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사할린을 가다 (3)
그 화면 속에는 이곳 마을 주민이 산책시키던, 작고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사뿐사뿐 발을 내딛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신이 났는지 여기저기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던 강아지는 지인을 만나 멈춰 선 주인을 기다렸다.
지루한 듯 뒷발로 자신의 목덜미를 몇 번 긁어대는 모습을 비추던 렌즈는 이내 강아지의 검은 눈동자로 향했다.
피사체의 눈, 코, 입을 화면 가득히 채운 빅 클로즈업 샷은 강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할 정도로 표정 변화를 여실하게 담아냈다.
그리고 잠시 후 줌아웃 된 프레임 속에는 건물의 알록달록한 배경과 강아지 주인의 하반신, 이젠 드러누워 눈을 반쯤 감아 버린 강아지의 모습으로 장식돼 있었다.
짧지만 다양한 샷과 앵글, 구도가 가미된 이 영상은 황수호를 충격에 빠뜨렸다.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오랜 피디 경력을 지닌 황수호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상미는 물론이거니와, 어디 영화에서나 볼 정도로 노련한 촬영 방식이었다.
도대체가 어이가 없었던 황수호가 영상 재생을 멈추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산하 씨, 이게 대체 뭡니까?”
지금 찍어낸 영상이 어느 정도 취급받을지는 산하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그냥 강아지죠. 귀여워서 찍어 봤습니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배운지 며칠 안 되셨잖아요. 그런데 와, 이건…… 이걸 어떻게 찍으셨어요?”
그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던 산하가 답했다.
“그냥 가르쳐 주신 대로 찍었는데요?”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가르쳐 달라고 하셨던 거, 저 놀리신 거죠?”
“그럴 리가요.”
“아니라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이거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우리 감독님이 찍으셨다고 해도 믿겠어요.”
그의 발언 덕분에 산하는 지금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정도 수준이면 메인 카메라도 잡을 수 있겠는데?
한편, 여전히 믿을 수 없어 하던 황수호는 영상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살펴봤다.
이게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TV에서 보던 영상이구나 하겠지만, 그래서 더 더 절대 초보 솜씨가 아니지.
보통 초보가 찍어내면 시작부터 어색하고 거슬리는데, 산하 씨가 찍어낸 영상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영상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황 피디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옛날부터 카메라 잡아 보셨죠?”
“아니요. 저 진짜 초보 맞는데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이게 어딜 봐서 초보 영상이에요? 잠깐만요.”
황수호는 영상을 다시 처음부터 재생했고, 곧 일시 정지를 눌렀다.
“보이시죠? 여기서 여기로 넘어가는 거. 이건 카메라 감독님보다 더 자연스럽고 좋아요.”
“에이, 그럴 리가요. 아무리 그래도 카메라 감독님하고 비교하세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황수호가 눈을 부릅떴다.
“제가 잘 찍지는 못해도 보는 눈은 있습니다. 괜히 피디겠습니까?”
이젠 아예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던 황수호에게 다른 스태프가 다가왔다.
그는 음향 감독이었다.
“피디님, 대체 뭘 그렇게 신나게 이야기하세요?”
“아, 감독님 마침 잘 오셨네. 여기 이것 좀 보세요.”
“뭔데 그러세요?”
“일단 보시면 압니다.”
그의 재촉에 영상을 쭉 보던 음향 감독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멋지네요. 잘 담으셨다. 피디님 실력 엄청 많이 느셨네요. 제 사견이지만, 이 정도면 카메라 감독님 필요 없겠는데요? 영상 이상하다고 엄살 부리시더니.”
허탈하게 웃던 황수호가 곁에 서 있던 산하를 가리켰다.
“제가 아니라 산하 씨가 촬영한 겁니다.”
지금 자신이 뭘 들은 거냐는 듯 그가 되묻는다.
“네!?”
“제가 아니라 산하 씨요!”
음향 감독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황 피디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에이, 농담도 잘하셔. 제가 속을 줄 아셨죠?”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그에게 황수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농담 아닙니다. 정말 산하 씨가 촬영했어요. 아까 저기서 카메라 들고 촬영하던 거 못 보셨어요?”
