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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195화 (195/445)

195화 날 거부하지 마 (4)

길거리에서 이걸 들여다봐도 될까 잠시 고민하던 산하는 아직 헌책 구경에 푹 빠져 있는 새봄을 바라보다가 표운성의 과거로 향했다.

...80년대, 만화방이 점차 쇠퇴기를 맞이하던 무렵 표운성은 아버지의 반대로 집을 뛰쳐나와 혼자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 만화가는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고, 그에 걸맞게 그가 사는 곳은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가파른 곳이었다.

눈이라도 오면 감히 내려가거나 올라갈 엄두조차 내기 힘든 곳.

그 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던 만화가 표운성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문 배달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입에서 하얀 김이 호호 뿜어지는 이른 아침, 그는 차가운 무언가를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걸 본 이곳 주민 몇 명이 길가에 서서 욕을 퍼부어댔다. 안 그래도 걸어다니기 힘든데 눈까지 온다고.

그러나 표운성은 그 눈이 좋았다. 하늘에서 하늘하늘 내려온 하얀 눈이 바닥에 닿자마자 사르륵 녹아 드는 걸 볼 때면 뭔가 낭만적인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늘은 이 감상을 만화에 녹여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얼어 버린 손을 슥슥 비비며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집 앞에 도착한 표운성은 웬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심지어 젊은 여성이다 보니 숙맥인 그는 긴장한 탓에 얼굴마저 굳어 버렸다.

“누구……?”

“안녕하세요? 표운성 작가님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아, 다행이다. 여기 주소 찾기 힘들었어요. 전 보름 출판사에서 왔는데요, 제가 이제 작가님 담당 편집자거든요.”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던 그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원고는 넘겼습니다만.”

“그냥 개인적으로 상의드릴 것도 있고, 인사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네?”

그 후 초라한 방안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중 강선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작가님 만화 <당당하게 맞서라>는 재미없어요.”

“뭐…… 뭐라구요?”

“그런데! 그림체는 너무 좋아요.”

이게 병 주고 약 준다는 건가, 뭐 하는 인간인지 생각해 보던 표운성이 막 입을 떼서 항의하려던 순간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스토리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네!?”

양판소 시절, 즉 만화를 공장에서 찍어내듯 하던 시기에 터져 나온 제의는 표운성을 당혹스럽게 했다.

평소 상업성이 있느냐 없느냐, 다시 말해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두고 편집자와 싸우기도 했던 그에게는 황당한 제안이었다.

이젠 아예 출판사에서 만화가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려 한다는 생각에 열이 뻗친 그가 되물었다.

“다시 말씀해 보세요. 뭘 하신다구요?”

“스토리 조언이요. 작가님 작품은 스토리만 조금 수정하면 잘될 것 같아서요. 너무 아까워 보여서 일부러 찾아왔어요. 그러니까 <당당하게 맞서라>를…….”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은 그가 생각하던 답변은 아니었지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 버린 표운성의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다가 종래에는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나가요. 당장 나가요.”

강선희는 화가 난 표운성을 보면서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조곤조곤 침착하게 말했다.

“작가님, 화만 내시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글, 그림 둘 다 잘하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조금만 신경 쓰면 잘될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 오늘은 종일 만화 그리기에 몰두하려 했던 표운성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까지 뜬눈으로 생각 중이었다.

평생을 바치려 했던 만화에서 성과를 이루지 못해 실망하던 차였는데, 재미없다는 말과 수정하면 잘될 것 같다는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언가를 결심한 그는 달동네의 자그마한 슈퍼를 찾아가 공중전화로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담당 편집자를 연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할게요.”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온 산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표운성과 강은희의 첫 만남에서 사랑의 흔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어서였다.

게다가 뭐라도 힌트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과 달리 얻은 게 거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잡지를 내려다보던 그의 시야에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타났다.

새봄이 잡지와 그의 얼굴 사이로 고개를 들이민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아…… 재밌는 건 아니고. 이제 다 봤어?”

“네, 책 냄새 너무 좋은 거 있죠? 저 이거 살 거예요.”

그녀가 내밀며 자랑하는 책을 무심코 바라본 산하의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헤밍웨이 - 노인과 바다>

양장본이지만, 무척이나 낡은 그 책에서 빛이 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빛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아기 새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것처럼 희미하게 명멸하는 것이 아닌가.

