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넘볼 수 없다 (1)
김미지는 일단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며 제목을 클릭했다. 그리고 그 메일의 세부 내용을 읽어 가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친애하는 박산하 작가님의 작품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상설 전시회도 아닌, 가을 특별초청 전시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에, 김미지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꼈다.
그래서 보낸 사람의 메일 주소를 확인했더니, 그쪽 공식 메일 주소가 맞았다.
누구에게나 통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요청해 올 줄은 몰랐던 그녀는 메일을 다시 꼼꼼히 읽어 보았다.
세상에 어쩜 좋아.
비너스, 모나리자 등으로 잘 알려진 명작을 포함해 38만 점에 이르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
세계 3대 박물관이자 파리 3대 미술관답게, 이곳의 방문객은 끊이지를 않았다.
관광객이라면 거의 필수코스로 찾는 곳에 그의 작품이 내걸린다니.
이번 기회야말로 박산하라는 예술인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릴 기회라고 생각한 김미지는 당장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부터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작가님 전화 좀 받으세요. 정말 놀라운 소식이에요.
그녀의 애원을 듣기라도 한 건지, 산하가 전화를 받았다.
“제가 잠시 바빴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있어요.”
“뭔데요?”
“메일이 하나 왔는데,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가님 작품을 가을 전시회에 초청하고 싶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루브르요?”
“네. 깜짝 놀라셨죠?”
하나 산하의 목소리에는 별달리 흥분한 기색이 묻어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 관람객 여전히 많지 않나요? 가을에도 많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래도 이런 기회 흔치 않잖아요. 이번 전시회 일정까지만 하고, 연장 없이 종료하시는 건 어떠세요? 그다음에 작품 들고, 바로 프랑스로 날아가시는 거예요. 그럼 시간 딱 맞을 것 같아요.”
“글쎄요. 전 조금 그렇습니다.”
김미지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듣고 당황했고, 어찌나 안타까웠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네? 왜…… 왜요? 어째서요?”
“아직 국내에서 못 보신 분도 많은데, 다른 전시회에 작품을 내 거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국내 관람객이 뜸해지면 그때 하죠.”
“나중에 그쪽에서 거부하면요?”
“그럼 그러라고 하세요.”
“작가님, 진심이세요?”
“네. 제가 어디 빚진 것도 아닌데, 그쪽 뜻대로 해 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딱히 아쉽지도 않고요.”
잠시 말이 없던 김미지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작가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 같으면 덥석 수락했을 텐데.”
“뭐,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 국내 관람객을 무시하는 처사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요. 초청은 감사하지만, 여기 일정 끝난 후에 생각해 본다고 전해 주세요.”
“……아니요, 이상하게 생각 안 했어요. 일단 작가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답장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통화를 종료한 산하는 피식 웃었다.
역시 우리 쇠똥이 형님 수묵화 솜씨는 프랑스에서도 통하네.
한편, 답장을 본 전시회 관계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기뻐하며 수락할 줄 알았건만, 거절 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이었다.
계획한 한국 전시회 일정을 제대로 소화한 연후에 생각해 보겠다는 답변이었다.
어이가 없었던 그는 파블로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정말 웃기는군요.”
“뭐가 웃깁니까?”
“답장이 왔습니다만…….”
“아, 뭐라고 합니까?”
“거절당했습니다.”
“거절을 했어요? 그게 사실입니까?”
“네, 그쪽 전시회 일정 모두 소화하고 난 뒤에, 참가하겠다도 아니고 생각해 보겠답니다.”
“허…… 그건 대체 누구 의견인가요?”
“정확히 밝히진 않았지만, 그 동양화 작가의 의견 아니겠습니까?”
버럭 화를 내려는 건지, 붉으락푸르락하던 파블로 교수의 표정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음…… 프라이드가 제법이군요. 그럴 만도 해요.”
“그래도 교수님, 이건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다른 훌륭한 작가들도 많습니다.”
“그쪽도 그 작품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계획한 일정을 소화하는 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 천천히 초청하기로 하죠.”
그의 발언에 담당자는 할 말을 잃었다.
전 같은 성격이었으면, 제깟 놈이 뭐라고 뻗대냐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참, 교수님 그 작가한테 푹 빠지셨네.
그럴 만하긴 하지만…….
* * *
도일식품 R&D 센터 소장은 커다란 박스를 전달받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뭡니까?”
고상식의 전담 비서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된장찌개 간편 식품입니다.”
연구소장이 답답하다는 듯 시선으로 그 간편 식품을 가리켰다.
