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298화 (298/445)

298화 바빠서요 (4)

그 책을 집어 든 장 대리는 이윽고 다른 신간도 몇 권 집어 들었다. 모조리 사무실로 가져가서 회의 시간에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탐색해 놓은 콘텐츠가 활약하기를 기대하던 장 대리는 책 구매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더 흘렀다.

오늘은 전 팀원이 모여 지지부진한 콘텐츠 탐색에 관한 회의를 할 예정이었다.

김무진 팀장이 손을 마주쳐 회의 시간임을 알렸다.

“자, 하던 거 마무리하고 회의실로 모이세요.”

열심히 발표 자료를 작성하며 자신이 발견한 콘텐츠 목록을 정리하던 팀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팀장님, 잠깐만요. 이거 조금만 마무리 할게요.”

“저도 오 분만요.”

김무진 팀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분명 엊그제도, 오늘 오전 중에도 공지했을 텐데요? 좋아요. 열의가 넘치는 거라고 생각하죠. 얼마나 좋은 콘텐츠를 물어왔길래 이러나 지켜볼 겁니다. 지금부터 십 분 더 드립니다. 시간 내에 전원 회의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기 팀장님, 저는?”

인턴사원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질문했고, 김무진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서빈 씨도 참가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회의실에 도착한 김무진은 의자에 앉아 냉수 한 모금을 들이켰다.

처음 장단석 부사장의 권유로 풍류에 기분 좋게 입사하긴 했지만, 여태 이렇다 할 만한 실적을 못 내놓고 있어서 무척이나 민망했다.

올해는 뭐라도 하나 내놓아야 할 텐데.

시장 잡아먹을 콘텐츠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나.

좋다 싶은 건 다른 스튜디오에서도 탐내다 보니, 풍류는 헛물켜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낚아챈 콘텐츠는 딱히 흥하지도 망하지도 않곤 했다.

드라마나 영화제작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었기에, 실패나 다름없었다.

지금이야 킬러 콘텐츠인 드라마 술왕부에서 어느 정도 자금이 들어오고, 투자금도 제법 들어오고 있지만, 내년 초 까지도 실적을 못 낸다면 윗선의 압박이 현실화할 터였다.

볼펜 머리를 테이블 위에 툭툭 치며 조급함을 드러내던 김무진은 이내 회의실로 들어서는 팀원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내 팀원들이 자리에 앉았고, 팀장 김무진이 회의의 서두를 열었다.

“현재 우리 콘텐츠 탐색팀 처지를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경쟁사도 많고, 킬러콘텐츠 씨가 말랐다는 것도 알죠. 하지만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훌륭한 콘텐츠를 찾아내는 게 우리 임무 아니겠습니까? 다들 힘내시고, 오늘 준비해 온 것 발표부터 시작합시다. 먼저 누가 시작할까요?”

서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사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제가 먼저 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시작하세요.”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대형 TV로 전송한 팀 막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제가 이번에 탐색한 콘텐츠 목록입니다.”

팀장이 입을 열었다.

“두 개뿐인가요?”

“네, 팀장님. 사실 여러 개를 뽑아냈었지만, 이 두 가지가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해서 나머지는 과감히 생략했습니다.”

“그래요. 어디 들어보죠.”

“요즘은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한 콘텐츠가 흥행하고 있다는 건 다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이번 탐색 주제는, <비현실적 세상> 으로 잡아서 콘텐츠를 물색했습니다.”

그는 얘기를 마치자마자 리모컨을 조작해 자료화면을 넘겼다.

“여기 보시면 두 가지 콘텐츠가 있는데요, 웹툰이 원작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판타지 요소가 살짝 가미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직 수면 위에 제대로 떠 오르진 않았지만, 시장 반응도 나쁘지 않습니다. 타 콘텐츠 대비, 긍정 비율이 50%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 주목할 만한 건 창작자가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지, 이야기 구조가 영상화에 걸맞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팀 막내 사원은 열정적으로 콘텐츠를 소개했지만, 팀장은 조금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막내 사원이 발표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자, 팀장이 입을 열었다.

“다들 잘 봤습니까? 방금 발표한 콘텐츠 머릿속에 잘 넣어 두세요.”

“네, 팀장님.”

“다음은…… 장 대리, 준비됐습니까?”

