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사할린을 가다 (2)
월요일 밤, 카메라 감독을 포함한 스태프 세 명이 식중독에 걸려 응급실로 실려 가 버렸고, 이 소식을 듣게 된 황수호는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나 그가 달려간다고 해서 뭔가 뾰족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상태가 어떤지 알아보고 병원을 돌아 나올 뿐이었다.
그 시각, 영업을 끝내고 집에서 웹툰을 그리던 산하는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하고 물었다.
“다들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그냥 식중독이라 괜찮긴 한데, 하필이면 이 시기에…….”
“대체 뭘 드셨답니까?”
“즐겨 찾는 굴 보쌈 집에 갔다는군요.”
“굴 보쌈이요? 이 여름에요?”
“매년 생각날 때마다 갔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거 정말 곤란하네요.”
잠시 생각하던 산하가 묻는다.
“그래도 인원 보강하고 촬영은 해야죠?”
“그게…… 그 환자 중에 카메라 감독님이 포함되어서 고민이 됩니다.”
“네? 카메라 감독님이면…… 문제가 크네요.”
이번에 합류한 카메라 감독은 현재 종영한 향토 음식 기행 촬영을 도맡아 했으며, 영상미 제대로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중요하기로는 1-2위를 다투는 사람이 입원한 것이라서 그 빈자리가 너무 컸고, 이걸 잘 알고 있는 산하는 고민에 빠졌다.
“산하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황수호는 이 다큐의 중심이자 제일 큰돈을 투자한 산하에게 결정 권한을 일부 넘겼고, 그는 잠시 고민 끝에 질문했다.
“입원하는 데는 얼마나 필요하답니까?”
“식중독이긴 해도 꽤 중증이라서, 제대로 면회도 못 하고 왔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로는 적어도 사흘 이상, 길면 일주일 정도 입원해야 한다고 하네요.”
그의 말을 듣게 된 산하는 뭔가 좋은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딱히 출구가 보이지 않자 홧김에 속으로 외쳤다.
그냥 확 내가 하고 싶네.
그런데 그 순간 산하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작사가 재능도 노력하다 보니 얻었지? 운 좋으면 될 것도 같은데?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그래도 가능성은 있어.
본래 영상 촬영이라는 게 빛의 예술의 일종이잖아.
공민철의 사진 솜씨도 빛의 예술이고.
산하는 무려 96%에 달하는 사진 솜씨에 더해, 쇠똥이의 천재적인 수묵화 솜씨와 윤희정의 서양화 솜씨 등을 잘 버무려 활용한다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사각의 프레임 안에 원하는 것을 적절하게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뭔가 가능성이 있었다.
산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말이 없었고, 그가 꽤 상심한 거라고 생각한 황 피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산하 씨?”
“네?”
“관리 못 한 제 탓입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요. 사람이 백 퍼센트 관리가 되나요. 그냥 운이 없었던 거죠. 그러고 보니 카메라 감독님이 제대로 합류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 지금 급히 구한다고 해 봐야 제대로 구해질지도 의문이고요. 그건 그렇고, 황 피디님. 카메라는 잡아 보셨죠?”
황수호는 현지에서 카메라를 잡으라는 것으로 알아듣고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잡아 보긴 했어도 지금 입원하신 감독님에 비하면 실력은 형편없습니다.”
“그래도 기본은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그럼 내일부터 저한테 카메라 조작법이랑 기술 좀 알려 주세요.”
예상치 못한 그의 요구에 황수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건 왜요?”
“기술 좀 배우고 싶어서요.”
“그걸 갑자기…… 왜?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현지에서 뭐라도 도와주려고 하는 건가 싶었던 황 피디가 내심을 토했고, 산하는 뭔지 모르겠지만 착각하도록 놔두기로 했다.
급선무는 카메라 조작 기술을 배워서, 아까 상상한 것이 실제로 적용 가능한지 어떤지 실험해 보는 거였다.
“일단 알려 주시긴 할 거죠?”
“네, 뭐 어렵진 않습니다. 이미 이것저것 절차는 다 끝내 놨으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세 분 비행기 표만 조정하고 촬영 강행하시죠. 이게 다 잘 되려고 이러는 걸 겁니다. 모든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지 않습니까? 또 아나요? 굉장한 작품 하나 나올지.”
심각하기만 하던 황수호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저도 산하 씨처럼 긍정적인 마음가짐 본받아야 하는데, 정말 그런 생각이십니까?”
