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196화 (196/445)

196화 특급 신상 (1)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서 멈칫하던 산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25년 전으로 다가갑니다.]

...머뭇거린 지가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표운성은 오늘은 기필코 그녀에게 고백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 결심을 바탕으로 연애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숙맥이었던 그는 친구가 조언해 준 대로 미사여구를 섞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만화가 대박을 터뜨리며 구입한 고급스러운 집, 그리고 좋은 책상이 있었지만, 그녀가 곁에 있어야 완벽하다고 생각하면서.

한참 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완성한 편지를 죽 훑어보던 그는 제법 잘 썼다고 생각하며, 편지를 곱게 접은 후 품에 집어넣었다.

이제 출판사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그녀에게 오늘은 기필코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표운성은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잠시 후, 출판사 근처에 차량을 주차한 그가 꽃다발을 들고 건물 코너를 돌아섰을 때였다.

강선희는 해외지사로 발령이 나서 외국으로 떠난다는 친오빠에게 작별 인사 중이었다.

“으이그, 하필이면 오늘이야. 진짜 가는 거야?”

“그래, 이 꼬맹아.”

“누가 꼬맹이야.”

“네가 꼬맹이지. 옛다, 작별 인사.”

“야, 놔. 이거 안 놔? 내 갈비뼈 금 가는 소리 안 들려?”

여동생을 거칠게 안아 준 사내는 이내 손을 흔들어 주며 자리를 떴고, 강선희는 그런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늘 개구쟁이 같던 오빠가 해외로 떠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이 장면을 도로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표운성은 꽃다발을 툭 떨어뜨리고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의 차량으로 힘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한탄을 내뱉었다. 그녀에게는 벌써 멋진 임자가 있었노라고.

결혼이라도 하는 모양이네.

그래서 출판사를 그만둔다고 했구나.

이날 소주를 잔뜩 퍼먹고 집에 돌아간 표운성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억지로 지워낸 후 가슴에 고이 품고 있던 편지를 거칠게 꺼내 찢어 버리려다가 멈칫하더니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그러나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그는 다시 쓰레기통에서 그 편지를 꺼내 한참을 바라보다가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를 일적으로 만났을 때 무언가를 확인했다.

“선희 씨는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요? 그건 왜요?”

“그냥요.”

“물론 있어요. 그 남자는 멍충이지만.”

“아…….”

그녀의 오빠가 장난치던 모습을 ‘사랑스러운 멍충이’ 정도로 해석한 표운성은 아픈 마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 후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짝사랑했는지 뼈저리게 느낀 표운성은 강선희가 그 사내와 행복하기를 바라며 집은 팔지도 않고 비워 둔 채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물론 선희와는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연락조차 끊어 버렸다.

계속 만나다 보면 그녀에게 무례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그를 좋아했던 강선희는 표운성을 찾아가 봤으나 이미 살던 집은 기척 하나 없고 연재도 중단하며 잠적한 터라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늘 밝기만 했던 그녀는 그날 이후로 우울한 표정만 지으며 하루하루를 견디다가 정말 출판사를 그만두고 지방에 계신 부모님 댁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의 과거에서 돌아온 산하는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둘 다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중얼거리던 산하는 결심했다.

강선희가 아직 그곳에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서 얼핏 보게 된 그녀의 부모님 댁을 어떻게든 찾아가 봐야겠다고.

* * *

지방 소도시, 그중에서도 산 아래 자리한 아담한 집 마당에서 강선희는 볕을 쬐고 있었다. 벌써 50대가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동안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과거에 사랑했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표운성, 어느 날 말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가 슬픈 소식만 전해 줬던 미운 사람.

대체 뭐가 그렇게 괴로웠길래 지방으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가 살아 있을 때 찾아가서 고백이라도 해 볼걸.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어휴, 난 뭐가 그렇게 좋아서 여태 그 사람만 생각하고 산 거야.

