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안 되면 되게 하라 (1)
<가수로만 알았던 하산해, 그의 재능은 어디까지?>
<하산해, 헤어 대중상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일냈다!>
<산하네 요리 전문점 단골, 미슐랭 너무 밉다>
<하산해 요리, 세계에도 통했나>
<모 요리 잡지 에디터, ‘그의 요리는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
산하의 요리를 처음 맛보았을 때 황 피디는 된장찌개에 홀딱 반해 버렸다. 그저 평소에 알고 평범하게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후 프로그램을 같이하게 되면서 자주 맛본 그의 요리 실력은 날이 갈수록 상승했고, 황 피디는 이러다 일내는 거 아니냐고 생각해 왔다.
그의 생각대로, 산하네 요리 전문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나 그의 생각과 달리 손님만 늘어날 뿐 세상은 계속 잠잠하기만 했고, 외국인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된장찌개라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웬걸.
그냥 뒤늦게 터진 거였다.
방금까지도 해외 특집 예산에 관해 고민하던 황 피디는 그런 건 까맣게 잊고 황급히 휴대폰부터 집어 들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 위해서였다.
“산하 씨!”
조카 유진과 놀아주던 산하가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했다가 답했다.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겠어요. 오늘은 또 왜 그러세요?”
그 순간 산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와, 이거 뭐야.
[미션 - 황 피디의 해외 특집 프로그램을 성공시켜라]
[보상 - 홍칠성의 전통주 빚는 솜씨가 93%로 상향됩니다.]
드디어 그 대단한 천상주를 93%로 끌어올릴 수 있는 거야?
대박!
그런데 저걸 어떻게 성공시키라고?
내가 무슨 수로?
촬영 스태프들에게 주워들어 그의 곤란한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산하가 고민에 빠졌다.
가만, 예전에 생각해 둔 그 방법 한번 얘기해 볼까?
그때, 산하의 귓가에 황 피디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산하 씨! 듣고 있으세요? 미슐랭 축하드린다니까요.”
“아, 기사 보셨구나. 감사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그의 반응에 황 피디는 당황했다.
아니 미슐랭 가이드가 어떤 곳인데, 산하 씨 뭐야. 이쯤 되면 기뻐서 날뛰어야 하는 게 정상아냐?
당황한 그가 내심을 토해냈다.
“어째 보아하니, 기분 안 좋으세요? 미슐랭 가이드에서 최고 등급 받으셨는데.”
“글쎄요. 장사가 안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날 평가한 것뿐인데요.”
어이가 없었던 황 피디가 그를 타박했다.
“전 정말 오늘만큼은 산하 씨 머릿속을 열어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세 개를 줬는데 시큰둥할 수가 있어요?”
“손님이 너무 많아서요.”
그의 짧은 발언에 황수호는 그건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이제 더 난리가 나겠네요.”
“이게 제 업보려니 해야죠.”
그의 다음 대답에 황 피디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잠깐! 업보라니요. 또 산하 씨 말에 넘어갈 뻔했네. 업보는 무슨, 남들은 별 1개라도 받고 싶어서 안달인데, 지금 장난해요? 산하 씨 식당이 이제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요.”
“그건 인정합니다. 그래도 뭐 큰 감흥까지는 없네요. 전 그것보다 손님들이 드시고 기뻐하시는 게 훨씬 좋고 중요하니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의 태도에 황 피디는 피식 웃었다.
“오늘은 제가 졌습니다.”
“오늘만 아니고 요새 계속 지셨잖아요.”
“……제가 언제요?”
“저번 촬영 때 게임에서 지시고 ‘치사해서 안 먹어, 절대 안 먹어!’라고 하시더니, 냄비 들고 뛰셨잖아요.”
부끄러웠던 기억을 떠올린 황 피디가 아직도 얼얼함이 느껴지는 이마를 쓰다듬으며 요구했다.
“그 얘기는 왜 또 하세요. 이제 그만 잊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날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요. 카메라 감독님이 못 찍었다고 진짜 아쉬워하셨잖아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혹이 이만큼 나오시고, 냄비는 엎어져서…….”
으아악 소리 지르던 황 피디가 제발 그만을 외쳤고, 산하가 하하 웃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알았어요. 그나저나 해외 특집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슬슬 본론을 꺼내기 위한 그의 질문에 황 피디가 반색했다.
