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완벽해! (2)
오! 이렇게 많이 단축됐다고? 한 번에 1일이나 하루에 1일 단축되는 줄 알았더니. 박윤땡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나?
잠깐만, 그럼 이걸 목표 일자까지 계속 써야 한다는 거야?
그 순간, 산하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찾은 건 좋은데.
방법이 너무 하잖아.
일기를 써야 한다고?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왜 이걸 보고 연결고리 생성일이 단축되는 건데?
여기에 담긴 능력 소유주 일기 천재라도 되는 거야? 아니면 관음증이라도 있는 거야?
아, 생각만 해도 괴롭다.
매일 일기를 써야 한다니.
아니지, 빨리 얻으려면 하루에도 여러 개 써야 할 텐데. 가만, 여러 개 쓰는 것도 적용되긴 하는 건가.
미치겠네. 왜 하필 일기냐고. 노래도 있고, 알 품듯이 품는 것도 있고 할 거 많잖아.
왜 하필 일기냐고.
한참이나 불만을 토해보던 산하는 두 손을 들어 항복을 외치고는 일기를 하나 더 쓰기로 했다.
실험도 할 겸, 하루빨리 이 미션을 해치우고 능력을 얻겠다는 불굴의 의지였다.
그리고 그를 응원이라도 해 주려는 듯, 또 한 번 연결고리 생성일이 단축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좋아. 오늘부터 하루 다섯 편씩, 오특훈에 들어간다.”
특별 훈련하는 심정으로 하루에 다섯 개의 일기를 쓰기로 작정한 산하는 책을 노려보았다.
이상한 거 나오기만 해 봐라.
* * *
베를린의 영향력 있는 주간 잡지 viel은 독일어로 ‘많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잡지사에 근무 중인 엠마는 이제 막 출간된 잡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여러 가지 정보를 담고 있는 그 잡지 표지에는 헤어 페스티벌 특집으로 산하와 베를린 시장 바스티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헤어를 다듬는 산하의 모습을 적절한 셔터 속도를 이용해 잘 표현한 사진이었다.
지금도 그날 목격했던 그의 손놀림을 잊을 수 없었던 엠마는 곁에 있던 동료에게 말했다.
“어때요? 잘 나왔죠?”
“아까 나도 봤어요. 이 남자가 그 사람인 거죠?”
“맞아요. 대중상 수상자. 제법 핸섬하게 생겼죠? 애인은 있나 몰라요.”
“왜요? 없으면 낚아채게요?”
“뭐, 봐서요.”
“엠마, 설마 여기에 사심이 듬뿍 담긴 건 아니죠?”
“그런 것도 조금 있을지 몰라요.”
“세상에, 편집장님한테 다 이를 거예요.”
그녀가 과장된 표정으로 고자질하겠다고 하자, 엠마도 그 장난에 동조했다.
“용서해 주세요.”
그녀가 두 손 모아 빌자, 직장동료가 근엄한 표정으로 볼펜을 들더니 그녀의 머리를 두드렸다.
“너를 죄를 사하노라.”
직장 동료가 마치 중세시대 기사를 서임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말하자 엠마가 호호 웃더니 묻는다.
“그나저나 이 남자가 다시 독일에 오긴 할까요?”
“글쎄요. 그러지 말고 엠마가 찾아가지 그래요? 취재도 한 번 더 할 겸, 잡지도 줄 겸 찾아 왔다고 핑계 대기 딱 좋네요.”
“고작 그거 때문에 독일에서 열 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날아왔다고 하라고요?”
“어때서요?”
“음…… 좋은 생각이에요. 일단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데, 그럴듯한 핑계 고민 좀 해 봐야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상부에서 허락을 받지 못했고, 울상이 되어 돌아왔다.
“뭐래요?”
“핑계가 조금 약했나 봐요. 별수 없죠. 오늘의 로맨스는 여기까지.”
“역시 엠마, 포기가 빨라서 멋져요.”
“뭐라고요? 나빠요. 아무튼 이 잡지라도 보내 줘야겠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취재 당시 산하로부터 받아 놓은 한국의 주소지로 잡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 잡지 내용은 독일에 거주 중이던 한국 기자가 먼저 캐치해서 에세이 형식의 기사를 작성 중이었다.