“그게 궁금한 게 아니라, 이걸 왜 주시는 건지 궁금한 겁니다.”
“그대로 카피하고, 더 뛰어난 제품으로 업그레이드해서 판매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의 상사, 즉 고상식 본부장을 떠올린 연구센터 소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이요? 이미 우리 회사에서도 시판 중인 된장찌개 제품이 있습니다. 한데 이걸 왜?”
“저도 그저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아무튼 이 제품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혹시 이 제품 드셔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먹어 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렇군요. 한번 맛보시고, 당분간 새로운 된장찌개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주십시오. 요즘 트렌드가 발효 식품이라면서요?”
“네!? 그러기에는 연구 중인 제품이 많아서…….”
“모든 걸 중단하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건 조금 천천히 하고, 업그레이드된 된장찌개 개발에 자원을 최대한 쏟아부으라는 본부장님 지시였습니다.”
도일 식품에도 타 회사와 마찬가지로 사장도 있고 부사장도 있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회장의 손자인 고상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연구개발센터 소장도 그저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겠다고 여겼다.
“음…… 알겠습니다. 연구해 보도록 하죠.”
“그럼 고생하세요.”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온 이 비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자신이 모시고 있는 고상식이란 인간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일식품은 현재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으며, 다양한 식품 연구개발 및 출시로 한창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의 이번 결정은 도일식품의 발전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사장이나 부사장과 충돌이 생기는 건 불 보듯 뻔해 보였다.
게다가 정공법이라더니, 이건 그냥 남의 상품 베끼기 아닌가.
도대체가 한 사람을 어디까지 방해할 셈이지? 대체 무슨 원한이라도 진 거야?
에이 몰라.
싸우든가 말든가.
내 한 몸이나 잘 건사해야지.
고상식 아래에서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인데, 날 놔주지를 않는단 말이야.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된 거야. 이런 짓 하려고 코피 나게 공부한 건 아닌데.
씁쓸한 미소를 짓던 이 비서는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는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같은 시각, 덩그러니 남겨진 박스에서 된장찌개 간편 제품을 꺼낸 연구센터 소장이 포장지 겉면을 살펴보았다.
<ㅇㅊㅎ 된장찌개>
이걸 카피하라고?
뭐 한두 번 해 본 일은 아니지만, 굳이 똑같은 된장찌개를? 맛이 엄청 좋은가?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뭐 나야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어?
어깨를 으쓱한 연구센터 소장은 타사 된장찌개 제품을 박스 안으로 툭 집어 던졌다.
* * *
드라마 술왕부는 여전히 인기를 더해 가고 있었는데, 시청자들의 가장 큰 궁금증은 주인공 스승 역할을 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냐는 거였다.
그 궁금함을 가진 사람 중의 한 명, 봉만두 동생 봉순영은 TV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늘은 하산하는 주인공을 스승이 덤덤한 표정으로 떠나보내는 장면이었다.
“명심하거라, 쉬운 길은 너를 나태하게 만들 것이다.”
“예, 스승님.”
“이만 가 보거라.”
이내 주인공은 봇짐을 멘 채 떠나갔고.
스승은 무심한 듯, 섭섭한 듯 복잡한 심경을 눈동자에 담았는데, 카메라가 그 장면을 클로즈업했다.
평소 교묘한 각도로 얼굴을 제대로 비추지 않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확대된 연기자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봉순영이 두 손을 짝 마주쳤다.
“오빠오빠, 저 사람 하산해님 맞는 거 같은데?”
지금 막 조리가 완료된 라면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봉만두가 말했다.
“아니라고 해도, 또 설레발이네. 내가 그런다고 형님을 만나게 해 줄 것 같냐?”
“아, 왜 못 만나게 하냐고.”
“우리 형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냐. 네가 반하고 상처받을까 봐 차마 만나게 할 수가 없다.”
그 순간, 봉순영이 벌떡 일어서서 주방으로 향하더니, 마치 무에타이 선수처럼 봉만두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이 바보탱이!”
“어쭈? 봉순영, 내가 널 이렇게 가르쳤어? 버릇이 없구나.”
“꼭 노인네 같은 말투로 뭐라는 거야. 흥이다, 흥!”
입을 삐죽거리던 봉순영이 소파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은 이번 장면을 어떻게 느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오, 이번에는 제대로 보여 주네요.
- 아무리 봐도 느낌이 하산해 같단 말이죠.
- 어? 저도 그렇게 느꼈는데.
- 밑져야 본전이죠. 전 홈페이지 응모하고 왔습니다.
- 앗, 늦었다.
- 선착순 달료달료.
