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약속을 지켜라 (5)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욕지거리부터 내뱉는, 다시 말해 무소불위의 인간을 노려보던 SL그룹 회장은 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빡 소리가 날 정도로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가 외쳤다.
“네, 애비다.”
어떤 미친놈이냐며 당장 잡아 죽일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던 성태환의 눈동자에 놀람이 찾아들었다.
“아버지 절 왜……?”
하아, 이놈을 길러도 한참 잘못 길러낸 건가, 아니면 타고나길 이리 타고난 것일까. 어찌 이리도 바보 같단 말이냐.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왜 때렸냐고 쳐다보는 눈빛이라니.
설마 아닐 게야.
“끝까지 말해 보아라.”
“절 왜 때리신 거죠?”
SL회장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자식이기에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온 참이었다.
하나, 이제는 앞에 있는 아들이 완벽한 구제 불능이라는 걸 여실히 깨달은 그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성태환.”
“네…… 아버지.”
“넌 오늘부터 SL홈쇼핑 영업기획팀 부장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성태환이 무언가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
“부장이라니요. 저 성태환…….”
그의 말을 가로챈 SL회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넌 오늘부터 차장이다.”
“아버지!”
“넌 오늘부터 과장이다.”
“…….”
아무리 바보라 하여도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저 밑바닥 사원까지 내려갈 기세라는 걸 알아챘기에, 성태환은 입만 다물고 아버지를 노려보다시피 했다.
“성 과장, 할 말 있으면 해 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불만을 쏟아냈다.
“절 이따위 홈쇼핑 부사장에 처박으신 것도 모자라서, 이제 뭐라구요? 과장이요? 제가 그따위 밑바닥에서 뭘 하라는 겁니까? 여기서 잠시 배우다가 오라면서요? 얼마 전에는 그룹 본사로 발령내신다면서요? 저 놀리십니까?”
여전히 답도 없는 아들놈을 매섭게 노려보던 SL그룹 회장은 열 받은 나머지 두툼한 손을 들어 올려 성태환의 뺨을 때렸다.
철썩 소리가 나도록 뺨을 얻어맞은 성태환의 입이 헤- 벌어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맞은 적 없었던 그는 오늘 뒤통수를 비롯해 뺨까지 얻어맞고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 아버지……?”
“귀한 자식놈한테 왜 이러냐고? 그건 네놈이 더 잘…… 아니다. 잘 모르겠구나. 설명해 주마. 네놈은 윗사람도 없이 나대고, 제 능력도 모르고 설치는 바보천치라서 그렇다.”
“네?”
“다시 말해 주랴? 이젠 말귀도 못 알아들어? 너는 이 홈쇼핑 밑바닥에서 구르면서, 대체 네놈이 뭘 잘못했는지, 왜 그러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잠깐만요. 아버지. 후계는요?”
“자식이 네놈 하나뿐이더냐? 네 형도 있고 동생도 있다.”
“…….”
“정신 차리기 전까지는 본가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알겠나, 성태환 과장?”
“아버지, 그래도 제가 SL그룹 후손인데…….”
“말 한번 잘했다. 네놈이 우리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사장이 가당키나 한 일이더냐? 더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오 비서!”
문밖에 시립하고 서 있던 사내가 빠르게 내부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방금 내가 말한 대로 진행해. 이놈에게 아무런 특혜가 없다는 것도 여기 직원들에게 주지시키고.”
“네! 회장님.”
“아, 그리고 임원들 소집시켜.”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성태환이 목에 핏발까지 세우며 고함질렀다.
“그렇게는 못 합니다!”
다섯 살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바락바락 대드는 아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그가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못한다? 이봐, 오 비서. 이놈 직위는 이제 대리부터 시작이야.”
“네, 회장님.”
“아버지!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다 때려치우겠습니다.”
“오냐, 그래 주겠느냐?”
“???”
“그리해 주면 내가 참 고맙겠구나. 어차피 말단 사원으로 가도 사고만 칠 놈이니. 오 비서, 이놈 사표 수리하고, 모든 특혜 회수 절차 밟도록 하게. 집, 카드, 승용차 모두.”
“네, 회장님!”
“아버지!?”
“네놈이 그렇게나 말하던 서민으로 살아 보도록 하려무나. 그곳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지.”
