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341화 (341/445)

341화 날 알아주는 사람 (1)

“이건 막걸리 아니냐?”

“네, 할아버지. 두근두근하시죠?”

“예끼 이놈아. 말 돌리는 재주도 가지가지다.”

허허 웃던 명예회장 곽춘일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에는 일이 고되고 잘 안 풀리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회사 근처 낡은 주막에 들러 막걸리를 들이켜곤 했다.

때로는 일이 잘 풀려 기쁠 때면, 그 집을 찾아가 잘 안 시키던 해물전을 시키기도 했었다.

이거 참.

막걸리라…….

“할아버지?”

“으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아니다. 그래, 이 막걸리를 그 사람이 만들었다고?”

“네.”

곽춘일은 기대되었다. 그의 술부터 빵까지 평범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잔말 말고 따라 보기나 해라.”

“네.”

곽기훈은 막걸리 뚜껑을 개봉했고, 이내 실내에는 시큼한 냄새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어이구, 이게 무슨 냄새냐?”

“냄새가 조금 그렇죠? 그래도 할아버지, 이게 밥맛에 그렇게 좋대요. 요즘 소화도 잘 안 되신다면서요?”

“밥맛? 아까부터 밥맛이 좋아진다느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일단 드셔 보시면 알아요. 진짜 약주니까, 쭉 들이키세요.”

곽기훈은 빈 찻잔에 막걸리를 따랐고, 곽춘일은 당황했다.

“이놈아, 잔도 없이 이게 뭐냐?”

“제가 미처 잔은 준비 못 해서요. 더러운 것도 아닌데 어때요.”

손자의 마음 씀씀이를 기꺼워하면서도, 약간은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그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혀를 마비시킬듯한 신맛이 곽춘일의 혀를 강타했다.

그는 곧바로 입안의 내용물을 토해냈고, 앞섶이 막걸리로 젖었다.

“이놈, 기훈아. 할애비한테 칠 장난이 따로…… 응? 이거 맛이…….”

하나, 그는 할아버지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바닥에 흘러내린 막걸리를 주시했다.

“아우, 아까운 거. 할아버지, 이거 지금 품절이라 귀하게 공수해 온 건데 이렇게 뱉으시면 어떡해요.”

“이놈아. 지금 할애비보다 막걸리가 중하냐?”

“그건 아니지만요. 어렵게 구한 거라서. 아 참, 맛이 어떠세요?”

“이 막걸리 이거, 참 요상하구나. 사람이 못 먹을 것처럼 신데, 막상 다른 맛으로 변하는 게.”

“그쵸? 특이하죠? 이거 할아버지 다 드세요. 많이 드셔야 효과 있대요.”

“효과? 밥맛 좋아진다는 그거 말이냐?”

“네, 여기 보세요. 떡하니 적혀 있잖아요.”

<밥맛 좋아지는 봉막걸리>

“거참, 그 말을 믿는 게냐?”

“어? 할아버지 요즘 소식 어두우시구나. 이거 요즘 화제인데. 없어서 못 팔아요.”

“그래?”

곽춘일은 봉막걸리를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아, 이놈아. 그만 따르라니까. 할애비를 죽일 셈이냐? 배부르다고 하지 않았느냐?”

“에이, 이거 두 병 다 드셔야 한다니까요. 그래도 맛있잖아요. 자자, 명예회장님. 조금만 더 드시면 됩니다. 밥맛을 위하여!”

“…….”

다음 날 새벽.

곤히 잠을 자던 곽춘일은 배가 너무 고파서 일찍 일어나 버렸다. 위와 장이 연신 요동치며 밥 달라는 소리를 냈다.

봄만 되면 밥맛이 없어 고생하던 그에겐 이상한 일이었다.

하나,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배고픔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부르기도 뭐한 시간, 후다닥 일어난 그는 냉장고로 향했다.

그곳에는 온갖 고급 식자재가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꺼냈다. 배추김치였다.

뚜껑을 열어 두 손가락으로 김치를 쭉 찢은 그는, 그걸 입안에 쑤셔 넣었다.

어허, 맛나다. 맛나.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거야 젊었을 적 얘기였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손은 김치를 찢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허허, 이게 얼마만의 식욕인지.

여기에 하얀 쌀밥 한 그릇이면…….

그때, 웬 소란에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나온 가사 도우미가 비비던 손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입가에 양념을 묻힌 채, 게걸스럽게 김치를 먹는 노인의 모습에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회, 회장님? 지금 뭐 하세요?”

“응? 깼나? 마침 잘 나왔네.”

“네!?”

* * *

<산하네 요리 전문점>

“막걸리는 잘 드셨어요?”

“아, 그거? 사실 그거 나 먹으려고 달라고 한 거 아니야. 우리 할아버지가 하도 승계 때문에 뭐라고 하셔서 달라고 한 거지. 입맛도 되찾아 드릴 겸.”

“아…… 효과는요?”

푸하하 웃던 기훈이 김치 찢는 시늉을 했다.

“말도 마라, 새벽에 일어나셔서 두 손으로 김치 찢어서 드셨대. 배가 너무 고프셔서. 이걸 20년째 할아버지 곁에서 가사 도우미 하시는 분이 봤거든?”

