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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183화 (183/445)

183화 동시 출격 (2)

되물었던 민채은은 ‘잠깐만요’를 외치더니 방금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려 보고는, <목멱산에서 널 기다렸어>가 가사에도 들어간다는 걸 눈치챘다.

“설마…… 직접 작사하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맞는데요?”

입을 살짝 벌린 채 말이 없던 채은이 따지듯 묻는다.

“진짜요? 가사를요? 아니, 그런데 그걸 왜 얘기 안 해 주셨어요? 저 놀리려고 일부러 속인 거죠?”

“그럴 리가요. 작사했다고 일부러 자랑하긴 그렇잖아요.”

“그건 그런데…….”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서 헛기침을 몇 번 한 민채은은 이내 시큰둥한 척했다.

“어쩐지, 배일상 선생님 스타일이 아니더라 했어요.”

“와, 이게 바로 급격한 태세 전환! 민채은 씨 무서운 사람이었네.”

그녀는 맹수가 먹이를 덮치는 형상으로 열 손가락을 날카롭게 세워 보였다.

“그래요. 저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금부터 제대로 평가할 테니까 얼른 노래나 부르세요.”

“예, 건물주님.”

“그 건물주님은 좀 빼고요.”

“그럼 녹음실 대장님, 시작하겠습니다.”

“뭐라구요? 녹음실 뭐라고 하셨어요?”

“못 들은 거로 해 주시고, 자자. 나가 주세요.”

어느새 녹음실 밖으로 쫓겨난 채은은 여전히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산하를 보며 풉 소리를 내며 웃었고.

산하는 다시 노래 연습에 들어갔다.

그 후 음향 조정실에 앉아 가사에 조금 더 집중해서 듣던 민채은은 감탄사를 흘렸다.

“무슨 인간이 가사도 이렇게 잘 써…… 샘나게.”

괜히 입을 삐죽거려 보던 민채은은 노래 삼매경인 산하를 바라보다가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산하가 라디오에서 백철우 모창으로 데뷔했을 때 듀엣을 제안했던 일과, 얄미운 지서윤 때문에 ‘하산해’라는 예명을 지어 주어서 무척 고마웠던 일. 보이는 라디오와 함께한 산수유 마을 깜짝 콘서트, 그리고 된장찌개 도시락.

나름 추억이라면 추억인 그 당시 일을 회상하던 민채은이 중얼거렸다.

‘듀엣이나 한 번 더 해 보자고 할까.’

* * *

산하가 여동생 윤정에게 새끼 고양이를 맡긴 후로 며칠이 더 흐른 어느 날, 산하는 윤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았지?”

“알긴 뭘 알아. 용돈 삭감.”

“왜왜, 나 잘 돌봤단 말이야. 오늘은 진짜! 지인짜 바빠서 그래.”

“네, 그러시겠죠. 박윤땡님.”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아참참, 그런데 우리 엘리자베스 말 엄청 잘 알아듣는다? 밥 먹자 엘리자베스, 하면 쪼르르 달려와.”

“그냥 먹이 냄새 맡고 달려가는 거 아니야?”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하여간에 박산하! 산통 깨는 데는 일인자야. 얼른 와. 나 나가야 해.”

“알았어. 그래도 조금 늦을 것 같은데.”

“얼마나?”

“한 시간? 아니면 두 시간?”

“……그래? 뭐, 그 사이 큰일이라도 있겠어? 방에 계속 있을 텐데.”

“그래, 나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알았어.”

통화를 종료한 산하는 명인표구사 사장 황무진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그럼요. 언제나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거야 사장님께서 잘해 주신 덕분인 거죠. 그럼 나중에 찾으러 오겠습니다.”

“네, 살펴 가세요.”

어느새 단골이 돼 버린 산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무진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대단한 작품을 매번 자신에게 맡겨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작품도 심상치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애절함이 가득 담겨 있다고 해야 하나?

벤치와 구불구불한 길 하나, 먼 곳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 수풀에 살짝 드리운 그림자와 같이 곳곳에 소소하게 배치된 장치 하나하나가 합쳐져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아들, 뭘 그리 봐?”

“아, 아버지. 박산하 씨 다녀가셨어요.”

“그래? 어디 보자.”

버선발로 달려 나오듯, 빠른 걸음으로 아들에게 다가간 황제석은 산하가 앨범 커버로 쓸 수묵화를 보고 감탄부터 내뱉었다.

“역시, 역시로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그는 이내 혀를 찼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이토록 대단한 것을 어째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야 요즘 사람들은 이런 쪽으로 큰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죠.”

“그것도 그렇다. 죄다 스마트폰만 보고 다니니. 에잉.”

