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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284화 (284/445)

284화 변신은 무죄 (5)

누군가 금세 눈치챌까 봐 손님의 헤어를 조금은 평범하게 손질했던 산하는, 오민석 특유의 헤어 솜씨를 선보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요리부터 해야 했기에, 미리 만들어 놓은 토마토소스를 이용해서 스파게티를 조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문화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손지유의 스파게티 요리 솜씨가, 현재 가진 솜씨 대비 4% 상향됩니다.]

이미 손지유의 실력은 100%를 채운 마당이었는데, 거기에 4%가 더해진다는 것에 산하는 하하 웃었다.

오늘 손님들 난리 나겠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후, 따끈한 스파게티 요리가 두 커플이 자리한 테이블로 서빙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가게 내부를 훑어보며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거의 안 한 것 같고.

조금 이상한 식당 같은데.

그나마 스파게티 요리가 맛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면을 돌돌 말아 숟가락에 얹고 맛을 보았다.

그러자 전율이 일어날 만큼 엄청난 소스의 맛이 혀를 강타했다.

마치 토마토밭에서 열매를 바로 따 먹기라도 한 것처럼, 신선하면서도 진한 소스의 맛은 그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풍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자기야. 이건 맛집이 아니잖아.”

정두환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맛이 이상해? 이상하다. 내 입에는 맛있던데.”

“그게 아니라…… 일단 먹고 얘기해.”

그녀의 말에 그는 스파게티를 포크로 쿡 찍어서 대충 입에 쑤셔 넣었고, 이내 화들짝 놀라 버렸다.

뭐야, 어제보다 더 맛있는데?

여기 정말 돌았나?

너무 맛있어서 어이없어하던 그는 스파게티를 미친 듯이 퍼먹었다.

맞은편의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딸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실내에 가득하던 그때, 접시를 아주 깨끗하게 비워낸 정두환은 바닥에 남은 소스가 아까운 듯 혀로 핥으려 했다.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모양새가 너무 추해 보였던 여자친구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잠깐, 그러지 마.”

“아, 내가 좀 그랬지? 미안.”

“여기 숟가락으로 먹어.”

이윽고 숟가락까지 이용해 소스를 박박 긁어먹은 후, 그녀는 감탄사를 토해냈다.

“진짜, 너무너무 맛있다. 환상적이야. 나 유럽 배낭여행 때 먹었던 스파게티 맛집도 이건 못 따라가. 이건 그저 맛집 수준이 아니야. 진짜 전 세계 최고일 거야.”

“와, 난 진짜 맛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정도구나. 대체 여기 사장님 뭐 하시는 분이지? 어제보다 더 맛있어.”

“자기 덕분에 이런 맛을 다 본다. 좋았어. 저번에 까인 점수 복구해 줄게.”

“진짜지? 땡큐!”

그때였다.

다가온 직원이 그들에게 말했다.

“맛있게 드셨나요?”

“네, 정말 맛있어요. 혹시 추가 주문 안 되나요? 내일도 오픈하나요?”

그녀의 질문에 직원이 정중하게 답했다.

“죄송하지만 추가 주문은 어려울 것 같아요. 내일은 휴무입니다.”

“아…….”

두 사람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오늘까지 이벤트를 하고 있는데요. 혹시 이 앞에 안내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헤어를 다듬으시겠습니까?”

요리로 인해 기대감이 잔뜩 차오른 그녀였지만, 헤어는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남자친구의 손질된 헤어를 보자 믿음이 생겼다.

“네!”

이윽고 옆 점포로 이동한 그녀는 마스크를 쓴 사내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딘가 외형이 낯설지 않았다.

체형이나 눈뿐만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를 가만히 관찰하던 그녀는, 앉으라는 산하의 말에 일단 앉으면서 거울을 통해 상대방을 조심스레 관찰했다.

그러다가 눈을 부릅떴다.

아까, 엄청난 스파게티 요리도 그렇고.

눈썰미 좋은 그녀의 눈에는 하산해가 분명해 보였다.

“맞죠!?”

“네?”

“혹시 이거 새 프로그램 촬영하는 거예요?”

무척이나 기뻐하는 여자친구의 모습에, 정두환은 당황했다.

“자기야, 왜 그래?”

“모르겠어? 이분 하산해 님이잖아!”

“뭐?”

“우와, 진짜 대박이다. 그게 미슐랭 별 받은 요리였어요?”

설마 만나자마자 눈치챌 줄은 몰랐던 산하가 하하 웃으며 마스크를 벗었다.

“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저 하산해님 팬카페 초창기 멤버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초창기 멤버시라니, 만나서 영광입니다.”

