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다 팔렸어요 (2)
그는 리뷰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이렇게 많아?”
리뷰란에 올라와 있는 글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중에 베스트 리뷰 하나를 클릭한 그는 글조차도 긴 것을 발견하고, 여기다가 무슨 장문의 에세이라도 쓴 거 아니냐고 생각하며 후기를 읽었다.
<……늦은 건 아닌지 두근반 세근반 기다렸는데요. 아니 글쎄, 이벤트 막차 탔다고 전화 온 거 있죠? 저 정말 까무러치는 줄 알았잖아요.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연예인 온다기에 된장찌개는 별생각 없었거든요? 그리고 그날이 왔어요.
실물이 훠어얼씬 멋진 하산해님이 방문하신 거 있죠? 그날만 생각하면 꺅! 그런데 말이죠. 그분이 직접 만들어 주시는 된장찌개, 배송받았던 ㅇㅊㅎ 된장찌개를 미리 맛본 상태라 좀 더 맛있겠거니 이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그건 저의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요.
맛있어도 너무 맛있어서 기절해서 못 일어날 뻔했잖아요. 이 맛을 널리 알리고 싶다가도 더 알려지면 맛도 못 볼까 봐 안 쓰려고 했는데, 그냥 다른 분들도 쓰셨길래 에라 모르겠다 하고 써요.
여태 하산해님 노래만 주야장천 들으면서 좋아했던 저 완전 개안했잖아요. 이제 저 하산해님 된장찌개도 팬 할 거예요. 그리고…….>
하산해……?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에 궁금해진 이태화는 포털사이트에 그 이름을 검색해 보았고, 이내 프로필 사진과 함께 뜨는 설명을 보며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아! 이 사람?’
음원 순위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었던 가수임을 어렴풋이 떠올리고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이 사람 식품 공장도 운영했어?
이거 홍보 한번 제대로 할 수 있겠는데?
여기도 지금 팬들이 몰려와서 이 난리 난 거 아냐?
그럼 나도 그 덕 좀 볼까?
그전에 상품 어떤지 확인부터 해 보고.
그는 박스에 대충 던져 놓았던 샘플을 집어 들고 탕비실 겸 시식을 하던 장소로 향했고, 이내 따끈하게 데운 후 맛을 보았다.
오, 상품도 괜찮은데?
좋았어.
이번 방송 연예인 후광 효과 제대로 한번 보자고.
씩 웃던 이태화가 막 테이블을 정리하려던 찰나 그의 1년 차 선배, 임동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몇 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된장찌개?”
“네.”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최근 1년간 진흙 속에 묻혀 있던 진주 같은 상품을 여러 개 발굴해 대박 상품으로 전환시켜 사내 스타 MD 반열에 오른 그는 윗선으로부터 상당한 이쁨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작년에는 사내에서 주최하는 이달의 실적 왕 1위에 여러 번 등극하며 자신의 능력을 뽐냈다.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는 요즘 콧대가 상당히 높아지다 못해 오만해져 있었다.
자신이 하는 게 왕도이자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MD 일에 과할 정도로 참견한다고 해야 하나.
그걸 잘 알고 있는 이태화는 그저 고개를 숙여 보이기만 하고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뭐? 너도 나 잘 나가는 것 같으니까 샘 나서 그래?”
“네? 아니요.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내 도움을 왜 거절해?”
“그냥 혼자 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도 조언 정도는 들으면 좋잖아. 보자…… ㅇㅊㅎ 된장찌개? 이름 웃기네. 그런데 이런 건 안 돼. 된장찌개 못 끓이는 집이 얼마나 된다고. 조리도 그리 안 어렵잖아. 이런 것보다는 좀 더 사람들이 편하게 사 먹고 싶은…….”
저번에도 그렇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조금씩 짜증이 치밀어 올랐던 이태화가 선배를 불렀다.
“선배!”
“어, 왜?”
“내기하실래요?”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기? 갑자기 무슨 내기?”
“제가 이달의 실적 랭킹 1위에 오르는지 안 오르는지요.”