아쉬워하던 황 노인은 산하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인물이로구나, 인물이야’라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그 시각.

박상태는 식품 공장에서 일찍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다가 고양이가 가늘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울음은 무척이나 애처로웠고, 박상태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릴 적 도둑고양이가 달려드는 바람에 무척이나 놀라기도 했고, 어른들이 고양이는 요물이라며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 때문에 자연스레 고양이를 싫어하게 되었던 그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딸의 방문을 살짝 열어 본 그는 솜뭉치 같은 네 발을 이용해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새끼 고양이를 보게 되었다.

“어허, 어딜 나와?”

그가 호통을 치거나 말거나, 고양이는 걸어가다 말고 비틀거리다가 발라당 자빠졌고, 이 모습을 보게 된 박상태는 보드라워 보이는 노란 털을 한번 쓰다듬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슬쩍 쓰다듬었는데, 갑자기 몸을 뒤틀며 박상태의 손에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요 녀석 봐라.’

혐오스러워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박상태는 그 녀석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명인표구사에서 출발한 산하는 천상주 생산 건물에 들렀다가 본가로 향했다. 본래 한 시간 정도 늦어질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벌써 세 시간이나 넘긴 참이었다.

새끼 고양이가 혼자 방에서 외로울 것 같다고 생각하던 산하가 부모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지만 곧장 현관문으로 향해야 할 산하의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무른 후, 발걸음마저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거실 창으로 바라본 내부에서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묘한 일이란 바로 아버지, 박상태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엉덩이를 바짝 들고 먼지떨이를 좌우로 흔들며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욘석아, 이리 나와. 여기 이거 봐라.”

이내 새끼고양이가 먼지떨이를 공격하러 나오자 박상태가 껄껄 웃었다.

“잡았다, 요놈.”

그놈이 귀여운 눈망울을 한 채 병아리가 삐약거리는 것처럼 몇 번을 울어대자, 박상태가 복슬복슬한 녀석의 털을 쓰다듬으며 눈 맞춤까지 하는 게 아닌가.

이 장면을 거실 창밖에 쪼그려 앉아 유심히 바라보던 산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분명히 아버지는 고양이를 싫어하시는데, 지금 저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대체 뭐야?

아버지의 신기한 모습을 한 번 더 살펴본 산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하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엄마 저 왔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당탕 소음이 들리더니 헛기침 몇 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네 엄마 집에 없다.”

“어? 아버지 계셨어요?”

“그래, 오늘은 쉬고 내일 동식이랑 계약하러 가기로 했어.”

“아, 그 OEM 건이요?”

“그래, 그나저나 이놈의 고양이가 왜 빠져나와서 이리 돌아다녀?”

딸이 방문을 제대로 안 닫고 가서 그렇다는 둥 이상한 변명을 하는 아버지를 유심히 바라보던 산하는, 어느새 고양이가 박상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등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에 당황한 박상태가 일부러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양이를 떼어냈다.

그러자 고양이는 나한테 왜 그러냐는 듯 작은 입을 벌려 항의했다.

“얘는 언제 데려가는 거야? 도대체가 시끄러워서 원.”

“아마 얼마 안 걸리지 싶은데요. 얼른 데려갈게요.”

“알았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스쳐 지나가는 아버지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산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를 들여다봐도 쓸데없는 것만 나와서 더 궁금해졌다.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와야 하나…….’

* * *

<하산해 신규 음반 출시 임박, 녹음 마무리 소식 들려와>

이 뉴스 기사를 접한 팬카페는 기대감 가득한 댓글을 쏟아냈다.

- 와, 이번에는 본인 목소리로 부르겠죠?

- 아마도요?

- 전 이미 구입할 준비 마쳤습니다. 나오기만 하면 됨.

- 음반 출시했으면 콘서트 갑시다. 가즈아!

- 이날만을 기다렸다. 돌격 앞으로!

브레이크타임을 맞아 스마트폰으로 남자친구와 관련된 뉴스 기사를 살펴보던 새봄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산하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음반 먼저 안 주기만 해 봐요.”

“안 주면 어쩔 건지 말해 봐요.”

“그냥 막!”

“막?”

“막 나갈 거예요. 장 보러도 안 가고.”

“된장찌개도 못 먹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던 새봄은 그 맛을 한번 떠올리곤 입맛을 다셨다.

“봄봄봄, 아까 점심 드셨거든요?”

“그래도 맛있단 말이에요.”

“알았어. 이따가 다들 퇴근하면, 아무도 몰래 우리 봄이만 된장찌개 끓여 줄게.”

“진짜요? 진짜죠? 약속했어요?”

“누가 들으면 내가 평소에 잘 안 끓여 주는 줄 알겠다. 어제도 먹었으면서.”

