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167화 (167/445)

167화 안 팔아 (1)

지금 이곳은 관객도 제법 많고, 조금 웅성대는 데다, 헤프닝으로 가기로 했기 때문에 배경 음악조차 없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주변의 산만함에 휘둘려 제대로 된 연주가 되기 힘들 수도 있었다.

산하는 그런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잠깐 궁리했고.

축제 기획자는 조금 전 화기애애한 대화 장면에서는 좋아하다가, 지금 분위기에 조금 불안해하고 있었다.

초급반이라던데…….

실수였나.

아냐,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된 이상, 내일 남은 축제라도 잘해서 평가 점수 만회해야지.

아무래도 시 예산이 들어가다 보니, 공무원도 그렇고 기획자도 그렇고, 축제가 끝난 후에는 평가 점수를 받는 자리가 있었다.

축제 기획자가 그 점수를 떠올리며 비관적인 생각을 이어 가던 찰나, 산하가 대금 취구를 향해 입김을 후 불어 넣었다.

후웅…….

이건 연주가 아닌,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한 용도였다.

사람의 정신을 맑게 만들어 주는 듯한 묵직하고 아름다운 음이 관객 사이를 뚫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들뜬 분위기가 잠시나마 가라앉았다.

그런 노련함에 축제 기획자가 눈을 크게 떴고, 그 틈을 타 산하의 본격적인 대금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곡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슬프게 끝나는 새드 엔딩 영화의 OST였는데, 한때 많은 사람의 눈물을 자아냈던 노래를 대금 곡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그 연주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이 멜로디를 알겠다는 듯 곳곳에서 눈을 마주치다가 산하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오, 좋다…….”

“잘하는데?”

“초보가 뭐 저래?”

마치 뜨거운 여름 볕이 내리쬐는 날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듯, 청량하면서도 맑은소리에 축제 기획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초급반 실력이라고……?’

조금 전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던 상급반 학생 두 명도 표정은 비슷했다.

‘……뭐지?’

‘어……?’

그 놀라움은 연주가 후반부로 치닫자 경악으로 바뀌었다.

무려 85%에 해당하는 임광수의 솜씨가 녹아들어 간 데다, 슬픈 감정을 노래에 담아내는 솜씨를 응용해 실어 보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끊어질 듯 안 끊어지고 애간장이 타도록 흐느끼는 듯한 구슬픔이 대금 연주에서 절절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별의 아픔을 겪은 누군가가 하염없이 숨죽여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탓인지 무대 근처에 모인 관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이건 헤프닝이 아니라, 마치 산하를 위해 마련된 독무대 같은 분위기였다.

보통 이 정도 분위기가 형성되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산하는 그럴 새도 없이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그의 더운 입김은 끊이지 않은 채 대금 내부를 휘돌아 나갔고, 고급반 학생도 힘들어할 길디긴 음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 긴 음이 너무나도 길게 계속해서 이어지자, 관객들은 감탄과 긴장이 어린 기색으로 두 손까지 모으고 있었다.

게다가 손과 몸을 떨어서 내는 음이 합쳐져 <비련의 길 위에서>라는 곡의 느낌을 제대로 살렸다.

그 바람에 이 자리에 있던 고급반 수강생조차도 놀라서 자신의 팔에 돋은 소름을 매만졌다.

‘……뭐야 저 사람?’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저렇게 끊어질 듯 말듯 아름다운 음을 제대로 이어 가는 건 자신도 힘들어하는 일인데. 저게 무슨 초급반이야. 배우는 게 아니라 가르쳐야 할 수준인데?

그렇게 모두가 놀라는 사이 산하의 연주가 종료되자, 관객들은 하나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로 바뀌며 환호성까지 들려왔다.

이곳 축제가 시작된 후로 처음 보는 열띤 호응에 축제 기획자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뻥 친 거 아냐? 뭐 저렇게 잘해?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선 산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관객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모두가 한 번 더를 외쳤고, 사회자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와, 우리 하산해 씨 대금 연주 들으셨습니까? 눈물 찍, 콧물 찍. 아니, 초급반이 이 정도면 대체 그 윗반은 어느 정도입니까? 조선 국악 학원! 여기 대체 뭐 하는 곳이죠? 안 그렇습니까? 하산해 씨.”

“그렇죠. 잘 가르쳐 주시니까, 배우고 싶으신 분은…….”

“아아! 에헤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몰래 광고하고 그러시면 떼찌떼찌. 아 참! 관객 여러분, 시간 관계상 앙코르까지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더 듣고 싶으시죠?”

“네!”

“좋습니다. 제가 잘리는 한이 있어도, 이곳 높으신 분한테 이렇게 이렇게 비벼서 허락을 받아 보겠습니다.”