“이야, 드디어 우리 산하 씨가 제 마음 알아주시는 건가요? 해외 가고 싶어지신 거죠?”
“아뇨, 스케줄에 넣을 수 있을지 없을지 생각해 보려고요.”
그의 대답에 현실을 떠올린 황 피디가 우울함이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
“……뭐, 아무래도 산하 씨 스케줄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 같긴 합니다.”
늘 활기차던 황 피디의 축 처진 음성이 어색하기만 했던 산하가 그를 달랬다.
“에헤이, 우리 황 피디님 왜 이러실까요. 씩씩하고 명랑하던 황 피디님은 어디 가셨어요?”
“제가 언제 명랑했다고…….”
여전한 그의 말투에 산하는 가끔 떠올리곤 했던 아이디어를 제시해 보기로 했다.
미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번 말해 보려고 했는데, 기회가 참 잘 되었다고 해야 하나.
특히 여태까지 봐 온 황수호 피디 성격이라면 좋은 반응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아 참, 피디님. 제가 얼핏 생각해 봤는데 해외 특집 방송이면 뭔가 의미가 있는 걸 담는 게 좋은 거죠?”
갑자기 프로그램에 관해 진지한 질문이 떨어지자 황 피디가 살짝 멍한 표정으로 의문을 표했다.
“네?”
“우리 프로그램 제목에 향토 음식 기행이 들어가잖아요.”
“그렇죠?”
“향토 음식이 해외에서 어떻게 변해갔는지에 관해 촬영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황 피디는 그의 말에 줄기처럼 뻗어 나가는 기획을 떠올리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 그거 지당하신 생각입니다. 저도 예전에 얼핏 떠올리긴 했었는데, 그래서 생각해 놓으신 지역이라도 있으십니까?”
언젠가 보았던 뉴스를 떠올린 산하가 답했다.
“사할린 어떠세요?”
슬슬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황 피디가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세요.”
“사할린 한인 동포를 찾아가는 거죠. 그들은 그곳에서도 우리 음식을 잊지 못했다는 주제로 가면 어떨까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정이 환해진 황 피디가 외쳤다.
“오! 산하 씨! 그거 정말 굿 아이디어입니다. 산하 씨도 실제로는 하고 싶으셨던 거죠? 하죠. 당장 하죠.”
“하긴 뭘 해요. 그냥 이런 것도 있으니 기획할 때 쓰시라는 거죠. 그럼 굿나잇.”
“잠깐! 잠깐만요. 산하 씨 불 질러 놓고 이렇게 끊으시면 어떡합니까?”
시무룩했던 그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산하는 속으로 킥킥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언제 불을 질렀다고 그러세요. 그래서, 예산은 준비하셨어요?”
그제야 현실의 냉엄함을 인지한 황 피디가 시무룩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아직.”
“피디님,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꼭 방법이 공중파로 방송하는 것만 있지는 않을 텐데요?”
“네?”
“지금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편집 잘해서 인터넷으로 송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 같습니다. 어쨌거나 황 피디님은 이번 프로그램 종영 반대하시는 입장이고, 또 하고 싶어 하시니까요. 지금 계신 방송국과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황 피디는 그의 조언을 듣자마자 냉수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잠깐, 나 왜 이런 방법 시도할 생각조차 못 했지?
황수호! 왜 거기 얽매여서 틀에 박힌 생각만 하고 있었어?
안 된다고만 하는데, 왜 그 말에 주눅이 들어. 돌파구를 찾아야지.
생각을 이어 가다 보니 죽어가던 아이디어마저 번쩍번쩍 떠오르는 걸 느낀 황 피디가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쏟아냈다.
“산하 씨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습니까? 진짜 산하 씨는 보물입니다, 보물. 그러고 보니 확실히 시대가 바뀌긴 했죠. 좋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예산은 마련해 보겠습니다.”
선배고 자시고,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데 까짓거 사표 쓰고 촬영한 다음에 다른 데 가지 뭐.
인생 별거 있어!
급격한 심경 변화를 일으키던 황 피디가 계속해서 긍정적인 말을 쏟아내자 산하가 그를 말렸다.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설마 대출받고 사채 쓰고 그러실 건 아니죠? 펀딩 같은 것도 있잖아요. 정 안 되면 저도 도울게요.”