“네, 지금 비행기부터 숙소까지 해약하려면 출혈이 크잖아요. 기다려 본다고 해도 앓다가 퇴원하셨는데 언제 제대로 일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현지 섭외해 놓은 것도 있고, 제 스케줄도 있고……. 일이 잔뜩 꼬여 버리니까요.”
“그건 산하 씨 말씀이 맞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하루만 더 생각해 볼게요. 촬영 기술은 내일부터 조금 가르쳐 드리면 될까요?”
“네, 그럼 내일 병문안부터 다녀오고 나서 가르쳐 주세요.”
황수호는 이미 일 처리도 다 해 놔서 할 일도 없기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황수호와 함께 병문안을 간 산하가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죽다 살아났는지 얼굴이 허옇게 뜨다시피 한 카메라 감독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죄인입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죄인이시니까 얼른 털고 일어나서 촬영 합류하세요.”
이대로 촬영이 미뤄질 거라고 생각했던 감독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잠자코 서 있던 황 피디가 입을 열었다.
“산하 씨가 그냥 촬영 강행하자고 하셨어요. 그러게 왜 한여름에 굴 보쌈 같은 걸 먹고 다녀요?”
친한 사이이다 보니 더 할 말이 없었던 그가 죄인과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매년 먹어도 탈이 없길래. 산하 씨,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얼른 털고 일어나시고, 몸 좋아지시면 현지로 날아오세요.”
“새로 안 뽑으시는 건가요?”
“새로 뽑긴 뭘 뽑겠어요. 카메라 감독님만큼 영상 뽑아내는 사람 구하기가 쉬운 줄 아세요?”
산하의 타박 아닌 타박에 미묘한 표정을 짓던 카메라 감독이 말했다.
“나중에 합류해서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퇴원해서 합류하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의사가 가도 된다고 하면 오세요. 어차피 촬영 초반은 황 피디님이 맡아서 하실 거니까 너무 걱정도 하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그럼 우린 가 보겠습니다.”
이번 다큐 촬영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떠나가자, 카메라 감독은 힘없는 손짓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왜 그랬어. 왜! 좀 참지. 그런 건 왜 먹어가지고. 내가 다시는 굴 보쌈 먹나 봐라.”
자신을 욕하던 카메라 감독은 황수호에게 미안해하다가 마지막에는 산하를 떠올렸다.
매번 촬영 때마다 기절할 만큼 맛있는 요리를 선사해 주었고, 늘 칭찬해 주던 사람이었다.
오늘도 구박하기는커녕 위로하고 격려하지 않았나.
이대로 무너져 있을 순 없지.
의사한테 애원이라도 해 봐야겠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던 그는 마침 병실을 방문한 간호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네?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요. 최대한 빨리 좋아질 방법 없나요?”
“네?”
그의 질문에 간호사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복통으로 배를 부여잡은 카메라 감독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나 죽네…….”
* * *
산하는 황 피디에게 카메라 조작법과 간단한 이론을 배웠다.
그 후 그는 밤잠을 줄여가며 개인적으로 촬영 기법 이론을 공부했고, 황 피디에게 빌려온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아, 이렇게?’
사실 이번 다큐가 다양한 기법을 필요로 하는 고난도 촬영이었다면 산하도 그냥 포기했을 테지만, 다행히도 역사와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 다큐였다.
그래서 그는 고난도의 기법까지는 필요 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영화 촬영 기법도 다큐에 적용해서 담아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 짧은 시간에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민철을 비롯한 많은 재능을 떠올린 산하는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피사체를 원경에서 찍는 롱 쇼트나 일반 DSLR 촬영에도 적용되는 딥 포커스, 피사체의 특징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클로즈업 등을 연습한 산하는 자신감이 붙었다.
생각보다 더 잘 되고 재미있어서였다.
심지어 사진 촬영과 비슷한 부분도 있다 보니, 머리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이해마저 잘 되고 있었다.
그 순간 산하의 눈앞에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떴다.
[재능 발현]
[놀라운 사건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됨을 깨달았습니다.]
[기본적인 영상 촬영 기법이 생성되었습니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유사한 분야의 재능 수치가 너무 높습니다.]
[수치를 재산정합니다.]
[박산하의 영상 촬영 기법이 85%로 상향되었습니다.]
[공민철의 사진 솜씨가 97%로 상향되었습니다.]
이거 뭐야? 극에 이른 건 한 점에서 만난다 이건가?
