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밥맛이 좋아져요 (1)
그는 내부에 제법 친한 경비원이 있다고 말할까 하다가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것도 일종의 범죄이기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도 알 수 없고.
그 순간, 산하는 그의 표정이 이상함을 알아보고 과거를 두어 번 들여다보았다.
눈이 확 뜨이는 내용이 포착되었다.
음……. 도움 요청? 경비원에게?
설마 훔치기라도 하려는 건가?
아무 말 안 하는 걸 보니, 숨기려는 모양인데.
이건 모른 척하는 게 좋겠어.
그 후로도 산하와 그들은 원본을 구할 방법을 모색했다.
다음 날.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한 사내가 굳게 잠긴 창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이번 술 대회 참가자들의 점수를 기록한 원본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걸 언제 다 파쇄 처리하나 싶어 한숨을 내쉰 그는 밀차에 서류 일부를 실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창고를 빠져나간 그가 문을 닫을 때였다. 밝은 손전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놀란 그가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누굽니까?”
“경비원입니다.”
살펴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긴 안 돌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죄송합니다. 순찰하던 게 버릇이 되어 놔서, 뭐 좀 도와드릴까요?”
그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됐으니까, 밖이나 잘 지켜요. 나가세요.”
“네, 그럼…….”
경비원이 뒤돌아서서 멀리 사라지자, 그는 짜증이 난 듯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파쇄실로 향했다.
그 바람에 문 잠그는 것도 잊어 먹었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경비원이 창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오, 열려 있네.”
사내는 내부에 가득 쌓인 서류를 살펴보았다.
“보자, 상위권만 찍어 오면 된다고 했지? 이걸 언제 다 찍어?”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재빨리 손을 놀렸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댔다. 서류를 넘기는 그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자신을 항상 무시하는 대회 조직위 고위 임원에 대한 복수이자, 항상 친절했던 페데리코 알론소의 부탁을 들어주는 거였다.
* * *
<저는 대회 내부 관계자 중 한 사람으로, 이번 대회의 비리를 밝히고자 이 자료를 배포합니다.>
누군가 익명으로 배포한 사진 자료를, 산하를 비롯한 외부 심사위원이 살펴보고 있었다.
“원본 맞는 것 같죠?”
심사위원 한 명이 질문을 던지자, 다른 외부심사위원 중 한 명이 답한다.
“맞네요. 여기 제 사인 확실합니다. 이걸 누가 찍어 올린 걸까요?”
산하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누군지 고맙네요. 전부 다는 아니라서 아쉽지만요. 이거 참가자별로 합산해서, 조직위에서 발표한 총점수와 대조하면 되는 거죠?”
“맞습니다.”
그 후 몇 시간이 흘렀다.
산하와 외부 심사위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원본상의 합산 점수는 어딘가 이상했다. 다 합치니, 대회 조직위에서 공개한 합산 점수와 비슷한 것도 있었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빠진 원본도 있는 마당인데, 이렇게 나올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조직위에서 발표한 1위는 엉터리라는 뜻이었다.
페데리코 알론소가 분개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조작이 확실하군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정말이었네요. 대회 전체는 몰라도 상위권은 조작이 확실합니다.”
“이제 어찌해야 할지 논의해 봅시다. 산하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페데리코 알론소는 산하가 존경스러웠다. 자신은 몸 사리느라 조심조심 움직였는데, 저 사내는 마르코와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직위 사무실 앞에서 마르코를 제대로 찍어 누르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가 참가자 및 관계자를 선동하는 바람에, 일이 제법 수월해진 참이었다.
해서 존경의 의미로 질문했고, 점수표를 내려다보던 산하가 답했다.
“불만 붙이면 될 것 같은데요?”
“네?”
“아마 네티즌도 알아차렸을 것 같아서요. 세세한 점수는 몰라도, 합산 점수는 대중에게 발표되었으니까요. 한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아…….”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스마트폰을 꺼내 네티즌 반응을 확인했다. 이미 축제 및 술 대회 관련 포럼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분석해서 올려놓은 자료 때문이었다.
- 뭐야, 이거 진짜 조작이잖아요. 원본이 확실하다면요.
- 아까, 심사위원 몇 명이 자기 사인 맞다고 증명했어요.
- 우와, 박산하 이 사람 뭐죠? 점수 기록표 일부 없는데도 점수가 미쳤는데요?
- 그러게요. 이게 말이 되나.