“아, 민망하셨겠네요.”

“아니야.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 줄 알아? 빨리 밥하라고 하셨대. 우리 할아버지 봄만 되면 진지도 먹는 둥 마는 둥 하시는데. 듣기로는 오늘 점심도 엄청 드셨대. 비서가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더라.”

“형, 어째 즐기시는 것 같은데요?”

“그럼, 즐겁지. 할아버지 잔소리도 쏙 들어가, 신경질 부리시는 것도 사라져, 밥도 잘 드시고, 그럼 건강하실 테고. 캬, 완전 만병통치약이다. 맞다! 산하야, 이거 추가 생산하는 대로 나 먼저 좀 줘라.”

“2층에 조금 남아 있는데,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

“오, 그래도 되냐? 땡큐다. 며칠 있다가 가져갈게.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슬슬 가야겠네.”

“네, 내일은 오세요?”

“글쎄. 나야 된장찌개를 매일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긴 한데, 요새 눈코 뜰 새가 없다. 못 올지도 몰라. 아무튼 간다.”

“네, 형. 가세요.”

한편, 모 제약회사는 비상이 걸렸다. 이번에 밥맛 좋아지는 유산균이라면서 신제품을 출시했는데, 난데없이 밥맛 좋아지는 막걸리가 나타난 것 때문이었다.

그 술 효과는 상상 그 이상으로 알려졌고, 그 때문인지 신제품 매출이 생각보다 안 나오고 있었다.

“구해 왔어요?”

“죄송합니다.”

“이런, 다음 물량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요.”

“그런데 팀장님, 다른 경쟁사도 시도 중인 거 아닐까요?”

“당연히 그러겠죠. 그러니까 제가 안달 난 거 아닙니까? 이게 특정 유산균주 때문에 생기는 효과일 텐데, 이 정도 효과 보이는 유산균은 처음 들어 보네요. 누구 들어 본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도…….”

“하산해, 이 사람이 정식으로 연구 분석해서 개발했을 리는 없고, 우연히 어디서 튀어나온 게 분명합니다. 봉막걸리 재판매 시작하는 대로 구해서 연구 시작합시다.”

“네, 팀장님.”

“알겠습니다.”

“아 참, 용 대리. 그거 알아봤어요?”

“아니요. 아직 특허 신청조차 없답니다.”

팀장이라 불린 사내가 활짝 웃었다.

“좋았어요. 하산해 이 사람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아직 가치를 모르는 모양이네요. 우리에겐 잘된 일이지만. 윗분들도 지금 지켜보고 있으니까, 다들 신경 팍팍 써요. 이번에 단체로 승진할 기회일지도 몰라요.”

“네, 팀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대됩니다.”

“다들 말만 하지 말고, 내 일이다 생각하고, 그쪽 제품 나오는 대로 누구든 빨리 구해 와요. 알았습니까?”

“네!”

“네, 그럼요.”

“당연하죠.”

* * *

국내에서 사육 중인 젖소는 모두 유럽에서 들여온 품종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기르는 품종이 홀스타인종인데, 최자환은 특이하게도 저지종을 사육 중이었다.

이 소는 모두가 ‘젖소’ 하면 떠올리는 검고 흰 얼룩소가 아니라, 한우처럼 갈색 소였다.

우유 생산량은 홀스타인종에 비해 60% 중반 수준으로 알려졌지만, 단백질, 지방함량이 높아 치즈 생산에 좋은 품종이었다.

지금 그 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목장주 최자환은 진땀을 흘렸다.

어미 소에게 문제가 생겼고, 밤새 수의사를 도와 송아지를 받아 내느라 용을 쓴 탓이었다.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옳지. 됐어!”

수의사는 새끼가 무사히 태어나자 한시름 놓았다는 듯 미소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자환 씨가 도와주고 걱정하느라 밤새 고생하셨지.”

“에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선생님이 새벽부터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자환 씨 고생에 비하겠어요? 자환 씨가 소한테 애정 쏟는 거, 이 주변 목장주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최자환이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었다.

“그런가요?”

“지금 그런가요 할 때가 아니라, 이제 내 말 좀 들어요.”

“또 그 말씀이세요?”

“그래요. 그 고집 좀 그만 내려놓는 게 어때요? 안 그래도 낙농가 힘든데, 왜 이리 고생을 자처해요? 몇 년만 있으면 둘째도 학교에 갈 나이 아닙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래도 전 이대로가 좋습니다.”

“이거 잔소리라고 듣지 말아요. 내 동생 같아서 하는 소리니까. 풀만 먹이는 거야 유기농 우유 인증도 받고, 제법 값도 나가니까 좋아요. 한데, 자연임신은 너무 갔어요. 아무리 동물 복지도 좋다지만, 생산량이 너무 낮잖아요.”

“그러게요. 그래도 전 소가 행복해야 좋은 우유가 나온다고 믿어서요. 강제 생산은 싫습니다. 그저 송아지와 더불어서 나눠 먹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수의사는 답답했다. 충고를 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고, 최자환은 사람 좋게 웃고만 있었다.