<……viel 표지로 선정된 하산해는 이곳 현지의 헤어를 사랑하는 독일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헤어 페스티벌 당시 그의 현란한 손놀림과 멋진 헤어 디자인에 사로잡힌 한 디자이너는 그의 밑에서 헤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viel의 표지로까지 선정된 것이 유럽 전체에 한류를 펼쳐내는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약 그것이 실현된다면 하산해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생각……>
아직 헤어 페스티벌 수상의 감동이 일반인의 뇌리에서 잊히기도 전에 이 뉴스 기사는 인터넷을 타고 한국 대형 포털에 등장했다.
- viel? 유명한 잡지인가요?
- 저 독일 유학생인데, 독일 사람 열 명 중에 네 명은 알아요. 되게 유명한 잡지예요. 저렇게 표지로 실리기가 쉽지 않은데. 최고상은 프랑스 사람이었잖아요. 그런데 하산해가 실리다니.
- 대중상을 더 높게 쳐 준다더니, 그 말 맞나 보네요.
- 사진 죽이네요. 겁나 잘 찍었네.
- 그런데 이 기자 너무 과장되게 기사 써놓은 거 아니에요? 그냥 독일에서 헤어 상 좀 탔는데, 너무 오바하는 것 같음. 유럽이 어쩌고 저쩌고.
- 뭐, 상상이나 했나요. 하산해가 독일에서 뜬금포로 상 타올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 가능한 방법 있습니다. 메이저 리그에 가서 이름을 떨어 울리는 거죠. 165km/h 가즈아!
- 정신 차려요. 헤어 기사에 메이저가 왜 나옴.
- 자꾸 이런 기사 나오니까 하산해 씨한테 헤어 맡겨 보고 싶네요.
- 저도 그래요.
그 시각, 대청에 자리한 산하는 볼펜으로 열심히 일기를 쓰고 있었다. 편하게 쓰려고 노트북을 가져다 타자를 쳤더니 아무 효과가 없어서였다.
오로지 육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가야만 효과가 있는 것에 분개하던 산하가 옆에 놔둔 책을 째려봤다.
아니,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일기를 이렇게 수기로 적어요?
우리 합의합시다.
우리 장순희 여사님이 늘 그러셨거든요. 합의하면 모든 게 평화롭다.
어떻게 생각해요?
하지만 책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산하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다시금 일기 쓰기에 집중했다.
그때, 소리 하나 없이 윤새봄이 등장했다.
“산하 씨, 거기서 뭐 해요?”
화들짝 놀란 산하는 얼른 쓰고 있던 일기를 후다닥 등 뒤에 감추며 하하 웃었다.
“어? 우리 봄이 왔어? 아버지 심부름 간다고 하지 않았어?”
대청에 앉아 있는 산하를 빤히 바라보던 새봄이 입을 열었다.
“어…… 아까 산하 씨 여기 있다고 해서 심부름 마치고 잠깐 들렀는데, 거기 뒤에 감춘 거 뭐예요?”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뭔데요? 수상해.”
“수상하기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쓸데없는 그런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러니까 더 보고 싶잖아요.”
사적인 생각이 드러날 위기에 놓인 산하가 하하 웃으며 말을 돌렸다.
“빵 구워 줄까? 마침 냉장고에 반죽도 있는데.”
“빵 좋죠. 그것도 보여 줘요.”
“윤새봄 사원, 이 세상은 정말 냉엄해.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싫어요. 오늘은 두 개 다 가질래요……라고 말할 줄 알았죠? 알았어요. 별로 안 궁금해할게요.”
배시시 웃은 새봄이 신발을 벗고 올라와 대청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오늘도 우리 집은 이쁘네요. 그런데 산하 씨.”
“응?”
“나 빵 먹고 싶어요.”
“오케이, 잠깐만 기다려.”
일기장을 돌돌 말아 손에 쥔 산하는 얼른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궁금증이 차오른 새봄은 그게 뭘까 고민하다가 늘 하던 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쓰레기통을 비우려던 찰나, 구겨진 종이 더미를 발견했다.
‘이게 다 뭐야?’
종이 하나를 펼쳐서 읽어 보던 그녀는 일기인지 지인 감상문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어쩜, 우리 산하 씨 귀여워.
나 일기 쓴다니까 따라 쓴 건가 봐.
내용도 재밌고 특이해.
그 후 쓰레기통에서 구겨진 종이를 다 꺼내서 펼쳐 본 새봄이 내용을 살폈다.
만두 오빠 것도 있고, 나세 언니랑 린다 것도 있고, 어? 내 것도 있네?
어디.
그녀는 산하의 속내를 알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방긋 웃었다.