- 대체 이 사람 술은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 이럴 때가 아니죠. 거짓말쟁이 마르코 응징해야죠.
- 우리가 뭘 어떻게 응징해요?
- 일단 시청 홈페이지 찾아가서 항의부터 합시다.
- 오, 그거 좋은데요?
- 여기 기자 있을 듯요. 이거 보시면 기사 좀 팍팍 써 주세요.
외부 심사위원이 이 내용을 읊어 주었고, 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여론은 형성됐네요. 이제 심사위원분들 중에, 마르코 씨에게 협박 같은 걸 당한 분들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저는 참가자분들 계속 독려해서, 이번 대회 항의하도록 설득할게요.”
어느새 산하는 이 그룹의 리더 같은 모양새가 되었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일은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다른 심사위원도 산하와 페데리코 알론소 세력에 합류했다.
점수 조작의 실체는 더 확연히 드러났고, 마르코는 궁지에 몰렸다.
수천의 대회 참가자도 속속 항의 행렬에 참여하고 있기에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낸 그가 화를 냈다.
“이런 미친, 대체 누가 유출한 겁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찾아내세요. 아니지 이건 나중 일이고, 뭐 좋은 변명거리 없습니까?”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자신이 사인한 원본 서류가 맞다고 증명했어요. 참가자들도 들고일어나려는 눈치예요. 이러다가 마르코랑 저…….”
마르코가 버럭 소리 질렀다.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하고, 방법을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왜 나한테 화내고 지랄이야.
나도 똥줄 타는구만.
저 인간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데.
차기 협회장이고 뭐고,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야.
두 사람이 고민하는 동안 일부 시민도 나라 망신이라며 얼른 수사할 것을 요청했다.
이즈음 마르코에게 협박받았다는 일부 심사위원의 증언은 점수 조작 논란에 불을 붙였다.
그래도 이탈리아 정부는 무슨 생각인지 조용했는데, 미국으로 돌아간 앤더슨 대통령이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마디를 던졌다.
“상당히 기대했던 대회였는데, 이탈리아 대회 운영에 실망했다.”
그제야 정부 당국이 수사를 지시했다.
이탈리아 경찰서.
너무 좁아서 폐소 공포증을 느낄 것만 같은 내부에, 마르코가 앉아 있다.
“이름.”
“다 알면서 왜 물어보는 겁니까?”
“이름!”
“당신 후회할 겁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잘 알죠. 나라 망신시킨 범죄자 아닙니까? 이름.”
“뭐!?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범죄 혐의 추가하기 전에 조용히 대답하세요. 나이.”
마르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나 본데, 내가 시장하고 어떤 사이인 줄 알아?”
“나이!”
“이거라도 풀어 달라고,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것도 없는데 웬 수갑이야?”
“자꾸 비협조적이면 당신만 고생합니다. 나이.”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야 할 거 아냐!”
“앉으세요.”
“못 앉겠다면 어쩔 거야?”
마르코가 벌게진 얼굴로 난동을 부렸다. 이에 짜증 난 표정을 짓던 경찰이 그를 우악스럽게 제압했다.
“놔, 이거 놔!”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났다. 이탈리아 뉴스 기사는 조용한 가운데, 외신에서 이번 대회와 관련된 내용을 다뤘다.
특히 독일, 프랑스 언론 매체가 적극적이었다.
<이탈리아 술 대회, 비리로 얼룩져>
<유명 소믈리에 초청, 권위 자랑하던 세계 술 대회 밑바닥으로 추락>
<점수 조작, 사실로 밝혀졌다>
<실제 세계 술 대회 1위는 한국 박산하의 천상주>
<일부 심사위원, 마르코에게 협박당했다. 증언 속속 이어져>
<대회 조직위원장 마르코, 밤샘 조사 후 귀가>
<뇌물과 매수, 협박, 이탈리아 술 대회 어디까지 썩어 있나?>
<이탈리아 시당국, 대회 주최 측 대신해 참가자에게 사과>
이 와중에 에밀리아노 그로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잘못하면 체포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탈리아 정부 당국은 이번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 했다. 여러 나라 보기 창피해서였다.
해서 에밀리아노는 양심 선언했다는 명목으로 약간의 조사만 받고 벌금형으로 끝났다.
병적으로 생각이 많은 데다 심약한 그는 그간 한숨도 못 잔 참이었다.
휴, 이제 졸음이 몰려오는군.
