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안 팔아 (3)
“박산하 씨 맞으십니까?”
“네, 박산하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다름이 아니라…….”
산하는 가게 주인이 말을 흐리는 걸 듣고 이야기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렀다는 걸 직감하자마자 선수를 쳤다.
“따님께서 안 판다고 하셨군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괜찮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따님과 잠시 만나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거야 우리 딸 마음이라서, 말씀은 전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사실은 우리 딸이…….”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이건 말하기가 조금 그렇군요. 아무튼 말씀은 전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난 산하는 어느새 수염이 살짝 자라서 까끌까끌한 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만나 주긴 하려나…….’
안 되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하던 일을 마저 했다.
* * *
황학동 벼룩시장의 가게 주인, 한중섭과 산하가 통화한 지 며칠 후.
약속 시각보다 일찍 카페에 자리한 그는 차가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한동예라고 했었지?
그래도 만나 줘서 다행이야.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산하는 나름 공인이다 보니 사적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자세하게 알려지기를 꺼려져서 아무 일 없이 물건을 구입하길 원했으나, 결국 유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쪽에서 보석함을 건네줄 것 같지 않았고.
그래도 원래 가야 할 곳이 있는 물건이란 말을 들으면 자신에게 팔아 주리라고 여겼다.
그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산하의 눈에 파란색 구두가 보였다.
고개를 들자 황학동 가게 앞에서 봤던 그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스카프를 두른 그녀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실물이 더 나으시네요?”
무슨 뜻이지?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가.
산하는 그녀에게 앉으라고 말하며 한동예의 과거를 살펴봤다.
[23분 전, 한동예는 박산하에게 보석함을 건네주기로 했다.]
주기로 했다고?
어째서 집착증에 가깝다던 한동예가 이 정도로 마음이 바뀌었는지 몰라 살짝 놀란 산하는 일단 그녀가 원하는 음료부터 한잔 더 주문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한동예 씨라고 하셨죠?”
“네, 맞아요. 그런데 왜 보석함을 그렇게 원하시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그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산하가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돼요. 보석함은, 이미 받은 게 있으니 드리려고 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받은 게 있다고? 뭘 받아?
보석함을 어떻게 가져와야 할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산하에겐 좋은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들고 온 종이가방에서 보석함을 꺼내 건네기까지 하자, 산하도 얼떨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려 했다.
그 눈빛을 눈치챈 동예가 한숨을 푹 내쉬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망설이돈 사이 진동벨이 울렸다. 그게 구세주라도 된 듯 한동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단 음료부터 가져오고 말씀드릴게요.”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주문대로 간 그녀는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산하와 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자리에 앉은 동예는 차가운 잔을 들어 올리더니, 목이 탄 듯 커피를 세 모금이나 들이켠 후에야 잔을 내려놓았다.
“궁금하시죠?”
그녀의 질문이 뭘 뜻하는지 알고 있는 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간단해요. 그만 동생을 놓아주기로 했거든요.”
“네?”
모종의 결심을 한 듯, 동예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잠시만 들어 주세요. 어릴 때 저한테 여동생이 한 명 있었어요. 뭔가에 한 번 꽂히면 놓을 줄을 몰랐고, 물건에 유치한 이름을 붙이고, 또 그 집착과 반대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 내기 일쑤였죠. 어느 날인가는 삼촌 차를 타고가면서 제가 가지고 놀던 주먹만 한 유리구슬을 탐냈어요. 자기 맘대로 이름까지 붙이더니 달라고 했고, 우린 싸웠어요. 삼촌은 제게 잠시 양보하는 게 어떠냐고 하셨고……사고가 났죠.”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토록 사적인 이야기를 산하에게 털어놓았다. 이에 그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유를 아는 것까진 좋은데, 생판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왜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조금 전 뭔가를 받았다고 하는 것 때문인가?
일단 들어 보면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던 산하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날 유리구슬이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여동생도…… 제가 양보만 했으면, 삼촌이 우리 때문에 잠시 한눈을 안 팔았으면…….”