“네, 준비됐습니다.”

팀장이 조금 전 콘텐츠를 머릿속에 넣어 두라고 한 이유는, 회의가 끝나면 콘텐츠를 다 같이 살펴보고 투표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투표를 통해 살아남은 콘텐츠는 보고서가 작성되고, 그 후에는 윗선의 결정에 따라 영상화를 할지 말지 결정하게 된다.

이 사실을 떠올리던 장경복 대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책 여러 권이 들려 있었다. 그걸 앞쪽에 내려놓은 장경복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콘텐츠는…….”

앞서 막내 사원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찾아온 콘텐츠에 관해 설명하던 장 대리도 준비한 발표를 마쳤다.

그때, 팀장이 그 앞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그건 뭐죠?”

“아, 이건 이번에 출간된 단편소설 중에 반응 좋은 것으로 추린 겁니다. 회의가 오늘이라 자세히 읽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다 같이 참고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들고나왔습니다.”

“그래요. 그건 나중에 각자 읽어 보도록 하죠.”

그 후로도 팀원 회의는 계속되었고, 김무진은 눈에 확 띄는 콘텐츠가 없는 것에 실망했다.

그때, 제일 구석에서 신간 한 권을 슬쩍 살펴보던 인턴사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로맨스야?

뭐지…….

어느새 회의는 뒷전이고, 책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녀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스토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괜찮은데?

급기야 그녀는 책 내용에 빠져들었고, 옆에서 노려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서빈 씨, 지금 뭐 해요?”

행복한 연인의 이야기에 미소짓던 그녀는 누군가의 조용한 속삭임에 흠칫했다.

“네?”

“회의 시간에 뭐 하는 거냐고요.”

“……어, 그게, 장경복 대리님이 가져오신 책을…….”

“그게 지금 해야 할 일입니까?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죠?”

그녀는 기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왜 이렇게 개념이 없어요? 곧 정규직 전환 아니에요? 이래서…….”

이 상황을 안 보는 듯하지만 다 지켜보고 있던 김무진 팀장이 테이블을 두들겼다.

“그쪽, 무슨 일입니까?”

“아, 네, 팀장님. 정서빈 씨가 회의 시간에 다른 짓을 조금 해서, 주의를 주고 있었습니다.”

“장 대리가 가져온 소설책을 확인했던 건가요?”

“네? 네. 제가 철저히 주의시키겠습니다.”

“정서빈 씨, 그 책이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는 단순히 정말 재미있냐고 물은 거지만, 정서빈은 울상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거 이리 줘 보세요.”

큰일 났다. 어떡해. 아, 이 멍충이. 회의 시간에 뭐 하는 거야. 전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얼마 안 있으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예정인 정서빈은 안절부절못했다. 풍류는 타 업체와 달리, 별문제 없으면 인턴의 대부분을 정식 고용하는 방향으로 운영 중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정식 입사 전 어느 부서가 적성에 맞는지,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체험해 보는 기간이었고, 그녀는 풍류 내의 여러 부서를 돌던 끝에 이곳까지 온 참이었다.

이러다가 팀장 눈 밖에 나서 정규직 전환 엉망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 상황과 맞지 않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책이 너무 재미있었어.

하지만 속내와 달리 죄지은 표정을 지으며 인턴 사원은 조심스레 책을 건네주었고, 김무진 팀장은 그 책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누구나 의문을 가졌던 것처럼, 이거 로맨스 아닌가 생각했다.

하나, 몇 장을 더 넘긴 그는 이게 그저 그런 로맨스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영혼을 슬쩍 잡아당기는 듯한 진리가 그곳에 담겨 있었다.

책장을 계속해서 넘기던 그에게 팀원 한 명이 당황해서 말을 걸었다.

“저기, 팀장님. 회의는 어떻게……?”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무진이 책을 탁 덮고는, 그걸 들어서 흔들었다.

“이겁니다!”

“네?”

“바로 이런 콘텐츠가 필요했던 겁니다. 장 대리, 아주 잘 찾아왔어요. 콘텐츠 투표는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 회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오늘은 이 책부터 확인하고, 각자 보고서 올리세요. 기한은 내일 오전 회의 직전까지입니다.”

팀원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지시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고, 회의는 끝났다.

다음 날.

