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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306화 (306/445)

306화 꿈꾸는 사람들 (2)

와인 종주국이라 하면 많은 이들이 프랑스를 입에 올리지만, 실제로 그 기원을 따져 보면 이탈리아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 시대부터 종주국을 자처하던 이탈리아는 이미 와인의 종주국이라는 명성을 넘겨주어, 세계인의 인식 일 순위에선 많이 비껴간 지 오래였다.

더더군다나 요즘은 칠레와 호주산 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프랑스마저 유명 와인을 제외하고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는 와인 생산자협회와 정부의 합작으로 세계 술 대회를 열었다.

디자인이 멋지고, 맛있고, 빛깔마저 아름다운 세계의 술을 한곳에 모아 순위를 매기고, 이것을 인터넷을 비롯해 여러 언론 매체에 발표하는 거였는데.

그런 식으로 인지도를 높여가면서 관광 자원도 추가하고, 종주국의 지위를 되찾는다는 계획이었다.

하나 이건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에 불과했고, 사실상 이 대회의 본 목적은 따로 있었다.

다른 나라 술은 잘 모르겠지만, 이탈리아 와인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많은 나라에 팔아먹겠다는 거였다.

그런 불량한 마음으로 두 번째 대회를 준비 중인 이탈리아 와인 생산자협회장 마르코가 입을 열었다.

“지난 대회에선 정말이지, 별의별 술이 다 나오더군요. 세상에 이렇게 술 종류가 많은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그의 발언에 협회 회원 한 명이 말을 받았다.

“그러면 뭐 하겠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술 하면 와인이죠. 다른 술은 들러리 아닙니까?”

다른 회원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별의별 잡술이 다 참가했지만, 결국 와인이 1등이죠.”

“프랑스 놈들 와인은 주의해야 합니다. 제품 격차가 꽤 있어서, 우리 참가자들에게 점수를 마음대로 주기가 힘드니까요. 한 2등 정도는 넘겨줘야 말이 안 나오지 싶어요.”

“그렇죠. 아무래도 공정성 시비가 문제이긴 합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해야 대회 권위가 살아나는데 말이죠.”

“뭐, 그래 봐야 주관적인 심사 아니겠습니까? 순위 조절만 잘하면 눈치채기 힘들 겁니다.”

“맞습니다. 그리 큰 격차가 아니라면, 참가자나 시민들도 수긍할 겁니다. 외국인 심사자들이 한 제품에 몰아주는 사례가 나오지 않는 한에야, 우리 이탈리아 쪽이 늘 아슬아슬하게 우승하는 거죠. 그저 실력과 우연의 산물일 뿐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랬다.

이들은 공정성을 기한다면서 대회에 외국인 심사위원을 대거 기용한 바 있었다. 심사위원의 70%가 외국인이었다.

그러나 30%에 달하는 심사위원은 이탈리아 현지인이었고, 외국인이지만 이탈리아계이거나, 대회 주관단체 쪽에 우호적인 이들도 10%가량 되었다.

한마디로,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1위부터 5위까지, 수상자를 입맛에 맞는 이로 줄 세우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때, 회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르코가 입을 열었다.

“자자, 어쨌거나 이탈리아 와인을 멋지게 포장해서 외국으로 열심히 수출하는 게 우리 최종 목적 아니겠습니까? 내년 봄 대회에서도 이탈리아 와인이 상위권에, 웬만하면 1위에 안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어느 정도 품질은 받쳐 줘야 합니다. 다들 아시겠죠?”

“그럼요. 그래야죠.”

“저도 슬슬 돈 좀 만져 보겠네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껄껄 웃던 와인 생산자협회 회원들의 눈동자에 탐욕이 어렸다.

그 시각.

산하는 다양한 막걸리를 사다가 시음해 보며 재해석에 관해 연구 중이었다.

막걸리는 생각보다 종류가 많다.

밤 막걸리, 귤 막걸리, 약초 막걸리, 좁쌀 막걸리, 쌀 막걸리 등 이름 정도는 들어 본 막걸리도 있지만, 소량으로 생산해서 다양하고 귀한 맛을 내는 막걸리도 수없이 많았다.

막걸리를 구해 와서 맛을 음미하던 산하는 한참이나 고민했다. 막걸리에 넣을 만한 재료가 너무 많다 보니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음…….

한 잔 두 잔 마셔가며 계속 고민해 보던 산하는 일단 계속 만들어 보면서 정답을 찾기로 했다.

* * *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생각보다 막걸리 재해석하는 작업이 더뎌져서, 산하는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식품 공장 신축 중인 곳에 잠시 들렀다.

그곳에는 그의 친구 동식이 공장 외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중이었다.

“야, 동식아. 여기서 뭐 하냐?”

“어? 너 인마, 바쁘다는 놈이 여길 왜 와?”

“하동식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날 못 믿어? 이참에 확 먹고 나른다?”

“날라라, 날라. 그나저나 거의 완성된 것 같다?”

“외관만 그래, 공장이 좀 커야 말이지. 내부 공사 다 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공장 너무 큰 거 아니냐? 여기다 돈 다 때려 붓는 너는 대체 무슨 심장이냐?”