그때, 그의 전화로 누군가가 연락을 넣었다. 그는 반갑게 전화 받았다.
“산하 씨? 안녕하세요?”
“그때, 봉막걸리 필요하다고 하셨죠?”
“네? 네.”
“그거 귀국하면 만들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네, 약속 지키셨잖아요.”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그와의 대화를 종료한 산하는 눈앞을 바라보았다.
[대회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라, 완료되었습니다.]
[박산하의 솜씨 80%가 적용된, 봉막걸리 대량 생산이 가능합니다.]
상익은 신나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와, 이번 사건 때문에, 형이 만든 술 인기 장난 아니에요. 다들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그럼 뭐 하냐, 국내 수요도 감당 못 하는데.”
“아, 하긴……. 그런데 형 대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요?”
“무슨 용기?”
“막막 그 마르코 들이받았잖아요. 재산 걸고 한판 붙자고.”
“그게 뭐 어때서? 불합리하면 들이받아야지. 가만히 있으면 누가 챙겨 주냐?”
“그야 그렇지만, 아무나 못 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외국인데, 아무튼 형 이번에 진짜 짱 멋있었습니다.”
“비행기 그만 태우고, 난 아래쪽에 심사위원분들하고 인사 좀 하고 올 테니까, 귀국할 준비해.”
“네, 형.”
잠시 후, 산하는 1층 카페에서 페데리코 알론소 및 심사위원과 만나서 악수했다.
“일이 잘 마무리돼서 다행입니다. 그럼 건강하세요.”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뭘요, 다 같이 노력한 덕분이죠.”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겠죠?”
산하가 하하 웃었다.
“그럼요.”
* * *
프랑스 세계 요리 대회 고위 관계자는, 대회 준비 과정에서 화들짝 놀랐다. 이탈리아에서 점수 조작 소식이 들려와서였다.
자신들도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내부를 제대로 단속하기로 한 그들은 대회를 미룬다는 공지를 내걸었다.
이즈음, 산하는 도저히 이탈리아에서 관광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번 사건도 사건이지만, 앤더슨 대통령과 관련된 뉴스 보도가 제일 컸다.
얼굴이 워낙 많이 팔려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해서 여자친구와 상의한 끝에 그냥 귀국하기로 했다.
그때, 상익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깝다. 형이랑, 새봄 누나랑 오붓하게 여행할 기회였는데…….”
흠칫한 산하와 새봄이 고개를 돌렸다.
“뭐?”
“뭐라고요?”
“두 분 사귀시는 거 아니에요?”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에이, 제가 형 옆에 매일 붙어 있는데,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새봄 누나 대회 도와주러 온 거 아니죠?”
“언제부터 알았어?”
“어……. 글쎄요. 어느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 두 분 오가는 눈빛이 막, 막 뜨거워서.”
“뭐 인마? 뜨거워? 너 똑바로 말해.”
“아! 아아! 형 아파요.”
“이 봉만두 같은 자식, 어디 음침하게 염탐을 해? 죽어!”
“아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입 꾹 다물게요.”
“그래도 죽어! 알면서 왜 숨기고 있었어?”
“그, 그냥요.”
“알면 안다고 말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어? 봄이한테 사장님 소리 들으니까 웃겼지?”
“어, 쬐끔?”
“받아라, 응징의 메아리!”
“으악!”
상익은 그의 손을 벗어나 다른 방으로 도망쳤고, 산하는 그 뒤를 쫓아갔다.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새봄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못 말려 정말.
그런데, 다른 사람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 아냐?
난 몰라, 어떡해.
잘 숨긴 줄 알았는데.
* * *
<하산해, 이탈리아 술 대회 보이콧 선언>
<이탈리아 술 대회 실질적인 1위, 하산해>
<대회가 비리로 점철되었다, 하산해 주장 사실로 드러나>
<유명 소믈리에 페데리코 알론소, 진실 추구하는 박산하에 경의 표한다>
<법인 은성, 주류 구입 문의로 몸살>
<천상주, 한국인이 가장 마셔 보고 싶은 술 1위 등극>
산하가 귀국한 지 며칠이 흘렀다.
국내 뉴스는 이탈리아 술 대회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와 더불어 산하의 인지도는 세계적으로 조금 더 올라갔다.
특히 아직도 천상주를 접해 보지 못한 국내 애주가들은, 산하가 생산한 술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그 시각, 산하는 식당 식구들을 불러 앉혀 놓고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중이었다.