“오! 오오! 산하 씨. 나의 구세주. 펀딩 좋죠.”
“징그럽게 왜 이러세요. 이만 끊습니다.”
“잠깐! 잠깐!”
“또 왜요?”
“산하 씨, 우리 쭉 같이 갑시다.”
“어우, 닭살이야. 그런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세요. 저 진짜 끊습니다.“
어느새 통화가 종료되어 점멸하는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던 황 피디는 생각했다.
산하 씨는 정말 곤란할 때 큰 도움 주신다니까.
맞아. 꼭 사비로 할 필요도 없고, 공중파로 내 기획을 전달할 필요도 없지.
나, 황수호야. 한다면 해.
그 시각.
식사를 끝내고 다과를 즐기던 박윤정이 자신의 오빠에게 업혀 있는 조카의 볼을 슬쩍 잡아당겨 보다가 물었다.
“누구야? 무슨 통화를 그렇게 길게 해? 애인이야?”
“몰라도 돼. 박윤땡.”
“치사하게. 누군데? 사할린 어쩌고저쩌고하던데.”
“궁금한 것도 많다. 이번에 하차하는 프로그램 피디님이야.”
“아…… 대체 왜 종영하는 거래?”
“나도 모르지. 러시아 가게 생겼네.”
“뭐? 좀 자세히 말해 보라고.”
“궁금하면 백만 원.”
“!?”
* * *
소리꾼 박산하와 함께, 팬 카페 운영자 윤태문은 방송국에 항의 메일을 보내고 씩씩거렸다.
“이것들이, 잘 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무슨 종영이야. 안 돼! 절대 안 돼!”
카페 회원을 모아서 방송국 앞으로 몰려간 다음 푸닥거리라도 한번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계획을 곧바로 포기했다.
예전 홈쇼핑 건은 명분이 확실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프로그램 종영을 빌미로 따지기에는 상당히 애매하다고 할 수 있어서였다.
더군다나 마구 떼를 쓰다가는 박산하의 이미지만 나빠질 우려가 있었다.
팬 수준이 어쩌고저쩌고하면 그것만큼 곤란한 게 없었다.
그래도 이번 종영만큼은 꼭 막고 싶었던 그는 팬 카페에 좋은 아이디어라도 올라온 게 없나 싶어서 공지에 달린 댓글을 살펴보았다.
- 아, 우리 손자놈이 바빠서 이제야 항의 메일 보냈지 뭐요.
- 이놈의 잡것들이 누구 맘대로 종영이야.
- 그러게나 말이오.
- 어르신들, 제가 빅 뉴스 들고 왔어요. 향토 음식 기행 해외 특집 방송 예산 마련 펀딩한대요.
- 으잉? 그게 뭔 소리여?
윤태문은 한 회원의 댓글에 눈을 번쩍 뜨더니 인터넷 링크를 눌렀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 펀딩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저는 소리꾼 박산하의 향토 음식 기행을 기획했던 황수호 피디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프로그램을 사랑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송구하게도, 급작스러운 종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지만, 이대로는 끝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다만 프로그램 포맷 자체는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저작권으로 인해 충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은 인적, 물적 가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펀딩 관련 글을 쭉 읽어보던 윤태문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 피디까지 싸잡아서 욕했는데, 알고 보니 담당 피디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해자 같았다.
그럼 이대로 있을 수 없지.
시청자와 같이 만들어 가는 프로그램, 좋잖아.
고개를 끄덕이던 윤태문은 곧장 카페 공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카페 운영자 윤태문입니다. 이번 박산하 님의 프로그램 종영과 관련하여 많이 아쉬우셨을 텐데요, 우리 회원님의 제보로 이와 관련된 펀딩이 올라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펀딩이란 인적 자원부터 물적 자원까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여러 사람이 힘을 실어 조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펀딩을 통해 박산하 님의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황수호 피디님은 아쉬웠던 부분을 채워 나가고자 한다고 전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 이대로 놓아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전 이미 황수호 피디님이 기획한 펀딩에 기부를 결정했습니다.
우리 카페는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강제하지 않겠습니다.