“그렇게 웃고만 있지 말고, 잘 생각해 봐요. 내가 뭐 나한테 이득 있으라고 이런 말 하나.”

“그거야 알죠.”

“아니면, 소 한 마리당 초지 면적이라도 좀 줄여요. 소 머릿수라도 많아야 우유 생산량 좀 늘릴 거 아닙니까?”

“고민해 보겠습니다.”

“고민해 본다고 한 게 벌써 반년이에요. 지금 적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지 않아요?”

“그러게요.”

“어휴, 답답해라. 낙농업도 사업이에요. 아무리 유기농이라도 수지 타산은 맞춰야지. 유기농 인증 조건보다 몇 배로 조건을 까다롭게 하니, 이거 원…….”

“그래도 우리 소들 열심히 뛰어놀고 행복한 것 같습니다.”

“……말을 말아야지. 내가 이래서 자환 씨를 존경합니다. 그 신념 참 대단해요.”

“별말씀을요.”

그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 갑니다.”

“네, 선생님. 오늘 진짜 진짜 고생 많으셨습니다.”

순박하게 웃는 목장주 최자환.

그를 바라보던 수의사가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했다.

“아, 그래. 그 투자자 받는다는 거, 문의는 들어왔어요?”

“어…… 아니요.”

“그럼 그렇지. 투자하는 대신 경영에 아무 상관 말라고 하는데, 누가 해요? 가뜩이나 낙농업도 어려운 판인데. 면적당 생산량도 적어, 공급 시기도 들쭉날쭉, 이러다 폐업하는 수가 있어요. 지금도 안 늦었으니까 고민 좀 더 해 봐요.”

“네, 선생님. 항상 걱정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말만 그렇게 할 뿐, 최자환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고집이 가득했고, 어이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수의사는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갑니다.”

최자환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수의사를 배웅했고, 잠시 후 갓 태어난 송아지 곁으로 돌아왔다. 어미 소가 자신의 새끼를 핥고 있었다.

그는 어미 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박한 소가 맑은 눈을 끔뻑였다.

“이놈아, 수고했다.”

한때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했으나, 그는 아들의 아토피 때문에 강원도 산골까지 들어온 남자였다. 가족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사내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목장을 사들였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날 무렵, 아들의 아토피는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심지어 자신을 매일 괴롭히던 비염도 싹 나아 버렸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평생 눌러살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새로운 신념마저 생겨났다. 무엇이건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야 한다는 것.

그때였다.

“압빠, 소지, 소지.”

몇 해 전 태어난 둘째 아들이 아장거리며 다가왔다.

“아들, 소지 아니고 송아지!”

“소지!”

“송아지!”

“소오지.”

“…….”

뒤이어 중년의 여성이 축사로 들어선다.

“당신도 참, 영훈이 아직 어려요.”

“그래도 소지는 이상하잖아. 당신은 왜 또 나왔어?”

“당신 걱정돼서요.”

“걱정은, 송아지 잘 나왔어. 이것 봐. 이쁘지?”

“다행이에요. 이번엔 많이 걱정했는데, 식구 하나 늘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이놈아, 넌 언제 자라서 풀 뜯어 먹을래?”

그의 기색을 살피던 그녀가 조심스레 생각해 오던 바를 말했다.

“이제 우리도 그냥 사료 먹이면 안 될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풀 먹여야지.”

“당신이 너무 고생스럽잖아요.”

“고생스러워도, 제대로 된 우유를 만들어야지. 당신도 시험성적서 봤잖아. 시중 우유랑 품질 자체가 다르다니까.”

“그래도 그렇지. 누가 우리 우유를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사겠어요? 아직 판로도 제대로 없으면서…….”

그는 그녀에게 늘 미안했다. 마음 같아서는 남들처럼 운영해서 편히 살게 해 주고 싶었다.

하나, 어느 날인가부터 생겨난 신념이 그걸 가로막고 있었다.

최자환은 괜히 웃어 보이면서, 희망적인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게 고민이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얘들도 행복해야 좋은 우유 나올 거 아니야. 아직 사람들이 이 우유 가치를 잘 몰라서 그래. 안 되면 다른 유기농 우유 가격만큼 낮추는 수밖에. 아니면 부자들한테 홍보해 볼까? 당신도 참,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남편의 고집스러운 눈매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 손님 오신다고 했었는데, 당신 요즘 너무 바빠서 말하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최자환의 얼굴에 화색이 피어올랐다.

사실 도심 작은 상가에서 임대료 수입이 나오긴 했다. 하나, 목장 경영으로 나오는 수익은 없고 오히려 마이너스다 보니 생활비가 쪼들린 탓이었다.

단체 체험객이라도 꾸준히 받으면 형편이 조금 피기에, 그는 다급히 물었다.

“체험 신청 들어왔어?”

“네.”

“이야, 이제 일이 슬슬 풀리려나 봐. 오랜만에 체험객도 오고, 잘됐네. 어디야? 정기적으로 올 만한 곳이야?”

기대에 찬 남편의 시선을 외면한 그녀가 민망한 듯 말했다.

“아니요…… 두 분이에요.”

“뭐?”

- 342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