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넘볼 수 없다 (2)
오, 좋은데?
공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보니 제품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었고, 생산된 제품도 브랜드명 ‘ㅇㅊㅎ’보다는 하산해 된장찌개로 더 잘 알려진 참이었다.
복합적인 이유로 브랜드 점유율 자체도 낮은 수준이었다.
점유율을 0.7%에서 1%로 끌어올리려면 단기간에 많은 걸 쏟아부어야겠다고 여기며, 산하는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뭐가 어쨌거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길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어서였다.
만약 식품 공장 적용 가능 비율을 32% 이상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간편 제품 시장을 압도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단가는 비슷하면서도, 타 제품에 비해 맛이 상당히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좋았어.
* * *
퇴근하고 여자친구와 데이트할 생각에 신이 난 책임연구원 복병찬은 저 멀리 다가오는 대머리 사내를 발견했다.
그는 바로 연구센터 소장이었다.
“소장님, 안녕하십니까?”
걸어오던 그가 허허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더니 박스를 잠시 내려놓았다.
“마침 잘 만났네.”
“네?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이거 말일세.”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복병찬은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 이거 하산해 된장찌개잖아요.”
“뭐라고?”
“기억 안 나세요? 왜 예전에 SL홈쇼핑 사건으로 난리 난 적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때 궁금해서 잠깐 연구했었고요.”
기억을 더듬어보던 연구센터 소장이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아, 그렇지. 요즘 기억력이 왜 이러나 몰라. 어쩐지 낯익더라니.”
“이건 왜 가져오셨어요?”
짧은 한숨을 내쉰 소장이 ㅇㅊㅎ 된장찌개 하나를 들어 보인다.
“그 왜, 위에 새로 오신 분 있지 않나?”
고상식을 떠올린 책임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그런데 그분이 왜요?”
“그분이 지시를 내리셨어. 이거 연구해서, 비슷하거나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내라고 말이야.”
그의 대답에 복병찬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이, 말도 안 됩니다. 그때 보고서 기억 안 나십니까?”
전혀 기억 못 하던 소장이 묻는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말이야. 정확한 내용이 뭐였지?”
“이거 카피하려면 단가 포기하고, 질 좋은 재료 아낌없이 때려 부어야 가능하다고요. 그렇게 해도 독특한 맛은 따라잡을 수 없다고 보고드렸었습니다.”
요즘 들어 기억력이 왜 이리 캄캄하나 고민하던 소장의 시선이 ‘ㅇㅊㅎ 된장찌개’로 옮겨갔다.
“음…… 그래, 그랬었지. 곤란하게 됐는데.”
“아마 하산해 된장찌개를 따라잡으려면, 꽤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할 텐데요? 그런데 굳이 이건 왜 카피하려는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그곳은 생산량도 적어서, 크게 위협되지도 않는데 말이죠.”
“음…… 알겠네. 일단 위에 다시 보고 올리고 얘기하지. 가던 길 가게.”
“네, 소장님. 아, 그거 제가 연구실 가져다 놓겠습니다.”
“아닐세, 내가 가져다 놓지.”
“그래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얼른 가 봐.”
“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떠나가는 책임연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구센터 소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성격 더럽다던데.
지랄하겠구만.
다음 날.
연구센터 소장은 보고를 올렸고, 고상식은 서류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단가만 포기하면 가능하다, 이 말이지?”
“네, 도련님.”
“도련님?”
여기서는 직함으로 부르라던 고상식의 지시를 떠올린 이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아,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단가만 포기하면 얼추 비슷하게 따라잡을 수 있답니다. 기존에 연구해 놓은 자료도 있다고 하고요.”
“그럼 그렇게 하라고 해. 제품 죽이기만 하면 되니까.”
“네, 본부장님. 그런데 저기…….”
“이 비서가 나한테 할 말이 다 있어?”
그의 기분 나쁜 시선을 마주한 이 비서가 말했다.
