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독일 사람도 반했다 (3)
근래에 미션이 자주 나온다고 생각하던 산하가 속으로 흐뭇하게 웃던 찰나였다. 광상익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이, 형 조그만 식당이라니요. 없어서 못 먹는 맛집이잖아요. 먹으려면 꼬박 열 시간 넘게 줄 서야 하는데…….”
그 사실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진 탁시훈이 물었다.
“정말이세요? 열 시간이나요?”
“말이 열 시간이지, 그보다 더 길 때도 많아요. 손님 줄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손님들은 산요권이라고 부르면서 이사 오려고 벼를 정도라니까요.”
“산요권은 뭐죠?”
“산하네 요리 전문점이 가까운 권역이요.”
뭔가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었지만, 탁시운도 일단 맞장구는 쳐 주었다.
“……와. 진짜요? 대단하시네.”
그래도 이 정도로 과장되게 말할 정도면 맛은 있겠다고 생각하던 탁시훈이 산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거면 안 먹어 볼 수가 없는데, 저기 산하 씨…….”
은근히 요리를 원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산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요리는 제가 담당할까요?”
“그래 주시겠어요? 재료비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찬성입니다.”
기대감이 어린 눈빛의 탁시훈과 입맛을 다시는 광상익을 보며 속으로 웃던 산하가 제안했다.
“그럼 장부터 보러 가시죠?”
그러자 고개를 흔드는 탁시훈.
“아닙니다. 재료 목록만 불러주시면 없는 것 빼고는 싹 다 공수해 올게요.”
“이게, 요리는 재료부터 중요하잖아요. 요리 재료는 직접 골라야 직성이 풀려서요.”
“아, 역시 맛집 사장님은 다르시구나. 그럼 같이 가시죠. 출발하겠습니다.”
한참 후.
게스트하우스 휴게실의 커다란 테이블로 손님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탁시훈은 모두에게 말했다.
“자자, 아까도 들으셨겠지만 여기 이분이 한국 전통 요리를 해 주실 겁니다. 입맛에 안 맞을 것 같으신 분은 따로 사 드시거나 만들어 드셔도 무방합니다.”
“전 먹을게요.”
“한국 음식이라고 했죠?”
“기대할게요.”
“산하 씨, 기대할게요.”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맛보고 영 아니면 나가서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응원하는 사람 등등등.
다른 투숙객은 한국인이 일곱, 미국인 한 명, 캐나다인 한 명, 독일 뮌헨 출신 한 명으로, 산하 일행과 이곳 주인을 제외하면 여행자들은 총 열 명이었다.
이 중에서 산하를 아는 사람은 한국인뿐이었는데, 두 명은 하산해가 가수라는 걸 알았고, 그의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사람이 두 명이었으며, 나머지 세 명은 산하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독일에 오니 자신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홀가분했던 산하는 요리 재료를 먼저 살펴보았다.
그러자 언젠가 한국 여행을 다녀온 적 있는 독일 남성이 영어로 물었다.
“한식 중에 어떤 걸 만드시는 건가요?”
“된장찌개요.”
“……된장찌개요?”
한국 여행 중에 냄새를 맡고 한동안 식욕이 사라졌던 기억을 떠올린 독일인이 티 안 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캐나다인 여성이 입을 열었다.
“된장찌개가 뭐죠?”
된장찌개 자부심이 대단한 산하가 입을 열었다.
“콩을 삶고 발효한 재료로 만드는 음식인데, 한국 가정에서 즐겨 먹는 요리예요.”
“아하!”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요리를 맛볼 생각에 들뜬 그녀가 재료들을 신기한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그동안 미국인 남성은 어딘가 과묵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고,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산하를 잘 아는 한국 여성이 입을 열었다.
“우와, 직접 해 주신다니까 기대돼요. 뭐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저도 요리는 괜찮게 해요.”
“어…… 그러면 여기 이것 좀 다듬어 주실래요? 전 빵 반죽을 해야 해서요.”
그때, 한 한국 남성이 한 손을 번쩍 들었다.
“빵은 제가 구울까요? 저도 베이킹 몇 번 해 봤거든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제 특유의 빵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함께 맛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게스트하우스 여행자들은 절반 정도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또 반 정도는 시큰둥한 표정을 한 채로 기다렸고 점점 시간이 흘러갔다.