작가 면벽의 <단풍을 닮았더라>를 각자 정독한 팀원들의 반응은 팀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제 책을 보고 느낌 감상이 자신만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에 기뻐하던 김무진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제 이 콘텐츠를 선점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장 대리.”

“네, 팀장님.”

“장 대리가 이거 들고 왔으니까, 열심히 잡아 봐요.”

그는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누가 채가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빈 씨.”

“네, 팀장님.”

“어제 잘한 건 아니지만, 잘했어요.”

“네?”

같은 시각.

큰바위 출판사는 작가 면벽의 단편소설 때문에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온라인 서점 상위권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었다.

특히 이 책의 편집을 담당했던 임보은 대리는 신이 났다.

자신이 여태 맡아서 출간한 책 중 이 정도로 흥행한 작품이 없어서였다. 물론 자비 출판이 대부분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거나 기분이 좋았다.

유명한 책에 편집자로서 떡하니 이름을 올린다는 건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 큰바위 출판사입니다.”

상대방은 자신을 문화기업 풍류 소속이라 밝혔고, 그 이야기를 듣게 된 임보은 대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곳은 하산해의 웹툰 원작을 영상화해서 유명해진 곳이었다.

벌써부터 영상화 입질 오는 거야?

미쳤다. 미쳤어.

기뻐하던 그녀는 조금 무심한 척 질문을 던졌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그쪽에서 출간된 면벽 작가님의 <단풍을 닮았더라>에 관심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네. 말씀하세요.”

“우리 회사는 영상화를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드라마 ‘술왕부’도 그중 하나입니다.”

“어…… 네, 알죠. 그러니까, 면벽 작가님 작품을 영상화하고 싶으시다는 건가요?”

“네, 괜찮으시면 미팅을 한번 했으면 합니다만.”

“죄송하지만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요. 위쪽에 보고 드린 후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윽고 통화를 종료한 임보은 대리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됐어요!”

그녀의 통화 내용에 귀 기울이고 있던 직원들을 비롯해, 탕비실에서 빠져나오던 편집장도 깜짝 놀랐다.

“아우, 깜짝이야. 임 대리? 또 뭐야?”

“아, 죄송해요. 놀라운 소식이 들어와서요.”

“소식? 뭐?”

“모두 들어 보세요. 세상에, 그 왜 하산해 웹툰 원작 드라마 영상화한 곳 아시죠? 풍류라고.”

“알지. 설마!?”

“네, 맞아요. 거기서 연락 왔어요. 우리 면벽 작가님 작품 영상화해 보고 싶다고!”

출판사 직원들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환호했다.

“와, 역시! 전 면벽 작가님 작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요.”

“거짓말 마요. 초반 장벽 때문에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사람 누구죠?”

“아니, 그건 그냥…….”

잠시 후,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대표가 모두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풍류에서 직접적으로 제안했다 이거죠?”

“네, 대표님.”

“그럼 덥석 물지 말고, 여러 곳 제안 오는 거 봐서 꼼꼼히 따져 봅시다. 최대한 유리한 곳으로 결정하는 겁니다. 풍류보다 더 큰 곳에서 입질이 올지도 몰라요. 아, 물론 그전에 면벽 작가님 의사를 타진해 봐야겠네요. 임 대리, 얼른 연락 넣어 봐요.”

“네! 바로 해 볼게요.”

그녀는 기뻐하며 작가 면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나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신호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늘은 기필코 그와 통화를 하고 말겠다는 일념을 되새긴 그녀는 재발신을 눌렀다.

누르고.

또 누르고.

하지만 결국 연락은 되지 않았다.

아, 정말.

어떡하지.

“임 대리, 작가님이랑 연락 안 돼요?”

“네,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음…… 여전히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그럼 일단 영상화 제안 들어오는 추이 보면서, 나중에 다시 연락 넣어 봅시다.”

“그럼 미팅은요? 풍류에서 미팅 한번 가지자고 하던데요?”

“미팅이야 나가야죠. 미팅만 나가는 겁니다. 이 정도면 다른 쪽에서도 연락 많이 올 거니까요. 누가 제일 좋은 조건으로 제안하는지 두고 봅시다.”

“네!”