“사장님이랑 부사장님 귀에 들어가면, 조금…….”
“이 비서, 내가 누구로 보여?”
“……도일그룹의 후계자이십니다.”
“그렇지? 그런데 어쩌라고?”
안하무인 격인 그의 발언에, 이 비서는 땀을 삐질 흘렸다.
“네, 본부장님, 제가 실언했습니다.”
“이만 나가 봐.”
복도로 빠져나온 이 비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인간 옆에 있을수록 스트레스만 더해간다고 생각하던 그는 퇴사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 사장은 ‘ㅇㅊㅎ 된장찌개’ 카피 제품 개발 소식을 연구센터 소장으로부터 전해 듣고, 부사장과 심각하게 대화 중이었다.
“상의도 없이, 아주 제멋대로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놔둬야죠.”
“그래도 그렇지.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이제 밥상을 엎으려고 하는 게 문제죠. 개발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마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거, 이미 연구소에서 분석했다가 포기한 제품이거든요.”
“단가가 얼마나 올라갈 것 같아요?”
“지금보다 1.5배 이상, 잘못하면 2배도 올라가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마케팅비를 쏟아붓는다고 해도 잠시뿐일 테고, 가격이 정상화되면 기존 소비자들에게 저항 불러오겠죠.”
“한계는 명백하군요.”
“어쩌시겠습니까?”
“일단 지켜봅시다. 얘기해 봐야 듣지도 않을 인물이니, 문제 생기면 그때 가서 얘기하죠.”
“네, 사장님.”
* * *
시간이 제법 흘렀다. 도일식품은 기존에 ‘ㅇㅊㅎ 된장찌개’를 연구했었기에, 제법 빠르게 업그레이드된 상품을 내놓았다.
물론 출혈을 각오하고 저렴한 가격에 내놓은 참이었지만, 팔면 팔수록 적자였다.
<도일식품, ‘내고향 된장찌개’ 업그레이드 버전 출시>
<내고향 된장찌개, 든든한 한 끼 책임지겠다>
도일식품에서는 공격적인 홍보까지 하며 제품을 소개했지만, 여러 매체를 비롯해 오픈마켓이나 홈쇼핑에서도 대대적인 판매에 나섰다.
지금도, 홈쇼핑 중 한 곳에서는 쇼호스트가 제품을 소개하는 중이었다.
“여러분, 지금부터 ‘내고향 된장찌개’의 위엄을 보여 드릴 텐데요. 깜짝 놀라지 않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 주세요.”
이 채널을 시청하고 있던 한 소비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전에 먹어 본 바로, 내고향 된장찌개는 건더기도 별로 없고, 평범한 맛이었기 때문이었다.
위엄 같은 소리 하네.
그 순간, 쇼호스트가 내고향 된장찌개 제품 포장지를 개봉해서 그릇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예전과는 다른, 먹음직스럽게 푸짐한 된장찌개 내용물이 시야를 자극했다.
와, 뭐냐. 대박인데?
예전에는 국물뿐이더니, 완전 달라졌잖아.
“새 제품 출시 특가, 거기에 얹어서 오늘만 특가에 판매합니다. 구입 서둘러 주세요.”
안 그래도 먹을 거 떨어졌는데.
오케이, 한 세트 사서 먹어 보자.
그는 곧장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주문을 넣었다.
며칠 후, 이 제품을 접한 동식이 식당으로 산하를 찾아왔다.
“진짜 환장한다. 어떻게 그렇게 저렴하게 파냐? 먹어 봤는데 맛도 괜찮고, 건더기도 엄청나더라. 재료도 대량으로 들여와서 가능한가 봐. 대기업은 대기업이네.”
그의 염려스러운 표정에도 산하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래도 아직 우리 거 잘 팔리잖아?”
“그야 그렇지. 네 팬들이 의리 지켜야 한다면서 사 주고는 있는데, 일반 사람들은 저렴한 거로 넘어가는 추세야.”