“내 심장? 꿈을 향해 뛰는 심장이지.”

“그래, 뭐 그 꿈이 널 여기까지 오게 해줬나 보다. 어떠냐? 실물로 드러나니까 두근두근하냐?”

“두근두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완공 예정일이 또 바뀌었다고?”

“그래, 조금 늦어졌어. 내년 5월?”

“많이 늦어졌네. 지금 공장 너무 좁지?”

“뭐, 좁아도 그럭저럭 괜찮아. 직원들도 여기 한 번씩 와서 봤는데, 다들 깜짝 놀랐잖아. 무슨 공장이 이렇게 크냐고.”

“그 많은 땅 다 팔고, 남은 자금까지 쏟아부었는데 이 정도는 돼야지.”

“잘 팔리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잘 팔리지.”

“그러면 좋겠다. 아 참, 아버님이 진짜 좋아하시더라.”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그런 거 내색 잘 안 하시는데.”

“그러게 말이다. 얼마나 좋으셨으면 그러시겠냐? 너 효도 제대로 한다?”

“효도는 무슨.”

“이 정도면 효도지. 아버님 평생 숙원이 잃어버린 은성식품 되찾는 거라며? 되찾는 건 아니지만, 비슷하게 현실화하고 있잖아. 이거 은성식품 전성기 시절보다 더 규모가 큰 거 아니냐?”

“아마 그럴걸? 어떠냐? 이제 여기서 일할 생각 하니까, 가슴이 콩닥거려서 터질 것 같냐?”

“그래, 인마. 콩닥거려서 터지겠다.”

“그럴 줄 알았다. 짜식.”

하하 웃던 산하는 친구 동식과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서서 공장 외관을 바라보았다.

실체를 확연히 드러낸 공장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아려왔다.

지난날 아버지 박상태는 남몰래 괴로워했고, 그 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어서였다.

아버지, 이제 그만 벗어나세요.

은성식품 제대로 부활합니다.

꿈을 꾼 끝에 여기까지 달려온 산하의 눈동자에 희망이 가득 차올랐다.

* * *

<하산해 웹툰 원작 전시회, 루브르에서 열린다>

<프랑스에서도 인정받은 제2전시실 수묵화, 대체 어떤 작품인가>

- 진짜 미쳤…….

- 하산해 도랐맨?

- 루브르? 특별 초청?

- 뭘 다들 놀라고 그래요. 작품 보니까 그럴 만하던데.

- 그럴 만한 게 아니라 다른 작품 다 찍어 누를 정도죠. 2전시실 작품 보고 소름 끼쳤다니까요.

-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 이거 소문 들었는데, 진작에 초청했었는데, 하산해가 전시회 일정 다 끝내고 간다고 했다는데요?

- 진짜요? 와 그게 더 미쳤네. 나 같으면 바로 오케이 했을 텐데.

- 그게 하산해와 당신의 수준 차이입니다.

- 하산해 배짱 하나는 두둑하네. 마음에 들어.

- 당신이 마음에 들면 어쩔 거임?

- 그만들 좀 싸워요.

루브르 특별 초청 전시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한 달 내내 막걸리 담그기에 전념하던 산하는 팔짱을 낀 채 항아리 다섯 개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태 만든 막걸리가 맛은 그냥저냥 괜찮았지만, 대회에 출품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였다.

그래, 저 중에 하나는 있을 거야.

그래야 마음 놓고 프랑스 전시회도 잠시 다녀오지.

잘 부탁한다.

항아리 표면을 툭툭 두드린 산하는 최근 계속되었던 일과를 떠올렸다.

털보 구산호의 캠핑장 인근에서 물을 길어오고, 또 질 좋은 재료를 구해오고, 쌀 씻어 불리고, 고두밥 만들어 누룩과 배합하고 등등, 얼마나 정성으로 막걸리를 담갔던가.

거의 천상주에 버금가는 노력이었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하기를 바라던 산하는 막 뚜껑을 개봉하려 했다. 그때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며 새봄이 등장했다.

“산하 씨, 여기 있어요?”

그녀의 뺨과 코가 빨간 것을 본 산하가 하하 웃었다.

“우리 봄이 거하게 한잔하고 왔어? 취한 것 같은데?”

그의 장난에, 자신의 차가운 뺨을 쓰다듬은 새봄이 항의했다.

“뭐래요. 추워서 그래요. 이제 다 익었어요?”

“얼추 다 익었을걸? 오늘은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지난번 것도 맛있었는데요? 우리 아빠가 엄청 좋아하셨어요.”

“그래도 내 마음엔 안 든단 말이야.”

“산하 씨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런 걸걸요?”

“그런가.”

“그래요. 천상주 만들던 사람 눈높이가 오죽하겠어요?”

“뭐, 그렇다고 치고. 확인부터 합시다.”

산하는 항아리 뚜껑을 열고 결과물을 하나씩 확인했다. 한데 네 번째 항아리를 열 때까지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아, 이건 아닌데…….”

“왜요? 전보다 더 좋기만 한데.”