이건 뭐 특수한 능력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데 잠깐.

산하는 그 책에 담긴 재능도 궁금했지만, 새봄의 이상한 능력에 더 놀라 버렸다.

예전 풍물시장에서도 그랬고, 그녀는 몇 번이나 능력을 지닌 물건을 골라내곤 했다.

무슨 이런 물건만 골라내는 레이더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던 산하가 새봄에게 물었다.

“이게 어디가 마음에 들어? 헤밍웨이면 서점에 새 책도 많은데.”

“그냥 뭐랄까…… 몰라요. 맘에 들어요. 여기 보면요, 자필로 누가 선물하면서 남긴 메모도 있어요. 뭔가 낭만적이지 않아요?”

<너만의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잡길 바라 -유정->

자랑하듯, 책을 펼쳐서 보여 주던 그녀는 이내 책을 두 손으로 품에 꼭 껴안고 활짝 웃더니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책값을 지불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산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오늘 잡지에서 큰 수확은 없었지만, 그녀가 한 건 해 주었다고 생각하며.

그나저나 저기엔 뭐가 담겨 있지?

새로운 재능을 얻을 생각에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을 받던 산하가 값을 치르고 돌아 나오는 새봄의 손을 잡았다.

“가자, 봄아.”

“이제 어디 가요?”

“일단, 밥 먹고 흰여울마을에 갈 생각인데…… 윤새봄 사원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 나도 거기 들어 봤어요. 가요가요.”

그녀는 평소 딸바보 아빠 윤주상으로 인해 이토록 자유로운 여행을 맘껏 다니지는 못해서 무척이나 신이 나 있었고, 산하는 그녀가 웃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짐을 느꼈다.

이날 오후, 해 질 무렵.

두 사람은 렌터카를 빌려 부산 곳곳의 명소를 재미나게 여행한 후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했다.

“아쉽다. 너무 짧았어요. 그쵸?”

“맞아. 벌써 저녁이네.”

그 또한 아쉬워하자, 새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참에 그냥 하루 더 있다가 갈까요?”

“아버지께서 이놈 하실걸?”

“……그건 그래요.”

‘그리고 아버님이 나는 죽이려고 하실 거야’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산하가 하하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뭐.”

“진짜요? 언제요?”

“꼭 여기가 아니어도 되잖아. 조만간 또 여행가자.”

“알았어요. 그 약속 꼭 지키도록 하세요.”

“당연하지.”

“잠시만요.”

그 말을 하자마자 백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 새봄은 그걸 정면으로 세워서 산하에게 보여 주었다.

바로 헌책방에서 구입한 헤밍웨이의 책이었다.

“헤밍웨이 할아버지가 증인이에요. 아셨죠?”

“…….”

* * *

자취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산하는 새봄과의 부산 여행을 떠올렸다.

결국 잡지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녀가 구입했던 헌책을 잠시 만졌을 때는 뜻밖의 메시지를 접하게 되었다.

[갓 태어난 연결고리입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 생성까지 372일 남았습니다.]

책은 그녀의 손에 들어가 있는 데다, 지금 당장은 뭔가를 해 볼 수도 없었던 산하는 다음을 기약하며 표운성의 미션에 집중하기로 했다.

“뭐라고 대답이라도 좀 해 보세요.”

하지만 여전히 책상은 묵묵부답이었고, 그는 슬슬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야식 배달을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길에 신장 개업한 카페가 산하의 눈에 띄었다.

<옛날 만화 카페>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해서 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신규 창업한 카페를 지나치던 그는 뭔가 떠오르는 바람에 곧장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나중에 중고 카페에서 그가 출간했던 만화책을 사 들여 살펴보려고 했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저곳에서 차나 한잔하면서 살펴보면 될 게 아닌가.

그래도 나름 이름 있는 만화가이니만큼 저곳에도 표운성의 만화가 있으리라고 짐작한 산하는 그곳을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기 표운성 화백님 만화 있나요?”

“그럼요. 저기 저쪽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안내해 준 종업원에게 음료를 주문한 산하는 아늑하게 꾸며진 서가로 향했다. 그곳 한 면이 전부 표운성의 만화임을 알아본 그는 빛이 어린 게 없는지 확인했다.