여태 이렇다 할 만한 상품 하나 발굴하지 못하고, 가끔 평타 정도나 치는 후배의 당차다 못해 어이없는 제안을 듣게 된 선배가 하하 웃었다.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아니요. 저 진심인데요.”
“진심? 너 지금 무슨 말하는지 알기나 하는거야? 실적 1위? 태화야, 너 이번 달에 내가 발굴해서 히트시킨 상품이 몇 개인 지나 알아?”
“알죠. 그래서 선배님 자신 없으십니까?”
“뭐? 이 자식이, 내가 왜 자신이 없어. 좋아, 해! 너 후회하지 마라. 내기 벌칙은?”
“왕의 식탁이요.”
“……진심이야?”
그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들이 말하는 내기는 바야흐로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사내 최고의 경쟁자였던 두 MD가 직업의 자부심을 건 한판 승부라 말하고, 실제로는 사행성 짙은 내기를 걸었는데.
이것이 차후 발각되어 둘 다 징계를 먹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웃긴 건 그 내기를 벌이던 달의 매출이 놀라울 정도로 껑충 뛰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놀란 임원진은 몇 달간의 논의 끝에 이 내기라는 걸 공식적인 게임 비슷하게 만들어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사행성을 배제하고 일종의 룰을 정해 버렸다.
그 룰 안에는 벌칙의 종류, 게임이 진행된 달의 매출과 비례한 참여자 보너스, 신발을 핥으라거나 다리 아래로 기어가라는 등의 과한 요구 배제 등이 포함돼 있었다. 벌칙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만 173개였고, 점점 늘어나는 중이었다.
윗선에서는 이렇게 점점 늘어나는 벌칙을 나쁘게 여기지 않고 놔둘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추기거나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하면 할수록 경쟁 유발 효과를 가져와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중에서도 ‘왕의 식탁’이란, 사내 식당에서 밥반찬이 담긴 식판을 내기에 이긴 상대방에게 매일 점심시간마다 가져다 바치는 것으로, 약 2년 전, 그러니까 지금은 퇴사한 한 MD가 제안한 벌칙이었다.
이것은 은근히 기분 나쁜 벌칙으로 손꼽혔는데, 진짜 왕에게 수라를 가져다 바치는 것처럼 한쪽 무릎까지 꿇은 채 공손하게 밥을 바치고 사극풍으로 대사를 외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열흘 내내 점심시간마다.
물론 그 대사는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 마음대로 정했다.
“전 정말 진심입니다. 하시겠습니까?”
“콜! 물려달라고 하지 마라? 나중 가서 이번 달 며칠 안 남았다느니 어쩌니 안 통한다?”
“물론입니다.”
“좋아, 사내 게시판에 올린다. 지금도 안 늦었어.”
“바로 올려 주세요.”
“너 좀 세게 나온다? 좋아. 진짜 하지 뭐.”
요즘은 조금 시들해졌지만 이 내기는 1년 전만 해도 새로운 규칙이 부여되며 뜨겁게 달아올랐었다.
바로 팀 결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추가되면서부터였다.
PD, FD, 카메라 감독, 조명감독을 비롯한 각종 업무 담당자가 다 같이 참여해 성과를 내는 방식이었는데, 누군가가 경쟁을 선언하면 자신이 참여하고 싶은 사람에게 붙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태화 너, 진짜 이번엔 선 넘었다.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이러냐?”
“뭐 시키실 건데요?”
“넌?”
“글쎄요…….”
한참 후 실제로 사내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저 임동희와 이태화는 이달의 실적 랭킹 1위를 두고 경쟁을 선언합니다. 벌칙은 왕의 식탁입니다.>
이 게시글은 곧 운영자에 의해 최상단 공지로 게재되었다.
- 두 사람 매출 비교 아니고, 이달의 실적 랭킹? 실화입니까?
- 와, 이게 얼마 만에 하는 대결입니까?
- 간만에 꿀잼각인데요?
