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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227화 (227/445)

227화 독일 사람도 반했다 (2)

이게 웬 횡재냐고 생각하던 산하는 제대로 된 실력을 내보이기 위해 모델의 머리칼에 집중했다.

그가 오늘 선보일 블런트 커트라는 것은 ‘클럽 커트’라고도 하는데, 층 없이 직선으로 커트하는 기법을 뜻했다.

이 안에는 스퀘어나 레이어, 원 랭스 등 여러 가지 기술이 있는데, 산하는 기존에 사용되는 것이 아닌 오민석 특유의 기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때, 산하는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 문화의 힘이 발휘되기 전에는 희미하게 느껴지던 오민석 특유의 헤어 기술이 선명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지금 당장이라도 가위를 움직이면 드러날 헤어 디자인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만 같아, 산하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조금 전 오민석의 헤어 솜씨 95%일 때와는 제법 큰 차이가 있었다.

한때 오민석이 홀로 갈고 닦았으나 대중에게 선보이지는 못했던 헤어 기법이 세상에 알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역시 능력이 상위를 향해 갈수록 1%의 차이에도 실력이 제법 달라진다는 걸 실감한 산하는 문화의 힘이 사라지기 전에 버저 음이 울리기를 바랐다.

만약 그 전에 울리지 않는다면 얼마 남지 않은 재능 포인트라도 사용해야 할 판이었다.

[18분 남았습니다.]

그때, 근처에서 그를 바라보던 호주 출신 여성이 살짝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이봐요.”

“네?”

“처음 참가하시나 봐요?”

“네, 처음이긴 합니다.”

산하가 헤어를 어떻게 손질할 것인지에 관해 집중하는 모습을 긴장한 것으로 오해한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긴장하지 마세요. 어차피 아마추어 대회잖아요. 그냥 대회 분위기가 이렇구나 정도만 느끼고 가면 성공인 거죠. 중요한 건 본 대회 실력자들 솜씨 관람이에요.”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저는 관광객으로 몇 번 온 적 있어서 본 대회도 봤는데, 그분들 실력은 정말 장난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혹시 혼자 오셨어요?”

“아니요. 혼자는 아니에요.”

“아쉽네요. 혼자 밥먹고 구경하기 그래서 말동무라도 구할까 했더니.”

“아, 그래요? 미안해서 어쩌죠?”

“아니에요. 이따가 본 대회에서 봐요. 거기서 정말 좋은 거 많이 배워 갈 수 있을 거예요.”

친절해 보이는 그녀에게 인사해 준 산하가 다시금 가위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눈앞의 메시지가 변했다.

[15분 남았습니다.]

아니, 이제 대회 시작할 때 됐잖아. 왜 시작을 안 해? 아깝게 재능 포인트 써야 하는 거야?

그는 이 대회에 긴장한 것 때문이 아니라 재능 포인트를 써야 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옆자리의 호주 여성은 그걸 또 오해한 모양이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요. 심호흡해요. 심호흡.”

오지랖이 상당한 호주 여성의 배려에 산하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네, 고마워요.”

그때 약간의 웅성거림이 생기더니 누군가가 정면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는 베를린 시장 바스티안으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선 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베를린 시장 바스티안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이곳 베를린을 찾아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중에는 헤어 디자인을 취미로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본업으로 삼기 위해 노력 중이신 분도 참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베를린 시장이 재미없는 말을 내뱉고 누군가가 그걸 통역하고 있을 무렵, 관람석으로 헐레벌떡 뛰쳐 들어온 한국 여성이 두 명 있었다.

“다행이다. 대회 시작 전인가 봐.”

“네, 좋으시겠어요. 한민정 씨. 이거 경로 이탈이에요. 독일을 먼저 오다니.”

“왜 그래, 친구야. 하산해 씨 얼굴만 딱 보고 가기로 했잖아.”

유럽 여행 중에 하산해의 헤어 대회 참가 소식을 전해 듣고 여행 경로를 변경한 하산해의 팬 한민정은 친구에게 아양을 떨었다.

그러자 혀를 찬 그녀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대신 오늘 밥 네가 다 쏘는 거 잊지 마.”

“그러기로 했잖아. 내가 진짜 푸짐하게 쏠게.”

“좋아. 그런데 하산해가 진짜 참가하긴 한 거야?”

“응, 팬 카페에서 들었으니까 거짓말은 아닐 거야. 알려 줄 거면 진작 알려 주지, 여행 중에 알려 줄 건 뭐야.”

“이제 그만 하산해는 버리고, 다른 중요한 것에 신경 쓰라는 의도 아닐까?”

“아니거든요? 아 맞다. 이럴 때가 아니지.”

유럽 여행을 오면서 그 무거운 DSLR을 챙겨온 사진 마니아 한민정은 가방을 열어 묵직한 카메라를 꺼냈다.

“너도 참 너다. 무겁지도 않아?”

