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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337화 (337/445)

337화 밥맛이 좋아져요 (2)

본래대로라면 너무 희미한 신맛 정도만 느끼는 게 다였다. 한데 어릴 적 맛보았던 사과 특유의 맛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이사벨라는 다시 사과를 베어 물었다.

아삭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고, 터져 나오는 사과 과즙은 너무 맛있었다.

그녀는 이 맛을 혹여 잃어버릴까 두려워졌다. 해서 베어 물고 또 베어 물고, 사과가 찌꺼기만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먹었다.

황홀했다.

새콤달콤한 사과를 맛본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다른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냉장고 안에 케이크가 있었다.

설마 이것도?

그녀는 케이크를 꺼내 크림을 찍어 맛보았다. 비록 희미하지만, 생크림 맛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 느껴져.

바로 이 맛이야. 이런 맛이었어.

오랜 기간 결핍되어 있던 그녀의 욕구가 충족되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걸 뛰어넘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사벨라는 미친 사람처럼 손으로 케이크를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때, 외출했다가 돌아온 에밀리아노와 그의 와이프가 이 장면을 목격했고, 현관에 선 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딸이 뒤돌아선 채 무언가를 마구 집어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

그녀는 어머니의 부름을 듣지도 못했는지 케이크를 미친 듯이 퍼먹었다. 그 행위는 에밀리아노가 제지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손으로 케이크를 먹는 딸의 팔을 잡았다.

“딸, 이게 무슨 일이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사벨라는 생크림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빠……?”

“그래, 아빠야. 왜 그러냐고 묻잖아.”

이사벨라는 맛에 취해 정신이 나갔었다는 걸 깨달았다. 엉망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활짝 웃었다.

“아빠, 이거 맛이 느껴져.”

“뭐!? 그게 진짜야?”

그녀의 어머니도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니? 맛이 느껴져?”

“응, 엄마. 너무 맛있어. 나 이런 맛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

“세상에, 딸, 너무 잘됐다. 잘됐어.”

이윽고 세 가족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여보, 그 막걸리인지 뭔지 하는 술 때문이 아니라, 이사벨라가 자연적으로 치유되고 있었나 봐요.”

“그러게, 우리가 너무 간절했었지. 그래서 뭐라도 붙잡고 싶었나 봐. 잘된 일이야. 정말 잘됐어. 우리 오늘 외식할까?”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좋아요!”

“이런 줄도 모르고, 괜히 얘한테 술만 먹였잖아요. 이러다 술꾼 되면 어쩔 거예요?”

“엄마는, 안 그래.”

그녀의 타박에도, 에밀리아노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딸에게 차도가 보이다니.

역시 과학을 믿었어야 했어.

분석 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 술에 힌트가 있다고 여겼다니.

정말 바보 같았지 뭐야.

그는 그저 강한 신맛의 술을 마신 시기와 딸의 자연치유 시기가 겹쳤다고 믿었다.

그 후, 이사벨라는 며칠간 밥도 무척이나 잘 먹고 연신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 기쁨도 얼마 가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또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희미한 신맛, 그것이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대체 왜…….”

“어째서…….”

이사벨라의 부모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때, 에밀리아노가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 막걸리, 막걸리를 다시 마셔 보자꾸나.”

“……막걸리요?”

“그래,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힌트는 여전히 그 막걸리뿐이야.”

에밀리아노는 당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와이프는 그를 말렸다.

“여보, 지금 한국은 새벽이에요. 그리고 뭐 준 것도 없이 계속 달라고 하기도 뭐하잖아요.”

“아…… 그렇지. 당신 말이 맞아. 하지만…….”

그는 말을 흐리며, 절망으로 멍하니 앉아있는 딸의 등을 토닥였다.

“딸, 분명 방법이 있을 게다. 실망하긴 일러.”

그의 격려에도 이사벨라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녀의 눈가로 촉촉한 습기가 번져 나갔다.

* * *

심 피디는 야심 찬 표정으로 기획서를 내려다보았다.

<스타 체육단>

연예인 중 특출나게 운동을 잘하는 몇몇을 뽑아 프로 선수와 한판 붙는다는 설정이었다.

사실 연예인의 몸으로 프로 운동선수를 이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지만, 그가 노리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하산해.

강속구로 이름 날린 그가 한번 출연해 준다면, 다른 연예인들이야 깨지건 말건 상관없었다.

유럽에서 인기 만발인 산하가 프로그램에 나오기만 해도 흥행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자, 심장원 피디는 돌연 흐흐 웃었다.

“심 피디, 왜 그런 식으로 웃어? 뭐가 그렇게 좋아?”

뒤를 돌아본 심 피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웃으면 안 되는 겁니까?”

“또 또 따지고 든다.”

“불의에는 항거하라는 말이 있죠.”

예능국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그 불의라는 얘기야?”

“그럴 수도 있습니다. 지금 뭔가 압력을 행사하는 눈빛을 쏘고 계시잖습니까?”