이럴 줄 알았어. 여기에도 이러고 있네. 그런데 결혼……?
산하 씨, 요즘 이런 거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거 기념으로 슬쩍 해야겠다.
종이를 곱게 잘 펴서 접은 후 핸드백에 잘 보관한 새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청소를 계속했다.
물론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즈음, 빵 상태를 살피던 산하는 벼락 치듯이 떠오르는 쓰레기통 안의 일기를 떠올리고 황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중에 화덕에 집어넣어 태우려고 미뤄 놨던 버려진 일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어디 갔어? 버렸나? 그래, 그냥 버렸겠지? 설마 못 봤을 거야. 곱게 자란 우리 봄이가 쓰레기통을 뒤졌을 리가 있나.
당연하지.
그렇고말고.
그때, 걸레를 빨아 온 새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하 씨, 빵 다 구워졌어요?”
“어? 아니. 아직 예열 중이야. 빨리 먹고 싶어?”
“네! 빵 너무 맛있어요. 우리 다음에 디저트로 손님들한테 한 조각씩 줘 볼까요?”
“그럼 엄청 많이…….”
산하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 빵을 구워서 식당 손님에게 서비스로 제공하자.]
[보상 - 편세환의 제빵 솜씨 90%로 상향]
“엄청 뭐요?”
“엄청 많이 구워서 대접해 봐야겠다고. 우리 봄이 굿 아이디어!”
“진짜요? 그냥 말해 본 건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조용히 말했다.
“저기…….”
그는 이웃집에 사는 전상필이었다.
“어? 아저씨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응, 오늘 선물 들어온 게 있는데, 우린 안 먹는 거라서 좀 주려고 왔지. 들어가도 될까?”
어딘가 어색한 그의 웃음을 보면서 산하는 생각했다.
사실은 빵 굽는 냄새 맡고 오신 거죠? 다 알아요. 하지만 모른 척해 드리죠.
“와, 감사합니다. 얼른 들어오세요. 마침 빵 굽고 있는데, 이따가 같이 드시겠어요?”
“아, 그럴까? 그 빵 참 맛있던데.”
요즘은 빵 먹는 게 낙이 돼 버린 전상필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꼈다.
빵, 빵이다. 드디어 빵을 먹는구나.
만세!
* * *
며칠 후.
오특훈에 돌입한 산하는 평소 쓰지도 않던 일기를 하루도 안 빠지고 쓰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냥 ‘철수와 영희는 잘 살았어요’ 따위의 단순한 일기를 써 놓으면 전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내용도 있고 재미난 일기를 써야만 시일이 단축되고 있었다.
심지어 산하 자신이 생각해도 재미있게 잘 썼다고 생각한 날은 며칠 더 단축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산하는 매일 머리를 쥐어짜야만 했다.
진짜 드럽게 까다롭네.
가만 있어 봐. 오늘은 뭘 쓰지.
오늘은 맹철호 아저씨로 해야겠다.
그렇게 한참이나 주변 지인과 있었던 소소한 사건에 유머를 곁들여 일기를 써나가던 산하는 볼펜을 탁하고 내려놓았다.
그곳에는 대충 보기에도 수려하면서도 멋들어진 글씨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산하는 그 빼곡한 글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몇 개만 더 쓰면 이 지겨운 일기도 끝이다.
보고 있나요?
내가 이 어마어마한 양의 일기를 하루에 다섯 편씩 삘 받으면 일곱 편씩 썼어요.
불만을 토해내는 건지, 자랑을 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책을 한번 쓱 훑어본 산하는 계속해서 일기를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한참 후.
“만세! 끝났다.”
장문의 일기를 완성한 산하는 원하던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의외의 효과로 연결고리 생성일이 단축되었습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 생성까지 1일 남았습니다.]
[미션 - ‘연결고리 생성 일을 단축하자’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 식품 생산 당일 진두지휘가 5분으로 감소합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축하합니다. 갓 태어난 과거와의 연결고리 생성을 빠른 시일 내에 단축시켰습니다.]
[보상으로 재능 포인트 3점이 적립되었습니다.]
[24시간 후에 과거와의 연결고리 생성이 완료됩니다.]
다음 날.
산하는 새 생명이 탄생하는 걸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헌책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10초 후에 과거와의 연결고리 생성이 완료됩니다.]
카운트다운 되는 숫자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산하는 드디어 0이 되고 떠오른 메시지에 주목했다.
[5년 전, 한규생은 그녀마저 떠나간 후 이를 악물고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에 닿았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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