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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240화 (240/445)

240화 더 주고 싶어 (3)

그리고 막 마개를 열려던 찰나 그녀는 자기 병에 새겨진 글씨를 한번 바라보았다.

아까도 그랬지만, 어딘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글씨체는 자기 병에 고급스러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괜히 글씨 표면을 한번 매만져 본 그녀는 천천히 입구를 막고 있던 마개를 열었다.

그 순간, 꽃밭에 나들이 나온 느낌을 받을 만큼 향기로운 천상주의 향이 호텔 실내로 확 퍼져 나갔다.

마치 요정이 봉인을 풀고 나타나 요술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향이 풍기자 마농 르쉐르는 일순간 얼어붙었다.

뭐야, 이게 술에서 나는 향이라고?

말도 안 돼.

이렇게 매혹적인 향은 처음이야.

그리고 거북하지도 않아.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게, 인공적인 향과는 차원이 다른걸?

무슨 이런 술이 다 있지?

향에 취하는 바람에 넋 놓고 침대 한편에 앉아 있던 그녀는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술병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기분도 너무 편안하고 좋아.

넌 대체 뭐니?

극히 소량으로만 생산되는 천상주는 국내의 저명인사라 할지라도 쉽게 접하기 힘들 정도로 희귀하면서, 동시에 놀라운 맛과 향을 자랑했다.

심지어 미 대통령마저도 방한 당시 천상주를 맛본 후 잊지 못했고, 중간에 술 공급이 중단되자 다른 핑계를 대며 방한하려 할 정도였다.

그러니 마농 르쉐르가 천상주에 반하는 건 예고된 미래나 다름없었고, 실제로도 향에 반해 버린 그녀는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투명한 술잔에 천상주를 아주 조금 따랐다.

주황빛을 띠는 천상주가 실내등에 반사되어 찰랑거렸다.

그 모습을 감상하던 마농 르쉐르는 큰 기대감을 안고 술잔을 기울였다.

이내 그녀의 입속으로 파고든 천상주는 놀라울 정도로 감미로운 맛을 선사했고, 목구멍으로 넘어가자마자 화끈한 느낌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입안에 꽃잎을 가득 머금은 듯 환상적인 느낌마저 선사했다.

도수가 높아 독하되 부담스럽지 않으며 신비롭고 행복한 술, 그것이 바로 천상주였다.

그 탓에 편안함을 뛰어넘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느낌을 받던 그녀는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잠시 후.

알딸딸하게 취한 그녀는 빈 술병을 들어 올리며 질문했다.

“너 진짜 뭐니?”

이런 놀라운 일을 겪으리라곤 생각지도 않고 산하네 요리 전문점을 방문했던 그녀는 왠지 그 식당이 신비롭다고까지 느꼈다.

이런 대단한 술을 고작 십만 원에 팔다니.

어느새 천상주의 가치를 아주 높이 평가하던 그녀는 이 술에 관해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철저히 믿고 있었던 평가관 마농 르쉐르마저 된장찌개에 관한 극찬을 이어 가자, 미슐랭 가이드 서울판을 담당하는 편집자는 굉장히 신기해했다.

여태껏 한국의 된장찌개라는 음식은 외국인에게 호평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부정적인 의견이 오가곤 했다.

그럼, 이번엔 내가 잘못 판단했다는 거네.

곧장 이브 몽탕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부터 한 그녀는 오랜만에 별 세 개짜리 음식점이 탄생하겠다고 여겼다.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니만큼, 다른 한국인 평가관과 다국적 외국인 평가관의 의견을 더 들어 보기로 했다.

늘 적용되는 글로벌 원칙을 통해 평가 기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이후에도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면 편집자, 평가관 등의 관계자가 참여하는 스타세션을 열어야 했는데, 이 절차를 위해 그녀는 미리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방송국 휴게실 내부, 황수호 피디는 눈동자에 황당함을 가득 담은 채로 항의했다.

“대체 왜요?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CP이자 그의 선배 정병섭은 애써 황수호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른다니까…….”

“어떻게 모르실 수가 있어요? 다른 데 말 안 할 테니까, 설명 좀 해 주세요.”

“정말 몰라. 나도 답답해.”

“선배, 지금 프로그램 팬층이 얼마나 탄탄한데요? 무슨 방송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퇴폐적이거나 음란물이 나온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런 게 살짝 나오더라도 시정 명령부터 나와야지, 슬슬 접으라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언제나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우스갯소리를 하던 황수호 피디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CP에게 계속 항의했다.

하지만 그의 항의는 대나무밭에서 혼자 소리 지르는 것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선배. 진짜 이러실 겁니까?”

“쉿! 인마, 밖에서 들어.”