빵 반죽이 발효되는 동안 산하는 한국인 두 명이 나서서 다듬어 준 재료로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재료 중의 키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된장은 조금 아쉽지만 탁시훈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더 흘렀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냄새가 솔솔 퍼져 나갔고, 한국에서 맡았던 것보다는 괜찮지만 거부감이 드는 그 냄새에 독일인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늘 냄새만 나도 사과해야 하는 독일인의 특성상 이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으나, 이곳이 여행자들의 숙소라는 걸 상기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행자 문화를 즐기는 그이기에, 이것도 독특한 문화 체험이 될 거라고 억지로 자신을 세뇌하면서.
그때까지도 과묵한 미국인은 여전히 근육을 자랑하며 팔짱을 끼고 앉아 있기만 했다. 대체 저 여행자는 뭐냐고 생각하던 게스트하우스 주인 탁시훈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여행은 어떠셨어요?”
“그냥 그랬습니다.”
“어디 어디 다녀오셨는데요?”
“그냥 뭐…… 여기저기 다녀왔어요.”
답변에 성의도 없고 괜스레 무게만 잡고 앉아 있는 미국인을 바라보던 탁시훈은 속으로 그에게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냥맨’이라고.
그냥맨, 그럴 거면 그냥 호텔에나 가지 여긴 왜 오신 거죠?
주먹이 운다. 그냥맨.
속으로 장난스레 말하던 탁시훈은 어느새 다가온 산하가 탁자 중앙에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를 내려놓자 환하게 웃었다.
“오, 이게 그 맛집 된장찌개군요.”
“원래 쓰던 재료가 아니라서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을 겁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요. 요리 진짜 감사합니다. 설거지랑 뒤처리는 우리가 다 할게요. 그렇죠, 여러분?”
“맞습니다. 그나저나 독일에서 된장찌개를 먹을 줄은 몰랐는데요? 안 그래도 양식만 먹어서 느끼하던 참이었는데 잘됐어요.”
이내 고슬고슬한 밥이 각자의 앞에 놓였고, 한국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냄새 때문에 된장찌개를 본체만체 밥만 깨작거리는 중이었다.
그러자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말했다.
“자, 다 같이 드시죠.”
다들 된장찌개를 바라보기만 하자 멋쩍은 듯 하하 웃던 탁시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일등으로 먹어 볼게요. 잘 먹겠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 끓여 주시던 맛 정도일까, 아니면 정말 맛집이라서 대단한 맛일까 생각해 보던 그는 된장찌개를 덜어 한 숟가락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맛 감지 세포 덩어리인 미뢰가 산하의 된장찌개를 감지했다.
왓!? 이게 대체 뭐지?
너 지금 뭘 먹은 거야?
오오, 행복해. 좋아. 멋져. 죽인다. 훌륭해.
혀에서 느껴지는 대단한 맛에 놀란 탁시훈은 생각했다.
된장찌개가 이런 맛이라고?
뭐? 재료 때문에 맛이 부족할 거라고?
이 사람이 정말. 이게 어딜 봐서 부족한 맛이야?
이렇게 맛난 음식이 세상에 존재했어?
그 후 탁시훈은 누가 보거나 말거나, 그릇을 통째로 기울여 된장찌개를 들이마시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탁시훈을 바라보던 게스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있나요?”
“어때요?”
탁시훈은 말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엄지만 치켜들어 보인 후 된장찌개를 또 덜었다.
그걸 지켜보던 한국인은 너나 할 것 없이 된장찌개를 덜어서 맛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감탄사.
“와…….”
“이게…… 뭐죠?”
“미쳤다…….”
“된장찌개 맞아요?”
“굿!”
그 모습을 왠지 자랑스럽게 바라보던 광상익도 얼른 그릇에 된장찌개를 덜어서 먹었다.
‘바로 이 맛이야.’
한국인들의 유별난 태도에 의아해하던 미국, 캐나다, 독일인이 냄새 때문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여전히 된장찌개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때였다.
게스트하우스에 새롭게 들어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탁시훈의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사는 독일인 친구로 여행자들과 술도 한잔하며 즐기러 온 참이었다.
“여어, 탁.”
“…….”
“탁? 나야. 나. 내가 왔다고.”
“어? 어…….”
왠지 성의 없어 보이는 친구의 태도에 의아해하던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또 된장찌개 끓였어? 난 안 먹으니까 먹일 생각 하지 마.”
“너 줄 거 없을 거 같으니까 걱정 마.”
“응?”