린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사장님, 무슨 일인데요? 혹시 이탈리아 또 가시는 건가요?”
봉만두와 유나세도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형님, 혹시 당분간 영업 중단은 아니죠?”
“무슨 중요한 일이세요?”
새봄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가운데, 산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중대 발표를 하겠다.”
“??”
“?”
“???”
“사실!”
“???”
“난 새봄이와 사귄다.”
유나세와 린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
“이제 공개하시는 거예요?”
“뭐야, 너네 둘도 다 알고 있었냐? 와, 진짜 눈치 하나는…….”
린다와 유나세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지만, 봉만두는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끌리는 거친 마찰음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는 눈까지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형님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니들 그게 무슨 소리야? 봄이랑 형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다급하게 말을 이어 가던 봉만두가 말을 흐리더니, 돌연 하하하 웃었다.
“아, 또 속을 뻔했네. 이 봉만두 이따위 저급한 몰래카메라에 당하지 않습니다. 야! 유나세 너지? 이런 유치한 장난을 주동한 인간이?”
“뭐라는 거야.”
팔짱을 낀 채 봉만두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산하가 말했다.
“이런 눈치코치도 없는 봉만두, 너는 그럴 줄 알았다. 몰래카메라 좋아하네.”
눈을 또르륵 굴리던 봉만두가 피식 웃는다.
“에이, 형님 저 안 속는다니까요. 이런 유치한 장난 그만하세요.”
“어딜 봐서 장난이야?”
그의 진지한 표정에, 봉만두가 정색했다.
“네!? 세상에, 그럼 정말 우리 지역 최고 미녀 봄이와 형님이 사귀신다는 말씀이세요? 어째서요?”
“어째서요라니? 이걸 그냥 확!”
두 손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 채, 뒤로 후다닥 물러선 만두가 묻는다.
“아니, 형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진짜 봄이랑 사귀신다고요?”
“그래, 인마. 몇 번을 물어봐? 누가 봉만두 아니랄까 봐, 이걸 구워 먹을까, 삶아 먹을까.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왜 너만 몰라?”
“……대체 언제부터 사귀셨는데요?”
“그건 알 거 없고, 봉만두는 눈치 없으니까 오늘부터 된장찌개 일주일간 압수.”
“안 돼!!!”
“자, 다들 퇴근해. 난 데이트하러 간다.”
유나세가 입을 헤 벌렸다.
“와, 사장님 이젠 대놓고…….”
린다는 어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럽다. 봄이 언니 부러워요.”
그가 새봄의 손을 잡아챘다. 그녀는 좋으면서도 민망한 기분이었다.
“아니, 이건 조금 놓는 게 어때요?”
“뭐 어때? 이제 다 밝힌 마당인데.”
“밖에 기자들 있어요.”
산하가 바깥을 흘깃거렸다. 다행히 내부를 염탐하는 기자는 없었다.
“아, 그러네. 나야 괜찮은데. 우리 봄이 돌아다니기 불편할 테니까.”
이윽고 산하는 새봄과 함께 사라졌고, 남은 세 사람은 그들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봉만두가 버럭 소리친다.
“야! 너네 둘, 왜 나만 안 알려 줘? 한 식구끼리 치사하게 이럴 거야?”
“오빠가 눈치가 없는 거예요.”
“그래, 봉만두 눈치 너무 없어. 얼마나 티 났는데.”
“억울해, 억울하다고!”
“억울하면 문단속이나 해, 우리 먼저 퇴근할게. 린다야 가자.”
“네, 언니. 만두 오빠 바바이.”
두 사람이 빠져나간 후, 봉만두는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았다.
“으아아! 이게 말이 돼? 옥탑에서 함께 솔로의 길을 맹세했거늘, 어떻게 형님이 연애를…… 이건 배신이야!”
휴대폰을 가지러 되돌아온 산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배신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언제 그런 맹세 했어? 너 사기 칠래?”
“!?”
“뭘 놀라고 그래?”
“형님, 왜 제 말을 엿듣고 그러세요?”
“엿듣긴 뭘 엿들어? 휴대폰 가지러 왔다 인마. 이 자식이 이거 나 없으면 몰래 내 욕하고 그런 거 아냐?”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 참! 형님, 형님.”
“왜?”
“저 간절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소원? 갑자기?”
봉만두가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비는 시늉을 했다.