영상을 찍기 위한 이론 공부와 실습을 병행했더니 공민철의 사진 솜씨가 올라 버렸고, 심지어 새로운 재능마저 생겨 버렸다.
좋은 징조라고 여기던 산하는 신이 나서 영화 연출 기법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며 장면이 전환되는 페이드 아웃이나, 그 반대로 전환되는 페이드 인, 요즘은 사용 빈도가 낮아진 오버랩까지 다양한 방식을 공부하고 카메라로 연습하던 산하는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메시지가 있었으니.
[박산하의 영상 촬영 솜씨가 86%로 상향되었습니다.]
다음 날.
황 피디는 카메라를 반납한 산하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할 만했어요?”
“그럭저럭이요?”
말이 그럭저럭이지, 눈가의 다크서클만 봐도 마음고생 많이 하셨구나.
뜻대로 잘 안 되죠?
내가 죄인이지, 죄인이야.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쉰 황 피디가 그래도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웃으며 묻는다.
“생각보다 쉽지 않죠? 그래서 카메라 감독님이 참 아쉽습니다. 이게 경력, 재능 따라 실력이 천차만별이거든요. 저도 몇 년 배웠는데, 아직도 어설퍼요.”
“네, 어려운 부분이 많더라고요.”
“그렇죠? 남들도 처음 배울 때는 다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설마 산하에게 촬영 재능이 생겼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황수호는 현지에서 제대로 촬영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 * *
사할린 한인 총인구는 3만 명에 달하는데, 그들 1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으로 강제로 끌려와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
하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패망한 일본은 그들을 일본인이 아니라며 방치했고, 대한민국은 냉전으로 인해 소련과 적대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데려올 힘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무국적자로 살아야만 했던 1세대 김두섭은 늘 고국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는 고향에 돌아갈 길이 열렸어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며 여생을 보내는 중이었다.
조국이 무척이나 그립긴 하지만, 그곳보다 더 오래 살아온 이곳에 정이 들어 쉽사리 떠날 수 없어서였다.
게다가 이곳에 모든 가족이 있었고, 오래전 이산가족 상봉 때는 고국의 피붙이를 찾지도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젠 부모님의 얼굴도 형제의 모습도 잘 기억하지 못하던 김두섭은 강제로 끌려와 살아낸 세월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이와 관련된 생각을 이어가는 김두섭을 그의 아들이 불렀다.
“아버지?”
“안 한다고 전해라.”
“아버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이놈의 자식이, 어디 러시아말로 쏼라쏼라 이래라저래라하고 있어. 내가 널 그리 길렀어?”
“여기가 러시아 땅이니까 러시아말 하지, 한국 땅이에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국 갈 기회 있을 때도 안 가셨잖아요. 언제까지 무국적자로 사실 거예요?”
“잔말 마라. 난 러시아사람 아니다.”
“그럼 어디 사람인데요?”
“이놈이 정말!”
“그럼 저는요? 전 어디 사람인데요?”
“네놈은 러시아 좋아하니 러시아사람 하면 될 게 아니냐?”
“아버지!”
“이놈이 기차 불통을 삶아 묵었나. 조용히 안 해? 내가 소련, 북한놈들이 살살 구슬려도 안 넘어간 사람이야.”
“지금 언제적 얘기하시는 거예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들기던 그가 말했다.
“그건 그렇다 쳐요. 대체 촬영 거부하시는 정확인 이유가 뭔데요? 돈 준다잖아요.”
“네놈은 돈이면 단 줄 알아? 난 고국 놈들에게 동정받기도 싫고, 원숭이 취급당하기도 싫다.”
“그게 무슨 동정이에요? 자본 시대에. 그냥 인터뷰 좀 하고 돈 받아 챙기면 그만이지.”
“이놈아, 나이 처먹고 돈돈거리는 네놈이 참 한심하구나. 세상은 돈이 다가 아니야.”
“제가 저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그래요? 여기 좀 둘러보세요. 거지 같은 폐광촌 같으니라고. 지긋지긋하지도 않으세요?”
김두섭은 무국적자로 살아오며 많은 불이익을 받았다. 거주지 이전이나 교육뿐만 아니라 직업에서도 곤란을 겪어야 했다.
지금 그의 아들이 말하는 지긋지긋함이란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말함이었다.
“지긋지긋하면 네놈은 좋은 곳으로 가라지 않더냐.”
“아버지만 두고요?”
“…….”