기대와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부산에서의 사건으로 보아 아직 실망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하던 그는, 표운성의 초창기 작품을 제일 위쪽에서 발견하자마자 손을 뻗어 상권을 끄집어냈다.

그건 바로 표운성의 데뷔작 <당당하게 맞서라> 개정판으로 총 세 권 중 첫 번째였다.

개정 전에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개정 이후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표운성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만화이기도 했다.

그 만화를 죽 훑어보던 산하는 이게 강선희라는 분의 조언 듣고 개정한 거 아닌가 생각하며 만화를 처음부터 빠르게 살펴보다가 다음 권도 살펴보며 전체적인 스토리를 파악했다.

이 만화는, 어떤 나쁜 친구와 그의 집안으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고 절망한 채 살아가던 한 사내가 어느 날 모종의 결심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거대 기업을 일구고.

그다음에는 모두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금 황당하거나 막장 드라마 같은 면도 조금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흥미를 끌어당길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던 산하가 마지막 권을 도로 꽂아 놓으려던 참이었다.

마지막 권에서 빛 알갱이가 솟아올랐다.

그래, 바로 이거야.

산하가 씩 웃으며 과거를 들여다보려던 찰나 진동벨이 울렸다. 곧장 음료를 가져온 산하는 마실 생각도 안 하고 과거부터 들여다보았다.

...“축하해요.”

“이게 다 선희 씨 덕분입니다.”

“뭘요. 조언 조금 해 드린 것뿐인데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 제 만화가 얼마나 재미없었는지, 뭐가 문제였는지 객관적으로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네, 말씀하세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당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하려던 표운성은 침을 꿀꺽 삼키던 끝에 다른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다음 작품도 저와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업무가 밀려 있어서요.”

“네…….”

그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표운성은 주먹을 꽉 쥐더니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런 멍청이, 이런 등신, 이런 바보. 왜 말을 못 해.”

...아주 짧은 과거를 들여다본 산하는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눈앞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기대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일이 풀려가는 징조라고 생각하던 산하는 카페를 벗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 *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그녀와 장을 보고 온 후 차에서 내리던 산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배달꾼 대표 장국진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산으로 갈 때 전화가 왔었지?

깜빡했네.

“네, 전화받았습니다.”

“아, 산하 씨. 혹시 오늘 시간되십니까?”

“네, 오늘 2시 이후부터는 시간이 좀 있고요, 아니면 지금부터 한 시간 정도는 시간이 있습니다만.”

“그래요? 그럼 제가 지금 식당으로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네, 오세요.”

그가 통화를 종료하고 5분이나 지났을까, 장국진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세요?”

“근처에 볼일이 조금 있었거든요.”

사실은 그를 만나려고 근처까지 와서 기다렸던 국진은 내심을 감추었고, 이미 그의 과거를 들여다본 산하는 그냥 모르는 척해 주었다.

잠시 후, 산하와 마주앉은 장국진은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대놓고 말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말문을 열었다.

“산하 씨, 아니 박 사장님. 배달 영업을 계속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서로가 그 이유를 알고 있기에 왜 그러는지 묻는 과정 따위는 없었고, 산하는 조금 곤란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건 조금…….”

“일주일에 하루라도 좋습니다. 사장님께는 앞으로도 수수료 전혀 받지 않을 테니, 꼭 좀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요즘 오후에 크게 빌 것 같은 자유 시간을 만끽하려 했던 산하는 그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하자 살짝 마음이 동하는 걸 느꼈다.

‘가끔 하루 정도는 괜찮을지도…….’

잠시 고민하던 산하가 이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확답은 못 드리겠고요. 생각해 볼게요.”

“네, 그럼 꼭 좀 긍정적인 방향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를 떠나보낸 후 산하는 점심 영업을 끝내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해금 연습을 해 보려고 했는데, 깜빡하고 안 가져와서 가지러 가는 참이었다.

이윽고 자신의 방에 들어선 그는 해금을 들다 말고 혹시나 해서 책상 표면을 매만졌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표운성의 일정 분량 과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강제로 연결됩니다.]

[25년 전, 표운성은 강선희와 어떤 남자의 모습을 보고 꽃다발을 떨어트렸다.]

[과거와의 연결고리에 닿았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 19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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