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날 알아주는 사람 (2)
당황한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여보?”
“응?”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사실 우리 목장에 그렇게 보고 즐길 게 많지는 않잖아요? 너무 외진 곳이기도 하고.”
그 말에 최자환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 내가 괜히 기대감이 컸었나 봐. 나중에 다른 동물도 더 키우고, 아 그래 치즈 만들기 체험장 규모도 조금 늘려 보자고.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정기적으로 오는 곳도 생길 거야.”
그녀도 속에 쌓여 있는 말이 많았으나,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그에게 상처를 줄까 저어되어서였다.
“그래요. 그럼 좋겠어요. 어머! 영훈아 지지, 그거 만지면 안 돼.”
최자환의 아들 최영훈은 어느새 소똥을 찰흙처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입에 넣으려 했고, 그녀는 다급히 다가가 아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들, 이게 뭔 줄이나 알아?”
영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듯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아들, 울지 마. 울면 안 돼.”
하나, 아이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하는 울음소리가 축사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보, 우리 아들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울보일까요?”
“그야…… 당신 닮아서?”
“여보!”
“아, 알았어. 나 닮았어. 그나저나 두 분이라고 했지?”
“네. 그냥 거절할 걸 그랬나요?”
“아냐, 원래 시작이 반이라잖아. 소수 인원으로 계속 받다 보면 길이 트이겠지. 애기 한 명이랑 부모님이야?”
“성인 남성 두 분이요.”
“뭐!?”
한편, 산하는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어디쯤인 것 같은데…….”
“여긴 완전 오지네요. 여기 정말 목장이 있어요?”
“그래.”
“그런데 형.”
“왜?”
“언제까지 둘러보실 생각이세요? 목장 체험만 벌써 나흘째인 거 아세요?”
“적당한 우유 찾을 때까지 둘러봐야지. 그건 왜?”
“다들 출연 좀 해 달라고 난리라서요. CG그룹 쪽 CF도 찍어야 하고, 은성 광고 사진도 한 컷 박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건 천천히 해도 돼.”
“우유 찾는 일이 천천히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하…… 강상익. 시어머니는 사절이다.”
“시어머니 아니고 유능한 매니저예요.”
“뻥치지 말고 앞이나 잘 봐. 여기서 구르면 끝장이야.”
“안 그래도 앞은 잘 보고 있어요. 그런데 치즈는 어디에 쓰시게요?”
“어디에 쓰긴, 먹는 데 쓰지.”
“형, 무슨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거죠? 살짝만 알려 주시면 안 돼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매니저인데, 아는 게 없잖아요.”
“그럴까? 계획이 뭐냐 하면 말이야.”
상익의 귀가 쫑긋거렸다.
“없어.”
“?”
“뭘 그렇게 봐. 어어, 앞 잘 보라니까. 그냥 치즈 만들어서 제빵에도 적용하고, 손님상에도 선보이고, 샴페인에도 곁들이고, 활용성은 무궁무진해.”
“치즈 처음 만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야 그렇지.”
“사람들이 다른 요리랑 비교하면서 실망하지 않을까요?”
“뭐, 인마?”
“농담이에요. 형은 언제나 기적을 만들어 왔으니까요. 이번 치즈는 얼마나 맛있을까요?”
“병 주고 약 주냐? 해 봐야 알지. 그건 그렇고 강상익, 너 요즘 말 엄청 많아졌다?”
“그런가요? 아닌데…….”
“아니기는, 내 주변에 말 많은 사람이, 너 요새 윤정이랑 노냐?”
“아니요.”
“그럼?”
“아무하고도 안 노는데요.”
“수상해. 말이 너무 많아졌어. 뻔뻔해진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봉만…… 어!? 여기 맞네.”
산하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팻말을 가리켰다.
<장수 목장>
그 팻말을 기점으로 아스팔트 길이 사라지고, 조금 거친 느낌의 콘크리트 길이 시작되었다.
“오, 그러네요. 잘 찾아왔네요. 형도 처음 와 보는 곳일 텐데 왜 이렇게 잘 아세요? 아까 갈림길도 그렇고. 혹시 와 보신 거 아니에요?”
산하는 내비게이션이 엉뚱하게 가르쳐 주는 길을 제법 쉽게 찾아온 참이었다. 바로 탁주문의 운전 솜씨를 활용한 것이었다.
“와 봤겠냐? 그냥 내 육감이 여기로 가라고 했어.”
“와, 그런 육감도 있어요?”
“그래. 그나저나, 여긴 체험객이 오다가 돌아가겠다. 길 못 찾아서”
“그러게요. 아무도 안 올 것 같아요.”
“뭐,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우린 치즈나 신나게 만들어 보자.”
상익의 표정이 묘해졌다.
“……형, 여긴 사람 많이 없겠죠?”
“글쎄, 왜?”
“형만 나타났다 하면 난리라서요.”
“난 또 뭐라고,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익숙해질 만하면 형 인기가 더 올라가잖아요.”
“그건 칭찬이냐? 불만이냐?”
“반반이요?”
“이걸 매니저라고, 내일부터…….”
