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괜찮으시겠어요? (1)
윤수열은 산하네 요리 전문점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했고, 오늘 처음으로 주변 교통정리 및 텐트 관리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비는 공간마다 들어찬 텐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튀어나오고 저리 튀어나온 텐트는 보기에도 난잡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도 안 해 본 아르바이트라니.
귀하게 자란 내가 이따위 거지 같은 일을?
에이, 짜증 나. 빨리 라면 거래나 해결하고 관둬야지.
그나저나 사장이랑 단둘이 토크 시간을 가져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파격적인 제안으로 밀어붙이면, 하산해도 사람인데 설마 거부하겠어?
“윤수열 씨?”
“네? 네.”
봉만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아닙니다.”
“자, 저기 앞에 보이시죠? 단골들은 안 그러는데, 새로 오신 분들은 저렇게 인도 보행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단 오늘은 첫날이니까, 아까 알려 드렸던 텐트 줄 세우기부터 해 보세요. 가끔 신경질 내는 손님도 계시니 유의하시고요.”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질문하세요.”
“다들 개인 사유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데다, 인도도 침범 중인데, 민원 안 들어오나요?”
“당연히 들어오죠. 사실 우리 사장님도 요즘 그걸 걱정하고 계세요. 민원이 상당히 자주 들어오거든요. 시끄럽다. 인도가 복잡하다. 잡상인이 너무 많다.”
“아…….”
“그래서 요즘 사장님도 방법을 찾고 계세요.”
“어? 그럼 제 아르바이트 자리는요?”
“그냥 구상만 하고 계신 거라서 언제 하실지는 몰라요. 그리고 수열 씨가 일만 잘하면, 이 일자리 사라져도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죠.”
“아, 네.”
“그럼 한번 해 보세요.”
봉만두는 평소와 다른 말투를 내뱉으며 윤수열에게 지시했고, 그는 저 뒤쪽의 텐트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손님이 텐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하네 요리 전문점 조끼를 입은 직원이 보였다.
“아, 네. 무슨 일인가요?”
“텐트를 조금 더 안으로 이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안으로요?”
“네, 보행에 방해가 돼서요.”
“거기 공간도 많은데…….”
투덜거리던 손님이 밖으로 나와 텐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됐죠?”
그 순간 윤수열은 희열을 느꼈다. 툭 튀어나와 있던 텐트가 앞의 텐트와 줄이 맞는 모습이라니.
뭐야, 이거 은근 취향에 맞는데?
그는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성향을 신기해하며, 다음 텐트로 향했다.
그 후 윤수열은 텐트를 여기까지 넣어라, 옮겨라,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며 텐트 정리를 열심히 했다.
도중에 말 잘 안 듣는 사람이 있어 소란이 있긴 했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는 텐트가 자로 줄 세운 듯 깔끔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가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던 봉만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저 사람 제법인데?
그 순간에도 윤수열은 신나서 텐트 줄을 세우고 있었다. 대부분은 부탁을 잘 들어주었지만, 사람이 다 같지는 않았다.
일부 손님들은 제법 까다롭게 구는 식당 직원 때문에 투덜거렸고, 또 일부는 목소리를 키우기도 했다.
그 바람에 그가 지나가는 자리는 조금씩 소란해지기도 했다.
하나 수열은 줄 세우는 맛에 취해서 손님들의 항의는 관심이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보행에 방해됩니다. 여기 보이시죠. 여기까지 넣어 주세요.”
“아, 알았어요.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닙니까? 이러면 됐죠?”
“네, 됐습니다.”
수열은 다음 텐트로 향했고, 엘리엇 올슨과 눈이 마주쳤다.
“어? 그때 그분 아니세요?”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알은체하자, 엘리엇 올슨이 입에서 닭고기 꼬치를 빼냈다.
“……누구?”
“저 모르시겠어요? 저번에 저어기 골목에서 저한테…….”
엘리엇 올슨은 그제야 기억을 떠올렸다.
“아! 그때, 그. 반가워요. 아니 그런데 그 복장은? 설마 여기 취직했습니까?”
“네, 그렇게 됐네요. 여기 요리 맛은 보셨어요?”
엘리엇 올슨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입니다.”
“……아, 저런, 그럼 꼭 드시길 바랍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윤수열은 그가 세계적인 부호인 줄도 모른 채, 텐트 줄만 맞추고 다음 텐트로 향했다.
* * *
산하네 요리 전문점의 브레이크 타임.
윤수열이 식당에서 제공되는 점심을 무심코 먹었고, 그 맛에 놀라 눈이 뒤집힌 그때였다.
산하의 관심은 온통 창식의 허리 벨트에 쏠려 있었다. 창식이 언질 했던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와, 그걸 어떻게 만지지?
과거 읽으려면 잠시 손대고 있어야 하는데.
다른 물건처럼 한번 만져 봐도 되냐고 하기엔 말도 안 되고.
잘못하면 변태라고 생각하겠지.
좋은 방법이…….
결국 이걸 써야 하나?