“들으라고 해요. 왜 멀쩡한 프로그램을 종영하라고 하는지 그 이유 좀 알아야겠어요.”

그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정병섭이 아이라도 달래듯 타일렀다.

“황 피디, 사회생활 처음 아니잖아. 까라면 까고 하라면 해야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

“혹시나 해서 말인데, 산하 씨가 저 위에 어디 밉보인 거 아니야?”

“산하 씨는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이것저것 바쁘다 보니 촬영 스케줄 잡기도 빠듯한데 밉보일 게 뭐 있어요?”

“그래? 거참 이상하네…….”

“선배, 남 말 하듯 하지 말고 빨리 이유나 말해 줘 보세요.”

“황 피디, 나도 정말 모른다고 했잖아. 너 아무리 친한 선후배 사이라고 해도 이렇게 기어오르면 국물도 없어?”

“제가 언제 기어올랐습니까. 이런 부당한 처사에 항의 안 하게 생겼어요? 지금 기분 같아서는 이사회고 뭐고 쳐들어가서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 정말. 황 피디 원래 안 이랬잖아. 화 좀 가라앉히고 찬찬히 생각해 봐.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딱히 산하 씨를 하차시키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프로그램 종료야.”

“그래서요?”

“딱 들으면 모르겠어? 조금 더 신선한 컨셉으로 프로그램 하나 만들고 산하 씨 승차시켜. 혹시 알아? 그거 확 대박 나서 우리 방송국 간판 프로그램될지?”

“그래서, 간판 프로그램 만들어 놨는데 또 종영하라고 윗선에서 압력 넣으면요?”

“에이, 그럴 리가……. 이번엔 그냥 트렌드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재편성하자는 뜻 같아.”

“아까는 모르신다면서요?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선배는 고릴라의 난도 모르십니까? 산하 씨가 요즘 트렌드지, 뭐가 트렌드예요? 팬덤 난리 나면 어쩔 겁니까?”

“아, 몰라 몰라. 나도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아무튼 그렇게 알아 둬.”

그 말을 끝으로 정병섭은 도망이라도 치듯 휴게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도망칠 타이밍을 놓친 정병섭은 잡았던 문손잡이에서 힘없이 손을 떼더니 한숨까지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또 왜? 나 정말 모른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다 저기 위에서 내려온 지시야.”

“그거야 벌써 수십 번 들었으니까 됐고요.”

“그래? 그럼 뭐?”

“저 마지막 회 특집이라도 촬영하게 예산 좀 주세요.”

“뭐!?”

“해외로 나갈 겁니다.”

“해외? 해외는 왜? 거기랑 향토음식 기행이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 있습니다. 그곳에도 우리 동포들은 있으니까요.”

황당하다는 듯 황수호를 바라보던 정병섭이 그에게로 가까이 걸어갔다.

“황 피디, 안타까운 마음은 알겠는데. 그건 아니야. 그런 특집 다큐 여러 번 한 거 황 피디도 잘 알지 않아? 그리고 이거 국내 다큐야. 그냥 당분간 좀 쉬면서 마음 추스르고 새 프로그램 준비해. 그게 정답이야.”

“선배! 이것도 못 해 주십니까?”

“말만 CP지, 난 힘도 없어 인마. 그만 얘기하자.”

이젠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은 정병섭이 휴게실을 빠져나가려 하자, 황 피디가 외쳤다.

“저 무슨 일이 있어도 할 겁니다. 방송국에서 지원 안 해 주면 다른 방법 찾아볼 거예요.”

“네 맘대로 해라. 나도 이젠 할 말 없다. 잘리든지 말든지, 그때 나한테 와서 울고불고하기만 해 봐라.”

으름장을 놓듯 말하던 정병섭이 휴게실 밖으로 휙 빠져나갔고, 황 피디는 허탈한 마음으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산하 씨한테 뭐라고 말하지…….’

이날 오후.

점심 장사를 막 끝낸 타이밍에 맞춰 황 피디에게 전화가 걸려오자, 산하는 이 양반 시간이라도 재고 있었나 생각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했다.

“네, 황 피디님. 무슨 일이세요?”

하하하 웃던 황 피디가 예전처럼 익살맞게 답했다.

“장사 끝나셨죠?”

“네, 지금 막 끝났죠.”

“캬! 역시 저의 예리한 통찰력.”

“무슨 일이신데요?”

“제가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합니까? 우리 산하 씨 목소리만 들으면 힘이 그냥 파바박 솟는 것이…….”

“와, 우리 피디님. 변화가 없네요. 고막에서 피 나요.”