* * *

<하산해 전국 투어, 축제의 서막 코앞으로>

<콘서트 주제, ‘단풍길 따라 우리 함께’>

<하산해 콘서트 예매 시작, 치열한 신경전>

연예 뉴스에서 하산해 전국 투어에 관해 열심히 보도하던 어느 날, 산하는 리허설을 위해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을 찾았다.

원래는 단풍이 잘 보이는 야외공연장을 고르려 했었지만, 서울 부근에서 찾다 보니 그게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잠실 주 경기장을 택한 것이다.

그는 예전 자선 콘서트 당시, 민채은 조칠용과 함께했던 합동 공연을 떠올렸다. 그 당시 콘서트는 5만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리에 막을 내렸었다.

한데, 이번에는 완전한 단독 공연이었다.

한국 역사상 레전드 중의 레전드만이 이곳에서 단독 공연을 실행했었다는 걸 고려하면, 장소 자체의 의미가 남달랐다.

최대 수용 인원만 10만 명에, 좌석 수만 7만석 가까이 되는 거대한 장소. 산하는 이곳에서 다시 한번 공연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대표님?”

“아, 시작하죠.”

이윽고 산하는 배일상과 장도산이 선물해 준 곡들을 노래했고, 그 외에도 기존에 출시했던 음반에 담긴 노래도 불렀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전 연습에 매진하던 산하는, 마지막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신곡 <붉은 계절>과 <가을 인터뷰>를 부르려고 준비했다.

그러자 직접 리허설 현장을 찾아 공연 준비를 확인하던 장단석 부사장이 공연 기획자에게 묻는다.

“이번엔 직접 만드신 신곡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주제가 이어지는 노래라서 연속으로 두 곡 부르신답니다.”

“그 바쁘신 와중에 또 언제 신곡은 만드셨는지,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마 팬들 깜짝 놀랄 겁니다. 예전에는 가사만 쓰셨지만, 이번엔 작사, 작곡 다 하셨다고 들어서요.”

앞서 리허설용 노래를 들었던 공연 기획자는 잔뜩 흥분했고, 장단석 부사장은 비슷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때였다.

의자에 자리한 산하는 클래식 기타 현을 뜯으며 감정에 몰입했다. 쓸쓸한 가을날, 두 남녀가 만나 서로에게 물드는 과정을 상상하면서.

고운 클래식 기타 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지자, 공연 관계자들은 잠시 그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그 연주에는 추억을 되새기는 힘이 담겨 있었기에, 모두들 지난날의 연애사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 순간, 통통 튀는 듯 사랑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이 기타 선율에 실려 나오며, 산하의 노랫말이 시작되었다.

“이토록 붉은 계절이, 내겐 달라 보여…….”

시작부터 달콤한 노래를 숨죽여 듣고 있던 장단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거 사랑 노래인가 보네요?”

“그러게요.”

그들이 노래에 귀 기울이던 그 순간에도 왠지 행복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노래가 계속되었다.

“가랑잎처럼, 굴러다니는 너의 웃음이…….”

한데 노래는 중반을 넘어서자,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마무리 부분에서는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올 만큼 슬퍼졌다.

그 노래가 울려 퍼지는 내내, 공연장 관계자들은 웃다가 울었다.

그건 장단석도 마찬가지였다.

첫 노래가 저렇다면, 두 번째 곡은?

그가 의문을 가지기 무섭게 두 번째 신곡 연주가 시작되었고,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가을날을 회상하는 노래, <가을 인터뷰> 차례였다. 노래 제목처럼, 누군가와 인터뷰하는 듯, 산하의 독백이 시작되었다.

“또 가을이야. 잘 지내? 나도 잘 지내…….”

그 순간, 산하는 좋은 생각이 났다.

단순히 노래만 할 게 아니라, 현재 가진 재능을 이리저리 잘 버무려 보면 어떨까 싶었다.

이윽고 산하는 안아 주고 싶을 만큼 외로워 보이는 어투에 이어, 배우 임태순의 연기 솜씨를 담아 표정과 몸짓으로 노래에 담긴 의미를 표현해 보았다.

그 시너지 효과는 대단했다.

일반적인 몸짓이 아닌, 임태순의 연기 솜씨가 실리자 그 행위는 노래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결단코 그 어떤 가수가 와도 해낼 수 없는 재능의 집합체가 표현해 내는 하모니라고나 할까.