“뭐 인마? 아우, 이걸 그냥. 너 인마, 저번에 하산해 출연 기획 이후로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는 거 알아?”

“짜잔!”

심 피디가 기획서를 내밀자, 국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뭔데?”

“알아맞혀 보세요!”

“지금 퀴즈 낼 때냐? 하, 주먹이 운다.”

“국장님이 저한테 지실걸요?”

“너 인마, 내가 왕년에 주먹깨나 쓴 거 몰라?”

국장이 입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연신 스트레이트와 훅을 날렸다.

“바람 찢고 스치면, 바로 사망이야.”

“국장님이요?”

“뭐 인마!?”

뒷목을 잡은 국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사장님. 어쩌다 우리 방송국에 이런 놈이 굴러들어왔을까요?”

“국장님, 그렇게 출세 욕구 자꾸 내보이시면 안 됩니다. 아부도 정도껏 하셔야죠.”

국장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심 피디. 내가 말대꾸하지 말라고 했지?”

“…….”

“뭐야, 왜 말 안 해?”

“…….”

“이 자식이 이거, 답답하게. 빨리 말 안 해?”

“말대꾸하지 말라고 하셔서요.”

“내가 말대꾸하지 말라고 했지, 언제 말…… 하, 됐다. 기획 설명이나 해 봐.”

시큰둥하던 심 피디의 눈이 레이저 줄기라도 쏠 것처럼 변했다.

“국장님!”

“왜 뭐?”

“예산 듬뿍 주셔야 됩니다.”

“예산은 내가 주냐? 뭔지 말이나 해 봐.”

“이게 뭐냐면요. 연예인 군단을 꾸리는 겁니다.”

“군단? 무슨 군단?”

“연예인 체육 군단이요.”

국장이 한심하다는 듯이 심 피디를 바라보았다.

“……때려치워.”

“왜요?”

“그거 예전에 비슷한 거 하나 했다가 욕만 먹었잖아. 연예인만 매일 깨지는데, 어느 팬이 좋아해? 반전도 있고 그래야 좋아하지.”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뭘? 대본이 다 하는 거라고 우기게? 그거 하지 마라. 요즘 분위기 별로다. 리얼리티로 가야 해.”

“당연히 리얼로 가죠.”

“그래? 그럼 뭐 준비했는데?”

“바로바로, 하산해!”

국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 진짜야? 섭외했어? 심 피디! 너 다시 본다? 지난번 프로그램 이후로 조용하더니, 하산해 섭외하러 다닌 거야?”

“아니요. 지금부터 해 봐야죠.”

환하던 국장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심 피디.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국장을 놀려?”

“에이, 국장님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제가 반드시 섭외해 오겠습니다.”

“그거 지난번에도 했던 멘트잖아? 그리고 다 실패했지?”

“제가요? 정말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전 기획서 드린 적 없는 것 같은데.”

그가 해맑은 눈동자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국장이 다시 뒷목을 잡았다.

“하…… 널 상대한 내가 잘못이다. 혈압 올라. 심장원, 이놈의 심장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국장이 저편으로 걸어가자, 심 피디가 따라붙었다.

“국장님, 기획서는 봐주셔야죠.”

“안 봐. 때려치우라고.”

“이번 기획은 정말 시청률 보장한다니까요.”

“하산해 섭외하고 나서 얘기해.”

“섭외요? 당연하죠. 강속구의 달인 하산해라면 제 부탁을 반드시 수용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말은 잘한다.”

심 피디를 흘겨보던 국장이 복도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심 피디가 기획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글로벌 스타님, 잘 부탁드립니다.”

이날 오후.

어렵사리 산하와 약속을 잡은 심 피디가, 출발하기 전 분장실을 찾아갔다.

“최대한 초췌하고 불쌍하게 부탁합니다.”

“네?”

“말 그대로예요. 너무 불쌍해서 떡 하나 더 주고 싶게 분장해 주세요.”

“……진심이세요?”

“물론입니다. 다크서클도 진하게 그려 주시고, 그 뭐냐 볼도 핼쑥하게 보이게 해 주시고요. 그리도 또 뭐가 있지…….”

분장사는 그런 심 피디를 괴생명체 바라보듯 했다.

잠시 후 분장을 마친 심 피디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오, 역시 실력이 탁월하십니다. 오늘 잘 되면 나중에 한턱 쏠게요.”

“뭐가 잘 되는데요?”

“그런 게 있습니다.”

휘파람을 불며 주차장으로 이동한 심 피디가 운전석에 앉았다.

“가자!”

* * *

산하는 심 피디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피디님,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시무룩한 표정이던 심 피디가 서두를 뗐다.

“제가요? 음…… 그게 말입니다. 제가 요즘 고민이…….”

“요즘 어디 드라마에 불쌍한 역할로 출연하세요? 웬 분장을 하고 오셨어요?”

흠칫한 심 피디가 묻는다.

“티 나요?”

“네.”

“아…… 그럴 수가. 야심 찬…….”