한때는 연애도 몇 번 해 봤지만, 계속 표운성의 얼굴만 떠올라서 결혼을 포기한 그녀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에서 홀로 사는 중이었다.

그렇게 노처녀로 늙어 버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던 강선희가 흔들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한 남자가 야트막한 담장 밖에서 소리쳤다.

“실례합니다.”

“……누구세요?”

이미 과거에서 들여다봤던 그녀임을 눈치챘지만, 산하는 모른척하며 물었다.

“저기…… 혹시 여기가 강선희 님 댁인가요?”

경계 어린 눈빛을 쏘아내던 그녀는 왠지 낯설지 않은 사내의 얼굴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다가 되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닌가요?”

“맞긴 한데…….”

“와, 겨우 찾았네요. 표운성 화백님이라고 아시죠?”

그녀는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잠시 후, 놀란 마음을 추스른 강선희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거실로 모셔 와 홍차를 대접했다.

“죄송해요. 집에 차가 이것밖에 없어서…….”

“괜찮습니다.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한참이나 말없이 차를 들이켜던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오갔고, 그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산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동시에 그녀도 입을 열었다.

“제가…….”

“저기…….”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에요. 먼저 말씀하세요. 대체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네, 다름이 아니라 아까 제가 몇 년 전에 운성 형님이랑 술집에서 친해진 사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랬죠.”

“그때 술 취한 운성 형님이 신세 한탄하듯 말씀하신 게 있어서요. 이미 늦어 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그 형님의 마음만큼은 전해 드리는 게 어떨까 싶어서 불쑥 찾아뵀습니다.”

“마음이요? 그전에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산하는 하는 수 없이 미리 준비해 놨던 거짓말을 토해냈다.

“사실 조금 망설이긴 했는데, 돈 좀 썼더니 되더라고요. 찾았다길래 반신반의하면서 왔지만요.”

믿기는 힘들지만, 대충 수긍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그녀가 이내 말했다.

“그랬군요. 이제 말씀해 보세요.”

“혹시 듣기 싫으시거나 실례라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니에요. 듣고 싶어요.”

관심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산하는 품속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그럼 일단 이것부터 보시겠어요?”

“이게 뭐죠?”

“운성 형님이 쓴 편지요. 계속 보관하셨던 것 같은데, 그날 술집 쓰레기통에 버리신 거 제가 슬쩍 주워 놨거든요.”

“편지…….”

왠지 예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는 걸 느낀 그녀가 조심스레 편지를 받아 펼쳐 보았다.

조금은 유치하지만 그의 마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읽던 선희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지는가 싶더니 한참 만에 말을 내뱉었다.

“멍충이…….”

“네?”

“아니에요. 그 사람이 그때 뭐라고 했나요?”

“그러니까…… 똑같이 말해 볼까요?”

“네, 그래 주세요.”

산하는 기억을 더듬는 척하더니, 과거와 끼워 맞춰 생각해 둔 대사를 내뱉었다.

“알고 보니 그사람은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었어, 그래서 놔주기로 했지. 사실 놔줄 것도 없었어. 짝사랑이었으니까. 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 사람이 이직하는 줄로만 알고 급히 고백하려고 했었는데, 괜히 우스운 꼴만 될 뻔했지 뭐야. 그런데…… 아직도 너무 보고 싶다. 결혼해서 잘살고 있겠지?”

마치 독백하듯 읊조린 산하의 말에, 강선희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눈동자 또한 이글이글 타오르더니 크게 외쳤다.

“표운성, 이 바보 멍청이, 똥개!”

“……네?”

후 하고 한숨을 깊게 내쉰 강선희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정말 바보였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도 그 사람 좋아했거든요. 하도 고백에 뜸 들이길래 출판사 그만둔다고 으름장을 놨더니…… 일이 이렇게 돼 버렸나 보네요.”

“네에!? 그럼 그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은……?”

“저도 모르겠어요. 뭘 보고 오해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때 만나던 사람 없었어요.”

“아…….”

