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다 팔렸어요 (1)
이서찬은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는 곽기훈에게 말했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
“대표님?”
의아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본 그는 졸고 있는 기훈을 발견했다. 파리도 들어가기 좋을 만큼 입을 반쯤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모습이 가관이었다.
“……대표님!?”
화들짝 놀란 기훈이 눈을 번쩍 떴다.
“뭡니까?”
“피곤하십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해요?”
“졸고 계시길래…….”
속으로 흠칫한 기훈이 턱을 문지르는 척하며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그럴 리가 있나요. 잠시 생각 좀 한 것뿐입니다. 과연 오늘 담판을 지을 수 있을지 어떨지 말이에요.”
아, 예. 그러시군요. 하여간에 우리 대표님은 아래 직원에게 저런 모습 보이는 걸 왜 저렇게 병적으로 싫어하시나 몰라.
사람이 졸 수도 있지.
재벌가 사람이면 방귀도 안 뀌고 화장실도 안 가나.
“왜 날 그런 눈으로 봅니까?”
“네? 아, 네 대표님. 오늘 하루도 대표님께 뭘 배울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이 팀장, 그 자세 참 좋습니다. 누구에게든 배울 점은 있는 법이죠.”
“맞습니다. 대표님. 특히 대표님께는 배우는 점이 참 많습니다.”
이서찬의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느긋하다가도 뭐에 한 번 꽂히면 우당탕탕 하는 성격이 좀 그렇긴 하지만, 평소 그의 사업 능력은 훌륭했다.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야 하나.
그는 OTT 업체가 시장을 잡아먹기 시작하려는 낌새를 보이던 어느 날, 세계에 대적할 콘텐츠를 만들겠다며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록 큰 성과는 없지만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었다.
훗날 결과로 보여 주겠다면서.
아마 엔터를 대형 업체로 키워 냈던 것처럼 언젠가는 자회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이서찬은 존경하는 눈빛으로 기훈을 바라보았다.
그 오묘하면서도 이상한 눈빛을 마주한 기훈이 헛기침을 하며 차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여깁니까?”
“네,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운전석에서 후다닥 내린 이서찬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려던 그때였다. 기훈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이 팀장.”
“네, 대표님.”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이 팀장은 내 몸종 아니니까 차 문 같은 거 열어 주지 말라고.”
그런 인간이 날 매번 데리고 다녀? 비서는 어디 팔아먹고 다니는 건데?
조금 전만 해도 존경심이 가득하던 그의 눈동자에 불량한 눈빛이 살짝 배어들었다.
“이 팀장? 오늘따라 눈빛이 이상한데, 뭐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그럴 리가요. 오늘도 대표님을 모시다 보니 너무 즐거운 마음에 그만, 죄송합니다.”
“전부터 느꼈는데, 이 팀장은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는군요?”
네가 사회생활을 알아? 아냐고!?
속으로 부르짖던 이서찬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 뭐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 걱정은 말아요. 어디 보자. 이 건물이라는 거죠?”
산하의 식당에 붙어살다시피 하는 곽기훈이지만, 그의 자취방에는 들른 적 없었던 기훈은 맹철호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물었고.
대표의 시선을 따라 건물을 힐끔거린 이서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 주소상으로는 여기가 맞습니다.”
“역시나 소형 업체인가 보군요. 그러니 홈페이지가 그렇지. 1층 상가에 위쪽은 주택이라……. 이 팀장 몇 층일 것 같습니까?”
내가 점쟁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때였다. 맹철호가 호프집 출입구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여기 가게 앞이니까 차 좀 치워 주세요.”
그 얘기만 하고 돌아서려는 맹철호를 기훈이 붙잡았다.
“잠깐만요, 사장님. 뭐 좀 여쭤볼게요. 여기서 장사 오래 하셨습니까?”
“그건 왜 물어봐요?”
“제가 누구를 좀 찾고 있어서요.”
“누굴 찾는데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이 건물에 무슨 플랫폼 같은 거 운영하는 분…….”
“플랫폼 뭐요?”
“플랫폼이요. 아, 제가 설명을 잘못했네요. 그러니까 만화 같은 걸 연재하는…….”
“만화? 만화가의 만 자 가진 사람도 없어요. 연예인이라면 또 모를까.”
“연예인이요?”
자랑스럽다는 듯 배를 내민 맹철호가 침을 튀기며 산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요. 연예인이요. 하산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곽기훈은 자신이 방금 뭘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여러 번 깜빡이다가 어리바리한 기색으로 물었다.