“제가 영광이죠. 보자마자 한 방에 딱 알아봤어요. 우와우와. 역시 미슐랭 요리사 다우세요. 맞다, 저 헤어 진짜 다듬어 주시는 거예요? 눈치챘다고 안 해 주시는 거 아니죠?”

“당연히 해 드려야죠. 그 전에, 혹시 두 분을 촬영한 게 방송에 나가도 될까요?”

“그럼요. 당연히 괜찮아요.”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자, 독일에서 헤어 대중상을 수상한 산하가 헤어를 다듬어 준다는 생각에 짜릿함을 느꼈다.

잠시 후,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산하의 미용가위가 신들린 듯 움직였다. 샥샥샥 소리가 나면, 어느새 그녀의 헤어는 새로운 변화로 꿈틀댔다.

그는 거침없이, 쉴새 없이, 오민석의 헤어 솜씨를 아낌없이 뿜어냈고.

실내의 모든 사람은 그 예술과도 같은 움직임에 감탄했다. 단순한 가위질이 예술로 보일 지경이라니.

특히 손님이 산하를 알아챘다는 말에 다급히 쫓아온 심장원 피디는 눈을 부릅떴다.

그도 산하의 진정한 헤어 솜씨를 현장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미용가위와 잔상을 남길 만큼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길은 점차 아름다운 헤어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 가위질이 끝났을 무렵, 그녀는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마음에 드세요?”

그녀는 태어나서 가장 마음에 드는 헤어를 접했고,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 순간 산하의 눈앞에 미션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식당 손님에게 대중상에 빛나는 헤어를 선보이자’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민석의 헤어디자인 솜씨가 100%로 상향되었습니다.]

몇 시간 후, 이 소식은 하산해 팬카페에 전해졌는데, 다들 원통하다는 듯 댓글을 쏟아냈다.

- 아놔, 푸드트럭만 눈여겨봤는데.

- 이건 사기야.

- 심 피디, 부숴 버릴 거야.

- 이제 거기선 안 하겠죠?

- 이미 다 철수했어요.

- 크, 부럽다. 하산해의 미슐랭 요리를 그렇게 쉽게 먹다니.

* * *

브라질에서 귀국한 고상식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숨을 크게 들이켜며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이윽고 미친놈처럼 하하 웃던 그가 정색하더니, 비서에게 말했다.

“또 그만두기로 했다고?”

“네, 도련님.”

“이번엔 또 이유가 뭐야?”

“……그게, 이유가 조금 이상합니다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재깍재깍 말하는 게 어때?”

유리알처럼 차가워 보이는 그의 시선에, 비서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음을 느끼며 황급히 대답했다.

“네, 도련님. 그런 짓을 하는 건 불경스러운 일이랍니다.”

고상식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뭐?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그건 저도 잘…….”

“하여튼 그쪽 바닥은 쓰레기들 천지야. 프로정신이 없어.”

“……어쩌시겠습니까? 이제 너무 유명해져서 위험할 것 같습니다만.”

비서의 말에, 고상식이 피식 웃었다.

“위험하다고?”

“네, 도련님. 이제 너무 유명인이라서,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도련님 승계에도 영향이…….”

그래, 승계는 받아야지.

도일그룹을 농락하려면 제일 윗자리에 앉는 게 최선이거든.

그 전에, 박산하 이거 웃기는 놈이네.

혼자 실실 웃는 그를 보며, 비서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만 좀 해.

그때, 고상식이 입을 열었다.

“이 비서, 그거 알아?”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왜 도일식품으로 발령내 달라고 했는지 아냐고.”

“……말씀해 주시면 새겨듣겠습니다.”

“새겨들을 필요까진 없고, 우리 정공법으로 한번 가 봐야지?”

“네?”

“승계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말이야.”

비서는 대화를 하자는 건지, 혼잣말을 지껄이고 싶은 건지 모를 고상식을 의문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고, 음침하게 웃던 고상식은 자세한 설명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간이 꽤 흘렀다.

경기도에 자리를 잡기로 한 강영신의 생산기지 설립 계획에 발맞춰, 경기도 측에서는 그 지역에 머무를 직원의 정주 여건 개선을 위한 신도시를 계획한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들려왔다.

그러자 산하의 식품공장이 위치한 곳의 땅값도 덩달아 그 값이 더 올랐다.

그리고 따끈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던 어느 날, 산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려 애쓰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직 땅을 팔진 않았지만, 계획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였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식품 회사 한 곳의 부도였지만, 박상태에게는 찢어진 채 아물지 않은 상처였고, 이제 그 상처를 완전히 봉합할 때라고 생각한 산하는 스마트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예, 아버지. 저요. 어디세요?”