왠지 조금 전보다 더 어색해지면서 가라앉은 분위기도 그렇고,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싶었던 선희는 눈물을 상대 몰래 훔쳐낸 후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저, 그런데 혹시.”

“네?”

첫 만남 이후부터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결심한 듯 물었다.

“아까부터 낯익어서 생각해 봤는데, 아니라면 죄송하지만, 혹시 하산해 씨 아니세요?”

이런 분위기에서 갑자기 내 예명이 왜 튀어나오냐고 생각하던 산하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만.”

그녀가 벌떡 일어서며 활짝 웃었다.

“와! 정말 하산해 씨였어요? 진작 말씀해 주시죠. 저 하산해 씨 노래 진짜 좋아해요. 전 연예인이 여기 오실 줄은, 그것도 운성 씨랑 아는 분이 오실 리는 없다고 생각해서 긴가민가 하고 있었거든요. 아! 잠깐만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랍에서 사인지를 주섬주섬 꺼낸 그녀는 뭔가를 열망하는 눈빛으로 산하를 바라보았고, 여전히 어색하게 하하 웃던 그는 어느새 그녀가 내민 사인지를 건네받았다.

“오신 김에 사인 좀 해 주세요.”

뭐야, 엉엉 울거나.

그것도 아니면 말없이 어색하게 침묵하거나.

이것도 아니면 그만 가 달라거나 할 줄 알았더니, 사인을 해 달라고?

그녀의 여러 가지 반응을 예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찾아왔던 산하는 얼떨결에 볼펜을 받아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아닌데…….’

[미션 - ‘강선희에게 표운성의 마음을 전해 주자’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표운성의 만화 재능 일부를 습득했습니다.]

[그림에 관한 이해도가 무척이나 높습니다.]

[만화가 특성을 고려해 수치를 재산정합니다.]

[표운성의 만화 재능이 92%로 상향되었습니다.]

[재능 포인트 1점이 적립되었습니다.]

그가 잠시 메시지를 바라보던 사이 강선희가 재촉했다.

“여기 한 장만 더 해 주세요. 그래서 콘서트는 언제쯤 하실 계획이세요?”

“……글쎄요.”

이날 밤, 선희는 울다 말고 잠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사랑했던 그가 찾아와 오해했노라고, 정말 사랑했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포옹했고, 심술이 난 그녀는 표운성을 주먹으로 몇 대 때려 주었다.

그는 주먹에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하하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밤중에 깨어난 그녀는 꿈이 정말 생생했다고 여기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다음 날,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개운해진 선희는 자주 내비치던 쓸쓸한 표정도 짓지 않았고 활기차게 생활을 이어 나갔다.

물론 산하에게 받은 사인으로 친구들에게 갑질 아닌 갑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한적한 카페 내부.

만화와 관련된 능력을 얻은 산하는 무선 노트에 사자 한 마리를 그리고 있었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는 형상이었다.

하나 그는 그림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자를 연필로 찍찍 그어 버렸다.

표운성 화백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식으로 똑같이 그려서 누군가에게 보여 줘 봐야 백철우의 노래 실력을 얻었을 때와 비슷한 평판을 얻을 게 분명해서였다.

‘여기에 이걸 조금 섞으면…….’

한참을 고민하던 산하는 쇠똥이의 수묵화 솜씨 특성을 반쯤 섞어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핏 보면 수묵화 같으면서도 다시 보면 만화인 조금 독특한 그림체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꽤 괜찮다고 여기던 산하는 연이어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실 모델은 맹철호였다. 호프집 앞에서 삿대질하며 화를 내는 모습이 현실과 무척이나 흡사했고, 그게 조금 정겨우면서도 웃겼던 산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때, 곁으로 다가온 친구 하동식이 산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어? 왔냐?”

그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동식이 허리를 두드리며 엄살을 부렸다.

“그래, 아우 허리야. 인마, 이 몸이 이렇게 불철주야 뛰어다니는데, 된장찌개라도 끓여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알았다 인마.”

