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251화 (251/445)

251화 우리가 살게 (2)

그 영상의 처음은 드론 한 대가 사할린 바닷가를 드넓게 비추며 시작되었다.

그날따라 파도가 거칠어 포말이 하얗게 일어나는 조금 낯선 바닷가.

화면이 전환되며 지상의 카메라가 주변 피사체를 더 가까이 비췄다.

렌즈에 미역, 다시마 등의 해산물을 채취하는 러시아 여인이 포착되었다.

통역사를 대동한 황수호가 나타나선,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례합니다. 지금 뭘 그렇게 열심히 채취하시나요? 채취하시는 것 좀 보여 주실 수 있나요?”

러시아 여성이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미역이랑 다시마랑 조개예요.”

“여기에서도 이걸 즐겨 드시나요?”

“당연하죠. 자주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해요.”

이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던 안차훈은 감탄사를 흘렸다. 어디 이름난 방송사도 아닌데 영상미가 제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왜 공중파나 케이블, OTT 업체도 아닌 개인 채널에 올라와 있는 거지?

신기하네.

어디서 불법으로 퍼온 건가?

그렇다기엔 처음 보는 건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어느새 장소가 바뀐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사할린 한식당이었는데, 많은 러시아인이 그곳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그리고 산하의 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지금 보고 계시는 곳은 사할린 한식당입니다.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식사 중이시네요. 왠지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한국 밥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리로 식사들을 하고 계신데요. 현지에서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고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내 황수호가 러시아인과 인터뷰를 하고 그곳의 요리를 소개하던 끝에 장면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그곳은 사할린 한인 1세대이자 크나큰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 김두섭의 자택이었다. 곳곳에 드러난 낡은 지붕과 외벽은 이 집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버텨 왔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이윽고 실내로 이동한 카메라는 김두섭의 인터뷰 장면을 비췄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차훈은 별생각 없었다. 그저 이 정도 영상이 왜 개인으로 추정되는 채널에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편집을 잘했나 못했나 따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산하가 재능 1포인트를 소모하며 촬영한 부분이 비쳤다.

“어르신은 고향이 어디십니까?”

이 질문을 받게 된 김두섭은 자동으로 옛일이 기억 속에서 딸려 나오자 잠시 말이 없었고, 대신 모든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다.

일반적인 촬영이었다면 이 장면을 화면으로 옮기는 게 전부였을지도 모르지만, 100%를 초과해 버린 산하의 재능은 그 감정마저 느낄 수 있도록 화면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로 인해 회한과 울분 추억이 뒤섞인 김두섭의 표정이 여실히 느껴지는 것에 안차훈은 충격받았다.

도대체가 이런 영상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영상이었건만, 그는 마치 자신이 저 노인의 삶을 살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 한편에 아픔과 안타까움을 절절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산하는 여러 물건의 과거를 들여다보며 많은 인물의 고통, 슬픔, 위안, 기쁨, 분노 등의 감정을 생생하게 겪었고, 그걸 발판삼아 뒤로 갈수록 더 리얼하게 영상에 녹여냈다.

그러다 보니 안차훈은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눈시울을 붉혔다.

슬픈 드라마를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그였기에,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영상 초반이나 보고 꺼 버리려고 했던 그는 한 시간이 넘어가는 다큐멘터리를 계속 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래…….’

누가 볼세라 재빨리 티슈를 뜯어내 눈가를 훔친 그는 대체 이걸 누가 제작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곧장 일시 정지를 누르고 아까 그 커뮤니티로 달려가 댓글을 살폈는데, 거기에 힌트가 있었다.

- 이거 지난번에 종영한 소리꾼 박산하의 향토 음식 기행 특별편이라던데요?

그 외에는 특별한 정보가 없었기에 안차훈은 포털사이트에 박산하로 검색어를 넣었고, 곧장 카페 여러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산하의 팬카페였는데, 그곳을 찾아 들어간 그는 게시물이 뭔가 난리가 난 걸 볼 수 있었다.