“산하 씨, 섭섭합니다. 우리 사이가 고작 이런 사이였습니까? 산하 씨가 배 곯고 가난하던 시절, 제가 된장찌개 가게를 촬영해서 번듯하게 일으켜 세웠지 않습니까?”

“그때도 장사 엄청 잘 됐거든요? 자꾸 뻥치시면 전화 끊을 겁니다.”

“잠깐, 잠깐만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려나 보네. 말씀하세요.”

“오늘 시간 있으세요?”

“있어도 없어요.”

“……산하 씨. 너무 합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끊습니다.”

“잠깐, 진짜 잠깐. 저 진지해요. 오늘 정말 시간 없으세요?”

“무슨 일인데요?”

“긴히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갑자기 태도가 바뀐 황수호 피디 때문에 덩달아 진지해진 산하가 의문을 표했다.

“전화로는 말씀 못 하시고요?”

“네, 이건 꼭 얼굴 보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보자, 이따가 세 시쯤에 오시겠어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그럼 식당에서 뵙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하고 의아해하던 산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새봄이 다가와 묻는다.

“무슨 일인데요?”

“글쎄, 황 피디님 이런 말투 처음인데. 꽤 진지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래요? 썰렁한 농담도 안 하시고요?”

“하긴 했어.”

“그럼 됐네요. 진짜 엄청 큰일이면 그런 농담 안 할 거 같아요.”

“그렇겠지? 이따가 만나서 들어 보면 알겠지.”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약속 시각이 되자 황 피디가 유리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저 왔습니다. 잘들 지내셨죠? 다른 직원분들은요?”

“아시잖아요. 다들 쉬는 시간만 되면 어디로 흩어지는 거.”

“그랬던가요.”

“모르는 척 그만하시고 들어와서 앉으세요. 오늘따라 피디님 수상해 보여요.”

“제가요?”

“네, 아주 많이 수상해 보입니다. 지난번 촬영에서 냄비 들고 도망치실 때처럼요.”

“……아니 그 얘기를 왜 지금.”

“엄청 웃겼거든요. 그런 게 방송으로 나가야 하는데. 일단 들어오세요.”

뒤통수를 긁적이던 황 피디는 식당 내부로 들어섰고, 이내 그와 마주 앉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황수호는 차만 마셨고, 그 모습이 못내 이상해 보였던 산하가 먼저 물었다.

“피디님,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세요? 평소답지 않게.”

의문이 가득한 그의 표정에 황 피디가 입술을 깨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늘 산하 씨한테 방송 분량이건 뭐건 더 드리고 싶어 하는 건 아시죠?”

“그건 제가 사양이라니까요.”

그의 단호한 거절에 황 피디가 심장 어림을 매만지며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산하 씨가 어떻게 저한테.”

“안 속아요. 말 그만 돌리시고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황 피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말이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거 먼저 들으실래요?”

“나쁜 소식이 있어요? 딱히 제가 방송국에서 나쁜 소식 들을 일이 없는데, 뭐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니까 나쁜 소식 먼저 들을게요.”

그의 대답에도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황 피디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네? 피디님이 왜요? 저 몰래 제 명의로 사채라도 쓰셨어요?”

“그게, 지금 하시는 프로그램 종영하게 됐습니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고 조만간 그렇게 될 겁니다. 이미 결정 난 사안이고요. 저도 얼마 전에 통보받았습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산하가 묻는다.

“그게 왜 나쁜 소식이에요?”

“네?”

“피디님은 어떠신지 몰라도, 저한테는 좋은 소식이네요. 요즘 어떤지 아시죠? 몸이 열 개라도 뼈가 분질러질 판이거든요. 캬, 이게 바로 자유의 느낌이군요. 감사합니다. 피디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반응에 얼떨떨하게 앉아 있던 황 피디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기분 안 나쁘세요? 아니면 저 기분 나쁘지 말라고 일부러…….”

“에이, 일부러는요. 영원한 프로그램이 어디 있겠어요? 끝이 있어야 또 시작이 있는 법 아니겠어요? 전 아무렇지 않으니까 염려 마세요.”

“그렇다기엔 산하 씨 말이 길어지셨는데, 역시 그런 거죠?”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은 뭔데요?”

“……어, 그러니까 종영 기념으로 마지막 편은 특별한 방송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잠깐! 이거 왠지 불길한 냄새가 나는데요?”

“불길하다뇨. 엄청 멋진 냄새가 날 건데요?”

“더 말씀해 보세요.”

“우리 아마 해외로 가서 촬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 확정 난 건 아니지만요.”

“피디님, 왜 바꿔 말하세요?”

“네? 뭘요?”

“그러니까, 촬영하러 해외로 가야 한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렇죠?”

“그거 나쁜 소식이잖아요. 앞에 하신 말이 좋은 소식이고.”