“오, 너 방금 알았다고 했다?”

“내가 그랬나? 에이, 잘못 들었겠지.”

“이걸 정말 죽여 살려…… 왜 만나자고 했어? 그것도 이 고상한 카페에서 말이야.”

“당연히!”

“당연히?”

“식품 공장 때문이지. 여기 경치도 좋고, 사업 얘기하기 딱 좋잖냐.”

“경치는 무슨, 아직 큰 문제없어. 저번에 다 얘기해 줬잖아.”

“그런 거 말고, 식당에서 판매하는 된장찌개 레시피로 레토르트 생산 한번 해 보려고.”

“뭐? 그거 시험 삼아 해봤으면서 뭔 소리야?”

그 시험이라 함은 산하가 현재 능력을 대량 생산에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전이었다.

비록 최대 20%이고, 얼마나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일단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야 그렇지. 그런데 한 번 더 해보려고.”

“친구야. 내가 볼 땐 너 그거 손맛인 거 같은데. 레시피로 좌우되는 거면 반쯤이라도 비슷하게 나왔어야지. 그냥 시중에 파는 것보다 조금 못했잖아? 아버님도 그러셨고.”

“그때야 그랬지. 그런데 뭘 좀 바꿔서 해 보려고.”

“뭘 바꿔?”

“그런 게 있어. 온도나 재료 투입이나, 이것저것.”

“오, 박산하. 그런다고 닭이 황새 되겠냐? 그거 손맛 맞다니까. 왜? 생산 공정에 손이라도 집어넣고 휘휘 젓게?”

“어휴, 동식아. 무식한 우리 동식아. 거기 손을 왜 넣어? 내가 또 닭을 황새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거 아니냐. 이 손이 미다스의 손이거든. 못 믿겠으면 한번 만져 봐도 좋아. 한 번에 오백 원.”

산하가 실제로 손을 만져 보라는 듯 내밀자, 동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뭐래, 유치하게. 닥쳐. 그런데 너 그건 뭘 그린 거야?”

어느새 산하의 노트를 가져간 동식은 그림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이거 철호 아저씨잖아? 똑같은데? 너 좀 그린다?”

“짜식, 뭘 좀 아네.”

“내가 좀 알지, 이제 만화에도 진출하게?”

“진출은 무슨, 내가 시간이 어디 있냐? 그냥 한번 그려 본 거지.”

“내가 널 모르냐. 다 알아 인마.”

“알긴 뭘 알아?”

“너 옛날에 나랑 만화책 보면서 이런 거 잘 그리는 사람 부럽다고 했잖아. 이 자식 이거, 몰래 연습 중이었네. 가만, 지금 보니까 완전 전문가 솜씨 같은데?”

“와, 동식이 이거 또 아는 척하네.”

“내가 좀 안다니까. 수묵화 잘 그리면 이런 것도 잘 그리나 봐? 진즉에 이런 길로 가지. 아니다, 이제 꽃이 필 때가 돼서 피는 건가. 그나저나 넌 요새 못 하는 게 없는 것 같다? 야, 이참에 너도 웹툰 한번 해 보는 거 어때?”

“웹툰은 무슨.”

“자식이. 내가 그런 거 자주 봐서 스토리 이런 건 빠삭해. 어떻게 하면 인기 끄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 말이야. 내가 노하우 전수해 주고 5:5 어때?”

“이런 사기꾼을 봤나. 저기요 경찰 아저씨? 여기 사기꾼이 헛소리해요.”

카페 내부의 몇몇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자 자라처럼 움츠러든 동식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숨죽여 말한다.

“야,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다.”

“진짜 맞잖아. 어딜 날로 먹으려고. 죽어라 똥식이!”

“쉿! 아, 이 자식은 부끄러움을 몰라.”

“그거나 내놔.”

“잠깐만 있어 봐. 이야…… 진짜 그림 괜찮네.”

“됐고, 생산 날 좀 잡아 봐.”