평소라면 된장찌개 딱 한 번만 먹어 보라며 끈질기게 따라다녔을 친구가 이상한 소리를 하자 그는 오기가 발동했다.
“뭐? 나 줄 게 없다고?”
“…….”
된장찌개를 덜어 먹느라 정신없는 친구를 바라보던 그는 그 주변의 동양인들도 눈 돌아간 표정으로 먹는 걸 확인하고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 외의 게스트들은 영 표정이 안 좋은데, 마치 나 같군.
그나저나 저놈 이상한데?
자신의 친구 탁시훈이 가끔 된장찌개를 만들어 먹긴 했지만, 저토록 미친 듯이 먹지는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함정 아니야?
그럼 그렇지.
뭔가를 알겠다는 듯 씩 웃은 탁시훈의 친구가 말했다.
“친구, 난 다 눈치챘다고. 그래 봐야 안 먹어. 쇼 그만해. 티 다 나잖아.”
“…….”
이 정도면 쇼는 끝나야 하지만 탁시훈은 조금 전보다 더 게걸스럽게 식사 중이었다.
“……뭐지?”
이쯤 되자 너무 궁금해진 그는 에라 모르겠다며 숟가락과 그릇을 가져와 된장찌개를 조금 덜었다.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호기심이 그 두려움을 이겨 버렸다.
어차피 강제로 몇 번 먹어 본 바 있어서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된장찌개를 떠서 입안에 집어넣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못해 땡그랗게 뜨더니 국자를 잽싸게 잡아챘다.
그러나 손 하나가 더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은 탁시훈이었다.
“내가 먼저 잡았어.”
“아냐, 내가 먼저야.”
상황이 이쯤 되자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된 캐나다인이 주방에서 국자 하나를 더 가져와서 그릇에 덜었다.
그리고 냄새가 별로여서 코를 찡긋거렸지만, 조심스레 맛을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오 마이 갓!”
그 후의 모습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자 된장찌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던 독일인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고, 괴성을 지르더니 산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게 정말 한국의 된장찌개 맞나요?”
“네, 맞아요.”
이제 남은 사람은 과묵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미국인뿐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거 몰래카메라 아닌가 생각 중이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주도한 거야? 저런 이상한 음식을 만들어서 먹으라고 하다니. 아우, 냄새. 여기 이 인간들 다 연기 중인 거 아냐?
허 참, 어이가 없어서.
근육을 불끈거리던 그는 된장찌개라는 정체불명의 음식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국자로 바닥을 긁어먹어야 할 지경이 되자 다급해진 그는 냄비를 통째로 가져갔다.
“이건 내 몫입니다. 인정하죠?”
못내 아쉬운 표정과 황당한 눈빛으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터프하게 냄비를 통째로 기울여 들이마셨다.
꿀꺽.
꿀꺽꿀꺽.
목울대는 잠깐 천천히 움직이다가 급하게 움직였고, 몇 초 만에 미국인 터프가이는 황홀한 표정으로 냄비를 내려놓으며 외쳤다.
“오우, 지져스. 된장찌개 아러뷰.”
그 말을 마치고 입가를 슥 닦은 그는 손등에 묻은 된장찌개도 아까웠는지 얼른 핥아먹었다.
그러자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그의 행동과 말투에 여행자들은 빵 터져서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즐거워하던 게스트하우스 여행자들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고 하나둘, 빵 반죽이 발효 중인 전자레인지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산하가 발효를 빨리하기 위해 물을 데우고 빵 반죽을 넣어 놓은 바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산하에게로 향했다.
그중에 과묵한 척 센 척은 다 하던 미국인이 돌변한 모습으로 질문을 던졌다.
“산하라고 했죠? 당신 미슐랭에 이름 올린 요리사인가요? 댄장찌괴? 딘장찌래? 아무튼 이 요리 냄새랑은 다르게 너무 맛있어요.”
어깨를 으쓱한 산하가 답했다.
“미슐랭은 아니고, 그냥 한국에서 식당 운영하는 요리사예요.”
“왓!? 당신 같은 실력자를 미슐랭이 가만히 놔뒀다는 겁니까?”
“…….”
한참 후, 된장찌개 환상 파티가 열린 지도 시간이 꽤 지났지만 여행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오븐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이유는 바로 빵이었다.
어느새 산하의 요리 덕분에 친해진 그들은 노릇노릇 구워지는 빵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저것도 맛있겠죠?”
