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제 것입니다만 (3)
그는 일주일 안에 두 편이란 미션 내용이 진실인가 싶어서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보통 웹툰은 편당 육십에서 칠십 컷을 그려야 하는데, 일반적인 웹툰 작가가 그림을 빨리 그려도 컷당 삼십 분은 소요된다.
콘티 짜고 스케치하고 선 따고 채색을 하고 나면 대사 집어넣고 효과음 넣고 등등등. 한 컷당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특히 지금과 같은 퀄리티를 유지하려면 대충 그려서는 답도 없었다.
그나마 산하는 표운성의 만화 재능을 비롯해 수묵화나 서양화와 같은 그림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대략적인 글 콘티만으로도 스케치를 어느 정도 생략하고 빠르게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할 일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일주일도 엄청나게 빠듯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산하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해 봤다.
아무리 채색을 안 한다고는 하지만 일주일?
그나마 새로 배운 프로그램에 익숙해질 만했는데 뭐라는 거야.
어시도 안 쓰는 데다, 벌여놓은 일을 줄여 본다고 해도 생략할 수 없는 게 있기에 산하는 잠시 궁리해 보다가 하하 웃었다.
힘들긴 하겠지만 빠르게 그려 보는 것으로 경험상 얻는 게 많을 것 같아서였다.
보자, 그럼 식당 영업을 일주일 쉬고.
천상주는 아직 넉넉하고.
공장이야 잠깐씩 다녀오면 될 것 같고.
제품 판매 이벤트 한 번 남은 건 후다닥 다녀오면 될 것 같고.
다른 것에서 시간을 대폭 줄여서 딱 일주일만 웹툰에 쏟아붓기로 작정한 산하는 이제 보상에 주목했다.
그릴 때마다 가변성이 주어진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보상이 어떤 것일지 짐작해 보던 산하는 손뼉을 치며 자신을 격려했다.
“가자! 박산하!”
그 후 산하는 한참이나 웹툰 그리기에 몰입했다.
다음 날.
식당 직원 모두를 불러모은 그가 조금은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형님, 일주일이나요? 무슨 일 있으세요?”
나세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요. 사장님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세요?”
린다도 산하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걱정하는 기색이었는데, 새봄은 뭔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바로 그의 남자친구가 대략적인 이유를 자신에게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웹툰에 관해 이야기한 건 아니고, 작품 그리는 데 영감이 와서 일주일 정도 매진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산하가 세부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나중에 말해 주어 그녀가 깜짝 놀라도록 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만큼은 까맣게 모르는 새봄이 눈을 반짝이며 궁금해했다.
대체 어떤 작품일까?
예전에 수묵화 ‘나의 자리’ 그 작품처럼 대단한 걸까?
아니면…….
왠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새봄은 남자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산하는 모두에게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이번에 영감이 와서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다들 유급휴가니까 잘 쉬고. 나중에 보자.”
“오! 형님 대작 냄새가 납니다.”
“이제 전시회 하시는 거예요? 린다 너 이제 2층 가는 거야?”
“어…… 글쎄요. 사장님 전시회 해요?”
산하는 웹툰 원작을 프린팅해서 전시회를 열어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생각 중이야. 아무튼, 다들 어디 이상한 거 하다가 다쳐서 ‘저 출근 못 해요’ 하지 말고, 조심히 푹 쉬다가 오세요.”
“예! 휴가다!”
“나세 너 어디 가려고?”
“나? 나 부산 갈래.”
“오…….”
“만두 넌?”
“나도 고향에, 린다 넌?”
“전 가족여행이라도 갈까 봐요.”
그 순간 뭔가 퍼뜩 떠오른 산하가 묻는다.
“린다, 아버지는 영국으로 안 돌아가셔?”
“……그러게요.”
어딘가 이상한 표정을 짓던 린다가 제삼자처럼 대답하자, 산하가 물었다.
“그러게요라니?”
“곧 출국하셨다가 재입국하실 거래요. 취업비자건 뭐건 긴 거 만들어서 다시 오신다고…….”
“……뭐?”
“아시잖아요. 우리 아빠 된장찌개에 완전히 그냥…….”
이해는 하면서도 어이없음을 표출하던 린다의 모습에 산하가 달래듯 말한다.
“에이, 내가 보기엔 린다랑 같이 있으려고 그러시는 것 같은데?”
“그런 분이 저 없을 때도 식당 앞에 줄 설 리가 없잖아요. 사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아주 그냥 된장찌개 예찬론자가 되셨어요.”
“……그래?”
“네. 아, 그런데 봄이 언니는 이번 휴가 때 뭐 해요?”
그러자 나세도 물었다.
“맞아, 봄아. 넌 뭐 해?”
