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독일 사람도 반했다 (1)
보안 검색과 출국 검사 시 기자들로 인해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무사히 탑승 게이트로 이동한 산하와 상익은 공항 직원에게 보여 주기 위해 여권과 탑승권을 준비했다.
“형, 저 처음이라 떨려요.”
“상익아.”
“네?”
“나도 처음이야.”
상익의 눈동자가 두려움을 가득 담고 커졌다
“네!? 아니 그런데 이렇게 달랑 둘만 간다고요?”
그의 당황에도 산하는 유유자적 태연하기만 했다.
“뭐 어때서, 영어만 할 줄 알면 되지. 거기 가면 우리 미용협회장님이 붙여 준 현지 가이드가 다 안내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와…… 전 또, 다행이다. 그런데 형 영어 잘해요?”
“야, 이 자식이 날 또 모르네. 이 형이 학창 시절에 영어로 이름 좀 날렸잖냐.”
“진짜요?”
“그래, 영어 점수 하위권으로.”
“???”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그럭저럭해.”
“아…… 형도 참.”
설마 동시통역사, 그중에서도 상당히 유능한 자의 영어 실력을 산하가 가지고 있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익이 자신도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앞으로 나랑 여기저기 다니려면 영어 필요하지.”
“네, 형. 꼭 형처럼 그럭저럭하는 수준까지는 끌어올릴게요.”
“그……래?”
“네.”
그거 좀 어려울 텐데라고 생각하던 산하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응원했다.
“그래, 열심히 하자. 안 되는 게 뭐가 있겠냐? 상익이 화이팅!”
“화이팅!”
예전에 동태눈깔처럼 썩어 있던 그의 눈빛은 날이 갈수록 젊음의 패기를 내보이고 있었다. 생의 의지를 열심히 불태우고 있다고 해야 할까.
산하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상익의 등짝을 팡팡 두들겼다.
“아, 형 아파요.”
“봉만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상익이 먼저 직원에게 여권과 탑승권을 보여 주고 수속 절차를 마쳤다.
뒤이어 기계적으로 산하의 여권을 받아들던 직원이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작은 소리를 내질렀다.
“왜 그러세요?”
“하산해 씨 맞죠? 그렇죠?”
“네, 안녕하세요?”
“와, 저 진짜 팬이에요. 이번 콘서트 일 생기는 바람에 못 가서 무지무지 아쉬웠거든요.”
“저런, 다음에는 꼭 오실 수 있을 겁니다.”
사인이라도 받고 싶었던 직원이었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산하를 눈물 가득한 표정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 * *
인구 3백만이 넘는 독일 최대의 도시이자 수도인 베를린 국제공항에 13시간이 넘게 날아온 산하와 상익이 첫발을 내디뎠다.
그들은 마중 나온 사람이 어디 있는지 이리저리 살폈고, 저편에서 한국말로 쓰인 A4용지를 손에 들고 흔드는 사내를 발견했다.
<박산하 씨, 환영합니다.>
그는 재독교포 2세로 헤르만이라는 독일식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여타 재독교포 2, 3세가 자신을 독일 사람이라 인식하는 반면에 헤르만은 한국 사람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강했다.
그래서 헤르만이라는 이름은 그저 현지에서 자연스럽게 활동하기 위해 지은 것에 불과했고, 그가 주로 쓰는 이름은 한국식으로 지은 탁시훈이라고 했다.
시훈은 손에 든 사진과 입국하는 사람의 얼굴을 대조하다가 산하를 발견했다.
“여깁니다!”
유창한 한국어를 내뱉는 사내를 향해 트렁크 가방을 끌고 다가간 산하가 입을 열었다.
“탁시훈 씨?”
그는 자신의 이름이 또 다른 한국인에게 불리는 것이 왠지 모르게 기분 좋아서 환하게 웃었다.
“네, 제가 탁시훈입니다. 산하 씨는 실물이 더 멋지시네요. 노래 잘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쪽은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매니저 광상익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눈 탁시훈이 입을 열었다.
“두 분, 오느라 힘드셨죠?”
산하가 하하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자고 일어나 보니까 독일이던데요? 안에서 살짝 헤매긴 했습니다.”
이 사람 왠지 친근감 있다며 미소짓던 탁시훈이 한쪽을 가리켰다.
“가시죠. 오늘은 푹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를 따라 공항 밖으로 나선 산하는 곧 주차장에서 그가 끌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승합차 한 대를 볼 수 있었다.
겉에 한국어로 ‘탁 게스트하우스’라고 적혀 있는 걸 발견한 산하가 물었다.
“아, 게스트하우스 하시는군요?”
“어? 협회장님한테 못 들으셨어요? 1인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 지 꽤 됐습니다. 그분이랑은 예전 헤어 대회 때 인연이 돼서 서로 연락하고 지내는 거고요.”