“주문량은 얼마나 감소했는데?”
“한 2% 정도? 그래도 우리 된장찌개가 더 맛있는데. 치사하게 가 버리다니.”
산하는 투덜거리는 친구의 말에 답했다.
“나도 광고 보긴 했는데, 먹음직하게 많이 넣어 놨더라.”
산하의 말에, 동식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지금 도일식품 칭찬할 때냐?”
“뭐, 칭찬할 건 해야지. 너무 걱정 마라. 나한테 다, 수가 있으니까.”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무슨 수가 있는데?”
“이 형님이 말이야.”
“뜸 들이지 말고.”
“기가 막힌 제품을 선보일 거다, 이 말씀이지.”
“오, 진짜? 언제?”
“농담이고, 조만간 내 식당에서 파는 다른 요리들도 본격적으로 제품화하려고.”
“캬, 역시 박산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건 언제 하나 했네. 안 그래도 공장부지 옮긴 다음에 경쟁할 생각 하니까 눈앞이 다 캄캄하더라고.”
산하가 그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동식아.”
“어?”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사업을 하려면 야수의 심장을 가져야 하는 법이야. 마음을 크게 먹으라니까. 자꾸 소심하게 그러면…….”
“그러면? 나 쫓아내게?”
“아니, 놀릴 건데. 하동식은 소심하대요. 얼레리 꼴레리.”
어이없어하던 동식이 피식 웃는다.
“이런…… 유치한 새끼. 어쩐지 요새 조용하다 했다. 나 간다.”
“벌써? 한 그릇 먹고 가.”
“어? 진짜?”
“아니, 가짜.”
“뭐 인마?”
“앉아 있어. 금방 해 줄게.”
이윽고 요리하던 산하는 어떻게 하면 대량 생산 제품의 맛을 더 끌어올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일단 제품 다양화부터 시도해 보자고.
며칠 후, 자취방에서 된장찌개 대량 생산에 관해 연구했지만 산하는 업그레이드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식당에서 판매 중인 요리를 간편식품으로 선보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어차피 목표는 브랜드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거였기에, 아예 제품마다 ‘ㅇㅊㅎ’라는 브랜드네임을 붙여 판매하면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다시 말해, 된장찌개 위주로 생산하던 제품 라인에 스파게티, 떡국, 해물죽 등을 추가한다는 계획이었다.
* * *
<은성식품, 새 제품 출시 임박>
<은성 대표 하산해, ‘다양한 간편식품 선보이겠다’>
이 뉴스를 접한 하산해 팬 카페 회원들이 댓글을 달았다.
- 오, 된장찌개도 푸짐하고 맛나던데. 새 제품 기대합니다.
- 도일식품 새로 출시한 것도 괜찮던데요? 건더기 엄청나고 맛도 제법이에요.
- 간첩이다!
-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저도 ㅇㅊㅎ 된장찌개만 사 먹어요.
- 괜찮다는 거 보니까 사 드신 것 같은데요?
- 뜨끔! 그냥 어떤지 맛만 봤어요.
- 뭐, 우리야 팬심으로 사 먹는다지만, 일반인들은 가성비 좋은 거로 사 먹겠죠.
- 하산해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그로부터 보름이 더 지났다. 산하는 아버지, 동식을 비롯해 공장 직원들과 협력해 새로운 제품 샘플을 생산했다.
그 제품들은 ‘ㅇㅊㅎ’라는 브랜드네임 뒤에 ‘스파게티’, ‘해물죽’, ‘떡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자, 다들 드셔 보시고 맛 어떤지 평가 부탁드립니다.”
아직 중소기업이다 보니 대기업만큼의 R&D부서가 없었고, 따라서 많은 부분을 산하가 진두지휘하여 제품을 완성한 참이었다.
그 후 모든 공장 직원을 불러 모아 시식회를 가지는 중이었는데, 둘러서 있던 직원 중 한 명인 방미자는 조금 염려스러워했다.