“……어, 잠깐만요. 지금 하산해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요. 왜 그렇게 놀라요? 하긴 놀랄 만도 하지. 우리 산하가 좀 잘나야지.”
헛웃음을 흘리던 기훈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이세요?”
“거,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따신 밥 먹고 헛소리나 할 사람으로 보여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훈을 바라보던 맹철호는 가게 앞을 쓸기 위해 빗자루를 가지러 갔고,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가 언급되는 바람에 놀란 기훈은 건물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산하가…… 여길? 에이 설마…….”
웹툰 플랫폼 업체 대표일 리는 없고, 기적적인 우연의 일치일 거라고 생각한 기훈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산하가 이 건물에 사는 플랫폼 업체 대표를 알고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여보세요. 바빠?”
“다 아시면서, 슬슬 바빠질 시간이죠. 왜요?”
“내가 말이야. 너 산다는, 그러니까 1층에 호프집 있는 건물 앞에 왔는데.”
“거긴 어떻게 알고 가셨어요?”
“어쩌다 보니 왔는데, 너 정말 여기 살아?”
산하는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네, 형은 왜 저한테 관심이 없어요?”
“산하야.”
“네? 저 이제 길게 통화 못 할 것 같은데,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요?”
“미안, 짧게 물어볼게. 혹시 너 사는 건물에 브리즈 툰 운영하는 사람 살고 있어?”
“전데요?”
기훈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어? 뭐라고?”
“와, 우리 기훈이 형 완전 스토커네. 제 플랫폼은 또 언제 알아냈어요?”
“잠깐만, 네가 거기 업체 대표라는 뜻이야?”
“모르셨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진짜야?”
“네.”
이게 말이 돼?
가만 있어 봐, 설마…… 에이. 아닐 거야.
기훈은 그 내심을 내뱉었다.
“……그럼 거기 웹툰 하나 연재하는 거 있던데. 그 작가는 아는 사람이야?”
“전데요.”
“뭐!? 장난하지 말고. 사업자 이름이 박상태인가 그렇던데.”
“아, 그거 우리 아버지 성함이에요. 사정이 있어서 잠깐…… 어? 뭐? 알았어. 형, 미안한데 나중에 얘기해요. 끊을게요.”
어느새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을 허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기훈은 마치 로봇 같은 말투로 이서찬에게 말했다.
“이 팀장…….”
“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색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브리즈 툰 대표가 산하랍니다.”
“네에?”
“그리고 거기 연재 중인 웹툰 작가도 산하랍니다.”
“네? 에이 설마요. 진짜요!? 만화도 그리신다고요?”
고개를 끄덕여 주던 기훈은 속으로 외쳤다.
이런 미친, 박산하! 왜…… 왜 말을 안 해 줘! 왜 만화 그린다고 말을 안 해 주냐고! 바로 앞에 놔두고 삽질했잖아.
나랑 영상화 계약 안 해 주기만 해 봐라. 식당 앞에서 시위라도 할 테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만 있던 이서찬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던 기훈은 퍼뜩 표정 관리를 하더니 이서찬에게 말했다.
“갑시다. 이 팀장.”
“회사로 가시는 겁니까?”
“아니요. 식당으로 갑니다.”
“어쩌시려구요?”
“따져야죠. 날 속인 죄. 열 배로 갚게 할 겁니다. 드라마도 만들고 영화도 만들고 애니메이션도 만들고 연극도 만들고 다 만들어서 괴롭혀 줘야죠.”
이 양반아, 그게 어째서 괴롭히는 거야. 성공시켜 주는 거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가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대표를 바라보자, 기훈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이 팀장, 오늘 날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해요. 혹시…….”
“혹시?”
“횡령이라도 저질렀습니까?”
“네!?”
“농담이에요, 농담. 자 갑시다. 사장님, 기회 되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멀찌감치 서서 빗자루로 길거리를 쓸던 맹철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속닥속닥하면서 눈빛이나 주고받고, 이상한 놈들일세.
“당신 또 여기서 뭐 해요? 하여간에 나갔다 하면 돌아올 생각을 안 해요.”
“어? 아니, 난 요 앞에 우리 가게 가로막은 놈들이 있길래, 차 빼나 안 빼나 감시…….”
“핑계 없는 무덤 없다더니, 얼른 들어오기나 해요.”
“이 사람이 정말, 사람 말은 들어 보지도 않고…….”
“말해 봐요.”
“……아냐, 들어가. 들어가야지.”
와이프의 뒤를 따라 호프집 안으로 들어서던 맹철호는 그들이 사라진 곳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쟤들 또라이 아니야?”