잔뜩 궁금해진 그는 간단한 가입과정을 거쳐 게시글을 자세히 살폈다.

<대박, 대박대박. 이번에 황수호 피디님 다큐 대박이에요.>

- 와, 다들 보셨나요? 감동이에요.

- 저 여기 펀딩 참여했어요.

- 저도요. 너무 잘 나와서 마음이 뿌듯해요.

- 특별편인데, 우리 하산해 씨는 왜 안 나와요?

- 잘 찾아보세요. 분명히 나와요.

- 그냥 알려 주세요.

- 다들 모르셨구나. 내레이션에 나오잖아요.

- 오, 그거 하산해였어요? 노래하는 목소리랑 많이 다르네요.

- 에이 실망, 왜 내레이션으로만 나오죠?

- 다들 끝까지 좀 보세요.

하산해는 안차훈도 알고 있었다. 요즘 제법 유명세를 치르는 연예인이라고 해야 하나.

가수 하산해랑 관련된 건가 보네. 일단마저 봐 볼까.

해당 영상으로 돌아온 안차훈은 감미롭게 들리는 산하의 내레이션에 고개를 끄덕이며 영상을 계속 보았다.

한반도에서 넘어가 변화한 사할린 한인들의 식단을 비롯해 식생과 풍경까지, 주로 산하가 촬영한 영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드디어 다큐 1부가 끝나고 예고편 이후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하던 시점.

보통은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눈여겨보기는커녕 영상을 꺼 버리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곳을 뚫어지라 살폈다.

카메라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해서였다.

그 순간 눈에 띈 이름.

<해설 - 박산하>

목소리 좋던데. 나중에 업계 관계자들 보면 서로 내레이션 좀 깔아 달라고 하겠어.

잠시 생각하는 사이 자막은 후루룩 넘어가 버렸고, 그는 미쳐 카메라 감독이 누구인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막 부분으로 커서를 옮겨 다시 재생했다.

그리고 이내 발견한 촬영자 이름이 있었으니.

<촬영 감독 - 최대원, 박산하>

엥? 감독이 두 명이야? 박산하? 동명이인인가 보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생각한 그는 영상을 앞에서 다시 한번 보려다가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 영상이 시작되자 그 손길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VJ의 카메라가, 메인 카메라를 잡고 촬영 중인 하산해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인터뷰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보너스 영상은 그에게 황당함을 안겨 주었다.

설마, 이걸 정말 하산해가 촬영했다고?

에이 거짓말.

그 정도 영상을?

그냥 동명이인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기엔 이름도 같은데.

뭔가 미궁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상황에 잔뜩 궁금해진 안차훈은 또다시 산하의 팬카페를 찾아갔다.

- 하산해 미쳤어요. 다들 자막 좀 보세요. 카메라 감독이 박산하래요.

- 진짜요? 전 그냥 자막 부분에서 꺼 버렸는데.

- 돌았네. 그럼 그 영상을 박산하가 찍었다는 거잖아요. 이거 장난 아닐까요?

- 장난이라기엔 너무 진지한 영상인데요? 여기에 장난치면 욕 배 터지게 먹을걸요?

- 여러분, 자막 끝나고 숨겨진 보너스 영상 있어요.

- 와, 진짜네요. 정말 하산해 님이 촬영했나 봐요. 아니면 잡는 시늉만 했나?

- 모르죠. 비밀은 저 너머에.

- 설마 거짓으로 하겠어요? 자막에 넣은 거 보니까 확실한 것 같은데요?

그 댓글을 보던 안차훈은 믿을 수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비슷한 시각.

카메라 감독 최대원은 마음이 하는 소리에 부정의 메시지를 던졌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내 짬밥이 몇 년인데.

산하 씨가 그 정도로 찍을 리가 없어.

장난일 거야. 장난.