깊은 한숨을 내쉬던 SL 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부사장실에서 나왔고, 성태환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나 평생 부유하게 살아온 성태환은 그 누구보다 돈과 권력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니야. 아냐. 이건 꿈일 거야. 악몽이야. 나 성태환이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우리 아버지가 날?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한 그는 멍한 표정으로 연신 중얼거리기만 했다.
* * *
<이번 사건의 책임자로 알려진 성태환 부사장, 이번 일 책임지겠다며 퇴직>
<불매 운동으로 번지던 고릴라의 난, 승리의 환호>
<공식 사과문 전달받은 하산해, 심경 질문에 말 아껴>
<시위 지켜본 시민, ‘이번 사건은 소비자의 승리’>
- 쩐다. 나 이런 거 처음 봄. 대기업에서 대대적 사과를 하다니…….
- 완전 엎드려 절받기. 그러니까 처음에 잘하지.
- 팬카페 변호인단 소송 겁나 무서웠나 봄. 전관예우도 있다던데.
- 하산해 악플 달기 무섭다. 힝.
- 와, 하산해 무법 파괴자 아님? SL홈쇼핑에 손댔더니 파괴됨.
- 파괴자 하산해!! 그래서 고릴라인가?
- 노노 하산해 인터넷 방송할 때 닉네임 마운틴R에서 따온 거임.
- 정확히는 팬들이 붙여 준 거임. 고릴라의 난, 크!
SL그룹 회장이 직접 사건 해결을 위해 나서자 사건 해결 속도는 상당히 빨라졌다.
이런 선례를 남기는 게 별로 탐탁지 않았던 SL그룹 회장이었지만, 그룹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시기에 이런 일까지 겹치게 만들 수 없다는 그의 결심도 한몫했다.
그러다 보니 SL홈쇼핑 사장 및 임원들이 본사 앞에 나와 큰절을 하며 사죄하는 것으로 이번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하산해의 자선 콘서트에 거액의 후원을 약속함으로써 거칠게 번져나가던 불길을 완전히 잠재웠다.
이번 태풍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하산해, 즉 박산하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오늘 자 뉴스를 살펴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 쟁취한 팬들이 대단하고 자랑스러웠다.
“형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승리의 미소?”
“아냐, 그냥 팬카페가 너무 다양해서.”
“그야 뭐, 사람들 취향이 다양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고개까지 끄덕끄덕하며 똑똑한 척하는 만두에게 가까이 접근한 산하가 묻는다.
“오, 봉만두. 그래서 넌 어디 팬카페 가입했어?”
아직 현실 파악을 못 한 만두가 해맑게 웃었다.
“아무것도?”
“이 자식이, 너 이리 와. 매일 형님이 어쩌고저쩌고 존경한다면서 가입한 카페가 없어?”
헤드록에 걸린 만두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아! 형님 아파요. 전 언제나 형님 곁을 우직하게 지키잖아요. 그리고 인터넷이 한동안 안 돼서. 오, 오늘. 그래요, 오늘 가입하려고 했어요.”
“뻥치지 마! 이걸 구워? 삶아?”
음식 맛을 떠올리는지 입술에 침을 바른 만두가 조언한다.
“형님, 웬만하면 군만두가 맛…….”
“시꺼! 넌 오늘부터 된장찌개 일주일간 압수.”
봉만두는 헤드록이 걸린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며 항의했다.
“아! 아아! 형님, 너무하십니다. 일주일이라니요.”
그들이 아웅다웅하던 그때 산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연계 미션 - 이태화 팀을 승리로 이끌어라.]
[미션 실패로 인해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노력 수치를 감안합니다.]
[페널티가 대폭 완화됩니다.]
[내일부터 열흘간 팬들에게 매일 다른 방법으로 즐거움을 선사하자.]
[현재 0/10]
원래는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했으나 사건이 터지며 제대로 된 방송을 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산하가 봉만두의 헤드록을 풀고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 돼!”
“그러니까요. 안 됩니다 형님, 반나절로 가시죠?”
“닥쳐!”
“…….”
* * *
이번 고릴라의 난에 참가했다가 승리를 맛본 이유순은 희희낙락하며 산하네 요리 전문점을 살펴보던 도중 공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휴무지만 깜짝 오픈>
- 왓!?
- 이거 실화냐?
- 와…… 잠깐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 달료!
- 오 마이 갓.