“그래? 우리 봄이 땡큐.”

그녀의 칭찬에 빙긋 웃어 보인 산하는 다섯 번째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이 항아리는 오로지 기본 재료만으로 만든 막걸리였다.

홍칠성과 로베르 막땅의 술 담그는 법을 조금씩 가미한 게 전부랄까.

한마디로 막걸리의 전통성은 지킨 가운데, 약간의 변화만 준 것이었다.

그래서 큰 기대까지는 없었다.

처음 이 막걸리를 만들 때부터 기본적인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것만은 계속 개선하며 만들어 왔지만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시간, 온도, 주조 과정에 살짝 변화를 주긴 했지만, 얼마나 큰 효과가 있었겠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음…… 일단 마지막 갑니다!”

항아리 뚜껑을 연 산하는 눈을 번쩍 떴다. 은은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코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여태 결과물 중에 이 정도 향을 내는 건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와, 산하 씨. 향 너무 좋다. 뭔가 맛있는 냄새 같기도 하고.”

“그러네. 이런 향은 처음인데. 윤새봄 사원, 이것도 맛보실래요?”

“당연하죠!”

아직 거르고 숙성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긴 했지만, 우선 맛을 보기로 한 산하는 작은 그릇 두 개에 막걸리를 덜어냈다.

그리고 맛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뭔가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이거야!

여기에 답이 있어.

그건 새봄도 마찬가지였다.

단맛이 별로 없어 부담스럽지 않고, 부드럽게 술술 넘어가는 우윳빛의 막걸리, 그 막걸리에는 약한 탄산이 톡톡 터졌고, 풍미가 그야말로 대단했다.

종일 밥 대신 이 막걸리만 먹고 싶을 정도랄까.

“우와, 진짜 맛있다.”

“천상주랑은 또 다른 매력이지?”

“맞아요. 어, 뭐랄까. 천상주가 도도한 느낌이라면, 이 막걸리는 엄청 친근한 느낌이랄까요? 아! 샴페인이랑 비슷한 풍미도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아요.”

“오, 우리 봄이 표현 잘하네. 이거 시중에 팔면 잘 먹히겠지?”

“백 퍼센트!?”

“오케이! 그럼 이걸 기준으로 조금만 더 연구해 봐야겠다. 아직 많이 모자라.”

“모자라요? 말도 안 돼.”

“말이 돼.”

“천상주랑 비교하면 그렇긴 하지만, 이것도 엄청 훌륭하다고요.”

그녀의 칭찬에 하하 웃던 산하는 이제야 마음에 조금 드는 막걸리를 바라보았다. 재해석이라는 걸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 듯싶었다.

천상주에 넣던 약초를 첨가하기도 하고, 로베르 막땅이 담그던 샴페인 발효법을 적용하기도 했지만 모조리 실패했었다.

한데, 기본을 지키는 가운데 약간의 변화만 가미하자 훌륭한 막걸리가 탄생한 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산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기본이 중요해.

그는 이걸 조금 더 확실하게 개선해 대회에 출품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 * *

50m에 달하는 산하의 수묵화는 프랑스 루브르로 귀하게 옮겨졌고, 전시회를 앞두고 있었다.

단 하나의 작품을 위해 기다리고 인내한 것은 처음이었던, 전시회 관계자와 파블로 교수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어떨지 기대되지 않습니까?”

“반응이 상당할 것 같아요. 다시 봐도 정말 소름 돋더군요.”

“이걸 한 번에 그려냈다던데, 정말 인간인가 싶습니다.”

“아, 그렇지. 사나팍? 작가님은 언제 오신답니까?”

“조만간 오신다고 전달받긴 했습니다.”

“전시회 첫날 오시면 참 좋을 텐데, 워낙 바쁘신 분이라고 들어서…….”

그들이 곧 열릴 전시회에 관해 토론하던 무렵이었다. 현재 프랑스 서점가에는 산하의 단편소설 <단풍을 닮았더라>가 조금씩 팔려 나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면벽 작가의 팬이 서서히 생겨났고, 그 팬카페에서는 열띤 토론이 오가고 있었다.

- 정말 감성적이면서도,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요. 대단해요.

- 저도 동의해요. 이 작가 소설은 다 이런가요?

- 글쎄요. 아직 다른 작품은 없다고 하던데요?

- 그래요? 설마 첫 작품은 아니겠죠? 이 작가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어요.

- 저도 그래서 팬 사인회 요청도 넣어 봤어요. 잘될지 모르겠네요.

- 다음 작품은 언제 나올까요?

- 글쎄요. 영화 제작 들어갔다는 소문은 있던데.

그 시각, 산하는 막걸리 재해석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프랑스 전시회 생각 중이었다. 프랑스 전시회 관계자가 관객들 앞에서 수묵화 그리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부탁해 왔기 때문이었다.

뭐가 좋을까.

전시 작품이랑 똑같이 하기는 그렇고.

아, 그렇지.

프랑스 출간 기념으로, 소설 내용을 표현해 볼까?

괜찮겠는데?

궁리하던 산하는 연습장에 이것저것 그려 보기 시작했다.

- 30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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