- 임동희 MD님 이번 달도 실적 장난 아닌데…….
- 이거 간만인데 팀으로 가는 것도 재미있겠는데요?
- 오, 팀! 저는 임동희 MD님 한 표.
이번 내기는 일이 점점 커지더니 PD와 FD 카메라 감독에 이어, 쇼호스트까지 팀으로 참여하는 대형 내기가 돼 버렸다.
임동희를 싫어하는 자와 보너스를 탐내는 자간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이 내기와 관련된 게시글을 유심히 살펴보던 홈쇼핑 사장은 허허 웃으며 비서에게 말했다.
“이거 참 오랜만에 또 불붙었군요. 서로 기분 안 상하고 선 안 넘도록 룰대로 잘 진행하세요.”
이 내기에 경쟁으로 인한 생산 유발 효과가 있다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었다. 바로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네, 사장님. 그런데 이태화 MD 쪽이 지는 건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요. 아무튼 간만에 재밌겠어요. 매출 기대됩니다.”
* * *
이제 막 산하네 요리 전문점이 브레이크타임을 맞이한 시각이었다. 이태화 MD는 맛집으로 소문난 산하의 식당 근처에 업무용 차량을 주차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식당 앞은 저녁 식사를 위해 미리 줄 선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식당 앞을 바라보던 그는 입을 헤 벌렸다.
‘와…… 뭐냐 이거.’
한참 그들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이태화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식당 출입구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이제 막 브리즈 툰 웹사이트를 살펴보고 노트북을 덮던 산하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와, 하산해님, 아니 박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 어제 약속 잡았던 MD 이태화라고 합니다.”
어제 뜬금없이 동식에게 전화가 와서, 홈쇼핑 관계자가 은성식품 대표와 직접 미팅을 하고 싶어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던 산하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악수한 두 사람은 마주 앉았고, 잠시 후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산하가 질문을 던졌다.
“절 직접 보자고 하신 이유가……?”
“네, 말 안 돌리고 바로 말씀드릴게요. 박 대표님 상품을 판매하는 시간에, 한번 출연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그러니까, 식품 회사 대표이자 요리사로 한번 출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것 부탁드리려고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아…… 그런 건 전화로 하셨어도 되는데.”
일단 살살 빼거나 거부하거나 곤란해할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전화로 해도 됐을 거라고? 지금 수락한 거야?
그는 지금 제대로 들은 건지 확인부터 했다.
“그 말씀은……?”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제 상품 파는 일이기도 하고. 스케줄만 잘 맞춰 주시면 출연할게요.”
“와, 엄청 화끈하시네요. 진짜 하기로 하신 겁니다?”
“네, 그럼 하실 말씀은 다 끝난 건가요?”
[연계 미션 - 이태화 팀을 승리로 이끌어라.]
[내기 기간 동안 식품 공장에 적용 가능한 요리 솜씨 비율이 30%로 증가한다.]
[보상 - 연계 미션 당시 적용된 식품 공장 적용 비율이 미션 완료 후에 그대로 승계된다.]
뭐야 이건 또?
내기? 무슨 내기?
하여간에 뜬금없이 나타난다니까. 어쨌거나 찔끔찔끔 올려 주다가 30%라니, 죽이는데?
“박 대표님?”
“아, 네. 뭔가 중요한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죠?”
“방송에 몇 번이나 출연해 주실 수 있는지…….”
“아! 그건 천천히 결정하는 게 어떨까요?”
“네, 그럼 시간은 언제…….”
그 후로 이번 판매 건에 관해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악수를 한 산하는 문을 열고 사라지는 이태화를 보며 생각했다.
무슨 내기 같은 거라도 건 모양인데?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기고 봐야지.
* * *
산하네 요리 전문점 유리 벽에 얼굴을 찰싹 가져다 붙인 곽기훈이 산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형, 또 왜요?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요.”