이미용협회 관계자에게서 호텔을 따로 잡아 줄지, 아니면 가이드분이 운영하는 숙소에서 묵을지 하는 질문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구나. 여기 타면 될까요?”
“네, 안전벨트 꼭 매시고요.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이내 운전석에 올라탄 탁시훈은 산하와 상익을 자신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로 데려갔다.
바닥 면적은 그리 크지 않지만 깔끔해 보이는 3층 규모의 건물을 바라보던 산하가 운전석에서 내리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긴 한국인만 주로 받나요?”
“아니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한국인이 대부분이긴 하죠. 오늘은 손님도 없으니까 조용히 쉬실 수 있을 겁니다.”
사람 좋게 웃어 주던 그는 이내 건물 내부로 그들을 안내했고, 산하와 상익의 방을 소개해 주더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라고 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형, 우리 이제 뭐 해요?”
“뭐 하긴, 시간 아까우니까 관광 좀 해야지.”
“진짜요?”
“너 어째 신나 보인다?”
“아닙니다.”
“아니기는, 그러면 그렇다고 얘기를 하란 말이야.”
“그건 꼭 아니지만, 어디 가실 건데요?”
“글쎄, 여기 주인분이 알려 주시지 않을까?”
그의 말에 하하 웃던 상익이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듯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수첩이었다.
“그건 뭐냐?”
“제가 또 형 매니저 아니겠습니까? 혹시 이렇게 시간이 남을까 봐, 특별히 구경할 만한 곳을 알아 왔습니다. 아까 차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살펴봤는데, 마침 여기 숙소 근처에도 도보로 갈 만한 곳이 두 곳 정도 있어요.”
“이야, 우리 상익이 제대로네? 스마트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형, 원래 숙소가 여기예요?”
“아니, 호텔도 잡아 준다고는 했는데, 현지 분위기 좀 느끼고 싶어서 여기로 선택했어.”
“아, 하긴. 친근감 있긴 해요.”
“그렇지? 자자, 짐부터 들여놓고 나가자.”
“네, 형.”
짐을 대충 방구석에 던져 놓은 산하는 벌써 자신의 방에 짐을 가져다 두고 복도에서 서성이던 상익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탁시훈이 두 사람에게 눈인사했다.
“우리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전화기에 대고 독일어로 잠시만을 외친 그가 묻는다.
“두 분이서 괜찮으시겠어요? 어디 가시려고요? 식사는요?”
“딱히 배는 안 고프고, 그냥 근처 잠시만 둘러보려고요. 어차피 오후라서 멀리 가지도 못하니까요.”
“아, 그럼 혹시 제가 필요할 일이 생기시면 여기로 연락 주세요.”
이미 협회장으로부터 그의 연락처를 받아서 알고 있었지만, 산하는 명함을 품속에 갈무리하고 상익과 함께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리는 여기가 외국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왠지 들뜨는 느낌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산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익아, 어째 좀 덥다?”
“그러게요. 알아보니까 이 시간이면 춥다던데.”
베를린의 5월은 일교차가 커서 아침이나 밤은 상당히 춥다.
하지만 이상기후 때문인지 해가 질 무렵인데도 조금 덥다고 생각하던 산하는 상익이 말해 준 장소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독일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맥주라고 떠들던 상익은 한참 헤맨 끝에 그를 유명한 곳으로 데려갔다.
“오, 우리 상익이 처음 오는데도 길 잘 찾는데?”
“그런가요? 그래도 좀 많이 걸리긴 했네요.”
쑥스러워하며 뒤통수를 긁적이던 상익이 가게 외부를 두리번거렸다. 가게 내부에는 현지인을 비롯해 관광객까지 손님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왜 안 들어가?”
“그게…… 좀 두려운데요?”
“뭐가? 말 안 통할까 봐?”
“네.”
“자식, 뭘 그런 걸 걱정하고 그래. 말 안 통하면 바디랭귀지 하면 되지.”
“와…….”
상익은 새삼 산하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지난 콘서트에도 산하의 노래를 듣고 감탄하다 못해 존경이 한층 더해졌던 그의 눈빛은 이제 살짝 과장되게 말해서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사람 같았다.
“형, 대단하십니다.”
“대단은 무슨, 들어가자.”
그렇게 내부로 들어선 산하는 매대에서 종업원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그는 호언장담했던 대로 바디랭귀지를 선보였다.
손짓·발짓을 섞어 메뉴판을 가리키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기까지 하며 간신히 주문을 끝낸 산하는 신기해하는 상익을 데리고 가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았다.
“형 진짜 용감한 것 같아요. 그런데 뭐 주문하셨어요?”
“그냥 맛있어 보이는 거.”
“???”
잠시 후 그들의 앞에는 수제 맥주와 독일식 소시지가 놓였다.
“형 진짜 맛있어 보이네요. 주문 제대론데요?”
“그렇지? 역시 만국공통어라니까.”