무심하기만 했던 그녀의 눈동자에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다 제 잘못이에요. 삼촌도, 동생도…….”
그녀가 아픔을 토로하자 산하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실패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왠지 그 말을 그녀에게 해 주고 싶어졌다.
“동예 씨 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낯선 이에게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듯, 동예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떴다.
“네?”
“주제 넘는 말이라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에 그건 절대 동예 씨 탓이 아니에요.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누구 탓으로 돌리기엔 이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잖아요? 그리고 동예 씨는 사고가 일어나게 하려는 것도 아니었고요. 삼촌분도 동생분도, 동예 씨가 홀로 이렇게 괴로워하는 건 싫어할 겁니다. 동예 씨 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동예 씨 부모님께서도 자식이 이런 이유로 여전히 힘들어하는 걸 알게 되시면 마음이 아프실 것 같아요.”
“……그렇겠죠.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왔어요. 그런데 여기서 나눈 대화는…….”
찰나 스쳐 가는 생각을 정리한 산하가 입을 열었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게요.”
동예는 산하에게 고마워하는 눈빛을 보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사실 부모님은 제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세요.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일이니까요. 저도 제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걸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제야 산하는 그녀의 집착이 과거의 일로부터 비롯된 상처였음을 알게 되었다.
뭐라고 더 말해 주기가 힘들었던 산하는 동예의 말을 묵묵히 들었고, 그녀는 수십 년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낯선 이에게 털어놓았다.
“부모님도 이제 나이가 있으시고, 염색하셔도 주름이 자글자글하시죠. 꼴통이라고 장난으로 말씀하시지만, 걱정하시는 거 다 알거든요. 그래서 이제 모두 그만하기로 했어요. 아니, 그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아버지 가게 앞에서 산하 씨를 만났을 때만 해도 보석함 드릴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이런 짓을 그만둘 수도 없었고요.”
“그러면……?”
“산하 씨가 제 마음을 바꿔 놓은 거죠.”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산하 씨 노래가 저를 바꿔놓았어요. 죄송하지만,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리도 보석함에 집착하냐면서, 아버지가 왜 이리 호들갑인가 싶어서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찾아봤거든요. 그러다가 산하 씨 노래를 듣게 됐어요.”
산하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온라인에 올라간 영상 중에는 슬픈 감정을 자유자재로 담아내는 능력을 실어서 부른 노래가 몇몇 있었는데, 그런 노래에는 묘한 효과가 있었다.
슬픔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치유한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그녀는 그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정리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요? 어떤 노래를……?”
한동예는 민요 <진주난봉가>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피식 웃었다. 젊은 사람이 듣거나 부르기에는 고리타분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재생을 누르고 난 후에는 후회했다. 그것은 절대 비웃을 수 없을 정도로 애절한 노래였다.
그 노래와 백철우의 <기운내라 그대여>에 관해 말한 동예는 그날의 심정을 토로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그날 많이 울었어요. 위로도 많이 받았고. 어떻게 된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산하 씨 노래 덕분이 맞을 거예요. 그 후로 이제 그만 삼촌도 동생도 놓아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 보석함도 가져왔어요. 제가 좀 미친 여자 같죠?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말이나 하고…….”
“아니요. 전혀 그렇게 안 보입니다.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동예 씨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되는 거겠죠?”
“네, 물론이죠.”
한동예는 산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노래로도 큰 위로와 용기를 주더니, 만나서도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다.
좋은 사람 같아.
“동예 씨?”
“아…… 네. 이런 얘기 처음으로 해 봤는데, 속이 후련하네요. 제 얘기 들어 주셔서 고마웠어요. 보석함 값은 이미 넘칠 만큼 치르셨으니까 안 주셔도 돼요. 저 먼저 가 볼게요.”
어딘가 착잡하면서도 홀가분한 느낌을 표출하던 그녀는 산하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먼저 사라졌다.
그로 인해 우두커니 앉아 그녀가 남기고 간 보석함을 바라보던 산하는 자신의 능력이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행복하세요…….’