결국 산하는 잠깐의 장기자랑이 이어질 시간까지 잡아먹으며 두 곡을 더 연주하기로 했는데, 그동안에도 이나라의 개인 방송용 카메라는 신나게 돌아가고 있었고, 채팅방은 이미 열띤 분위기였다.

- 와, 저게 무슨 초보야. 장난함?

- 그러니까요.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우리 나라 씨는 비비기 힘…….

- 하산해 씨! 제가 야구팬으로서 한마디 하는데, 지금 대금 연주 할 때가 아닙니다.

- 지금 야구가 왜 나와요?

- 아니, 제가 볼 때는 야구 실력이 제일 좋으신 것 같은데, 더 늙기 전에 고고씽 하자고요.

- 노노, 야구 따위, 하산해 씨는 노래를 제일 잘하십니다. 이분들 스목들도 안 보셨나.

- 김상수 야구 해설위원이 말하는 거 못 들으셨어요? 우리나라에 메이저를 제패할 잠재력을 가진 이가 있다면, 하산해라고.

- 그거 순뻥 방송용 멘트임. 고작 강속구 달랑 하나 보고, 어휴. 그리고 하산해 씨 야구 안 하신다고 했어요.

- 그건 인적 자원 낭비라니까요.

하산해로 인해 떠들썩한 채팅방 분위기에 왠지 심술이 난 이나라가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여러분들 이러실 거예요? 이거 하산해 씨 채널 아니고, 대금나라 채널이라고요! 다 얼려 버릴 거야!”

이나라는 실제로 채팅방을 얼려 버려서 채팅을 못 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학원에서 임시로 제공해 준 대금으로 연주를 끝마친 산하는 문화의 힘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다가 메시지 하나를 보게 되었다.

[문화 축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임광수의 대금 연주 솜씨가 87%로 상향됩니다.]

* * *

슬슬 이 학원도 그만둬야 하나 생각하던 산하가 고개를 들어 간판을 바라보았다.

<조선 국악 학원>

나름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던 산하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학원 입구로 들어서자, 지나치는 수강생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눈초리가 뿜어졌다.

접수처 여직원은 아예 대놓고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어머 어머, 산하 씨 축제장에서 일내셨다면서요?”

“네?”

“저 다 들었어요. 막막 사람들이 눈물도 찔끔 흘리고, 앵콜 외치고, 난리였다던데요?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글쎄요. 강사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속으로는 이게 다 임광수 선생님 때문이라고 말한 산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강의실로 향했다.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문을 살짝 열고 나온 수강생들이 산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 실력으로 왜 초급반이래요?”

“아니에요, 처음에는 진짜 초보였는데, 엄청 빨리 배웠다나 봐요.”

“그래요?”

“나도 가 볼걸.”

“장난 아니었어요. 진짜 한 호흡으로 길게 빼는데, 와. 내 숨이 턱턱 막히더라니까요. 그런데도 음 이탈 같은 게 전혀 없었어요. 거의 우리 강사님 수준?”

“와, 멋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강의실로 향한 산하가 문을 열자 빈공철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를 마중 나왔다.

아니, 바깥으로 밀어냈다.

“산하 씨, 우리 얘기 좀 합시다.”

“네? 얘기요?”

“그래요. 진지하고 건설적인 그런 얘기요.”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휴게실로 갑시다.”

다급히 산하를 데리고 자판기가 놓인 휴게실로 데려간 빈공철이 허허 웃으며 음료를 뽑으려 했다.

“아, 선생님. 이건 제가 뽑을게요.”

산하가 지갑을 꺼내자 빈공철이 지폐 투입구를 가로막았다.

“이러지 마세요. 이건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요. 잠시만요.”

따끈한 캔커피 두 개를 뽑은 빈공철이 그중 하나를 산하에게 내밀며 말한다.

“난리 난 거 아시죠? 우리 학원 지금 수강 신청 문의 잔뜩 들어오고 있어요.”

“그렇게나요? 딱히 무슨 취재 나온 것도 없는데…….”

“우리 학원에 BJ가 한 명 있거든요. 아마 그분 효과가 제일 크지 싶어요. 대금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구독하는 채널이다 보니까, 우리 학원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라도 났나 봐요. 이거 과장 광고가 돼 버렸는데, 어떡합니까.”

“……과장은요.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셨는데요.”

“에이, 그런 소리 마세요. 저는 초급반에서 가르친 것도 얼마 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실력이 그렇게 쑥쑥 늘어나십니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던 산하는 그의 과거를 살펴봤다.

[27분 전, 빈공철은 산하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인재인지 고민했다.]

뭘 전수해 주고 싶어서 그런 건가 싶었던 산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질질 끌다가는 본론이 안 나올 것 같아서였다.