주름진 얼굴로 말이 없어진 아버지를 답답한 듯 바라보던 사할린 2세는 방을 빠져나가며 생각했다.
그러실 거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시지.
욕하면서도 매일 그리워하시면서.
한숨을 푹 내쉰 그는 바깥에서 대기 중인 한국 촬영팀에게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안 계셔서 우리 부부끼리만 상의하고 수락했는데, 영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이에요.”
황수호는 자꾸만 꼬여가는 촬영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죄송합니다만,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소용없습니다. 워낙 완고하셔서요. 한 번 안 한다면 안 하십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황수호의 팔을 잡아당긴 산하가 작게 말헸다.
“오늘은 이만하시죠?”
“……정말 산하 씨 볼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시고요. 한 번 더 여쭤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두섭의 아들은 민망한 듯 덩달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요.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이라도 한 번 더 말씀드려 볼게요.”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국내에서도, 현지에서도, 꼬여 가는 촬영에 당황한 스태프들과 황수호는 터덜거리는 발걸음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하지만, 산하 혼자만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꼭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다음 날.
악기를 챙겨 들고 어딘가로 가려는 그를 황수호가 붙들었다.
“산하 씨, 어디 가시게요?”
“할아버님 설득하러요.”
“네? 가지 마세요. 오늘 아침에도 제가 한번 다녀왔거든요. 정말 완강하세요. 지금 다른 분 급히 알아보는 중입니다. 괜히 가셔 봐야 고생만 해요.”
“이분이 이 마을에서 제일 고령이시고, 이것저것 제일 잘 아신다면서요? 일단 다녀올게요.”
황수호의 만류를 뒤로하고 김두섭의 집으로 향한 산하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조용하기만 했다.
‘다들 어디 가셨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산하가 초인종을 한 번 더 누르자 무언가 미약한 소음이 들려오더니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누구요?”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그에게 산하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찾아뵈었던 한국 촬영팀입니다.”
“거, 일 없다니까 그러네. 귀가 막힌 게요? 아니면 사람 말을 모르는 게요?”
주름진 얼굴에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하는 김두섭의 태도는 완고했고, 산하는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설득해 보고, 안 되면 방법을 달리해야겠어.
“할아버님, 전 오늘 설득하러 온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대화하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옛날이야기도 여쭙고 싶고요.”
뜬금없는 대화 선언에 김두섭이 황당한 표정으로 묻는다.
“대화? 거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우리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요.”
그의 설득에 완고한 태도가 조금 가라앉은 김두섭이 묻는다.
“할아버지?”
“네, 할아버지요.”
핑계 좋다. 어떻게든 환심 사고 설득해 보려는 게지.
난데없이 대화는 무슨…….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김두섭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됐소만, 난 생판 남과 대화할 생각 없소이다. 그럼 살펴 가시오.”
어느새 쾅 닫혀 버린 문을 잠시 바라보던 산하는 포기하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뒤편에서 지켜보던 황수호가 다가왔다.
“산하 씨, 보셨죠? 절대 수락하실 분이 아니에요. 그만 돌아가죠. 지금 현지 가이드도 그렇고 열심히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쉽긴 해도 다른 분으로 곧 섭외될 겁니다.”
“잠깐만요.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죠.”
“네!?”
김두섭 할아버지는 살아낸 세월이 긴 만큼 한과 설움도 더 많으실 테고, 그럼 슬픈 감정을 대금 연주에 실어 보내면 변화가 있을지도 몰라.
계획대로 할아버지 집 근처에서 연주 해 봐야겠어.
찰나에 생각을 끝낸 산하가 그에게 말했다.
“황 피디님이 그러셨잖아요. 이분 촬영하면 제일 풍부하고 다양한 이야기 담을 수 있을 거라고. 1세대 중에 가장 고령이시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대체 산하가 무슨 생각인가 싶었던 황 피디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로부터 오 분 후, 김두섭의 집 근처 바위에 걸터앉은 산하는 대금을 파지했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한인들이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뭐 하는 거래?”
“몰라, 연주라도 할 모양인가 봐.”
“사할린 한인 주제로 두섭 아저씨랑 촬영한다지 않았어?”
“아들은 하고 싶어 하는데, 두섭 아저씨가 거절했다던데. 그 아저씨가 허락할 리가 없지. 예전에도 다 거부했는데.”
“하긴, 두섭 아저씨 고집을 누가 말려.”
쯧쯧 혀를 차던 두 사람이 막 갈 길을 가려던 참이었다.
