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탐이 난다 (1)
...이석헌은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무과급제가 꿈이었다. 하나, 석헌의 아버지는 아들을 걱정했다.
무과에 응시할 자격은 있지만 양반이 어려운 문과를 버리고 무과를 택하는 경우도 많았고, 시험 난이도 자체도 무척이나 어려웠기에, 양인이 급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험 과목인 활쏘기야 어떻게 한다손 치더라도, 마상무예를 훈련하거나 병법을 공부해야 하는 등 난관이 많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아들이 허송세월을 흘려보내는 것은 아닌가 염려했다. 재정적으로도 뒷받침해 주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석헌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목검을 휘두르고 뜀박질하며 신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중에도 석헌의 아버지는 그 모습을 대견하게 여겼고, 손수 목검을 깎아 주기도 했다.
비록 몽둥이인지 검인지 분간은 안 갔으나, 아버지의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석헌은 목검을 제 몸처럼 귀히 여겼다.
하나, 세상은 그의 삶을 가만두지 않았다.
왜구의 침탈이 있었고, 마을이 불탔으며, 석헌이 살던 집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이 가운데 그는 우연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가족을 대부분 잃었고, 어머니는 불구가 되었다.
이날 석헌은 불타다 남은 반 토막짜리 목검을 쥐고 엉엉 울었다. 어린 그의 마음에는 원한이 아로새겨졌다.
반드시 무과에 급제하여 군사를 이끌고 복수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후 어렵사리 가까운 친척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나, 그 생활은 쉽지 않았다.
말이 의탁이지, 거의 노비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더 흘러 장성한 이석헌은 친척 집으로부터 독립했고, 제법 으리으리한 집을 찾아갔다.
소문에 이르되, 무예를 익히고 싶은 자라면 응당 이곳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염려되는 것이 있었다. 그 어느 누가 무과 시험에 관련된 것을 거저 알려 주겠는가.
돈부터 구해야 하나.
그에게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신세를 한탄하며 고민하던 석헌은 인기척을 느꼈다.
뒤돌아보니, 백발이 성성하나 허리는 꼿꼿한 노인이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자네는 어찌하여 그리도 한숨을 내쉬는고?”
일면식도 없는 노인의 질문에 그는 내심을 쏟아내고 싶어졌다. 답답하지만 그 어디에도 상의하거나 말할 곳이 없어서였다.
해서 자신의 신세 내력을 간단히 말하였다.
“고생이 많았구만. 허면,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이석헌이라 하옵니다. 그런데, 노인장은……?”
노인은 그가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허허 웃었다.
“무예를 익히러 온 것이라면, 아주 잘 찾아왔네. 날 따라오게.”
그로부터 몇 년이 더 흘렀다.
어느새 어깨가 떡 벌어진 이석헌은 스승 앞에 무릎 꿇었다.
“스승님, 제자 영민하지 못하오나, 제발 가르침을 거두지 마옵소서.”
“석헌아.”
“예, 스승님.”
“내 진실대로 말하마. 석헌이 너는 그 어떤 것에도 재능이 평범하거나 미미하다. 이리도 세월이 흘렀으니, 그만할 때가 되었다. 이만 세상에 나가 봄이 어떠하냐?”
다른 걸 해 보라는 조언에, 석헌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애원했다.
“하지만, 스승님. 말씀하신 대로 원한도 잊고, 매사 정진하였습니다. 진정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제게 그리도 재능이 없단 말입니까?”
허연 구름이 둥둥 떠가는 하늘을 바라보던 노인.
그가 한참 만에야 운을 뗐다.
“대관절 재능이 없어도 이리 없을 수 있나 하였지만, 네게도 재능은 있다.”
“참말이십니까?”
“그렇다.”
제자 이석헌이 대체 그 재능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눈빛을 쏘아내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당황한 이석헌이 묻는다.
“그게 어찌 재능이라 할 수 있습니까?”