“기억 안 나요.”

“안 나? 안 나면 나게 해 주는…….”

그때, 유리문이 살짝 열리며 덩치 큰 사내가 조심스레 머리를 들이밀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그녀에게 기습 뽀뽀를 하려던 산하는 멈칫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광상익이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었다.

“아, 오셨네요?”

새봄이 조용하게 묻는다.

“누구예요? 아는 사람?”

“응, 봄아. 아는 사람이야. 나중에 얘기해 줄게.”

“알겠어요. 차 준비할게요.”

잠시 후.

마주 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마주 앉았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부터 해야겠네요? 제 이름은 이미 아실 테고,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광상익이라고 합니다.”

“네, 상익 씨. 약속 지키러 오신 건가요?”

“어…… 저 그게, 돈은 아직 별로 못 모았는데, 고양이가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첫 만남 때의 강렬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왠지 모르게 소심해진 그를 바라보던 산하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새끼고양이 동영상을 재생한 뒤 그에게 보여 주었다.

“보시다시피 다 나아서 잘 놀고 있습니다.”

새끼 고양이가 작은 인형과 엎치락뒤치락 싸우며 활달하게 노는 모습을 본 광상익은 반가움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행복해 보이네요.”

“그렇죠? 더 행복하려면 상익 씨가 데려가서 잘 키우셔야죠.”

“네, 그래야죠. 딱 열흘만 더 주십시오. 그때는 돈도 갚고 고양이도 데려가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네, 믿을게요. 일은 할 만해요?”

“네, 나름 재미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식사는 하셨어요? 이렇게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아니요. 아닙니다. 다른 일자리 나온 게 있어서 가 봐야 하거든요. 잠시 들른 거라서. 그럼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고양이에게 자신을 이입한 것인지, 간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광상익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산하가 사람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새봄이 접근했다.

“저 사람 누군데요?”

“고양이 아빠.”

“네?”

* * *

크리스마스이브가 나흘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인터넷에 산하의 팬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뉴스가 떠올랐다.

<하산해, 싱글 음반 쇼케이스(오후 2시)>

이 쇼케이스 사회자를 맡은 이는 다름 아닌 코미디언 이창난이었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산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 하산해 씨 이번 음반 상당히 독특하다고 들었는데요.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으셨는지 제가 이렇게 팍, 팍팍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선 음반 발매에 관한 질문인데요. 싱글 음반을 두 가지로 발매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백철우 선생님 모창 버전으로 하나, 그리고 제 목소리로 하나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팬분들도 하나의 음반에 담으실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존중의 의미입니다.”

“어떤 존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백철우 선생님을 존중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 작곡가 선생님 두 분을 향한 존중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작곡가 배일상 선생님과 장도산 선생님 두 분 다 곡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장도산 선생님, 배일상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 곡을 잘 안 주시기로 유명한데, 놀랍네요. 아,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있죠? 앨범 커버를 모두 직접 제작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정말이십니까?”

“네, 미흡하나마 제 앨범 커버는 직접 만들고 싶어서 도전해 봤습니다.”

자신이 커버를 직접 만들었지만, 사실상 노래 빼고는 큰 흥미를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건 이창난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하십니다. 자, 그럼 신곡 한번 들어 보고 팬들과의 대화를 이어 가겠습니다. 하산해 씨, 준비되셨나요?”

“네, 준비됐습니다.”

“큰 박수로 응원해 주세요. 하산해가 부릅니다. <소원 저 가슴 깊이>!”

이 자리에 참석한 팬 한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커버는 맡기시지.”

“그러게, 포장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내 말이 그 말. 어쩔 수 없지, 내가 많이 사 드리는 수밖에.”

“나도나도.”

그때, 무대 중앙으로 나아간 산하가 청중에게 인사하고 마이크를 들자, 배경으로 이번 음반의 커버용 사진이 노출됐다.

그 아래 구석에는 하산해라는 예명이 아름다운 붓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그 순간 산하의 눈앞에 미션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 두 번째 앨범 재킷을 본인이 촬영한 사진과 붓글씨로 장식하자]

[미션이 완료되었습니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비공식 미션이 감지되었습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에서 배제된 존재와의 접촉이 감지되었습니다.]

[차단합니다.]

[보상을 재산정합니다.]

[공민철의 사진 솜씨가 96%로 상향되었습니다.]

메시지를 바라보던 산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공식 미션? 배제된 존재는 또 뭐야?

‘비공식 미션’과 ‘닫혀 있다’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비슷하다고 느끼던 산하는 이번 메시지를 쇼케이스가 끝나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사이, 관객석에선 벌떼라도 날아든 것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18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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