그래도 나름 잘 나가는 된장찌개 생산을 줄이고 새로운 제품을 런칭하겠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방 여사님, 안 드세요?”
“아, 먹어요.”
이 회사만큼 월급이며 복지 서비스를 챙겨 주는 곳이 잘 없기에, 제발 은성식품이 오래오래 존속되었으면하고 바라던 방미자는 조심스레 해물죽부터 맛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다 못해, 조금 전의 염려도 날아갔다.
“어머, 맛있다.”
쫀득한 해물 건더기와 적절하게 배어든 간에 이어 감칠맛까지, 시중에 파는 죽과 비교해도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 그녀는 손뼉을 쳤다.
“대표님, 이거 잘 팔리겠는데요? 다른 회사 죽보다 맛나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다른 분은요?”
그러자 다른 직원들도 맛있게 먹으며 의견을 토해냈다.
“저도 방 여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도요.”
“오, 진짜 괜찮은데요?”
“세 개 다 맛있어요!”
“대박 예감입니다.”
오늘 생산한 제품들은, 산하가 가진 요리 솜씨에서 각각 15%, 20%, 17%의 요리 솜씨가 적용돼 있었다.
며칠 후부터는 된장찌개 생산량을 줄이고, 오늘 만든 샘플을 적용해 네 개의 라인으로 가동할 예정이었다.
과연 시장 반응이 어떨지 기대하며, 산하는 ‘ㅇㅊㅎ’ 브랜드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사은품을 세게 걸어 볼까?
* * *
‘ㅇㅊㅎ 된장찌개’보다 가성비가 좋다는 평가에 ‘내고향 된장찌개’로 갈아탄 소비자가 점점 늘어났고, 점차 타사 소비자까지 빨아들이며 매출 확대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타 기업도 출혈을 각오하고 제품에 변화를 시도했고, 할인 경쟁에 불이 붙었다.
그런 이유로 제품을 갈아탄 소비자 중 한 명인 김채연은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된장찌개를 좋아했던 그녀는, ‘ㅇㅊㅎ 된장찌개’ 특유의 맛을 좋아했다. 아니, 그 전에 하산해라는 가수를 좋아했다.
하지만 가난한 자취생 입장에서 ‘내고향 된장찌개’만큼 좋은 게 없었다. 건더기도 푸짐하고, 저렴하고, 믿을 만한 대기업 제품이고.
하산해님 쏘리.
그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한 후, 오늘도 ‘내고향 된장찌개’를 주문하려고 오픈마켓에 접속한 그녀는 예전 버릇이 남아 ‘ㅇㅊㅎ 된장찌개’를 검색했다.
아 참, 이거 아니지.
뒤로 가기를 누르려던 그녀는 홍보 문구를 보고 마우스 움직임을 멈추었다.
<ㅇㅊㅎ 브랜드 신상품 출시, 신상품 구매하시고 응모하신 분에게 매일 다양한 추첨 이벤트>
오, 이벤트?
뭐지?
스크롤을 내린 그녀는 이벤트 상품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날 완판 시, 웹툰 원화 전시회 무료 입장권, 20명 추첨>
<둘째 날 완판 시, 만찬주로 이름 높은 천상주 증정, 20명 추첨>
<셋째 날 완판 시, 하산해가 직접 그려 드리는 캐리커처 서비스, 20명 추첨>
<넷째 날 완판 시, 독일 헤어 대중상에 빛나는 하산해 헤어 손질 서비스, 20명 추첨>
<다섯째 날 완판 시, 미슐랭 3스타에 빛나는 산하네 요리 전문점 이용권 증정, 20명 추첨>
<여섯째 날 완판 시, 하산해의 즉석 붓글씨 선물, 20명 추첨>
스크롤을 내리면서 입을 헤 벌리던 그녀는 제일 마지막 상품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달 말까지 연속 완판 시, 하산해 전국 투어 콘서트 진행>
<자세한 사항은 아랫부분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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