- 제발 선착순 안에 들었기를…….
풍류에서는 스승 역할을 최초로 맞히는 이에게, 선착순으로 소정의 상품을 증정하기로 돼 있었다.
한데 여태 아무도 못 맞히자, 작정하고 클로즈업을 택한 것이었다.
따라서 산하를 알아보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하나, 봉순영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하산해를 곁에서 지켜본 오빠의 확정적인 대답 때문이었다. 이건 이래서 아니고, 저건 저래서 아니라는 봉만두의 말에 완전히 넘어갔달까.
다음 날.
풍류에서는 스승 역할을 한 연기자가 누구인지 밝힘과 동시에 한정판 웹툰 캐릭터 굿즈 세트에 당첨된 이가 누구인지도 발표했다.
이 공지를 보게 된 봉순영은 부들부들 떨었다.
“봉만두 이 바보야!!”
“어쭈? 누구보고 바보래?”
“같이 일하는 사장님 얼굴도 못 알아보냐? 멍충이! 똥개 멍충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었다. 그걸 무심코 읽어내려간 봉만두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진짜? 에이, 말도 안 돼. 내 눈썰미가 얼마나 좋은데…….”
말을 흐리는 오빠의 말에 봉순영이 항의했다.
“눈썰미 같은 소리 하네. 오빠 때문에 응모도 안 했잖아. 물어내. 한정판 굿즈 내놓으라고!”
“……그게 말이다. 순영아.”
“뭐? 왜?”
“사람은 착각의 동물이란다. 때로는 혼란한 감정에 휩싸여 오판을 할 수도 있는 법이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형님은 이런 말을 남기셨다. 약간의 광기도 없는 위대한 천재란 있을 수 없다. 이 오빠가 요즘 광기에 휩싸여 오판을…….”
인상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봉순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빠?”
“응?”
그녀가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며 외쳤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그만해! 굿즈 내놓으라고!”
그 시각, 뉴스를 본 술왕부 애청자는 혼란에 휩싸였다.
<하산해 충격적인 연기 실력, 베테랑 연기자도 혀 내둘러>
<절반이 애드리브, 설덕수 총감독도 감탄했다>
- 와, 진짜 노인인 줄 알았는데. 하산해라니.
- 전 적어도 50대 이상 연기자인 줄 알았어요.
-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 애드립? 애드리입? 완전 돌았네. 그게 어딜 봐서 애드립?
* * *
스승 역할 연기자가 누구인지 밝혀지고 난 후였다. 다양한 곳에서 산하에게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이걸 죄다 거절한 산하는, 오늘 아버지와 함께 드넓은 부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버지 괜찮지 않아요? 동식이 넌 어때?”
“어…… 난 좋아 보이는데. 가격도 괜찮은 것 같고.”
박상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여기가 마음에 쏙 드는구나.”
“그럼, 별일 없으면 여기로 결정할게요. 이의 있으시면 지금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동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사기 전에 팔리는 거 아니야?”
“이렇게 덩어리 큰 걸 누가 쉽게 사겠어? 뭐, 누가 먼저 가져가면 어쩔 수 없고.”
“너도 참 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냐? 나 같으면 조급할 것 같은데.”
“조급해한다고 해결되냐?”
그 말을 끝으로 산하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아직 기존 공장용지를 판매한 게 아니라 당장 구입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만약 매매하게 된다면 이곳이 은성식품의 부활을 제대로 알리는 장소가 될 터였다.
하나,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현재 대량식품생산에 적용 가능한 최대 비율은 22%였는데, 과거 홈쇼핑 판매 미션에 실패한 후로 미션이 안 떠서 비율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22% 안에서 무작위로 결정되다 보니, 맛 차이가 조금씩 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제품 고유의 맛도 살짝 있고 맛있긴 하지만, 타 업체 동종 제품을 압도할 만큼의 경쟁력은 없었다.
오로지 미슐랭 요리사의 개발 제품으로 소문나 잘 팔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타 식품 회사, 특히 대기업에서 비슷한 제품군을 단가를 낮추어 공급하는 데다 홍보에 돈을 쏟아붓는 바람에 판매 부진이 염려되고 있었다.
중소기업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열심히 개발해 보거나, 적용 가능 비율을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맛으로 승부하는 방법뿐이었다.
그 순간, 산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 상향된 제품을 출시하고, 목표치를 채우자]
[목표 - ㅇㅊㅎ 브랜드 점유율 1% 이상 달성]
[현재 - 0.7%]
[보상 – 식품 공장에 적용 가능한 최대 비율이 32%로 증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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