뭐 하냐는 질문에 이번 주말이 아버지 생신임을 떠올려보던 새봄이 입을 열었다.
“전…… 그냥 집에?”
그 순간 그녀를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느낀 산하는 이번 미션이 끝나면 새봄과 거하게 데이트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오후.
곧 탄생할 그의 작품을 생각하면 설레면서도 일주일이나 제대로 못 본다는 생각에 왠지 쓸쓸해짐을 감출 길이 없었던 새봄이 터덜터덜 걸었다.
아침이면 함께 장을 보고, 밥을 같이 먹고, 대화하고, 포옹하고,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늘 함께였지만 그게 일주일이나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허전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향하던 새봄의 손을 누군가가 다가와 따스하게 잡았다.
“어!? 아직 안 갔어요?”
토끼만큼이나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한 손으로 새봄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산하가 말했다.
“우리 봄이 쓸쓸해 보여서.”
“어…… 그런 거 아닌데. 오해예요. 오해!”
“아니기는…….”
“정말 아니에요. 봐요. 이 윤새봄 사원은 씩씩하다고요.”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던 산하는 계획을 살짝 수정하기로 했다.
“봄아.”
“네? 전 정말 괜찮…….”
새봄이 자신 때문에 그의 작업에 방해라도 되는 건 아닐까 염려하던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산하 씨, 잠깐만요. 왜?”
“뭐 해?”
“……싫다니까.”
윤호준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거부하는 여동생의 대답을 듣자마자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뭐가 싫어?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럼?”
“가족끼리 여행 한번 다녀오자고 전화했어. 이번 주 아버지 생신인 건 알지?”
예상했던 대화 진행이 아닌 것에 의아해하던 새봄이 질문을 던졌다.
“알긴 아는데, 아빠한테는 말씀드린 거야?”
“다른 핑계로 이번 주말에 쉬시게 해 놨어.”
“뭐 이상한 계획인 건 아니지?”
“그런 거 없어. 요새 아버지가 너 팔아먹는다고 날 아주 그냥 잡아먹으려고 하셔서 포기했다.”
“포기?”
“그래, 포기. 아무튼 주말에 너도 하루는 쉰다며?”
“……응.”
“딱 됐네. 오케이. 자세한 건 이따가 톡으로 보내 줄게.”
만나기만 하면 주시완 만나 보라고 노래를 부르던 오빠 윤호준이 포기라는 말을 언급하자 도무지 믿기 힘들었던 새봄은 약간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어, 알았어.”
곁에서 손을 잡고 가만히 서 있던 산하가 묻는다.
“봄아,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어…… 그게. 산하 씨 미안해요.”
“미안? 왜 미안?”
“오빠 전화인데, 저 이번에 가족여행 가야 할 것 같아서 할 일이 많아지겠는데요? 어쩌죠? 자주 연락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나 바쁜 여자예요’라고 말하는 듯 새봄이 새침한 표정을 짓자, 놀라게 해 주려던 계획을 포기한 산하의 내심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하나 그의 겉 표정은 울듯 말듯 이상해졌다. 심지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우는 시늉까지 했다.
“……산하 씨? 안 속아요…… 장난꾸러기.”
어느새 손을 슬그머니 내린 그가 묻는다.
“티 나?”
“엄청 나요. 바보. 얼른 돌아가요. 대작 만들어야죠.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요?”
“네네, 윤새봄 사원님, 알겠습니다. 그래도 하루 한 번은 연락하는 거 알지?”
“알았어요. 매일 사진 찍어 보내서 놀려야지.”
“두고 보자 윤새봄 사원.”
혀를 날름 내민 그녀는 잠시 후 산하와 헤어져 집으로 들어섰다.
“아빠, 저 왔어요.”
“오, 그래. 우리 딸 왔어? 밥은?”
“먹었어요. 맞다. 아빠, 오빠가 이상해요.”
“이상해? 또 너한테 뭐라고 하든? 내 이 녀석을 그냥…….”
“아니요. 아빠 그게 아니라 주시완 노래 안 부르던데요?”
“그래?”
“네…… 이상하죠?”
“그놈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구나.”
“그런 걸까요?”
“아무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정말 아버지 말대로 오빠가 더는 자신에게 누군가를 강요하지 말아 줬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산하를 떠올렸다.
‘다음 주에 봐요…….’
* * *
식품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정말 딱 1시간만 채운 산하가 동식에게 손을 흔들었다.
“벌써 가냐?”
“이 몸이 바빠서, 몸이 열 개라도 정신이 없다.”
“그러니까 좀 쉬어가면서 해.”
“그래야지. 아 참, 이번 거는 반응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달라?”
식품 공장에 요리 솜씨를 적용 가능한 최대 비율이 22%로 적용된 데다 문화의 힘까지 10% 추가로 떠서 다른 거라고는 말 못 한 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달라.”