하하 웃던 산하는 일단 맥주부터 한 모금 마시려다가 눈을 번쩍 떴다. 가게 안쪽 저 멀리에서 빛이 어리고 있었다.
다행으로 그쪽은 화장실 방향이기도 했기에 벌떡 일어선 산하는 상익에게 화장실 간다고 말해 놓고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형, 왜요? 어디 아프세요?”
“아냐.”
산하는 조금 전 보았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재능 수용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과거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여태 잊고 있었지만, 한계치를 초과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산하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해가 다 져서 아쉬운 거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상익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래요. 그래도 우리에겐 독일 수제 맥주가 있잖아요.”
“그래, 상익아. 이건 진짜 잘했다. 건배.”
“건배!”
다음에 다시 널 데리러 오겠다고 다짐한 산하가 맥주를 들이켠 후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 맛 죽인다.”
“와, 수제라 그런가, 맛이 다르긴 달라요.”
그렇게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며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 * *
독일 베를린의 행정구역은 12구 체제로 돌아가는데, 이 중 한 도시에서 펼쳐지는 헤어 페스티벌에 속한 대회는 권위 있으면서도 볼거리가 많기로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관광객도 제법 몰리는 편이었고, 베를린시에서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행사였다.
이 행사는 첫날 여러 형태의 가발을 쓰고 시가행진을 하는 것으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데, 산하는 그 축제 첫날 행사장에 도착해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굵은 철사를 이용해 높다랗게 감아올린 가발부터 불가사리 모양으로 사방을 향해 뻗친 가발까지, 실로 다양한 가발이 눈에 띄었다.
“와, 형 사진 찍어 드릴까요?”
“그래 줄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탁시훈이 제안했다.
“자자, 두 분 서 보세요. 제가 찍어 드릴게요.”
“시훈 씨, 감사합니다.”
“뭘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
행진을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은 산하는 잠시 후 아마추어 대회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로 이곳에 온 목적인, 점심 이후부터 열릴 예정인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첫날의 이 대회는 헤어 페스티벌의 여흥을 돋구기 위한 이벤트 성격이 강한 행사로 세계의 실력 있는 아마추어들이 참가해 실력을 뽐내는 자리였다.
이곳까지 그들을 책임지고 데려온 탁시훈이 본 행사장으로 산하와 상익을 안내했다.
“여깁니다.”
체육관을 바라보던 산하가 미소지었다.
“신경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회장 김부선에게서 언젠가 헤어계의 큰 별이 될 거라던 말을 전해 들은 그가 씩 웃으며 답했다.
“뭘요. 협회장님이 잘 부탁한다고 협박 단단히 하셨거든요.”
“협박이요?”
“그냥 말이 그런 거죠. 자자, 시간이 얼마 없네요. 가서 준비하셔야죠?”
이미 자잘한 절차는 탁시훈과 함께 처리한 상태였기에, 산하는 대회에 참가하기만 하면 되었다.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상익이 넌 시훈 씨랑 있어.”
“네, 형. 가방 이리 주세요. 응원 열심히 할게요.”
산하의 짐을 챙긴 상익이 탁시훈과 함께 관객석 쪽으로 사라지자, 산하는 대회장으로 들어섰다.
아마추어 대회는 딱 한 차례, 그리고 동시에 자유 헤어를 선보이는데.
여흥의 성격이 강하니만큼 준결승이니 우승이니 하는 절차가 없었다.
그저 헤어 솜씨를 관객에게 선보이고, 행진에서 극악의 확률로 빛을 보는 과정이 남을 뿐이었다.
이 사실을 대회 참가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산하는 신나게 헤어나 다듬고 관광을 즐기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경기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다양한 인종이 한데 모여 실력을 뽐내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그 순간 모델 입장을 알리는 버저 음과 함께 모델이 하나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이 대회는 참가자가 모델을 직접 데려오지 않고, 주최 측에서 제공했다.
그 모델을 마주하게 된 산하는 평범해 보이는 젊은 독일 여성과 인사하고 그녀의 머릿결 상태나 얼굴형에 맞는 헤어스타일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했다.
볼살이 조금 있으니까 블런트 컷, 괜찮겠는데?
어디 보자, 갸름하게 가리면…… 오케이. 블런트 컷.
산하는 모델의 헤어를 살펴보며 어떤 헤어스타일을 연출할지 결정짓고 난 후 헤어 대회 시작 버저음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직도 시간이 남아서 오민석의 가위만 만지작거리던 찰나, 그의 눈앞에 두 종류의 메시지가 떴다.
[문화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박산하의 헤어 솜씨가, 현재 가진 솜씨 대비 일시적으로 7% 상향됩니다.]
[남은 시간 20분]
[미션 - 헤어 대중상을 수상하라]
[보상 - 오민석의 헤어디자인 솜씨가 98%로 상향됩니다.]
- 22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