“보아라, 너와 동문수학했던 아이들이 그 짧은 세월을 참지 못하고 모두 포기하지 않았느냐? 그들의 재능이 충만하다 하나, 배움과 끈기가 모자라니, 끝내 한계에 이를 것이다. 한데, 석헌이 너는 끝까지 배움을 갈구하니, 늦을지언정 원하는 것에 도달하리라 믿는다.”
“그러하옵시면, 왜 제게 그만하라 하시는지요?”
“나로서는 네게 더 가르칠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하니, 더 좋은 스승을 찾아 보거라.”
실망한 석헌은 스승 앞에서 물러났고, 이를 악문 채 다가오는 무과에 도전하였다. 하나 실패했다.
몇 날 며칠 술만 퍼마시던 그는 어린 시절의 악몽을 꾸었다. 그리고 현재 어머니의 당부도 떠올렸다.
“석헌아, 이 어미가 짐만 되는구나. 염려 말고 네 뜻대로 하려무나.”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는 결국 꿈을 버리지 못했다. 늦을지언정 어떻게든 무과에 급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야 어머니도 마음이 편해지실 것이 아닌가.
그 후 석헌은 서른이 될 때까지 자신의 몸을 혹사했다. 특히 그나마 잘 쏘는 활에 집중했다. 하나 모든 것이 조금 능숙해질 뿐,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활과 한 몸이 된 듯, 묘한 느낌이 석헌의 몸을 지배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이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얻은 무언가를 확인해 보았다. 결과는 대단했다. 과녁에 백발백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석헌은 자신의 실력을 재차 검증하기 위해 산으로 향했고, 집채만 한 멧돼지 한 마리를 찾아냈다.
놈의 핏발 선 눈동자와 거친 털이 코앞에 있는 듯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였다.
멧돼지가 콧김을 내뿜더니 석헌을 향해 돌진했고, 그는 흠칫 놀랐으나 마음을 가다듬었다.
얼마 전 깨달은 바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였다.
석헌은 옆으로 한걸음 내디디며 멧돼지를 피해냈고, 활통에서 활을 꺼내 화살을 메겼다.
각궁의 시위가 순식간에 부풀었고, 놈의 뒷목에 활이 꽂혔다.
괴성을 지르던 멧돼지는 더욱 흉포하게 변하여 석헌에게 달려들었다. 하나 그는 오히려 가라앉은 눈으로 놈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두렵지가 않았다.
그는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차분하게 놈을 상대했고, 발걸음마저 산책을 나온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끝내 멧돼지는 활을 수북하게 꽂은 채 쓰러졌다.
이전과 다른 실력에, 석헌의 눈동자에 환희가 차올랐다. 이 정도면 뭔가 될 것 같았다.
그 길로 오랜만에 스승을 찾아간 석헌은 활 솜씨를 선보였고, 그의 스승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내 눈이 썩었던 게로구나. 이토록 놀라운 활 쏘기는 처음이로다. 되었다. 되었어. 어디 다시 한번 노력해 보자꾸나.”
그로부터 몇 년이 더 흘렀다.
조선 시대 무관 시험은 정기적으로 보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인 시험인 별시, 정시, 알성시 등 여러 가지였다.
그중에서 석헌이 도전한 시험은 식년시였다.
이 시험은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했는데,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단계를 거쳐 사람을 선발하였다.
한데 이 시험이라는 것이 무관이라 할지라도 문무를 갖춰야 했다. 하여 무예를 비롯해 이론시험인 강서(講書)도 공부해야 했다.
석헌은 스승의 도움으로 이런 과정을 마무리했고, 무과에 응시했다.
그의 강서와 마상무예는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금 뛰어난 수준이었으나, 활쏘기에서 모두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백발백중은 기본이요. 철전을 그 누구보다 멀리 쏘아 보내는 등 신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활쏘기와 마상무예가 핵심인 무과 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전국에서 고작 28명을 뽑는 고난도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석헌의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들었고, 불편한 몸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조금 더 흘렀다.