“원래 예술의 길은 멀고 험한 거랬어.”

“누가?”

“몰라.”

“바보, 모르면서.”

“너 자꾸 그러면 이걸로 인생샷이랑 인생 영상 안 찍어준다?”

한민정의 친구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항복!”

킥킥 웃던 그녀는 망원렌즈를 장착한 후 대회장 참가자를 살펴보았고, 그중에서 검은 머리의 동양인을 중심으로 하산해를 찾아 보았다.

여기는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잠시 헤매던 그녀는 저 대회장 끄트머리에 자리한 하산해를 발견하고 감격에 차 말했다.

“저기 있다.”

그녀의 열정이 대단하다는 듯 한민정의 친구가 두 개의 엄지를 치켜올렸지만, 말은 따로 놀고 있었다.

“그 정성 나한테도 좀 쏟아 봐. 사진 이상하게 찍어 주기만 해 봐.”

“알았으니까 쉿! 집중할 시간이야.”

민정은 뷰파인더에 눈을 들이대고 산하의 전신을 꼼꼼히 살폈다.

“역시…… 하산해, 멋있어.”

신이라도 영접할 기세인 친구를 조금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단상 위에서 무언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 독일인 사내를 향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

‘뭐라는 거야.’

그 사내는 베를린 시장이었다.

시장 바스티안은 예고도 없이 나타나 격려의 말을 3분간이나 늘어놓았고, 산하는 초 단위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바스티안이 격려사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모두 아시다시피 매번 대회 때마다 대중상 수상자가 이 보잘것없는 시장의 헤어를 다듬는 것이 관례입니다. 아무쪼록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그런 실력자가 나오기를 고대하며…… 대회 시작을 선언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버저 음이 울리며 아마추어 참가자들이 헤어모델에게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시장 바스티안은 대회장을 떠나 버렸다.

그러자 산하는 모델에게 영어로 충고해 주었다.

“조금 빠르게 손질할 거예요. 별일 아니니까 놀라지 마세요.”

그녀는 산하의 말에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걱정 말아요.”

산하는 그녀의 말을 듣기 무섭게 오민석의 가위를 집어 들어 그 어떤 준비 동작도 없이 가위를 번개같이 놀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가 보았다면 가위를 마구잡이로 놀려 종이에 난도질하는 것만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에 놀란 모델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고, 이 동양인이 지금 자기 머리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속으로 외쳤다.

이건 빠른 게 아니라 미친놈처럼 막 자르는 것 같잖아.

알바비도 받을 겸, 헤어 디자인도 공짜로 해결할 겸 참가하긴 했지만, 헤어 페스티벌의 권위 때문에라도 이런 건 예상치 못한 그녀였다.

보통 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인데, 어디서 이런 이상한 사람이 참가한 거야?

눈을 또르륵 굴린 그녀는 다른 모델과 참가자를 바라보았다. 다들 안정적인 모습으로 신중하게 자르고 있질 않나?

한데, 이 동양인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이미 머리칼은 뭉텅이로 잘려나가 바닥에 떨어진 참인 데다, 함부로 행동하면 다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녀는 이곳을 지나치는 헤어 페스티벌 스태프에게 눈빛을 발사했다.

이봐요, 내 뒤에 미친 인간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죠? 빨리 좀 말려 봐요.

그 눈빛을 캐치라도 한 건지, 스태프 한 명이 발걸음을 빠르게 놀려 다가왔다.

그녀가 그 스태프에게 고자질이라도 하려던 순간이었다. 그 스태프는 제지는커녕 손으로 입을 반쯤 가리며 감탄사를 토해냈다.

그의 반응에 의아해진 모델 여성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의아해했다. 감탄사를 왜 터뜨리지? 아무리 느껴 봐도 마구잡이로 자르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 감탄은 스태프 한 명에 한정하지 않았다. 산하의 바로 옆자리에 있던 호주 여성이 ‘오 마이 갓’을 연발하는 중이었다.

이 동양 남자, 뭐야. 대체 저 손놀림 어떻게 하는 거지? 그냥 대충 자르는 것 같지만, 그게 아냐. 가위가 지나갈 때마다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해.

말도 안 돼.

본 대회에서도 못 본 솜씨인데. 저 정도 실력자가 아마추어라고? 왜 본 대회가 아니라 여기에 있지?

그 순간 산하에게 말을 걸어 충고 아닌 충고를 해 주었던 기억을 떠올린 그녀의 얼굴은 삽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파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의 관객 시선이 점점 산하에게로, 정확히는 산하의 손놀림과 완성되어 가는 모델의 헤어 디자인에 쏠리고 있었다.

그건 한국 관광객이자 하산해의 팬인 한민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새 DSLR을 동영상 모드로 변경하고 산하를 줌인해서 넋 놓고 촬영 중이었다.

예사롭지 않다 못해 신들린 듯한 산하의 손놀림은 그저 예술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어서였다.