기훈이 스마트폰을 들고 꼼지락거리더니 화면에 문구를 커다랗게 띄워서 보여 주었다. 산하가 물려받은 문화의 힘과 관련된 내용이 화면 우측으로 흘러갔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김구->
검지로 그 화면을 톡톡 두들기며 가리킨 기훈이 또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 진짜 사심 없어. 계약해 줘.”
저 형이 또 김구 선생님 팔아먹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산하가 말했다.
“안 들려요.”
“다 봤으면서…….”
유리 벽에 맞닿아 일그러진 채로 이야기하는 기훈의 표정이 너무 웃겼던 산하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너, 웃지 마. 그래도 포기 못해.”
그의 입 모양을 대충 읽어낸 산하가 예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바를 꺼냈다.
“그럼 합작법인 하나 설립하실래요?”
이번에는 산하의 입 모양을 제대로 못 읽어낸 기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유리문을 밀고 쳐들어왔다.
“뭐라고 했어?”
“합작법인이요. 콘텐츠 생산부터 형이 말한 영상화 기획까지 일괄적으로 이루어지게요. 지금 형태로는 부드럽게 진행되기 어려워 보여서요.”
기훈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오, 박산하. 지금 합작…… 합작이라고 한 거야? 합작 좋지. 자금은 내가 댈 테니까, 넌 콘텐츠…….”
“에이, 형 아니죠. 저도 자본은 넣어야죠.”
“내가 지분 많이 가져갈까 봐 그래? 나 지분 별로 필요 없어. 지분 너 많이 줄게.”
“아니요. 그냥 공평하게 하고 싶어요. 형이 돈 많다고 해서 저는 안 내고 그런 건 좀 아니잖아요.”
기훈은 마치 천사의 강림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빛냈다.
“역시…… 역시 우리 산하는 킹왕짱이야.”
“킹…… 뭐요?”
“아냐, 조카한테 물들었나 봐. 나 간다.”
“이러고 간다고요?”
“우리 영감님 때문에 한시가 급한데 합작법인 설립부터 준비해야지. 아 참, 법인 이름은?”
“그냥 우리 이름 따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형네 스튜디오랑 우리 웹툰 업체 이름 섞어서 써도 되고.”
“그래, 그럼 그건 좀 더 고민해 보자. 그래도 빨리 결정해야 해. 나 진짜 간다. 나중에 연락할게.”
얼마나 신이 났는지 스텝을 밟으며 사라지는 기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산하가 합작법인 상호를 뭐로 해야 할지 궁리해 봤다.
원래는 문화 기업 형태로 쓰려 했던 풍류라는 상호를 여기에 써 버릴까?
어차피 혼자서 모든 걸 다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기에, 그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것에 관해 고민해 왔던 산하는 동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똥식아.”
“왜 쌍하야.”
“……쌍하는 뭐냐?”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알면서 그래, 왜?”
“……잘났다. 그런 걸 따라 하고 그래. 그건 그렇고 법인 풍류 있잖아. 어떻게 됐어?”
“슬슬 시작하려고, 이번 홈쇼핑 건도 그렇고 할 일이 많아서 조금 미뤄 뒀다. 금방 할 테니까 걱정 마.”
“어, 잘됐다. 잠깐만 그거 하지 말고 있어 봐.”
“왜?”
“합작법인 하나 설립해야 할 것 같아.”
“뭐!? 무슨 합작법인? 이건 또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별건 아니고 HO엔터 대표님이랑 콘텐츠 영상화 부분에서 손 잡기로 했어.”
“……그래? 그거 괜찮은데? 그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고, 홈쇼핑 출연하기로 했다면서?”
“어.”
“잘했어. 엄청 잘 팔리겠다.”
“웬일이냐 동식아. 네가 칭찬을 다 하고.”
“누가 들으면 내가 이상한 놈인 줄 알겠네. 네가 이상한 놈이야 인마. 나 바빠서 끊는다.”
통화가 종료되어 깜빡이는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던 산하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 자식 이거, 내가 매번 끊으니까 일부러 먼저 끊은 거 같은데?
하여간에 동식이, 내 친구 동식이 변치 말자.