“……뭐라고요?”

“그리고 전 특별 편성 안 해도 됩니다. 저 위로해 주려고 그렇게 힘쓰실 필요 없어요.”

“아니, 이건 제가 꼭 하고 싶었던…….”

“봄아, 황 피디님 가신단다. 문 열어 드려.”

“네, 사장님!”

이곳에 오면서 했던 걱정과 불안함, 미안함을 어느새 다 날려 버린 황수호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산하 씨 이러실 겁니까? 우리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한솥밥 먹은 지가 몇 년째인데.”

심지어 우는 시늉까지 하던 그가 산하를 설득했다.

“제 마음도 모르시고, 이렇게 문전박대하실 거면 된장찌개라도 한 그릇 주고 내보내셔야지. 군자의 도리가 땅에 떨어져도 이렇게 떨어질 수가 있습니까?”

“뭐, 좋습니다. 그래도 종영한다는 좋은 소식 하나는 가져오셨으니까 한 뚝배기 끓여 드릴게요……라고 할 줄 아셨죠? 봄아, 황 피디님 바빠서 얼른 가신대. 문 좀 활짝 열어 드려.”

“이렇게요?”

유리문 두 짝을 활짝 열어젖힌 새봄이 장난스럽게 웃자, 이젠 심각함을 완전히 다 날려 버린 황수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웃던 황 피디가 산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래서 산하 씨가 좋습니다.”

“전 남자 안 좋아하니까 이거 놓으세요.”

그의 말대로 손을 놓은 황 피디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무튼 저 해외 특집 포기 못 하니까 그렇게 아세요.”

“방송국에서 보내 준대요? 프로그램 종영도 하는 마당에?”

“어, 그건 잘 얘기해 봐야죠.”

“그러니까 결정도 안 난 거네요?”

민망한 표정이던 황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긴 합니다.”

“만세! 봄아, 황 피디님 지금 안 가신단다. 해외 특집과 된장찌개를 맞바꾸시는 건 어떠세요?”

그의 제안에 실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황 피디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선택지가 너무 어렵지만, 그래도 전 프로그램의 마지막과 함께하겠습니다.”

“봄아, 피디님 이번엔 진짜 가신단다. 배웅해 드려.”

그의 장난에 동참하던 새봄이 이제 재미없어졌다는 듯 유리문 두 짝을 다 닫아 버리더니 휴게실로 향하며 말했다.

“귀찮아요. 사장님 바보.”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황 피디가 산하에게 슬쩍 물었다.

“……새봄 씨 아직 연예인 하실 생각 없으시답니까?”

“네, 절대 안 합니다.”

“네? 산하 씨 말이 조금 이상합니다만. 왜 당사자처럼…….”

“그야 봄이는 우리 식당의 소중한 직원이니까요.”

“아하! 그건 그러네요. 그럼 저 된장찌개 한 그릇 부탁합니다.”

“피디님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시네요. 꼭 봉만두처럼.”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만두 씨는 어디 가셨습니까?”

“모르겠어요. 어딜 그렇게 다니는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 그릇 후딱 끓여 드릴게요. 마침 직원용으로 사 왔다가 남은 재료가 조금 있어요.”

산하는 곧장 된장찌개를 맛나게 끓여 황 피디에게 제공했고, 그는 마치 사나흘 굶은 거지처럼 된장찌개를 밥에 쓱쓱 비벼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퍼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짜 잘 먹었습니다. 그럼 해외 특집은 어디로 할지 심도 있게 고민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해외는 됐고요. 안녕히 가세요.”

흐흐 웃던 황 피디가 난 절대 포기 안 한다는 시선을 쏘아 보내고는 신나는 발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새봄이 물었다.

“황 피디님 좋아지신 것 같죠?”

“응, 아까 표정은 진짜 장난 아니었는데.”

“그런데 어딜 데려간다고요?”

“해외.”

“황 피디님 나쁜 사람이네요.”

“그렇지?”

두 사람은 하하 호호 웃다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종영하는 걸까요?”

“글쎄…….”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산하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 * *

황수호 피디가 산하에게 해외 특별방송 발언을 한 지도 며칠이 더 흘렀다.

산하네 요리 전문점이 브레이크 타임을 맞이한 시각, 어떤 한국인 남성이 유리문을 열었다.

그는 미슐랭 가이드 서울판을 펴내는 데 가교 역할을 하는 미슐랭 전담 통역사였다.

그러자 식당 내부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으로 블로그를 관리하던 산하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말씀드릴 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오세요.”

이내 한 외국인 여성과 내부로 들어선 그가 첫마디를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미슐랭 가이드에서 나왔습니다.”

- 24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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