“뭐가 달라?”
“맛이 조금 더 좋을걸?”
“그래? 어떻게 그래?”
“재료가 저번보다 좋더라고.”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모르면 말고, 아무튼 잘 팔아라 하동식.”
“안 팔아도 잘 팔려나간다. 박산하.”
“자식, 나 간다.”
“그래, 운전 조심하고.”
그 후 한참이나 지나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온 산하는 본격적으로 웹툰을 그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산하네 요리 전문점 블로그는 야단법석이었다.
<휴무 공지>
- 여러분 침착하세요. 말이 일주일이지, 주 4일 영업이니까. 실제로는 4일 휴무라고 할…… 수가 없다. 아 미치겠네. 내 된장찌개.
- 일주일이라니요. 살려 주세요 사장님. 저 무슨 낙으로 살아요.
- 으……일주일에 딱 하루 겨우 시간 내서 여기 가는 맛으로 사는데, 내 행복 돌려줘!
- 자, 여러분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거든요. 산하네 요리 전문점 된장찌개가 인터넷에서 판매 중입니다. 대량 생산이라 그런지 맛은 천지 차이지만, 특유의 맛은 살짝 있어요.
- 네, 품절 어서 오시고.
- 판매 일정 공지됐어요.
- 헉, 진짜요?
- 저도 그거 먹어 봤는데, 사장님이 직접 만들어 주는 것보다 한참 아래지만, 그 특유의 뭐라고 해야 하지. 하여튼 그건 있거든요. 다들 사 드셔 보세요.
- 이름이 뭔데요?
- ㅇㅊㅎ 된장찌개라고 검색하면 될 거예요.
* * *
세계적인 OTT 업체가 한국 미디어 업계를 서서히 장악해 가자 공중파 방송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뉴스 방송이나 하는 구닥다리 신세로 전락하고 말겠다는 위기감이 방송가를 휩쓰는 중이었다.
그 방송국 중 하나인 QBS에서는 1년 전부터 겉으로 보기에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이른바 ‘공중파 불 지피기’라고 명명된 이 계획은 방송사장의 지시로 따로 팀까지 꾸려졌는데, 일 년이 넘게 흐른 지금은 찬밥신세로 전락했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 팀에서 막내라고 할 수 있는 송혜성은 지식재산권 탐색을 일부 담당 중이었다.
영어로는 IP라고 하는, 영상화 가능한 웹툰 및 소설 원작을 찾고 있던 그는 기지개를 켜며 찌뿌드드한 몸을 달랬다.
“어허, 우리 막내 또 논다.”
슬그머니 두 팔을 내린 송혜성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한다.
“팀장님, 저 딱 3초 기지개 켰는데요?”
“기지개 켤 시간이 어딨어?”
“기지개도 업무의 연장입니다. 피로가 풀려야 일도 잘되는 법이죠.”
“말이나 못 하면, 너 잘났다.”
하하 웃어 보이던 송혜성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다국적 업체를 이겨낼 만한, 다시 말해 영상화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을 한참이나 찾아 헤매던 그는 뻐근한 눈을 문질렀다.
맘에 드는 게 없네.
처음 이곳으로 발령 났을 때만 해도 큰 건을 달성하겠다고 열의에 불타올랐던 그도 이제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국적 공룡 업체는 돈을 쏟아부으면서 밀고 들어온 지 오래고, 여타 국내 관련 업체도 그 전부터 노력 중이었는데, 이 꼰대 같은 방송가는 도대체가 혁신만 부르짖지 정작 하는 건 똑같았다.
고작 이런 팀 꾸려서 뭐가 되긴 되는 걸까 회의감에 빠져있던 송혜성은 오늘 찾아낸 몇 개의 작품에 관해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인터넷 창 한편 작은 배너 광고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일반 독자층이라면 잘 안 보겠지만, 그는 ‘작품만으로 승부한다’는 말에 끌렸다.
<많은 것도 필요 없다. 단 하나의 작품만으로 승부한다.>
HO엔터 자회사에서 근무 중인 최목찬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 그는 활짝 웃었다.
“자신감 죽이는데?”
송혜성은 곧장 그 배너를 클릭했고, 잠시 후에는 우와우와를 연발하며 웹툰을 감상했다.
이런 보석이 왜 여기 있어?
죽인다.
일단 보고…… 아니야, 일단 연락부터 해야지.
놓치기 전에.
엥? 전화번호가 왜 없어? 뭐, 그래도 메일 주소는 있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었던 그는 팀장에게 보고도 없이 작품을 영상화하고 싶다는 메일부터 작성해서 브리즈 툰 공식 메일로 전송했다.
- 20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