그 바람에 산하의 노래에 감정 이입한 모두는 심장이 아려옴을 느꼈다. 한데, 쓸쓸함과 후회라는 감정을 안겨 주던 노래는 마지막 부분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우리가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날 테니, 그때는 널 놓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이 노래를 다 듣고 난 장단석 부사장은 혀를 내둘렀다.

첫 곡과 두 곡이 마치 한 몸처럼 이어져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주마등처럼 되돌아보게 만들었고, 두 번째 곡 마무리 부분의 멜로디와 가사는 미래를 위한 희망으로 가득 채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인간의 생애처럼, 웃다가 울다가 지쳤다가, 다시 희망을 품고 일어서는 느낌이 노래 단 두 곡에 실려 있었다.

아려 왔던 가슴이 어느새 희망으로 부풀어 오른 것을 확인한 장단석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노래는 인생이다.

그래, 인생이야.

저 노래는 삶을 노래하고 있어.

어떻게 이런 노래가…….

이것은 유비원의 클래식 기타에 담긴 추억의 선율과 마운틴R의 100%에 달한 노래 솜씨, 그리고 배우 임태순의 연기 솜씨가 혼합되어 일어난 놀라운 현상이었다.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 리허설이 이 노래를 끝으로 종료되었고, 공연 관계자들은 손바닥이 터지도록 손뼉을 쳐 댔다.

그리고 장단석 부사장은 이번 콘서트 초대박을 확신했다.

* * *

“이번엔 어디에요?”

“SBC 드라마국이래요. 한번 만나서 얘기해 보자네요.”

“벌써 두 곳이네요. 아니,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작가님은 대체 뭘 하시는지…….”

“그쪽 출판사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슬쩍 물어볼까요? 박산하 작가님 지금 뭐 하시는지?”

“그러다 나중에 그쪽 출판사에서 알게 되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네. 그것도 그렇겠네요. 그런데 책 출간보다 중요한 게 뭐길래 전화를 안 받으실까요?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니에요?”

“글쎄요. 문자 답장도 없어요?”

“네.”

“어쩔 수 없네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최선을 다합시다. 뉴스 홍보는 어때요?”

임보은 대리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꽝이에요.”

“왜요?”

“지금 하산해 전국 투어 콘서트 때문에 난리거든요. 그래서 신간 뉴스 저기 지하에 묻혔어요.”

“거참, 타이밍하고는. 하필이면 하산해.”

“그렇죠? 제가 하산해 혼내고 올까요? 우리 면벽 작가님 책 홍보 잘되게요.”

“그래요. 다녀와요.”

“……대표님 농담인데.”

“나도 농담이에요. 임 대리는 하산해 콘서트 안 가요?”

“전 큰 관심 없어요. 그리고 우리 면벽 작가님 챙겨야죠.”

“그거 일 중독이에요. 쉬엄쉬엄해요.”

“대표님이 일을 많이 주셨는데요?”

그는 딴청을 피웠다.

“……난 그런 적 없는데. 아무튼 새로운 내용 있으면 보고하세요.”

그는 대표실로 사라졌고, 임 대리는 산하에게 또 한 번 전화를 걸었다.

받아라! 받아라!

얍!

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뭐야, 정말.”

* * *

해만 지면 찬 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날, 드디어 대망의 하산해 전국 투어 콘서트 전날이 되었다.

그 시각, 큰바위 출판사는 축제 분위기였다. 작가 면벽의 작품이 온라인 서점 몇 곳에서 베스트 순위 1위에 등극한 것 때문이었다.

“와! 대박!”

“작가님 아직도 연락 안 되죠?”

“아, 맞다. 깜빡하고 말씀 못 드렸는데, 이유가 있더라고요.”

“이유? 그게 뭔데요?”

“어제 그쪽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났는데요. 제가 물어본 건 아닌데, 박산하 작가님 해외로 나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네, 머리도 식힐 겸, 차기작 구상하시나 봐요. 그래서 휴대폰도 꺼 놓으신 것 같고요.”

큰바위 출판사 대표는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어쩐지. 뭐, 별다른 일은 없으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우린 작가님 입국하실 때까지 좋은 소식 준비해 놓읍시다.”

“네, 대표님.”

그 시각, 산하는 다음 날 콘서트를 위해 휴대전화도 꺼 놓고 맹연습 중이었다.

- 29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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