“야심?”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요? 그런데 오늘 왜 보자고 하셨어요? 또 무슨 기획서라도 가져오셨어요?”

“어!? 산하 씨, 족집게 그 자체!”

“족집게는 무슨, 뻔하니까 그렇죠. 이번엔 또 뭔데요?”

서류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낸 심 피디가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겁니다!”

첫 장에 새겨진 제목을 확인한 산하.

“스타 체육단이요?”

“네, 한번 검토해 보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산하는 서류를 집어 들고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무슨 배구, 농구, 축구, 양궁, 유도, 태권도 등등 운동이란 운동은 다 적혀 있었다.

“섭외한 연예인들이 프로에게 도전한다고요?”

“네!”

“비슷한 프로그램을 봤던 것 같은데요?”

“노노, 그런 망한 프로그램과는 비교하지 마십시오. 근본부터 다릅니다.”

“그럼 피디님 거랑 망한 프로그램이랑 무슨 차이인데요?”

“바로 당신입니다.”

“?”

“강속구 잘 던지는 산하 씨, 사실 이 예능 프로그램의 최종 목적은 하산해입니다.”

“???”

“다음 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들 프로선수를 이길 리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다들 절망하고, 또 절망하죠.”

“그래서요?”

“그때! 산하 씨가 혜성처럼 나타나는 겁니다. 그저 평소처럼, 시구할 때처럼, 강속구를 똭! 날려 주시는 겁니다. 도루도 하고, 홈런도 날리고, 막막 다 해 버리는 거죠. 산하 씨가 시간이 없다고 해서 특별히 출연 분량도 짧게, 그리고 임팩트 있게 만들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재미없네요. 그건 됐고요.”

심 피디가 울상을 지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직 세부적으로 짠 건 아니지만,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저 말고 다른 연예인 찾아보는 건 어떠세요?”

“아니요. 절대 안 됩니다. 이번 기획은 산하 씨 없이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그래요? 그럼 시원하게 한번 나갈까요?”

“오? 정말이십니까? 제발요. 출연해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산하는 프로그램 두어 개 정도에는 출연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식품 공장의 부흥을 위해서였다.

“좋습니다. 프로그램 재미있어 보이면 출연할게요.”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심 피디가 벌떡 일어섰다.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죠?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이 심 피디 오늘부터 코피 기획 들어갑니다?”

“코피요?”

“네, 코피 흘릴 때까지 기획 수정합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네, 걱정 감사합니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오. 오늘 약속 잊지 마시고요.”

심 피디는 후다닥 사라졌고, 산하는 그의 순수하면서도 오차원적인 모습에 그저 웃음을 흘렸다.

* * *

은성식품의 신축 공장 규모는 예전과 달리 거대했다. 하나, 사용 면적은 아직 그리 넓지 않았다. 때문에, 반 이상의 공간이 놀고 있는 실정이었다.

“생산량은 대폭 늘려서 한시름 놨다. 그나저나 이 공장 언제 다 채우냐?”

“자식이 뭐 그런 걸 걱정하고 그래? 금방 채워져.”

“그래, 수출 시작하면 금방 채워지긴 하겠다. 저긴 당분간 비워 둬야겠네.”

“비워 두긴 뭘 비워 둬, 막걸리나 만들어야지.”

“뭐!?”

“막걸리. 막걸리가 뭔지 모르냐?”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웬 막걸리?”

“봉막걸리라고, 내가 이번에 만든 거 있어.”

동식은 시큼한 봉막걸리를 맛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기대 어린 눈빛으로 질문했다.

“저번에 만들던 그 쌀 막걸리? 엄청 개선됐냐? 잘 팔릴 것 같아?”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일단 시험 삼아 소량만 생산해서 팔아 보려고.”

“그래? 에이 최고의 술 장인이 만들었는데, 잘 모르기는. 얼른 맛부터 보여 줘.”

“그럴까? 며칠 있으면 다 익으니까, 그때 맛보여 줄게.”

“오케이, 품목 다변화는 환영이지. 그런데 막걸리는 대량 생산되나 봐?”

“뭐, 맛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가능하긴 해.”

“좋았어!”

며칠 후.

동식이 식당을 찾았고, 산하는 2층에 새로 들여놓은 저온 숙성 냉장고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

“이건 또 뭐냐?”

“뭐긴, 막걸리는 저온 숙성하면 더 맛있어지거든. 새로 장만했다.”

“김치냉장고도 아닌 게, 영 요상하게 생겼네, 그런데 막걸리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밥맛 좋아지는 봉막걸리.”

“뭐? 밥맛? 앞에 이상한 게 붙은 거 같다?”

“이상하기는, 괜찮기만 한데.”

“그래? 난 좀 이상한데. 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맛부터 보자.”

동식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냉장고를 바라보았고, 산하는 스텐 뚜껑을 열고 국자로 막걸리를 퍼 담았다.

시큼한 냄새가 동식의 후각을 강하게 찌르고 들어갔다. 당황한 그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냄새가 왜 이래? 설마…… 아니지?”

- 33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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