“진짜 하게? 그거 또 폐기하면 아까워서 어쩌려고?”

“아깝기는, 그거 이번에 대량으로 만들어서 바로 인터넷 판매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동식의 눈이 크게 부풀어 오르다 못해 튀어나오려 했다.

“뭐!? 요새 잠잠하다 했더니 이게 또 급발진하네. 정신 차려 박산하. 식품 공장이 애들 장난이야? 맛도 없는데 팔릴 것 같아?”

“맛있어질 거니까 걱정 마.”

화를 토해내려던 동식은 멈칫했다. 이런 대화 전에도 해 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아!

“너! 지금 꼭 식당 말아먹고 새로 시작할 때 모양새 같은데?”

“이게 왜 또 식당 말아먹은 이야기는 꺼내. 이 몸은 이제 새로 태어나신 몸이거든?”

“그때처럼 좋은 느낌이 온다 이 말이지. 알았어. 그럼 일단 준비는 해 보자. 확실히 자신 있는 거지?”

“그래, 인마.”

반신반의하던 동식은 알았다고 대답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고, 산하는 그와 잡다한 대화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막 계단에 발을 디디려던 무렵, 호프집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맹철호가 튀어나왔다.

“야, 박산하! 어쭈구리?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쳐?”

“아저씨, 저 참새 아니고 독수리라니까요. 몇 번을 말해요.”

“독수리 같은 소리하네. 택배나 가져가.”

“오! 왔어요?”

“그래, 또 뭘 산 거야?”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거요.”

“수묵화를 컴퓨터로 그려?”

“에이 그게 말이 돼요? 수묵화 하면 붓이죠. 그건 그냥 끄적끄적 아무거나 그려 보려고 산 거죠.”

“그래? 아무튼 옜다.”

맹철호가 내민 택배 박스를 건네받은 산하가 그에게 인사하고 자신의 자취방으로 다시 올라가려던 무렵이었다.

“산하야.”

“네?”

“너 계속 여기 살 거야?”

“네, 왜요?”

“아니, 돈도 많은 놈이 왜 계속 여기서 살아?”

“저 돈 없어요.”

“건물 두 개에 공장까지 있는 놈이 할 소리냐?”

“그게 다 회삿돈이지 제 돈입니까?”

어느새 그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맹철호가 돌연 화를 냈다.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이거 말발만 더 늘어가지고.”

하하 웃던 산하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당분간 여기 더 살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이번에 대출도 조금 받을 거라서 거지예요, 거지.”

“어쭈? 지금 건물주한테 통보하는 거야?”

“빙고! 아저씨, 저 올라가요.”

“야, 야! 박산하.”

“또 왜요?”

“이번에 투룸 방 뺀단다. 거기로 옮길래?”

“오, 그거 좋죠. 언제 나가는데요?”

“한 달 있다가.”

“좋네요. 그 방 제 거니까 놓지 마세요. 아 참, 그리고 지금 방도 놓지 마세요.”

“뭐!?”

“이 방도 아마 임자가 있을 거 같거든요.”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방 놔 드린단 소리죠. 저 진짜 갑니다.”

그에게 꾸벅 인사한 산하가 다시금 자취방으로 향하려다가 멈칫하더니 택배 박스를 내려놓고 서류 가방에서 노트 하나를 꺼냈다.

“너 뭐 하냐?”

“아저씨 선물 드리려고요.”

“선물? 무슨 선물?”

이내 무선 노트 한 장을 북 찢어낸 그가 맹철호에게 그걸 척하고 내밀었다.

“받으세요. 아저씨와 제가 세입자와 건물주로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는 의미의 기념 선물입니다.”

“???”

무심코 그가 내민 종이 쪼가리를 건네받은 맹철호가 중얼거렸다. 이 자식이 낙서……는 아니고. 뭐야 이거, 나 같은데?

자신과 너무 비슷한 그림 속의 캐릭터를 유심히 바라보던 맹철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이 자식이 날 왜 이따위로 그려 놨…… 갔네?”