* * *
식당 영업 시작 직전에 들이닥쳐서 잠깐 바깥에서 얘기 좀 하자던 곽기훈을 떠올린 산하가 피식 웃었다.
브리즈 툰이 어쩌고저쩌고, 당장 계약 안 해 주면 여기 드러눕겠다나 뭐라나.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네.
그때도 계약하자고 매번 찾아오고 난리였는데.
예전 일을 떠올리던 산하는 본가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반갑다며 꼬리를 풍차처럼 돌리는 따릉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중 따릉이 집의 못이 살짝 튀어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저러다 다치겠다고 생각한 그가 개집 수리할 도구를 찾기 위해 마당 창고로 향하던 무렵.
이제 막 페이 약사로 취업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돌아온 윤정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따릉이 반갑반갑.”
히히 웃어 주던 윤정은 곧장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리쳤다.
“야! 박산하. 왔어? 뭐야, 아무도 없어?”
눈을 또르륵 굴리던 윤정은 도도한 모습으로 소파에 엎드려 있는 고양이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가 앉더니 말을 걸었다.
“엘리자베스 잘 있었어? 내가 왔는데 마중도 안 나오고. 어쩜 그래?”
“냥…….”
미안하다는 듯 자신의 손에 볼을 부비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갑자기 재미난 생각이 떠오른 윤정은 대사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러지 마, 엘리자베스. 너와 난 이제 헤어져야 해.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순 없어.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오지 마!”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다가와 손가락을 핥자 윤정이 눈물이라도 흘릴 듯 애절한 표정으로 외쳤다.
“안 돼, 안 돼. 참아야 해.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야…….”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먹거리는 시늉을 하더니, 또 한 손으로는 고양이를 그리워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런 상황극이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간단히 따릉이 집을 손봐주고 현관으로 들어선 산하는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뼉을 쳤다.
“부라보! 박윤땡, 피디님 소개해 줄까?”
어깨가 움찔할 정도로 놀라다가 끝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윤정이 뒤를 돌아보며 항의했다.
“뭔데? 왜 몰래 들어와서 남의 사생활을 훔쳐봐?”
“나 몰래 안 들어왔고, 여기 거실인데?”
“아, 몰라! 이 바보탱이.”
‘쪽팔려’ 하고 중얼거린 윤정은 엘리자베스를 안고 부리나케 방으로 도망쳤다.
그런 여동생의 모습이 너무 웃겼던 산하는 하하 웃고 나서 주방 냉장고로 향했다.
오늘 가족 모임을 위해 요리할 재료를 꺼내던 산하는 조금 전 여동생의 메소드 연기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배우 재능은 못 얻었네.’
다른 거 할 시간도 빠듯한데 있어 봐야 뭐할 거냐고 중얼거리던 산하가 가족을 위한 요리를 시작했다.
* * *
인지도가 없는 상품도 방송을 통해 대박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홈쇼핑 MD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품이 좋아야 하기에 이태화는 어떤 MD보다도 상품 선정에 꼼꼼히 신경 쓰곤 했다.
기획, 소통, 협상이라는 단어로 말할 수 있는 직업에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던 그는 오늘 한 업체 관계자가 놓고 간 샘플 제품을 바라보다가 입점 제안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상품명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은성식품>
<ㅇㅊㅎ 된장찌개>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야?
사십 대에서 육십 대에 이르는 홈쇼핑 주 고객층에서는 별로 반기지 않을 만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수북이 쌓인 다른 제안서를 바라보았다.
저 속에는 그래도 나름 이름 있는 업체가 있었다.
시간도 아까우니 이런 이상한 소형 업체의 장난 같은 제안서는 그만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른 제안서나 볼까 하던 그는 멈칫했다.
그런데 ‘ㅇㅊㅎ’가 뭐지?
궁금해하던 그는 내용을 조금 더 살펴 보았다.
그 아래에는 제품명, 원산지, 제품 특성이나 단가 등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중 유통 실적 부문을 살펴보던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판매 기간에 비해 매출이 상당했다.
이거 뭐지?
상품을 조금 더 꼼꼼히 읽기 시작한 그는 이내 기타사항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또 한 번 뜻밖의 사실을 접했다.
<……본 상품은 하단부에 기재된 오픈마켓에 첫 입점하자마자 품절 사태를 빚었으며……>
품절? 고작 된장찌개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제안서에 기재된 오픈마켓 주소로 접속해 상품 설명을 살펴보다가 리뷰란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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