진짜 장난이 분명해.

피디님이랑 산하 씨도 그렇지. 무슨 그런 고약한 장난을 다 치고 그래.

그냥 노련한 프리랜서가 찍은 걸 거야.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심호흡을 하고 인터넷에 올라온 다큐 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 잠깐만에 눈을 크게 떴다.

미, 미친.

어떻게 저렇게 찍어.

뭐야 저거?

김두섭의 인터뷰 장면은 감정이 전달될 정도로 강렬하게 찍혀 있었고, 당황한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자막 쪽으로 커서를 옮긴 그는 내면에서 이미 알고 있던 진실과 마주하고야 말았다.

내레이션도 박산하, 카메라 감독도 박산하.

심지어 보너스 영상에 그 증거가 확연히 찍혀 있었다.

‘말도 안 돼…….’

* * *

산하는 휴일을 맞아 새봄과의 데이트를 끝내고 본가에 도착했다.

해도 져서 사위가 어슴푸레해진 그 시각, 현관으로 들어선 그는 비틀거리며 요가 자세를 취하는 윤정을 발견했다.

“오, 박윤땡. 몸치 그 자체.”

“뭐래. 박산하 왜 왔어! 엄마 오빠가 놀려.”

“놀리긴 누가 놀렸다고 그래. 진실 그 자체지.”

“됐거든?”

“되기는, 요새 일은 잘하고?”

“오, 박산하. 수상해. 그런 걸 다 물어보고?”

“그냥 물어봤어. 혹시 잘려서 내 돈 뜯어 가는 거 아닌가 싶어서.”

“야!”

“왜!?”

“아침방송 출연한다며?”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냐?”

“주워듣긴 누가 주워들어. 동식 오빠가 다 얘기해 줬어.”

“아, 그놈의 동식이 입이 싸다니까.”

“아니거든? 나한테만 살짝 얘기해 준다고 했거든?”

“그냥 립서비스 한 거지. 그걸 믿냐?”

“아, 됐어. 그래서 관심도 없던 아침방송은 왜 나가는데? 맞다! 그 다큐 그거 홍보하려고 나가는 거 아냐? 와, 그 다큐 장난 아니던데? 진짜 직접 찍은 거야?”

“그럼 직접 찍었지. 거짓말하겠냐? 그나저나 박윤땡 쪽집게네, 쪽집게야.”

그때, 앞치마를 하고 거실로 나온 장순희가 물었다.

“아들, 아침방송 나와?”

“네, 엄마. 윤정이가 얘기 안 했어요?”

“방금 처음 들었는데? 너 왜 얘기 안 해?”

“까먹었어.”

“잘한다. 약사님이나 되시는 분이. 벌써부터 깜빡하면 어떡한다니?”

“아, 엄마. 이게 뭐 중요한 일이라고 잘 기억해. 대충 알아두면 되는 거지. 어? 엄마 타는 냄새 나.”

“어머!”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간 어머니를 바라보던 산하가 물었다.

“아버지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고용주는 박산하잖아.”

“고용주는 무슨, 우리 아버지는 왜 퇴근을 안 하시냐. 아주 공장에서 사시네 사셔.”

“미슐랭 식당 되고 나서부터 더 그래. 공장 식품이 그렇게 잘 팔려?”

“매출은 좀 확 뛰었더라.”

그때였다. 울상을 한 장순희가 거실로 나오며 과하게 튀겨진 새우튀김을 보여 줬다.

“어떡한다니. 잠깐 한눈판 사이에 이렇게 돼 버렸네. 다들 조금만 더 기다려.”

“엄마는 좀 쉬세요. 제가 튀길게요.”

“아서라. 쉬는 날은 푹 쉬어 둬.”

“괜찮아요. 저 요리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어머니를 강제로 거실 소파에 앉힌 산하가 튀김 요리를 시작하며 생각했다.

재능 늘어난 후로 다른 요리도 점점 더 맛있어지는 것 같단 말이야.