외적의 침입에서 큰 공을 세운 이석헌은 종 5품의 벼슬에 올랐다.
세간에서는 그를 신궁이라 불렀다.
그의 손에는 아버지가 손수 깎아 쥐여주었던, 반 토막 난 목검이 자주 들려 있곤 했다.
...
[이석헌의 활 솜씨 관찰에 성공했습니다.]
[이석헌의 승마 솜씨 관찰에 성공했습니다.]
[솜씨 일부를 가져옵니다.]
오래전 이석헌의 과거는 그에게 두 가지 재능을 전해 주었고, 산하는 두 가지 사실에서 당황했다.
하나는 막대기가 본디 반 토막 난 목검이라는 사실이었고, 또 하나는 활쏘기 재능이었다.
이게 목검이었구나.
그런데 활쏘기는 어디에 쓰지?
어디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고.
놀라운 실력이지만, 현재로서는 별달리 쓸모가 없는 재능이었다.
볼을 긁적이던 산하는 막대기를 내려놓았다.
뭐,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 * *
산하의 곁에 머무르던 루카스가 프랑스로 떠나간 어느 날이었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막걸리를 빚었다. 곧 다가오는 이탈리아 대회에 출품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술맛이 프랑스로 떠나기 전 품질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천상주나 로베르 막땅의 샴페인에 비해 꽤 뒤처지는 감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막걸리는 빨리 익어서 많은 실험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엔 잘돼야 하는데.
항아리 몇 개를 가만히 살펴보던 산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곧장 본가로 향한 그는 쪼르르 달려오는 조카 박유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유진이 잘 있었어?”
“네! 삼촌.”
부모님과 형 박제동, 형수에게도 인사한 산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정이는요?”
“걔는 말도 마라. 아주 그냥 혼자 비행기 타고 날아다닌다.”
“네?”
“말 나온 김에 네가 데려와.”
“알았어요.”
산하는 윤정의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안에서 외국인 말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났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전신 거울 앞에 선 여동생을 발견했다. 밀짚모자를 쓰고 웬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인 여행 가방을 곁에 둔 채였다.
책상 위 스마트폰에서는 불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정은 자신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가, 또 샐쭉한 표정을 했다가, 활짝 웃었다가, 그다음에는 불어로 인사까지 했다.
심지어 한국인과 만나 첫인사 나누는 장면까지 연출 중이었다.
“아, 한 번에 한국인인 줄 알아봤어요. 반가워요. 저는…….”
“박윤땡입니다.”
그제야 산하가 들어선 걸 눈치챈 윤정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쒸, 박산하. 왜 숙녀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 내가 노크하랬지?”
“노크했거든?”
“거짓말.”
“거짓말은 무슨, 지가 못 들어놓고, 거울 앞에서 뭐 하냐?”
“남이사. 그래서 왜?”
“밥 먹으라고, 와 근데 이게 다 뭐냐? 방이나 좀 치워라. 여기가 쓰레기 매립장이냐?”
“야 이 뻥쟁아, 그 정도는 아니거든?”
“어쭈? 비행기 표 환불해?”
삿대질하던 윤정이 손가락을 슬며시 오므렸다. 얼굴에는 가식적인 미소가 가득했다.
“오라버늬, 소녀 방을 정갈하게 치우겠사옵니다.”
“……소녀가 아니라 노처녀겠지.”
“아, 진짜. 비행기 표만 아니었어도.”
“아니었어도?”
“아냐, 고맙다고. 금방 나갈게.”
그가 방문을 닫고 나간 후, 윤정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다시 거울을 쳐다보았다.
“역시, 박윤정 미모 안 죽었어. 이뻐이뻐.”
* * *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는 바로 ‘국궁’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서 국궁은 일종의 스포츠 문화이자 오락거리로 자리 잡는 중이었는데, 삭막한 도심 곳곳에 활쏘기 유료 체험장이 생겨나고 있었다.