여전히 진지한 그의 태도에 음향 감독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다.
“못 봤는데요?”
“아, 답답해. 산하 씨,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인물 테스트 촬영 한번 해봅시다. 잘하면 카메라 감독님 오시기 전에도 일정 분량 촬영할 수도 있겠어요.”
물론 산하는 이걸 염두에 두고 재능이 생기기를 바랐었지만, 여기서 알겠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제가요?”
“그럼 누가 해요? 제가 촬영한 건 이미 망했고, 카메라 감독님 오시기 전까진 따로 할 사람도 없고, 시간 촉박하니까 뭐라도 해 봐야죠.”
“그럼 인터뷰는 누가 하죠?”
물론 황 피디님이 하실 거죠?
제가 여기까지 계산에 다 넣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황 피디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대답했다.
“어차피 다큐니까, 인터뷰어는 우리 스태프 중에서 뽑죠. 아니면 제가 해도 되고. 어때요, 산하 씨?”
“그럼 정말 제가 메인 카메라 맡으라고요?”
“초반 촬영만요. 나머지는 직접 출연하셔야죠.”
그러자 음향 감독이 끼어들었다.
“피디님, 진짜 산하 씨가 촬영한 거라고요?”
“그렇다니까 왜 못 믿으세요?”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왜 안 돼요.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는데. 아무튼, 산하 씨. 우리 스태프 상대로 테스트 한번 하죠.”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요.”
“아직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 아니니까 부담 가지진 마시고요.”
말을 이어 가던 황수호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그는 비디오 저널리스트, 줄여서 VJ를 담당하는 사내였다.
메인 카메라에 미처 잡지 못한 여러 가지 상황을 잡아내는 역할이었는데, 왜 부르나 싶어 하던 그는 곧장 숙소 내부로 들어섰다.
“네, 피디님.”
“지금 산하 씨 초반 촬영 테스트할 거예요.”
VJ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조금 빡세더라도 카메라 감독님 도착하고 나서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직접 촬영하신 거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셔 놓고.”
자신의 머리를 툭 친 황수호가 대답했다.
“아, 내가 말을 잘못했네, 정확히는 산하 씨 영상 촬영 능력 테스트라고 해야겠네요.”
어리둥절한 VJ가 산하와 황 피디를 번갈아 보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알고 보니까 산하 씨 촬영 기술이 장난 아니에요. 일단 테스트는 해 봐야겠지만, 결정 나면 임시로 산하 씨가 촬영 감독 역할 맡을 테니까, 산하 씨가 촬영하는 모습 담아 주세요. 보너스 영상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그의 설명이 이어지자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VJ가 묻는다.
“잠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산하 씨가 메인 카메라를 담당한다는 말씀이세요? 인터뷰어가 아니라?”
“맞습니다.”
황 피디가 미친 건 아닌가 싶었던 VJ는 잠시 말이 없다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번 촬영 계획에 변경점이라도 있는 건가요? 신규 콘셉트라거나.”
“있죠. 초반은 산하 씨가 촬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뭐, 일단 인물 촬영 테스트는 해 봐야겠지만요.”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가 싶었던 VJ 사내는 멀뚱멀뚱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방송국에서 몇 년 일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한 VJ는 산하가 테스트로 촬영한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스태프 몇 명을 피사체로 촬영한 영상이 그야말로 고급스럽게 담겨 있어서였다.
아마추어는커녕 프로 중의 프로라고 봐도 될 정도의 실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가 삐그덕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배우신지 보름도 안 되셨다고요?”
“네, 피디님이 잘 가르쳐 주셨어요.”
그의 대답에 고개를 휙 돌린 VJ가 묻는다.
“피디님, 무슨 벼락 일타강사라도 되시는 겁니까? 전 이거 절대 못 믿어요. 아니 무슨 며칠 만에, 에이,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에요?”
숙소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황수호는 어이없어하며 반박했다.
“조금 전에 산하 씨가 촬영하는 거 다 보셔놓고 또 이러시네. 조작이나 기법이나 그냥 딱 봐도 노련하잖아요.”