“야, 한민정, 하산해 본 직업이 원래 미용사야? 장난 아닌데?”

“아니…… 아닌가? 나도 몰라.”

“찐팬이라더니, 순 뻥이네.”

“뭐래, 조용히 해 봐.”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속으로 진땀을 흘리며 헤어 디자인에 몰입한 산하는 마지막 컷을 하고 가위를 내려놓았다.

[10초 남았습니다.]

휴, 다행이다. 아슬아슬했어.

이마에 살짝 흘러내린 땀방울을 닦아 내던 산하는 어느새 자신에게로 잔뜩 모여든 시선에 살짝 당황했다.

그 시선에는 이 대회를 관람하며 하품만 하다가 흥미로워하며 다가온 독일 기자도 몇 명 있었다.

다들 놀라워하는 눈빛으로 산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아마추어 대회 참가자 일부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경기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100%를 살짝 넘겨 버린 오민석의 헤어 솜씨는 그만큼 대단했다.

솜씨 발휘가 너무 과했나 생각해 보던 산하는 그저 미소를 지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 되자 궁금증이 치밀어오른 헤어 모델은 작은 손거울을 살며시 꺼내 자신의 헤어를 살펴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곳에 얼굴도 갸름하고 귀태가 줄줄 흐르는 여성이 거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넌 누구니?

* * *

하산해 팬 카페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닉네임 ‘민정해’라는 팬이 올린 게시글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하산해, 독일 헤어 페스티벌에서 미쳤어요.>

- 우리 하산해님이 왜 미쳐요?

- 민정해님 유럽 여행 가신다더니, 독일이세요?

- 하산해님이 독일에?

- 엥? 하산해님 독일 가신다는 말 듣긴 했는데, 왜 가신 거래요?

- 이분들 저번에 올라온 게시글 못 보셨어요? 하산해님 독일 헤어 페스티벌 참가하러 가신 거래요.

- 여러분 지금 댓글 달 때가 아니에요. 하산해님 진짜 미쳤는데요?

- 와, 죽인다. 빨리들 보세요.

- 우앙, 진짜 미쳤다. 저 손놀림 뭐예요?

그 시각 산하는 들러붙는 독일 기자들과 잠깐의 인터뷰를 하고 그곳을 탈출했다. 가방을 들고 얼른 곁에 들러붙은 매니저 광상익이 놀란 눈빛으로 말했다.

“형, 형 대체 뭐예요? 본업이 헤어 디자이너였어요? 그런데 왜 아마추어 대회에……?”

“그런 거 아니야.”

그때, 더 놀라자빠질 듯한 표정으로 다가온 게스트하우스 주인 탁시훈이 다급히 질문부터 던졌다.

“산하 씨, 대체 그 실력은 뭡니까? 그거 아마추어 솜씨 아니잖아요.”

“아마추어 맞아요. 자자, 그만들 하고 돌아갑시다.”

차에 올라타고서도 백미러를 통해 산하를 신기한 동물 바라보듯 하던 탁시훈이 운전대를 움직였다.

한참 후, 대회장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자신의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온 그가 물었다.

“진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신 거예요?”

“네.”

“와, 그럼 천재네요. 노래도 엄청 잘하시는데, 헤어는 신의 경지던대요?”

“그럴 리가요. 본 대회 참가자분들이 보면 비웃습니다.”

“비웃겠죠. 그런 엄청난 실력인 사람을 아마추어 대회 참가시킨 관계자들을요.”

산하는 당사자보다 더 흥분한 탁시훈을 보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그런데 오늘은 손님이 제법 있다고 하셨죠?”

“네? 네. 아무래도 헤어 페스티벌 주변 숙박 업소부터 채워지니까요. 이제 그쪽 다 차서 이쪽까지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혹시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조금 더 조용한…….”

“에이, 아니에요. 게스트하우스는 처음이라 여행자들이랑 함께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산하 씨, 연예인인데 연예인 같지 않은 게 좋다니까요.”

“네?”

“그냥 산하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요. 자, 내리시죠. 전 장 보러 가야 해서. 오늘 산하 씨 대회 박살 기념으로 한식 쏩니다.”

그러자 아까부터 산하를 향한 존경이 더욱 깊어진 눈빛의 광상익이 입을 열었다.

“오, 한식이라면 또 우리 형이 잘하죠.”

“그래요? 산하 씨 요리도 잘하세요?”

“네, 그냥 조그만 식당 운영하느라 요리를 자주 합니다.”

딱히 연예인에게 관심이 없어 그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지도 않았던 탁시훈은 이 사람 대체 직업이 몇 개냐고 생각하며 감탄사를 흘렸다.

“와, 그러시구나.”

그 순간 산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 여행자들에게 단 하루도 잊을 수 없는 맛을 선사하자]

[보상 - 편세환의 제빵 솜씨 87%로 상향]

- 22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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