“그럼요. 된장찌개 만드신 분이 만드셨는데.”
“너 집에 안 가냐?”
“안 가. 아니 못가. 나 오늘 여기서 다 먹고 간다.”
“…….”
탁시훈은 된장찌개 극혐론자였던 친구마저 변화시킨 된장찌개 맛을 떠올리며 군침을 삼키다가 그가 사라진 계단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이미용협회장 부갑선이 산하를 한국의 헤어 업계를 이끌어갈 인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과장된 표현이려니 했었던 그는 그녀의 평가가 잘못됐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협회장님, 산하 씨 헤어 솜씨가 엄청나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요리로 세계를 주름잡을 사람 같은데요?
그때 띵 소리와 함께 오븐 타이머가 종료되었다.
그러자 여행자들은 이 요리를 만든 주인공을 향해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쳤다.
“산하 씨! 다 됐어요!”
“빨리요!”
“다 구워진 것 같아요.”
짐 정리를 하던 산하는 그들의 다급한 외침에 피식 웃고는 아래로 내려가서 빵을 꺼냈다.
그 후 그들에게 제공된 빵은 순식간에 각자의 위장으로 사라졌다. 된장찌개뿐만 아니라 빵도 상상 이상으로 맛있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산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을 듣고 입을 쩍 벌렸다.
“역시 화덕에 안 구우니까 맛이 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 캐나다인이 묻는다.
“산하 씨가 뭐라고 하신 거죠?”
그러자 한 한국인 게스트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게…… 화덕에 안 구워서 맛이 부족하다고 하신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그 순간 산하의 눈앞에 미션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 ‘여행자들에게 단 하루도 잊을 수 없는 맛을 선사하자’가 완료되었습니다.]
[편세환의 제빵 솜씨가 87%로 상향되었습니다.]
* * *
헤어 페스티벌 본 대회는 각국의 실력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각 나라의 스타들 헤어를 손질해 주기도 하는 등 자신의 나라에서는 꽤 대접받던 그들도 이곳에 오면 깨갱 소리를 내야 할 만큼 수준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런 곳에서 우승자가 탄생했고, 전년도 우승자에게서 왕관을 건네받은 수상자가 속으로 크게 웃었다.
좋았어.
이제 대중상 타고 집에 가면 되겠어.
부모님도 좋아하시겠지?
결국 한국인 중엔 순위권에 든 사람이 없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부갑선은 아쉬운 한숨을 토해냈다.
다음 날, 산하는 자신이 헤어 디자인을 해 주었던 모델 옆에 정장을 입고 나란히 서 있었다.
이 행사는 헤어 대회에 참가했던 아마추어뿐만 아니라 본 대회 수상자 및 참가자들이 모조리 참여하는데, 대중에게 헤어 디자인을 자랑하고 선보이는 자리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 행사가 대중상을 위한 점수를 매기는 자리라는 사실이었다.
대중상은 말 그대로 축제 이전에 투표 참가 자격을 무작위로 획득한 일반인과 본 대회 점수를 매긴 전문가가 절반의 비율로 투표하는 상이었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선택받았다는 의미에서 본 대회 최고상보다 더 높게 치는 사람도 있다는 걸 고려하면, 우습게 볼 상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헤어 페스티벌 참가자가 제일 받고 싶어 하는 상 중의 하나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 헤어 대회 대중상 수상자는 늘 본대회 수상자 중에서 뽑히는 일이 구십구 퍼센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마추어 대회 참가자 중에서는 대중상을 수상한 자가 여태 단 한 명도 없었고, 일반인 심사위원도 본 대회 수상자 중 누구의 헤어 디자인이 뽑힐까 생각할 뿐이었다.
그때, 행진이 시작되었다.
체육관 입구에서 모델과 헤어 디자이너가 양탄자가 깔린 곳을 밟고 걸어 나오며 좌우 관람객에게 손을 흔들었다.
“역시, 본대회 우승자답네.”
“오, 멋지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모델과 그녀의 곁에서 함께 걷는 헤어 디자이너의 모습은 마치 영화제 시상식처럼 볼 만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인종과 헤어 디자인이 어우러지는 이 행사에는 기자들이나 방송국 카메라도 빠지지 않았으며, 플래시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그렇게 이번 헤어 대회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헤어 행진이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아마추어 참가자 대열에서 대기 중이던 산하는 앞쪽 참가자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모델과 함께 체육관 입구를 벗어났다.
- 22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