왠지 민망해서 머리를 벅벅 긁은 맹철호는 그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호프집 앞에서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이 그림으로 표현된 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때, 어느새 가게에서 빠져나온 그의 와이프가 옆으로 다가와 그걸 보더니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머어머, 우리 남편이랑 똑같네. 불같이 화내는 것 좀 봐. 이거 누가 그렸어요?”

“……뭐라는 거야. 당신은 내가 좋아? 세입자가 좋아?”

“이 양반이 따신밥 먹고 웬 헛소리야. 정신 차리고 들어와서 일이나 해요.”

“…….”

* * *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산하는 택배 박스를 뜯어 타블렛이 포장된 박스를 살펴보았다.

동식의 말처럼 한때 만화 잘 그리는 애들을 부러워하곤 했던 산하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포장을 뜯고 컴퓨터에 연결했다.

이내 타블렛 펜으로 간단한 그림 하나를 슥슥 그려 보다가 돌연 재미난 생각이 났다.

가끔 시간 내서 연재 한번 해 봐?

뭘 그려보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던 산하는 과거에서 능력을 가져온 인물들을 떠올렸고, 급기야는 그들의 삶을 이리저리 섞어 술빚는 장인에 관한 이야기 일부를 짧게 써 보았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시대, 가난한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나 자라온 주인공은 신세를 한탄하며 훔쳐 온 소주를 퍼마신다.

그 당시는 흉작과 기근으로 금주령이 내려졌던 터라 걸리면 관아로 끌려가기 딱 좋은 시절이었다.

물론 주로 처벌받는 이가 하층민이라고는 하나, 고급술에 속한 소주는 권세가라 할지라도 특별 단속 대상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몰래 집안 창고에서 술을 퍼마셨고,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데, 그건 바로 술 제조법이 담긴 책자였다. 호기심에 찬 그는 주변 흙을 손으로 파헤치고 그걸 주워들었다.>

한 편에 걸맞은 연재 분량을 글로 대충 써 내려간 산하는 웹툰 사이트를 참조하더니 그림 콘티가 아닌 실제 연재용 만화를 곧바로 그리기 시작했다.

‘오, 재밌는데?’

역사 자료까지 찾아보며 몇 컷을 열심히 그리던 산하는 한참 만에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중얼거리며 하품을 몇 번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며칠 후.

만화방 시절부터 웹툰에 이르기까지 만화를 즐기면서 살아온 허상섭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정식 연재 웹툰을 스마트폰으로 다 보고 난 후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 재미난 거 없나.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기호에 맞는 작품이 없음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 말고 초보들이 정식 웹툰 연재에 도전하는 카테고리에 생각이 미쳤다.

그곳에는 간혹 참신하고 재미난 웹툰이 올라오곤 했는데, 그의 눈에는 오늘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어디…… 한번 봐 볼까.’

이내 컴퓨터를 켜고 해당 사이트에 접속해서 순위별로 웹툰을 하나씩 클릭해 보던 그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취향에 안 맞거나, 또는 재미없거나, 그림체가 영 개발새발인 것도 있어서였다.

“와, 이걸 그림이라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내가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는 잘 그리겠다고 투덜대던 그는 계속해서 다른 작품들을 클릭하기 시작했다.

‘이건 좀 괜찮고…….’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그는 신규 업데이트된 조금 특이한 제목의 웹툰을 발견했다.

<술만 만드는데 왕실에서도 부름>

이렇게 싼 티 나는 제목을 오랜만에 본 그는 킥킥 웃었다.

내가 이딴 어그로에 끌려 줄 것 같아?

그 길로 스크롤을 휙휙 넘기던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였다.

‘아, 내가 또 낚여 준다.’

스크롤을 위로 올린 허상섭은 이내 그 만화 섬네일을 클릭하며 다짐했다. 재미도 없고 그림도 엉망이면 악플을 달아 주겠노라고.

- 19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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