“잠깐! 형, 된장찌개로 협박하려고 그러시죠?”
“내가? 아니야.”
“그럼요?”
“협박 아니고 통보야. 강상익 된장찌개 반년간 금지.”
“형!”
“운전이나 해.”
풀이 곳곳에 솟아난 주차장에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주차장 관리 상태가 별로네요?”
“그러네. 여기 주인 내외 두 분이 운영한다더라고, 바빠서 그런가 봐. 일단 가자.”
두 사람은 주차장을 벗어나 잠시 걸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 사이로 두 줄의 갈색 흙길이 보였다. 그곳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가던 산하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야, 상익아. 경치 좀 봐라. 지금까지 본 목장 중에 제일 죽인다.”
탁 트인 그곳에는 드넓은 초원과 파란 하늘, 그리고 뭉게구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네요. 여태 본 곳 중에 제일 멋져요. 그런데 왜 사람이 아무도 없죠?”
“더 가 보면 알겠지.”
그때였다. 저 언덕 너머로 갈색 말을 탄 사내가 나타났다. 최자환이었다. 그는 소를 축사로 몰다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멀어서 흐릿해 보이는 두 사람을 향해 그가 크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오늘 체험하러 오신 분들이세요?”
길게 울려 퍼지는 그의 외침에 산하가 답했다.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길 따라서 조금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거기 가시면 제 집사람이 있거든요. 저는 여기 마무리하고 금방 갈게요. 미리 마중 나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일찍 왔어요.”
소리쳐 답해 준 산하가 고개를 돌렸다.
“이야, 말 타고 소몰이하시네. 여기 특이하지?”
“그러네요.”
잠시 후.
최자환의 와이프는 둘째 아들 영훈을 급히 붙잡아 혼내는 중이었다.
“아들, 엄마가 주워 먹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지지라고 했지?”
아이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 그 말을 듣다가, 돌연 남은 손을 움직였다. 그곳에는 조금 전 염소가 남기고 간 흔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영훈이 말했다.
“음마, 아…….”
아이는 염소똥을 친절하게 내밀었다.
“엄마 먹으라고? 자꾸 그러면 떼찌 할 거야?”
영훈은 엄마가 뭐라고 하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들, 또 울려고?”
그때, 누군가가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오늘 체험하러 왔는데요.”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아, 맞다.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든 채, 활짝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오……!?”
최자환의 아내는 놀라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저 멀리 하산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정신을 추스른 그녀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어머,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산하는 하하 웃으며 답했다.
“물론 체험하러 왔습니다. 전화 받으셨던 분 맞으시죠?”
“아, 그럼 그때 그분이…… 어쩐지, 전화 받을 때 어딘가 익숙하다고는 느꼈는데, 그게 설마 하산해 씨일 줄은 몰랐어요.”
“그러셨어요? 그런데 다른 체험객은 안 보이네요?”
그녀는 체험객이 둘뿐이라 다행이라는 듯 해맑게 대답했다.
“네, 두 분뿐이에요.”
“아…….”
한참 후 도착한 최자환도 산하를 보고 놀랐다. 멀리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하산해였다.
“이야, 이거 정말 감격스러운 날이네요. 하산해 씨가 제 목장을 다 찾아 주시고. 저기, 기념사진 한 번만 박으면 안 될까요?”
“네, 그러시죠.”
이내 최자환의 와이프는 아이 둘을 다 데려왔고, 다섯 사람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촬영기사는 상익이었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하나둘.”
찰칵 소리와 함께 상익이 감탄했다.
“와, 여긴 경치가 좋아서 뭘 해도 예술이네요.”
“그런가요? 칭찬 감사합니다. 자자, 두 분 잠시 이리로 오시죠. 차 한잔하면서 체험할 것 천천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 * *
산하는 두 손을 따스하게 한 후 직접 소젖을 짰다. 쭉쭉 뻗어 나간 흰 우유가 작은 그릇을 채웠다.
“이렇게요?”
“와,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그의 칭찬에 산하는 생각했다.
점점 손도 섬세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신기하네.
소젖을 몇 번 더 짜던 산하가 옆을 돌아보았다.
“너도 해 봐.”
“그럴까요?”
흐흐 웃던 상익도 준비를 마치고 소젖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자 젖소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에 최자환이 반응했다.
“아아, 잠깐, 잠깐만요. 그렇게 거칠게 하시면 안 되고, 이렇게 이렇게 부드럽게 쭉쭉.”
상익이 어색하게 웃는다.
“이거 보기보다 어렵네요. 제가 하니까 젖도 잘 안 나오고.”
“원래 처음 하시면 어렵습니다. 산하 씨가 잘하시는 거예요.”
“그런가요? 형은 대체 못 하는 게 뭐예요?”
“이것저것 다?”
“그걸 누가 믿어요?”
잠시 후.
치즈 만들기 체험 직전, 산하는 우유 맛부터 보았다. 여태 맛본 우유와 다르게 고소함과 풍미가 살아 있었다.
지금까지 찾아 헤매던 우유 품질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정도는 돼야지.