[1회에 한해, 허공을 격하고 물품의 과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제한 거리 - 1m 이내]
예전에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봉씨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받은 보상이었다.
와, 이거 아껴 뒀던 건데.
여기에 써먹으면 너무 아까울 것 같기도 하고.
더 필요한 상황이 나타날 수도 있잖아.
고민되네.
그래, 며칠만 더 생각해 보자.
어쩌면 그냥 허리 벨트를 만질 방법이 생각나거나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그래, 그럼 이건 뒤로 미뤄 두고, 그다음 민원 해결이 문젠데.
원래 산하네 요리 전문점은 예약 시간만 지나면 나름 한산했었다. 하지만 산하가 유명세를 더해 갈수록, 그의 요리를 먹으려면 줄을 정말 오래 서야 했다.
이 바람에 손님들은 전날 대낮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고, 산하네 요리 전문점은 항시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산하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역시 답은 온라인뿐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전문가랑 상의해 봐야겠어.
일단 민원 가라앉히려면 공지부터 올려야겠지?
그는 곧바로 노트북을 꺼내서 공지를 작성했다. 이와 관련된 사실을 구청에도 알렸다.
비슷한 시각.
인터넷 서핑을 하던 남성이 하하하 웃었다.
<……여러 주민분께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현재 개선 방법을 고려 중이며, 추후 줄을 서지 않고도 공정하고 신속하게 예약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진즉에 이럴 것이지.
* * *
엘리엇 올슨은 드디어 하산해 식당 안으로 발을 들이밀 수 있게 되었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쾌거야?
주식 차익으로 3조 벌었던 것보다 더 기쁘네.
어이가 없어서 원.
내 시간이 얼마짜린데, 길바닥에 다 뿌렸지 뭐야. 맛없기만 해 봐라.
그나저나 이게 무슨 냄새야?
웬 발 냄새가 이렇게 나?
엘리엇 올슨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고, 그 근원지가 어디인지를 알아냈다. 그건 다른 손님들이 먹는 된장찌개에서 피어오르는 냄새였다.
아우, 냄새.
냄새가 별로라더니, 이런 냄새였어?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군.
이거 여태 헛짓한 거 아닌지 모르겠어.
그 심정은 맞은편의 비서도 같은 모양이었다.
“보스, 정말 이런 걸 드시려고 이렇게나 시간을 낭비하신 겁니까? 차라리 저 밖에서 파는 닭고기 꼬치가…….”
엘리엇 올슨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그의 말을 막았다.
“조용, 진실은 늘 감춰져 있는 법이니, 매사에 신중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보스, 이건 냄새부터 너무…….”
“뭐, 조금 그렇긴 하지만, 먹고 나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죠.”
잠시 후.
금발의 린다가 명랑하게 웃으며 된장찌개를 서빙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요.”
두 사람은 웬 미인이 서빙하자, 신기한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된장찌개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은 잘 먹는 걸 보니, 이건 취향이 극명하게 갈리는 요리인가 보군요. 보스가 먼저 진실을 탐구해 보시죠?”
미식가인 엘리엇 올슨은 긴장한 탓에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랜 세월 미식가로 살아왔지만, 눈앞의 요리는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다.
요리는 냄새가 반이라고 했는데, 비서 말대로 취향에 따라 맛있고 맛없고가 갈리는 요리인가 싶었다.
“음…… 보스라고 말만 하지 말고, 먼저 먹어 보는 게 어떤가?”
“보스,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합니다. 어른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나라에 맞는 예법을 잘 지키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보스는 이걸 드시고 싶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왕이면 제 것도 같이 드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서는 된장찌개 뚝배기를 앞으로 슬쩍 밀었고, 엘리엇 올슨은 얼굴을 찌푸렸다.
“귀국해서 두고 봅시다.”
그는 비서를 잠시 째려보다가 숟가락을 들었고, 된장찌개를 개미 눈물만큼 떠서 맛을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사고회로가 정지해 버린 듯한 기현상을 경험했다.
이 세상의 감칠맛은 다 모아 놓은 듯, 놀라운 맛이 그의 미뢰를 강타했다.
이럴 수가!
엘리엇 올슨은 평생 맛본 적 없는 진귀한 요리 맛에 눈을 휘둥그레 뜨기까지 했다. 너무 맛있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요리가?
인터넷에 떠돌던 그 말들이 모조리 진실, 아니 너무 축소되어 있었어.
이런 요리가 존재할 수 있다니.
그는 곧장 된장찌개를 마구 퍼먹으려 했으나, 그 순간 비서가 슬쩍 밀어 놓은 된장찌개를 발견했다.
잠깐!
저것까지 내가 먹어 버려?
아니야, 그건 욕심이 너무 과한 것 같아.
하지만, 나 먹으라고 밀어낸 거잖아.
고심하던 엘리엇 올슨의 표정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러자 비서가 속삭이듯 말했다.