산하의 따스한 숨결이 대금 취구를 통과했다.
후웅…….
오늘 그가 연주하는 곡은 당연하게도 <아리랑>이었다. 누구나 알아들어야 효과가 배가 되리라는 생각에서 선택한 곡이었다.
구슬프면서도 맑은, 바람이 우는지 사람이 울음을 참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그들의 귀를 자극했다.
그 소리는 실로 아름다우면서도, 응어리져 있던 슬픔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해소하는 능력까지 가미되어 있었다.
그 바람에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멈춰 선 사할린 한인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조금 천천히 갈까?”
“그러지.”
이내 제자리에 서서 산하의 연주를 감상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점점 눈가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왜 이리도 슬프단 말인가.
한 사내는 어머니를 찾고, 또 한 사내는 아버지를 찾으며 눈물을 흘리던 그때였다.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옛일을 떠올리려 애쓰던 김두섭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산하의 대금 연주를 들었다.
어떤 놈이 시끄럽게 구냐고 하려던 그는 멈칫했다.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뭔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래?
감정 따위, 메말라 버린 지가 언젠데…….
하지만, 김두섭은 자꾸만 귀 기울이게 되는 산하의 대금 연주와 제멋대로 움직이는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한국 방송국이건 단체건 찾아오기만 하면 아리랑으로 어설픈 신파나 찍고 있어서 영 불만이었는데, 지금 들려오는 아리랑 연주는 그렇지 않았다.
억지로 울음을 짜내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저 단순한 연주로 들리지도 않았다.
사람의 심금을 뒤흔들다 못해 뒤집어 놓는 묘한 힘이 느껴졌다.
대체 어느 누가 이런 연주를 하나 싶어 창가로 다가간 김두섭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더 강렬한 소리가 그의 고막을 자극했다.
연주 때문에 입도 살짝 벌리고 연주를 듣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라앙, 아리랑, 아라아리이요…… 아리랑…….”
옛 추억이 담긴 노래를 한참이나 부르던 그는 끝내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고향에 두고 왔던 아버지, 여동생, 골목길의 동무들, 그리운 집 담장 하며, 성황당 나무까지.
평소에는 떠올리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 않던 옛 추억이 한 번에 밀려 들어서였다.
심지어 선명하기까지 했다.
그로 인해 벽에 기댄 채로 숨죽여 울던 그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을 부모님을 생각하며 고국을 떠올렸다.
그로부터 몇 분 더 지났을까.
연주가 뚝 그쳤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기만 했던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낀 김두섭은 어느새 신발을 고쳐 신고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혹여라도 울었던 게 들킬까 싶어 얼굴을 대충 정리한 그가 그곳으로 다가갔다. 한데 사람들 얼굴이 모두 눈물 자국으로 가득한 게 아닌가.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안심하던 김두섭은 대체 누가 이런 연주를 했나 싶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 중앙에는 대화가 하고 싶다며 찾아왔던 한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에…….
저리도 젊은 사람이……?
그는 조금 전 심금을 울린 연주를 떠올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심경에 점차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수호는 이 모든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이날 오후.
혹여 김두섭이 수락해 주지 않을까 싶어 기다리는 동안 산하는 다큐 촬영용 카메라를 들고 이곳의 사람 사는 풍경이나 자연환경을 찍고 다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 피디가 미안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산하 씨가 제일 답답하겠지.
돈도 시간도 갈아 넣었는데, 이것도 저것도 되는 게 없으니까.
‘어떻게든 해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던 황 피디가 가이드에게 물었다.
“내일 그분은 확실한 거죠?”
“물론입니다. 단지 김두섭 씨보다 끌어낼 이야기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황 피디는 그나마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카메라 감독이 퇴원해서 조만간 날아온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너무 기뻤던 나머지 이제 막 숙소로 들어서는 산하에게 외쳤다.
“산하 씨, 카메라 감독님 퇴원하셨답니다!”
“와, 그거 다행이네요. 한시름 덜었어요.”
“그렇죠? 이제 일이 조금 풀리려나 봅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열심히 찍고 다니세요?”
“아, 그냥 연습 삼아 찍고 다녔어요.”
“한번 보여 주실래요?”
“네, 여기요.”
가르쳐 줬던 조작법과 촬영 기법을 얼마나 배웠는지 궁금했던 황 피디는 카메라를 넘겨받아 녹화된 영상을 재생했다.
- 24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