“어디긴 어디야. 공장이지. 왜?”

“다음 주에 저랑 새 공장 부지 보러 다니시면 어떨까 하고 전화드렸어요.”

“…….”

“아버지?”

이미 간단한 소식은 접한 바 있던 박상태가 물었다.

“……알았다. 얼마나 크게 지으려고?”

“옛날 은성만큼이요. 아니다. 더 크게 지어야겠어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알았다. 지금 바빠서, 그건 이따가 얘기하자.”

일부러 통화를 종료한 박상태의 뇌리에 옛일이 떠올랐다.

본디 은성식품은 산하의 증조할머니가 차린 식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맛이 너무나 기가 막혀, 한 번 맛본 그 누구라도 잊지 못하던 된장찌개.

그 된장찌개를 팔던 식당은 오춘희의 아들 박태산이 사업과 접목하면서 꽤 빠르게 성장했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를 따라 할 순 없지만, 그 맛을 제품에 조금이라도 담으려 노력했던 열정이 빛을 본 것일까.

은성식품은 날이 갈수록 커갔고, 유명해졌다.

하나 파고 없는 사업이란 없는 법이다.

시대의 흐름은 그 잘나가던 은성식품을 삐걱거리게 만들더니, 결국 좌초되게 만들었다.

그 마지막 선장이었던 박상태는, 지금 아들에게 전해 들은 말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아들의 친구 하동식에게 잠시 전화 좀 하고 오마 하고 밖으로 빠져나간 그는 공장 뒤편으로 이동했다.

꽃샘추위마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초여름 오후였다.

맥동하는 천지의 생명만큼이나, 박상태의 심장은 거칠게 요동쳤다.

아들이 무리해서 땅을 사들일 때만 해도 염려가 되었지만, 여봐란듯이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더니 이젠 공장 부지를 보러 가잔다.

이제 땅을 팔아 옛 은성만큼이나 거대한 식품 공장을 지을 계획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니, 옛 은성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크게 지을 거란다.

그의 눈동자에 호수처럼 눈물이 가득 고였고, 떨어져 내린 닭똥 같은 눈물이 메마른 대지를 적셨다.

그 얼마나 염원했던가.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허망하게 스러져간 은성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다.

한데…….

차마 속으로도 말을 잇지 못하던 박상태의 발치에는, 때를 모르고 피어났다가 시들해진 금잔화 한 송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주황빛 꽃이 박상태의 눈물에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금잔화의 꽃말은 비탄과 실망이다.

그 꽃이 박상태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너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이제 끝이라고.

충혈된 눈으로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던 박상태는 옷 소매로 눈가를 슥 닦았다.

그리고 아들을 떠올렸다.

그래, 산하야.

희망은 결국 보답을 받는구나.

네 말이 맞다.

사람은 꿈을 꾸어야지.

이 아비가 미안하구나.

장하다.

장해…….

이 소식을 접한 것은 비단 박상태만이 아니었다.

박태산, 즉 산하의 할아버지는 이 소식을 접하고 마당으로 나가 저 멀리 바다를 보았다.

예전에 늘 새카맣고 암울하게 넘실거리는 듯 보였던 바다는, 무척이나 푸르고 희망차게 느껴졌다.

그길로 박태산은 지팡이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보는 사람마저 그 감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주름진 얼굴에는 기쁨이 솟아났다.

들썩이는 어깨와 움직이는 춤 선 하나하나에 오랜 절망이 떨어져 나가고 희망만이 자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태산의 딸이자 산하의 고모 박은심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 * *

프랑스 가을 특별초청 미술 전시회 관계자들은 파블로 교수의 강력한 의견에, 얼마 전 다들 한국을 다녀갔다.

그리고 동일한 결론을 냈다.

이건 꼭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 웹툰 원화 전시회 공식 메일로, 영어로 작성한 초청 메시지를 전송했다.

이 메일을 처음 접한 사람은 관광공사에서 근무 중인 사내였다. 그는 그 메일을 해석하자마자 이번 원화 전시회를 담당 중인 김미지에게 소리쳤다.

“와, 이것 좀 보세요.”

“뭔데 그래요? 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요.”

“이건 꼭 보셔야 하는데.”

“그거 바로 안 본다고 어떻게 돼요?”

“네!”

“뭐라고요? 아니기만 해 봐요. 뭔데요?”

“공식 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바삐 하던 일을 멈춘 그녀는 곧장 메일함을 확인했고, 최신 메일 제목을 훑었다. 그중의 하나가 김미지의 눈에 띄었는데, 그 뜻을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르 살롱에서 보냅니다.>

- 28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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