“네, 소원, 작은 희망이라고나 할까요?”
“말해 봐. 들어는 볼게.”
“소개팅해 주세요.”
만두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산하가 입을 열었다.
“진심이냐?”
“당연히 진심이죠. 절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제가 어때서요? 늠름한 대한의 사나이 봉만두, 무쇠다리 무쇠팔! 이 정도면 최강의 소개팅 상대 아닙니까?”
“봉만두, 소크라테스 형님 충고 모독하냐? 너 자신을 좀 알아야 되는 거 아냐?”
“잘 아는데요?”
“됐고, 20kg 감량하면 생각은 해 볼게.”
봉만두가 경악했다.
“그거 안 해 주시겠다는 거잖아요?”
“이게 왜 안 해 주겠다는 거야? 새 사람으로 거듭나면 소개팅도 해 주겠다는 거지.”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 봉만두가 고개를 모로 비틀며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돌연 묻는다.
“그래서 소개해 줄 사람은 누굽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 없을 수도 있고.”
“형님! 실망입니다.”
“그래 많이 실망해라. 아차, 봄이 기다릴라. 야이 봉만두 때문에 시간 지체했잖아.”
산하는 휴게실로 이동해 휴대폰을 가져왔고, 만두는 부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형님, 진짜 데이트하러 가시는 겁니까?”
“뭐가 그렇게 궁금해?”
“봄이 같은 최고 미인과 데이트하는 기분은 어떤지 궁금해서요.”
“그런 게 궁금해?”
“네!”
“나중에 직접 해 봐.”
“네!? 진짜요? 미인 소개해 주실 거예요? 저 살만 빼면 되는 거예요? 정말요?”
“또 헛물켜네. 미인은 알아서 구해야지. 나 간다.”
“형니임!”
“시끄러, 문이나 닫고 퇴근해.”
홀로 남겨진 봉만두가 울부짖었다.
“아, 솔로여, 비참하구나. 형님이 연애를…….”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던 봉만두가 뱃살을 두 손으로 꼬집었다. 눈빛은 꼭 원수를 보는 것 같았다.
“나의 동지 뱃살이여, 이제 너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는가!”
히죽 웃던 만두가 볼록 튀어나온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안하다. 잘 가라, 나도 이제 따뜻한 커플의 삶을 살련다. 안녕.”
* * *
이탈리아 술 대회 소란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무렵이었다. 에밀리아노 그로소는 특별한 물품을 배송받았다.
바로 봉막걸리였다.
과발효 시 항공배송 중 터질 염려가 있었고, 산하는 발효가 덜 된 막걸리를 보낸 참이었다.
그곳에는 쪽지가 붙어 있었는데, 냉장 보관 후 며칠 후에 먹으라고 돼 있었다.
국제전화로 산하에게 감사함을 표한 에밀리아노는 삼일 정도를 기다렸다.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은 에밀리아노가 봉막걸리를 가리켰다.
“업그레이드되었다던데, 저번처럼 효과가 있으면 좋겠구나.”
“이러다 우리 딸 술꾼 되는 거 아니에요?”
“엄마!”
“알았어, 얼른 맛이나 봐. 저번처럼 그런지 어떤지 봐야지.”
“응.”
이사벨라는 업그레이드된 봉막걸리를 그릇에 따랐다. 그 시큼한 냄새는 여전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막걸리를 조심스레 입으로 가졌다.
“음? 맛은 잘 느껴져요. 저번처럼요. 그런데 맛이 똑같은데요?”
“그래? 어디…… 응? 그렇구나. 뭐가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거지?”
“나도 먹어 봐요. 어휴, 이 술은 첫맛이 왜 이러나 몰라요.”
에밀리아노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답이 없는데, 분석 결과도 별거 없다고 하니 원.
그러고도 며칠이 더 지났다. 이사벨라는 유일하게 맛을 제대로 느끼는 봉막걸리를 야금야금 마셨고, 결국 오늘 술이 다 떨어졌다.
마지막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막걸리병을 거꾸로 세워서 탈탈 털었다.
하나 이제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맛을 선사해 주던 술이 사라진 참이었다.
아쉬웠던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식탁 위의 과일을 바라보았다.
알딸딸하니 기분이 좋은 가운데, 조금 전부터 배가 고팠다. 배를 슥슥 문지르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아까 빵 먹었는데.
“이거라도 먹을까?”
별생각 없이 사과를 한입 베어 문 이사벨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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