실내 활쏘기 체험장을 운영하는 송문석은 크게 하품했다.
오늘따라 찾는 손님이 없어서였다.
“에구야, 뻐근하다. 왜 이렇게 파리만 날려.”
그때, 그의 와이프가 등장했다.
“이것 봐. 내가 돈 안 된다고 하지 말라고 했죠?”
“당신은 왜 또 잔소리야?”
“은퇴하고 다시는 안 한다더니, 또 하니까 그러죠. 또 이건 국궁이니 뭐니 변명하지 마요. 그 활이나 이 활이나.”
찔끔한 송문석이 말을 돌린다.
“거참, 당신 그거 알아?”
“뭘요?”
“오늘따라 너무 이쁜 거.”
“……그건 나도 알아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송문석은 당황했다.
“뭐!?”
그녀는 남편을 슬쩍 흘겨보았다. 그 눈길을 슬쩍 피한 송문석이 각궁을 들어 올렸다.
한때 양궁 선수였던 그가 새로이 가진 취미이자 일이었다.
“손님도 없는데, 당신 한번 쏴 보는 건 어때?”
“취미 없다고 했잖아요.”
“거 한번 해 보라니까, 심신 수양에 아주 좋아. 요즘 당신 스트레스 많잖아. 이거 몇 번만 날리면 그런 기분 싹 사라져.”
“행여나 어디 가서라도 그런 말 하지 마요. 순 사이비 같아.”
“사이비라니. 엄연한 진실인데.”
그때, 출입구 문이 열렸다. 들어선 사람은 산하였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
고개를 돌려 인사하던 송문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유명한 하산해였다.
그의 와이프도 놀라던 그때, 송문석이 후다닥 그에게 달려갔다.
“아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럼요, 안녕합니다. 활 쏘러 오셨습니까?”
“네, 지금 가능할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어떻게 쏴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뭐라고 말할까 잠시 생각하던 산하는 사실대로 말했다.
“구경은 조금 해 봤습니다.”
“그래요? 그러시면 제가 기본만 조금 알려 드릴게요.”
잠시 후, 송문석은 각궁의 여러 부위에 관해 설명했다.
“여기 보이시죠? 이 부분을 절피라고 합니다. 시위가 상하는 걸 막아주죠. 그리고 여기는 줌통이라고 하는데…….”
각궁이 물소의 뿔이나 민어 부레풀, 대나무 등 여러 재료로 만들어진다는 것까지 설명한 그는 직접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잡고, 천천히 숨을 들이켜면서, 복식호흡을 하시고요. 그다음에…….”
설명을 끝마친 그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활은 과녁의 중앙 근처에 틀어박혔다.
최대 10점 중 9점이었다.
그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 이거 10점이 안 나왔네요. 저도 녹슬었나 봐요.”
“에이, 잘 쏘시는데요?”
“그래 보이나요? 사실 제가 양궁 선수였거든요. 뭐 별 볼 일은 없었지만요. 그때 조금만 운이…….”
송문석은 잠깐 과거사를 늘어놓았고, 산하는 그의 노력을 칭찬했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제 자랑만 한 것 같네요. 자, 한번 쏴 보세요. 생각보다 어렵진 않을 겁니다.”
물론 그가 말한 ‘어렵지 않다’의 뜻은, 일반적으로 그냥 활을 날리는 정도는 쉽다는 뜻이었다.
그에 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총 스무 발의 화살을 넘겨받은 그는 자리에 섰다. 이곳에는 잠깐 시간을 내서 활 솜씨를 시험하러 온 참이었다.
한데, 이석헌의 재능으로 과녁을 보니 너무 심하게 가까웠다.
눈 감고도 10점은 충분해 보였다.
다음엔 실외의 제대로 된 활터에서 쏴 봐야겠다고 생각한 산하가 각궁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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