* * *
신입 쇼호스트 한영미는 이번에 자신이 맡게 된 상품에 불만이 많았다.
원래 쇼호스트를 꿈꾸었을 때 나름 우아한 모습으로 방송하고 싶었던 그녀는 처음 주어진 판매 물품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업체의 된장찌개라는 것에 기가 막혔다.
이거 나 신입이라고 막 다루는 거지? 내 이 미모에. 이 몸매면 의류 방송이나 운동기구나 좋은 거 많잖아.
팀 경쟁이고 뭐고, 왜 이런 냄새나는 된장찌개를 팔라는 거야. 짜증 나. 유명 브랜드이기라도 하든가.
쇼호스트는 세일즈를 하는 사람이기에 실적을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하고 상품이나 콘셉트, 자기 관리 등등 신경 써야 할 게 많지만, 한영미는 유독 자신이 파는 품목에 신경을 많이 쓰곤 했다.
자신과 잘 어울리는 우아한 상품을 팔고 싶어 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신입인 데다 쇼호스트이다 보니 뭔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방송 며칠 전부터 이 상품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쇼호스트라면 이건 기본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객의 니즈를 알아야 잘 팔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그녀만의 철칙이 있었는데, 홈쇼핑 방송사에서 건네준 상품 기술서에 의존하지 않고 더 유연한 자세로 상품을 알아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상품 기술서는 겉면만 대충 훑어본 게 다였던 그녀는 은성식품이라는 업체에 관해 검색해 보다가 마치 파도를 타는 것처럼 연관 검색으로 넘어갔다.
‘이건 뭐야?’
산하네 요리 전문점이라는 추천 검색어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심코 그걸 눌러서 한참을 둘러봤다.
그리고 기술서를 재빠르게 훑어본 그녀는 이번에 함께 출연한다던 업체 사장이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게 되었다.
“대박! 이건 괜찮은데?”
그렇게 며칠이 더 흐르고 방송 당일.
산하의 여자 친구 새봄은 그가 생산하는 된장찌개를 홈쇼핑에서 판매한다던 시간이 되자 집으로 부리나케 돌아왔다.
홈쇼핑의 방송 황금시간대는 보통 오전 8시부터 3시간가량인데, 남자친구로부터 오늘 오후 8시부터 방송을 시작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딸, 왔어?
윤주상이 신문을 들여다보다 말고 안경을 벗으며 묻자 새봄이 리모컨부터 집어 들며 배꼽 인사가 아니라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평소와 다른 딸의 인사에 윤주상이 울먹이는 척했다.
“딸, 우리 딸. 너무 섭섭하다. 이제 이 아빠는 눈에도 안 보이는 거야?”
“미안해요. 아빠. 나 볼 거 있어서 그래요.”
상품 판매한다고만 들었지, 산하가 출연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새봄이 TV를 켰다.
“볼 거? 무슨 볼 거?”
“잠시만요.”
이내 그녀가 채널을 돌려 홈쇼핑을 들여다보자 윤주상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그 볼 거라는 거야? 홈쇼핑은 왜?”
“그냥요.”
“???”
홈쇼핑 스튜디오 내부.
쇼호스트 한영미는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리허설 당시 부족했던 부분을 떠올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소개해 드릴 상품은요…….”
ㅇㅊㅎ 된장찌개를 두 손으로 들어 카메라에 잡히도록 한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바로바로 이 된장찌개예요. 여러분 지금 깜짝 놀라셨을 텐데요. 포장지 디자인이 정말 엄청나죠? 네, 그렇습니다. 포장지부터 맛깔 나보이는 된장찌개, 맛도 아주 훌륭한데요. 박세진 씨, 이거 드셔 보셨나요?”
“그럼요. 이 된장찌개 제가 먹어 본 간편 음식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맛있어요.”
“네, 저도 그 말에 동의해요. 그런데 잠깐! 우리 출연자 한 명 더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쇼호스트 박세진이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있죠. 똑똑똑, 나와 주시겠어요?”
- 21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