참여하실 분은 다음 링크로 찾아가 참여하시고, 잘 모르시는 분은 저를 비롯한 운영진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참고로 황 피디님이 기획하는 프로그램 가제는 ‘그곳에서도 잊지 못했다.’이며, 향후 새롭게 개설된 인터넷 영상 채널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박산하 님의 아이디어로 기획되었다고 하는데요. 프로그램 종영이 아쉬우셨던 분들 많은 참여 바랍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공지 댓글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예전 고릴라의 난 당시 협업했던 타 카페 회원들도 넘어와 댓글을 남겼다.
- 저 러시아 말 잘해요. 통역 지원하러 가요.
- 난 현금 조금 보냈소이다.
- 우와, 우리 회원님들 분위기 좋다.
- 러시아 현지 가이드로 일한 적 있는데, 잘됐네요. 마침 백수라서.
- 저도 돈 좀 넣었어요.
- 조연출로 일한 적 있어요. 한 손 거들러 갑니다.
-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각.
방송국 CP 정병섭은 굉장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박산하가 미슐랭 3스타에 등재되는 바람에, 이 정도 요리사가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왜 종영시키냐는 의문이 방송사 직원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처음 며칠만 해도 항의가 별로 없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날이 갈수록 그의 팬들이 게시판에 글을 쓰고 항의 메일을 날리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장실을 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이사회도 그렇고, 다시 말씀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건 곤란합니다. 이미 결정 난 사안이에요.”
“그래도 반발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 황 피디는 사표 내자마자, 펀딩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사장이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펀딩?”
“네, 독자적으로 돈 모아서 프로그램 촬영하려는 모양입니다. 인터넷으로 송출하고요.”
방송 사장이 피식 웃었다.
평소 공중파와 인터넷방송의 파급력은 그 질이 다르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고작 생각해 낸 게 인터넷 방송이라는 것을 비웃던 그가 입을 열었다.
“독자적이라…… 놔두세요. 인터넷 방송, 잘해 봐야 거기서 거기죠. 정 국장이 신경 써야 할 건 깨끗한 종영입니다. 어떻게든 큰 잡음 안 나오게 깔끔히 마무리하세요.”
아무 변화 없는 사장의 태도에 정병섭도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유 정도는 알고 싶었다.
“……네, 사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뭡니까?”
“저도 프로그램을 왜 종영하는지 궁금합니다. 화제성이 풍부한 박산하 씨라면 흥행에 더 도움이 될 테고, 시청률도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만.”
“정 국장.”
“네, 사장님.”
“그거 알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선 넘으려고 한다는 거?”
“…….”
“평소 하던 대로 해요. 정 국장 그런 거 잘하잖아요. 지금까지도 잘해 왔고.”
왠지 모를 굴욕감을 느낀 정병섭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억지로 잠재우며 고개를 숙였다.
“네, 사장님. 조심하겠습니다.”
막 나가다가는 지금까지 지켜온 지위를 모조리 잃어버리는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황 피디 이놈 정말 부럽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 거야?
고민하던 정 CP에게 방송 사장이 출입구 방향으로 고갯짓했다.
“그럼 나가 봐요.”
힘없이 뒤돌아선 정병섭은 사장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터덜터덜 걸으며 생각했다.
이 짓도 정말 못해 먹겠네.
* * *
천상주 火 버전과 氷 버전은 없어서 못 판 지 오래되었다.
산하가 바빠진 것도 있지만, 장소가 건물 옥상이었던지라 재료 생산이 힘들었던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 재료를 생산해야 할 장소를 한옥 마당 유리 온실로 옮긴 바 있었던 산하는 이미 고추와 작은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두 식물을 감상하던 그는 고추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대로 계속 길러 볼까?
고추는 원래 여러해살이 식물이지만, 우리나라 기후 특성상 한해살이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나 산하에게는 유리 온실이라는 무기가 있었고, 따라서 고추는 앞으로 겨울이 닥쳐와도 죽을 염려가 없었다.
경제성으로만 보자면 모종을 사다가 계속 심는 것도 괜찮겠지만, 4계절 내내 죽이지 않고 길러 보고 싶었던 그는 시도나 한번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빈 땅에는 뭘 길러 볼까, 고추를 더 심어 볼까 고민하던 산하는 급한 것도 아니니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며 온실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네, 우리 편집장님. 별일 없으시죠?”
“아니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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