“선생님, 혹시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느낌이 조금 그래서…….”

“아…… 티 났나요? 이런……. 사실 제가 오랜 기간 대금을 다뤄 왔어요. 그런데 제대로 습득할 인재가 없어서 고민이 많았고요. 원래 관악기가 배우는 데는 오래 걸리는데, 산하 씨 보고 눈이 확 트이지 뭡니까? 혹시 대금을 더 깊이 배워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냥 미션 해결해서 습득하는 게 더 빠를 텐데, 한번 배워 볼까. 아냐, 시간이 너무 부족해. 그래도 일단 킵.

생각을 정리한 산하는 빈공철에게 되물었다.

“어…… 그러고는 싶은데, 제가 시간이 많이 없어서요. 이거 당장 결정해야 하나요?”

“아니요. 아니요. 천천히 고민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래 봬도 아직 팔팔하거든요. 내일모레 쓰러지고 그러지 않습니다.”

농을 던지며 웃는 그를 바라보던 산하가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네, 그러면 나중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당장 대답하셨으면 제가 오히려 실망했을 겁니다. 왠지 신중해 보여서 더 좋습니다.”

그 후 강의실로 돌아가 수업을 듣고 수강생들의 뜨거운 눈빛을 한 몸에 받던 산하는 학원을 빠져나오자마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그만둬야겠는데?’

이때, 그의 옆으로 다가선 중년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산하 씨?”

“네? 누구신지?”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 학원 원장 모성운이라고 합니다. 잠시 시간 있으시면 저랑 잠시 대화를…….”

연예인인 데다, 배우기 시작했다는 사람이 수준급 이상의 실력을 뽐내서 홍보가 되자 학원 원장마저도 산하에게 들러붙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느낀 산하는 어쩔까 하다가 여기서 얘기를 듣기로 했다.

“제가 지금 스케줄이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여기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렇죠. 제가 또 바쁘신 분을 붙들고…… 그럼 간략하게 말씀드릴게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우리 학원 전속 모델을 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

“모델료는 넉넉하게 쳐 드리겠습니다.”

“어…… 갑작스러운 제안이네요. 일단 생각해 보겠습니다.”

확답이 아닌 것에 실망하던 모성운이었지만 일부러 환하게 웃었다.

“네,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바쁘실 텐데…… 살펴가세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산하는 인도 위를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했다.

모델은 무슨,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 *

산하의 연주로 뉴스 몇 줄이 떴다 사라지던 어느 날.

동묘앞역에서 내려 벼룩시장을 한번 훑은 산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허탈한 마음으로 본래 목적지로 이동했다.

바로 황학동 벼룩시장이었다.

그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미션 - 전하지 못한 선물]

[임광수의 마지막 편지를 양옥희에게 전해 주자.]

[힌트 - 황학동 벼룩시장]

[보상 - ???]

이 미션은 임광수의 마지막 모습 때문인지, 꽤 특이한 미션이었다. 심지어 보상은 물음표로 돼 있었는데, 뭘 주는 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런 보상이 없더라도, 그 전하지 못한 편지는 옥희 할머니에게 꼭 전해 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그 작은 나무 보석함을 여기서 언제쯤에나 찾느냐고 생각하던 산하는 연신 주변을 매의 눈으로 살펴보았고, 과거에서 들여다본 그 보석함이 있는지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눈 씻고 봐도 없자, 오늘은 그른 게 아닌가 싶었던 산하는 출출한 배를 달래려 음식점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바깥 가판대에 앨범을 늘어놓은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는 8~90년대를 풍미했던 옛 가수들의 앨범을 주로 팔고 있었다.

왠지 모를 호기심에 그곳으로 다가간 산하가 물건들을 구경하자 상인이 뛰쳐나오더니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세요. 여기 물건들 생각보다 구하기 어려워요. 팔리기 전에 후딱 업어가세요.”

“네, 잠시만 구경할게요.”

천천히 훑어보던 산하는 그곳에서 백철우의 앨범을 발견했다.

그 당시 워낙 많이 생산하고 판매되어 희소성은 없지만, 그에게는 의미 있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반에 백철우의 능력을 얻으며 많은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그것도 그렇고 아버지에게 선물하면 좋아하시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이거 얼마냐고 물어보려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구경하는 사이 상인이 뭔가를 꺼내 만지작거렸는데, 그게 바로 임광수가 양옥희에게 선물하려 했던 보석함이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이나 봐도 확실했다.

산하가 그걸 뚫어지라 노려보자, 상인이 눈치채고는 보석함을 들어 보였다.

“아, 이거 이쁘죠? 우리 딸내미가 괜찮은 거 샀다면서 맡겨 놓고 갔어요.”

- 168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