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어머니의 맛 (4)
호기심 가득해진 새봄은 얼른 물김치를 한 모금 마셨다.
톡톡톡.
조금 전 후각을 자극했던 향처럼, 잘 숙성된 물김치의 탄산이 혀를 비롯해 입안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는데, 일반 탄산음료나 기존의 물김치와는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
마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통통 뛰어오르는 연어처럼, 싱싱하고 맛깔난 자극이었다.
알싸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맛과 조화를 이루다 못해, 맛을 배가시켜 준다고 해야 하나.
생생한 자연을 한 모금 들이킨 것 같으면서도, 밥맛이 마구 당기는 기묘한 물김치에 새봄은 깜짝 놀라 버렸다.
남자친구의 말대로, 물김치 맛이지만 물김치가 아니었다. 시원하면서도 찡한 느낌은 정말이지, 셋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거의 된장찌개가 최상으로 끓여졌을 때, 그 맛에 필적할 만한 맛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물김치를 꿀꺽 삼킨 후, 입안에 감도는 희미한 맛에서 무언가 그립고도 아련한 누군가와 마주한 기분을 느꼈다.
포근하다고 해야 할까.
뭐……지?
기분 좋다.
잠시 가만히 서서 그 느낌을 음미하던 새봄은 어딘가 비어 있던 공허함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물김치를 들이마셨다.
그러자 그녀의 입안에 진입한 배추 조각이 어금니에 씹히며, 단맛과 고소함을 내뱉었다.
김칫국물과 건더기의 조화가 그야말로 일품이었고, 그녀는 감탄사를 흘렸다.
“산하 씨, 이거…… 진짜 맛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어요?”
그러자 산하가 김치냉장고 앞을 가로막으며 과장되게 말했다.
“거기까지. 윤새봄 사원, 다가오지 마. 더는 못 줘.”
그러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던 새봄이 말했다.
“내가 다 살게요.”
그녀의 장난에, 산하는 마치 배우처럼 대사를 내뱉었다.
“이걸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요. 하지만 좋은 방법이 있죠.”
“응?”
어느새 산하에게 다가선 새봄이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뽀뽀했다.
“됐죠? 이제 나 다 가져도 돼요?”
자신의 입술을 매만져보던 산하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가져, 이 물김치는 이제 우리 봄이 거야.”
“치, 그래 놓고 다 팔 거면서. 이따가 아빠 가져다드리게 조금만 줘요.”
“당연히 드려야지. 저기 있는 한 통 다 가져가.”
“진짜요?”
“당연하지, 봄이 향한 내 사랑이 이만큼이야.”
“물김치 한 통만큼이요?”
“!?”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배시시 웃던 새봄이 산하를 살포시 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산하 씨, 고마워요.”
산하의 표정에 의아함이 내려앉았다.
“응? 갑자기?”
외로웠던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이제는 행복 그 자체인,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남자 박산하를 잠시 올려다보던 새봄이 다시금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요. 잠깐만 이렇게 있어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산하는 말없이 새봄을 안아 주었다.
이날 밤, 조금 늦게 집으로 돌아온 새봄이 거실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아빠, 어디 계세요?”
출출해서 냉장고를 기웃거리던 윤주상이 거실로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딸 왔어? 우리 사위는?”
“아빠는……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사위예요?”
“딸. 아빠가 늘 말하지만, 산하를 확 낚아채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그런 의미에서 늘 사위라고 부르면 좋은 일이 있을 게다.”
“아빠!”
“아, 알았다. 알았어. 왔으면 같이 들어오지 그랬어?”
“그 사람 요즘 바쁘잖아요.”
“하긴, 우리 사위가 이래저래 바쁘긴 하지. 몸 상하겠다. 아, 그래. 산삼 좋은 거 들어왔더라. 그거라도 가져다 먹여.”
새봄이 반색했다.
“그래도 돼요?”
“그럼, 되지. 그런데 그건 뭐냐?”
묵직한 김치통에 잠시 시선을 주었던 그녀가 답했다.
“아, 이거 산하 씨가 이번에 이벤트로 판매하려고 만든 물김치예요.”
그 말에,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던 윤주상이 물었다.
“된장찌개는 없고?”
“이것도 맛있잖아요. 아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가.”
“특별?”
“네, 아빠. 이거 드실 거면 덜어서 드시고 냉장고에 넣어 주세요. 저 좀 씻을게요.”
딸이 식탁 위에 남겨 두고 간 김치통을 멀거니 바라보던 윤주상이 중얼거렸다.
마침 잘됐네.
밥에 말아 먹어야겠다.
우리 사위 물김치도 맛있지 맛있어.
그래도 된장찌개보다는 못한 게 문제라면 문제인…….
중얼거리며 김치통 뚜껑을 연 윤주상은 알싸한 향에 눈을 부릅떴다. 뭔가 비슷하면서도 이전과 다른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어디…….
딸의 충고에도 아랑곳없이, 통 안에 숟가락을 그대로 들이민 윤주상이 김칫국물을 떠서 입안에 넣었다.