뭔가 나도 모르게 배워 가는 느낌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산하는 튀김 요리에 집중했다.

* * *

<광복절 기념 다큐, ‘그곳에서도 잊지 못했다.’ 조회 수 급등>

<아침방송 출연한 하산해, 다큐 촬영 비화 소개>

<하산해, 다큐 촬영감독으로 활약했다?>

<프리 전향한 황수호 피디, 명품 다큐 만들어>

- 영상이 너무 미쳐서 눈물 질질 짜다가 누가 촬영했나 보니까 박산하래요.

- 이게 말이 돼요? 신이시여. 전 왜 아무 재능이 없는데요?

- 어떻게 저예산 다큐가 공중파 다큐보다 품질이 더 미침?

- 저 두섭 할아버지 이야기 들으면서 울었잖아요. 진짜 눈물 나요. 안 보신 분, 그 부분은 꼭 보세요. 아침방송 보니까 그 부분도 하산해가 촬영했대요.

- 돈 없어서 펀딩까지 했다던데, 미쳤네.

- 진짜 잘 찍었더라고요. 김두섭 할아버지 화이팅!

- 두섭 할아버지 어떻게든 가족 꼭 찾으시길 바랄게요.

- 우리 가족 우연히 다 같이 봤는데, 광복절에 뜻깊었어요.

- 황 피디 특별편, 방송사에서 반대해서 개인적으로 촬영했다는 소문 들리던데요?

- 향토 음식 기행 시청률 나름 괜찮았는데 종영했잖아요. 그러고 나온 황 피디 저거 찍음. 방송사 윗대가리들 보는 눈도 없나.

- 하산해 정도면 붙잡으려고 난리일 텐데. 웬 종영인지.

처음 하산해의 팬들이 몰려들어 영상을 시청하자 지금 뜨는 영상에 노출됐던 사할린 다큐는 점점 노출이 많아지며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인터넷 뉴스에도 언급된 <그곳에서도 잊지 못했다,>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이 영상을 주목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거대한 다국적 OTT 업체 엔플릭스였다.

그곳의 책임자는 이 영상을 끝까지 돌려보고 난 후 감동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멋진데?’

그리고 다음 날.

영상 채널에 기재해 둔 이메일로 누군가에게 독점 제의를 받고, 황수호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죄송하지만, 어딘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엔플릭스입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그는 산하를 먼저 떠올렸다. 모두 산하 덕분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그가 찍어 놓은 분량이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지다 못해 신이 난 황 피디는 조금 전 상대방이 제안했던 사항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판권을 사시겠다고요?”

“네, 가격은 조율해야겠지만,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광복절이 지나고 나면 각종 플랫폼에서 영상을 팔아 보려 했던 황수호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에게 전권이 없다는 걸 떠올린 황수호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죄송하지만 저는 결정 권한이 없습니다.”

“네? 그럼요?”

“이번 다큐 영상 최대 투자자는 따로 있습니다. 하산해 씨 아시죠?”

“아, 그런가요? 그럼 한번 여쭤봐 주시겠어요?”

“네, 일단 상의해 볼게요. 다시 이 번호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그럼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되자마자 황수호는 산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하 씨! 산하 씨! 빅 뉴스! 빅 뉴스입니다.”

“저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해 주세요.”

“…….”

“에이, 농담인 거 아시면서. 무슨 일인데요?”

“아, 전 또. 엔플릭스 아시죠?”

익숙한 이름을 듣게 된 산하는 여동생 박윤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요즘 쉬는 날이면 방에서 체육복 입고 뒹굴면서 드라마만 보고 있었다.

“알죠. 제 여동생이 요즘 거기에 미쳤거든요.”

“거기에서 연락 왔습니다. 이번에 찍은 다큐 판권을 사겠대요. 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판권을 산다고?

잠시 생각해보던 산하가 입을 열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 25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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