* * *
[미션 - 전하지 못한 선물]
[임광수의 마지막 편지를 양옥희에게 전해 주자]
드디어 옥희 할머니에게 그의 마지막 선물을 전해 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보석함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 오랜 시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편지를 옥희 할머니가 찾아내기는 힘들어 보이니,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편지부터 찾아서 함께 전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기적적인 우연인 것처럼.
한참이나 보석함을 뒤적이던 그는 보석함 밑바닥 아니고는 숨겨 둘 만한 곳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곳을 통통 두들기니 비어 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여기 맞는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렇게 꽁꽁 숨겨놓으셨던 거지?
전해 줄 생각이 없으셨던 걸까.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으셨나.
궁금해하던 산하는 이내 얇아서 소리가 나는 나무 밑판을 살짝 뜯어냈다. 그러자 그곳에 편지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산하는 그길로 트럭을 몰아서 옥희 할머니가 운영하는 슈퍼로 향했다. 오늘도 양옥희는 가게 앞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뒷짐을 진 채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가 트럭 엔진음 소리에 뒤를 돌아보더니 주름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밥은?”
“당연히 먹었죠. 할머니는요?”
“나도 당연히 먹었지. 해지니 춥다. 어여 들어와.”
그녀를 따라서 가게 안으로 들어선 산하는 새삼 그녀의 슈퍼가 다르게 보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거가 있게 마련이기에, 그녀가 살아낸 세월이 보이는 듯하다고 해야 하나.
“뭘 처음 온 것처럼 두리번거려? 얼른 앉아.”
“네, 할머니.”
곧 슈퍼 한편에 놓인 작은 의자에 천천히 앉은 산하는 곱게 접힌 편지지 한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나한테 편지라도 썼어?”
“아니요.”
“아니면?”
“제가 황학동에 갔다가 마음에 들어서 이걸 샀거든요.”
그가 보석함을 꺼내서 보여 주자, 옥희는 그것이 남편이 전하지 못한 선물인 줄도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손질하다가 밑바닥이 조금 이상하길래 뜯어 봤더니 이런 편지가 나왔어요. 신기해서 한번 읽어 봤는데, 할머니 이름이 나오는 거 있죠? 그래서 한번 가져와 봤어요.”
“그래? 누가 그런 편지를 숨겨 놨을꼬?”
옥희는 나이가 들어 그런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산하가 건네주었던 편지지를 천천히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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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야, 못난 내게 시집와 줘서 정말 고맙다.
투정 한번 안 부리고 여태 함께 살아 줘서 고맙다.
그리고 늘 미안했다.
늘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형편 좀 필 만하니 딴짓해서 이상했지?
사실은 내가 악기 하나를 배우고 있거든.
당신, 소리 나는 악기라면 다 싫어하잖아. 그래서 말 못 했어.
부부간에도 할 말 못 할 말이 있다지만, 대체 무슨 상처이길래 그러나 싶었어.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궁금하네.
그러니까, 이 편지 보게 되면 살짝 알려 줘.
그리고 이건 우리 결혼기념일 선물.
사랑한다, 옥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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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지에 담긴 글씨를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아 보이던 옥희는 이내 손을 사시나무 떨듯 떨다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한 이불 덮고 산 세월이 얼마인데,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나 남편의 필체 하나 못 알아볼까.
광수 씨, 임광수 씨.
당신 하늘에서 나 다 보고 있었소? 그랬소?
우리 자식들 크는 것도 다 보고 있었던 거요?
그래서 이 편지 보낸 거요?
이보시오. 광수 씨. 광수…….
마음으로 남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옥희는 끝내 생각마저 이어가지 못하고 엉엉 울고 말았다.
어느새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편지지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산하는 그녀가 마음의 응어리를 마음껏 풀어내도록 조용히 앉아있기만 했다.
[미션 - 전하지 못한 선물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전달까지 6일 23시간 59분 남았습니다.]
- 17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