그 후 반응은 새봄과 다르지 않았다.
오오, 신이시여.
이것이 진정 물김치란 말입니까?
우리 사위는 인간이 맞습니까?
이젠 아주 물김치가 돌아 버렸구만.
생각을 이어 가던 그는 무언가 따스한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찾아온, 왠지 간질간질하니 기분 좋은 느낌에 그가 잠시 말이 없던 그때였다. 주방으로 다시 돌아온 새봄이 그를 불렀다.
“아빠?”
퍼뜩 정신을 차린 윤주상이 숟가락을 등 뒤로 감췄다.
“아냐…… 딸. 딱 한 번 맛만 봤어. 진짜야.”
“확실해요?”
“……아마 그럴걸?”
아버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봄이 입을 열었다.
“저 씻을게요.”
그녀가 다시 주방에서 사라지자, 윤주상은 침을 꿀꺽 삼킨 후 큰 대접에 밥을 담아왔다. 그리고 그곳에 물김치를 가득 담았다.
산하의 요리를 만난 후로 그에게 생긴 습관이었다.
잠시 후, 대접에 밥과 물김치를 말아 신나게 퍼먹던 윤주상이 돌연 크게 웃었다. 이런 대단한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사위가 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서였다.
무척이나 기뻐하던 그는 다시 물김치에 말은 밥을 퍼먹으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그런데 대체 둘이 언제 합칠 거야?
에이…….
왜 이리 느려.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한다니까.
하긴, 우리 사위가 도망갈 사람은 아니다만.
그래도 자신이 나서야 하나 생각해 보던 윤주상은, 괜히 역효과라도 날까 싶어 한동안 더 지켜보기로 했다.
* * *
새벽 네 시.
물김치를 특별 판매하는 첫날이 되었다. 혹시나 줄이 길어서 못 사는 거 아닌가 염려했던 한다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김치는 2층에서 판매하기로 돼 있었는데, 줄이 까무러칠 만큼 길지는 않아서였다.
다행이다.
빙긋 웃던 그녀는 손에 든 대형 보온통을 매만졌다.
공지사항에서 말하기를, 보온통을 가져와서 받아 가면 최상의 맛을 유지할 수 있다고 돼 있어서 가져온 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자신의 차례가 되자 한다정은 2층 내부로 들어섰고, 산하는 갑자기 눈앞에 뜬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아홉 번째 연결고리인 한다정이 당신의 영업장에 입장했습니다.]
[건물 내부에 위치한 모든 물김치 맛이 2% 상승했습니다.]
미친, 여기서 더 맛있어졌다고?
그런데 누가 한다정이야?
방금 들어온 여자분인가?
산하는 명확히 알아보기 위해 그녀의 과거를 확인했다.
[27분 전, 한다정은 점점 줄어드는 줄을 보며 기뻐했다.]
이분 맞네.
홍혜영 선생님이랑 무슨 관계지?
일단 계획대로 많이 퍼드려야겠다.
그가 모종의 이벤트를 계획하는 사이, 내부 줄이 줄어들며 한다정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보온통을 내밀었다.
“여기요.”
“축하합니다!”
산하의 외침에 어리둥절한 한다정이 되묻는다.
“네?”
“오늘 히든 이벤트도 있거든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여전히 얼떨떨해하던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어…… 한다정이요.”
“네, 한다정 씨, 오늘 히든 이벤트 당첨되셨어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오셨는지, 계속 세고 있었거든요. 축하드립니다!”
산하는 혹여나 홍혜영의 지인이 올까 싶어 미리 준비한 변명을 내뱉었다.
“아…… 정말요?”
“네, 상품이 궁금하시죠?”
“네!”
“상품은 열 배 서비스입니다.”
“네!? 열 배요?”
“공지사항에 규정했던 용량 가격만 받고 물김치는 열 배를 드립니다.”
열 배라는 말에 한다정은 환호했다.
“우와, 진짜요? 정말요?”
“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후 사각 김치통을 통째로 포장한 산하가 그걸 한다정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통은 꼭 반납해 주세요.”
“진짜 이거 다 주시는 거예요?”
“네, 당연히 정말이죠.”
그녀가 조심스레 포장된 김치통을 받아들었다. 뒤쪽에 서 있던 손님들이 한다정을 부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중이었다.
한참 후, 집으로 돌아온 한다정은 만세를 불렀다. 휴가를 낸 뒤 잠도 안 자가며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드디어 엄마의 맛을 다시 느껴 보겠다고 생각하던 한다정이 얼른 김치통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서 알싸하면서도, 어딘가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하는 향이 뿜어져 나왔다. 지난번 물김치와는 뭔가 달랐다.
그 향을 맡은 한다정이 손을 파르르 떨었다.
어……엄마?
당황하던 그녀는 선명하게 떠오른 기억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홍혜영은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식 걱정이 제일 앞섰다.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그런 그녀가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 오늘 집에 좀 와.”
“집에? 왜? 오늘 조금 바쁜데.”
“물김치 담가 놨어. 네 오빠는 벌써 가져갔다.”