-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사장님 딱 기다리세요.
이번 이벤트를 기획한 산하는 오전에 출근한 모두를 격려했다.
“다들 미안하다. 오늘 영업 끝나면 된장찌개랑 다른 것 2개 더 만들어 줄게. 오늘 하루만 힘내자. 오케이?”
“밥만 준다면 전 추가 영업 찬성, 안 그래도 주 4일 너무 짧았어요.”
“오예!”
“대박! 2종이다.”
어째 일하는 걸 무척이나 반기는 것 같은 직원들을 바라보던 그에게 만두가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형님 내일도 영업하시고 3종 추가!?”
“……받아라 봉만두!”
“아악! 봉만두 살려!”
이즈음, 산하네 요리 전문점 앞에 가장 먼저 줄을 선 사람은 다름 아닌 린다의 아버지 레이몬드였다.
그는 집이 가까워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1등으로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온 린다가 아버지를 발견했다.
주야장천 된장찌개만 찾으시기에 오늘은 좀 쉬시라고 영업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던 그녀의 눈동자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아빠,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어떻게 알긴, 딸 출근하는 거 다 눈치챘지. 이 아비가 딸 놀러 나가는 거랑 구분도 못 할까 봐?
하지만 그는 내심과 다른 말을 내뱉었다.
“말도 마라. 블로그 감시하다가 뭐가 떴길래 일단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다. 그랬더니 아니 글쎄 영업을 시작하는 것 같지 뭐니?”
“…….”
* * *
페널티 2일 차.
원래는 휴무일이지만 산하는 바빴다.
전날 오후, 창고에 먼지만 쌓여 가던 돌림판을 끄집어내 당첨된 단골들에게 된장찌개 이용권을 부여한 산하는 오늘도 열심히 조리 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오전 장사만 하고 오후에는 쉴 생각으로 열심히 요리한 산하가 된장찌개를 내놓을 때마다 손님들이 셀프 서빙을 했다.
“사장님 최고!”
“나온다!”
페널티에 불만을 느끼기보단,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에 덩달아 웃음이 나오는 걸 감출 수 없었던 산하가 크게 외쳤다.
“7번 테이블, 된장찌개 2개 나왔습니다.”
“앗싸!”
“이게 웬 횡재야?”
오후가 되자 내일은 사인회를 한번 열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식당 문을 닫아걸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네, 사장님. 아, 그래요? 네, 지금 시간 있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식당 앞에 도착한 봉황 부동산 최팔봉 사장이 차를 주차하고 손을 흔들었다.
“뉴스 봤는데,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사장님도 건강하시죠?”
최팔봉이 예전에 비해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보시다시피 배만 나옵니다.”
허허 웃던 최팔봉이 식당 옆 골목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쭉 올라가면 오늘 소개해 드릴 매물이 있습니다. 운동도 할 겸 걸어갈까요?”
“아, 네 가시죠. 안 그래도 요즘 운동이 부족하던 참이에요.”
땀을 뻘뻘 흘리는 최팔봉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오르막 골목 끝, 그러니까 자그마한 야산 바로 아래 자리한 한옥이었다.
상당히 오래된 것 같지만 부지가 넓었다.
그곳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든 산하가 묻는다.
“와,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어요? 이게 매물로 나왔다고요?”
“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아무래도 유리 온실을 상가 건물 위에 추가 설치하시는 것보다는 이런 마당에서 해 보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첫번째로 보여 드리는 겁니다. 자택도 마련하시고 좋을 것 같아서요.”
“역시 우리 최팔봉 사장님. 제 마음을 이렇게 잘 아신다니까요. 안 그래도 옥상에 유리온실을 합법적으로 설치하는 건 어려워 보여서 고민 중이었거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내부 좀 둘러볼 수 있을까요?”
“그러시죠.”
이내 삐걱 소리가 나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선 산하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옥 마당의 대부분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고, 한쪽은 텃밭 농사를 지었던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 잘 가꿔온 듯한 정원수와 자그마한 연못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잘 어울려 더 마음에 들었던 산하는 건물 외부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좋다…….’
누가 채가기 전에 빚을 내서라도 계약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산하는 이제 막 건물 코너를 돌아서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물에 살짝 가려져 있던, 화덕으로 보이는 시설물에 빛이 어리고 있었다.
- 21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