괜히 질투심마저 차오르던 VJ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이게 말이 돼?
배운지 며칠 만에?
누구는 경력 쌓아도 이 모양인데.
이건 사기야, 사기.
어떻게 이런 영상을 초보가 담아내?
재능이 미치기라도 했나?
어이가 없었던 그는 속으로 실소만 흘렸다.
* * *
캄캄한 밤, 한국.
판소리 보존협회장 강정열이 비서에게 묻는다.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지? 대중상 수상자에다가 요즘 나름 잘나가는 출연자 프로그램을 종영시킨다? 제삼자가 보기엔 영 수상쩍단 말이지.”
그는 소리꾼 박산하의 향토 음식 기행이 갑자기 종영된 것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가 미슐랭 3스타를 받기 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3스타를 받았는데도 그쪽 방송사 반응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종영 선언을 해서 어쩔 수 없다지만, 다른 프로그램에서라도 섭외 노력은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그런 기미가 눈곱만큼도 안 보였다.
게다가 담당 피디가 그만두기까지 했다.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던 그의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회장님. 현재 타 방송사에서는 산하 씨 영입하려고 애쓰는데, 이상하긴 합니다.”
“그렇지? 뭔가 찝찝한 냄새가 나.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에 누군가 개입한 거라면 웃기지도 않은 거지. 어딜 우리 산하 앞길을 막으려고.”
의욕이 불끈 솟구친 비서가 묻는다.
“당장 조사 시작할까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은 강정열이 입을 열었다.
“아냐, 당장 조사까지 할 필요는 없네. 아직 뭐 큰 피해가 생긴 것도 아니고, 그쪽 이사회를 건드릴 정도면 만만한 놈은 아닐 테니까. 거물 정치인이거나, 재벌가 쪽이거나 그렇겠지. 일단 흘러가는 상황을 좀 더 두고 보자고. 우연의 일치인지, 인위적인지도 정확하게 파악할 겸.”
“네, 그럼 대기하겠습니다.”
“그러게, 그나저나 건드렸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무슨 이유로 건드릴 것 같나? 산하가 누군가에게 원한 같은 걸 질 인물은 아닌데 말이야.”
언젠가 몇 번 먹었던 그의 요리 맛을 떠올린 비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동조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산하 씨 참 좋은 분인데.”
어이없어하던 강정열이 묻는다.
“좋은 분인데 군침은 왜 삼키나?”
“……죄송합니다.”
그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아, 농담이야. 죄송할 건 없지. 그나저나 슬슬 그룹으로 복귀하든가 해야겠어. 다들 경영이 영 시원찮아.”
비서가 반색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회장님께서 맡을 당시만 해도 재계 서열 3위까지 올라섰었는데, 이제 10위까지 추락했습니다. 그룹에는 정말 회장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부는 그만 떨고 퇴근 준비나 하게.”
“네, 회장님. 바로 자택으로 가십니까?”
아쉽고 그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강정열이 산하의 요리 맛을 떠올렸다.
“그럼 자택으로 가야지. 식당 문도 닫았는데.”
“하긴, 그렇습니다. 전 밑에 내려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이내 문을 열고 사라지는 비서를 바라보던 강정열이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감은 오는데 말이야.
그저 우연이면 좋겠지만…….
* * *
사할린은 섬이다.
그리고, 김두섭에겐 타국이었다.
이 낯선 곳에서 반평생 이상을 살아오며 늙어버린 그는 늘 허전함을 간직하고 살았다.
손자들이 찾아와 재롱을 피워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새 옷을 입어도 채워지지 않던 텅 빈 마음.
한데, 요 며칠 사이 그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언가 마음 한켠에 그득하니 채워진 게,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랄까.
고생만 죽어라 하다 늙어 버린 지금, 김두섭은 하늘이 고생했다며 보상이라도 준 것만 같아 허허롭게 웃었다.
그 원인이 된 한국 촬영팀의 누군가를 떠올린 그가 이제 거실로 들어서는 아들에게 말했다.
“한다고 해라.”
- 24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