“엄마도 참, 몸도 편찮으신데 좀 쉬셔.”
“난 이게 쉬는 거야.”
“누가 엄마를 말려…… 알았어요.”
이날 저녁, 부모님 댁을 방문한 한다정은 어느새 주름이 가득해진 홍혜영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엄마 일 좀 그만하셔.”
“으이그, 우리 딸 또 잔소리 시작했다.”
“치, 내가 언제 잔소리했다고 그래. 이런 걸 효녀의 마음이라고 하는 거야.”
“잘도 가져다 붙인다. 바쁘다면서? 이거나 얼른 가져가. 밥 꼭 챙겨 먹고. 다이나마이트인지 뭔지 하지 말고.”
“다이나마이트 아니고 다이어트.”
“그거나 이거나.”
“알았어. 엄마. 다음 주말에 올게.”
“알았으니까, 어여 가. 늦겠다.”
...언젠가부터 희미해졌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르자, 한다정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이번 물김치의 향은 한다정에게 있어 조금 특별했다.
과거 어머니 홍혜영이 하늘나라로 가기 몇 개월 전, 자식들 주겠다며 최선과 정성을 다해 담았던 마지막 물김치의 향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인분에게 그 사실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내려앉았던가.
꼼꼼히 고른 재료와 자식을 향한 사랑이 듬뿍 담겼던 물김치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만들어 온 물김치 중 최상의 맛을 자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김치만큼은 다시는 맛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 왔던 한다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 이런 맛이었어.
맞아.
이런 맛이야.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국자를 가져와 물김치를 덜어낸 그녀는 숟가락도 없이 김칫국물을 들이마셨다.
꿀꺽.
혀를 자극하는 그 맛은 과거의 그때보다 더 맛있었지만, 분명 어머니의 향수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 향수를 잊지 않으려는 듯, 한다정은 쉴 새 없이 김칫국물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있었다.
며칠 후, 산하의 물김치 맛이 소문나며 특판 행사는 난리가 나버렸다. 그 바람에 아직도 구매하지 못한 한다정의 친구 김채연은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내가 꼭 사고 말 거야.”
“그러게 첫날에 같이 가자고 했잖아.”
“아니, 잠이 오는데 어떡해.”
“넌 그 잠이 문제야.”
“그건 그래. 그런데 너 뭐 해?”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터치하던 한다정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 나 하산해 팬 카페 가입 중.”
“뭐? 갑자기 왜?”
“어…… 그냥 좋아졌어. 하산해 팬 하려고.”
“네가? 진짜? 연예인은 지나가던 똥개처럼 생각하던 네가? 말도 안 돼.”
“무슨 말이 안 돼? 하산해가 얼마나 좋은데.”
“미친…… 한다정 정신 차려. 이거 몇 개야?”
“아, 몰라. 조용히 해 봐. 인사말 남겨야 한단 말이야.”
하산해 팬 카페에 가입한 한다정이 카페 규정대로 인사말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물김치요정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여러 항목을 쭉 적어 나가던 그녀는 마지막에서 잠깐 고민하다가 화면을 열심히 터치했다.
<아무거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하산해님 물김치 만들어 줘서 고마워요.>
그걸 다 쓰고 난 한다정이 깜빡했다는 듯 친구에게 말했다.
“아 참, 내가 말했던가?”
“뭘? 너 제정신 아닌 거?”
“아니, 나 물김치 판매 첫날 이벤트 당첨된 거.”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던 김채연은 산하네 요리 전문점 댓글에서 얼핏 보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뭐? 설마 열 배 이벤트? 그게 너야?”
“응, 조금 줄까?”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어머, 대박. 진짜야? 줘. 나 많이 줘.”
“아, 몰라. 많이 못 줘.”
티격태격 싸우던 두 사람은 이내 하하호호 웃으며 하산해에 관해 이야기했다.
* * *
승용차 한 대가 은성식품 공장 인근 야외 주차장에 주차를 마쳤다. 그곳에서 내린 이는 검은 정장을 빼입은 여성이었다.
사감 선생님이나 쓸 법한 검은테 안경을 치켜올린 한 여성이 은성식품 공장 전경을 훑어보았다.
정말 코딱지만 하네.
뭐, 여기서 뼈 묻을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레시피만 빼서 넘기면 되니까.
비틀린 미소를 짓는 그녀의 이름은 정경화였다.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한 식품회사에 입사했던 그녀는 한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자신이 연구·개발한 식품을 다른 이가 맛있게 먹어 준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달까.
하나, 어느 날 불어닥친 그녀의 어려운 집안 사정은 은밀한 뒷거래를 하게 만들었고, 정경화를 돈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 후부터였다.
이젠 딱히 생활이 어렵지도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의 사업장 비밀을 빼서 건네주고 돈을 받아 편히 살곤 했다.
그런 그녀는 오랜만에 한 건의 의뢰를 받았고, 은성식품 연구개발 부서에 면접을 보러 온 참이었다.
이번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예상해 보던 그녀는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공장 정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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