끌로드 막땅이 최상의 치즈를 만들기 위해 골랐던 우유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이었다.
바로 투자한다고 말할까?
아냐, 너무 급한 거 같다.
치즈 먼저 맛보고 천천히 얘기하자.
생각을 끝낸 산하가 우유를 가리켰다.
“와, 사장님 이거 정말 고소하고 맛있어요. 이런 우유는 처음인데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음을 지켜보던 최자환이 기쁘게 웃었다. 그의 칭찬은, 정성으로 우유를 생산하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느껴졌다.
“그렇습니까?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이윽고 상익도 우유를 먹어보곤 감탄했다.
“우유가 진짜 진하고 맛있어요. 최곱니다. 최고.”
“이거, 오늘 두 분 비행기가 너무 어지러운데요?”
그때, 최자환의 아들 영훈이 산하의 다리 한쪽에 달라붙으며 방긋 웃었다. 그걸 보게 된 최자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우리 울보가 오늘 웬일인지 모르겠네요. 첫째도 그렇고.”
“울보요?”
“네. 조금만 뭐라고 해도 울고, 낯선 사람 보면 울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산하 씨만 보면 이렇게 친근하게 굴잖아요. 첫째도 낯을 많이 가리는데, 별로 거리낌도 없고.”
“애들이 저를 조금 좋아하긴 합니다.”
“그래요? 저한테는 정말 신기한 일이거든요. 아 참, 영훈아, 아저씨 귀찮게 하지 말고 이리 와.”
“전 괜찮습니다. 영훈이라고 하셨죠?”
“네.”
“영훈아, 우리 같이 치즈 만들기 놀이 할까?”
아이가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허, 정말 별일이네요. 대답도 하고.”
산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잠시 후.
“이제 우유도 시음하셨으니까 본격적으로 치즈 만들기 들어갈게요. 자, 우선 여기 온도계 하나씩 받으세요.”
산하와 상익이 온도계를 받자, 최자환이 설명을 이어 갔다.
“치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앞서 간단하게 말씀드렸죠? 지금부터 우리는 간단하게 모짜렐라 치즈를 만들어 볼 건데요. 다 만드신 후에는 가져가시면 됩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냄비에 우유를 부어 주시고…….”
두 사람은 최자환의 설명에 따라 치즈 만들기에 열중했다. 사실 산하는 치즈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묵묵히 그의 말에 따랐다.
그때였다.
[문화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끌로드 막땅의 치즈 만드는 솜씨가, 현재 가진 솜씨 대비 31% 상향됩니다.]
[남은 시간 20분]
이건 정말 나오랄 땐 안 나오고.
속으로 피식 웃던 산하는 손을 계속 놀리기 시작했다.
온도를 재고, 렌넷이라는 효소를 넣어 우유를 응고시키거나 유청을 빼내는 등,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모짜렐라 치즈를 만들었다.
“자,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동안 여기 목장 구경도 시켜 드릴게요.”
몇 분 후.
두 사람은 초지에서 노니는 젖소를 구경했고, 이곳에서 키우는 거위나 산양, 토끼 등, 다른 동물 구경도 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 최자환이 갈색 말을 끌고 왔다.
“말 한번 타 보시겠어요? 목장 둘레 몇 번 돌고 나면 얼추 응고 끝날 것 같은데요.”
“그럴까요?”
“네. 제가 고삐 잡아 드릴 테니까, 염려 마시고요. 순한 말입니다.”
최자환은 나무 발판 하나를 말 안장 부근에 놓아 주었다.
“말 놀라지 않게, 천천히 올라타시면 됩니다.”
“네.”
산하는 이석헌의 승마 솜씨를 이용해, 아주 가볍고 날렵하게 말 안장에 올라탔다. 그 모습은 너무나 우아하여 그림 같았고, 최자환은 입을 떡 벌렸다.
“……원래 승마하셨어요?”
“승마까지는 아닌데, 말을 조금 타 보긴 했습니다.”
“조금이라기엔, 자세가…… 그럼 한번 달려 보시겠어요?”
“그래도 되나요?”
“네. 초보는 안 되지만, 엄청 익숙해 보이셔서요. 말도 순해서 괜찮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산하는 이랴 소리와 함께 말 옆구리를 박찼다. 히히힝 소리를 낸 말이 신나서 초원 저편으로 달려나갔다.
최자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치 말 주인이 바뀐 것 같았다. 그는 저 멀리 달려나간 산하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상익에게 말했다.
“와, 이게 무슨, 정말 잘 타시네요.”
상익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답했다.
“……그러게요.”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흘렀고, 치즈 응고가 끝났다.
“쭉쭉 잘 늘어나네요. 자, 어디 두 분 손맛은 어떤지 한번 볼까요? 우선 상익 씨부터.”
최자환은 강상익이 만든 치즈를 살짝 떼어 맛보았다.
“음, 잘 만드셨네요. 다음은 산하 씨 거. 과연 대스타님은 얼마나 잘 만드셨는지 볼까요?”
그는 곧장 산하가 만든 치즈를 떼서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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