“보스, 역시 맛이 별로입니까?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얼른 귀국하시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못 드시겠으면 그냥 일어나시죠? 아마 귀국하시면 많이 귀찮으실 겁니다.”
그 순간 엘리엇 올슨은 결심을 굳혔다.
얄미운 비서 놈.
이건 내가 다 먹는다.
그는 결정을 내리자마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말하세요. 나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먹긴 먹어야지 어쩌겠습니까?”
엘리엇 올슨은 그 말을 하며 비서의 된장찌개를 자신에게로 가져왔다.
“보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저 자신에 대한 벌입니다.”
비서가 당황했다.
“아니, 보스 왜 그러십니까? 조금 전 제 말은 그저 농담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이거 하나 먹자고 자리를 마음대로 비웠으니 벌은 달게 받아야죠.”
그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된장찌개를 먹었다. 비서가 눈치 못 채게, 정말 맛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는 두 번째 뚝배기를 먹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어.
한국 오길 잘했어.
이거 최고야.
대체 다른 요리는 어떤 맛일까?
“보, 보스.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만. 갑자기 왜 웃으시는지?”
하나, 엘리엇 올슨은 된장찌개에 정신이 팔려 먹는 데만 집중했다.
그제야 비서는 뭔가 속았다는 걸 알아챘다. 보스의 태도는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보스가 업무에 집중할 때 나오는 모습이 왜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보스?”
그는 비서의 부름을 듣지 못했고, 여전히 된장찌개 먹기에만 열중했다. 다급해진 비서는 숟가락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잽싸게 뚝배기에 집어넣었다가 뺐다.
그제야 엘리엇 올슨이 화를 냈다.
“어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이 먹던 음식에 손을 대다니요?”
“보스가 걱정돼서요. 잠시만요.”
이윽고 된장찌개를 살짝 맛본 비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와 동시에 그는 손을 재빨리 움직여 반 이상 남아 있는 된장찌개를 자신에게로 가져오려 했다.
그걸 엘리엇 올슨이 막아섰다.
“왜 이러는 겁니까? 더럽게. 이건 내가 먹던 요리예요.”
“보스, 이건 원래 제 겁니다.”
“냄새가 고약해서 취향이 갈린다고 한 건 누굽니까?”
“그건 제가 우매해서 진실을 보지 못한 겁니다. 지금 드디어 진실에 눈을 떴으니 진실을 탐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겁니까? 나 먹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러는 거예요?”
“보스, 치사하게 이러실 겁니까? 벌을 주는 거라고요? 절 속이고 이걸 다 드시려고 하시다니요? 절 자르신다고 해도 이것만은 양보 못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눈에서는 레이저라도 뿜어져 나올 듯했고, 된장찌개 뚝배기는 식탁 중간에서 한참이나 머물렀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산하는 창식이 말해 준 외국인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저 사람 맞는 거 같은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야.
어디서 봤더라.
과거 한번 볼까?
[13분 전, 엘리엇 올슨은 된장찌개 맛에 눈이 돌아갔다.]
엘리엇 올슨? 엘리엇…… 잠깐!
엘리엇 올슨이면 초청장 보냈던 그 부자 아냐?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산하는 그의 모습을 더 상세히 살폈다.
맞는 거 같은데?
설마 여기서 텐트 치고 줄을 섰다는 거야?
어이없네.
그런데 뉴스는 왜 이렇게 잠잠해?
아무도 저 사람 귀국한 걸 모르는 건가?
이름도 일치하고, 그 엘리엇 올슨이 확실한 것 같은데.
산하가 엘리엇 올슨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앞을 지나치던 윤수열이 속삭이듯 말했다.
“사장님, 저분 일행 되게 특이하죠?”
그는 이렇게라도 친분을 쌓아서 거래를 트려 했다.
“특이해요?”
“네, 저 사람 일행은 고급 양복 입고 있는데, 그 앞에 분은 그냥 미국 동네 아저씨 같잖아요. 그래도 돈은 제법 있는 사람인가 봐요. 저번에 저랑 이야기 몇 마디 했다고 백 달러를 찔러 주더라니까요.”
“그 사람한텐 잃어버려도 모를 정도의 푼돈일 테니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저 사람 아는 분이세요?”
“엘리엇 올슨이잖아요.”
“엘리엇 올슨…… 이 누구죠?”
“세계 부호 7위에 등재된 사람이에요.”
“네!? 뭐라고요?”
“쉿!”
윤수열이 입을 쩍 벌렸다.
저 동네 아저씨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고?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아버지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세계적인 부자가 줄을 서서 요리를 먹다니.
대체 하산해 요리가 어떻길래?
이날 오후.
엘리엇 올슨과 비서는 산하와 마주 앉았다. 물론 엘리엇 올슨이 대화를 요청한 거였다.
“진정 세계 최고의 요리라 할 만합니다. 대체 라면과 빵은 무슨 맛일지 너무 궁금하더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줄을 며칠이나 서신 겁니까?”
“글쎄요. 생각보다 오래 섰습니다. 어째 제가 처음 온 날부터 사람이 점점 많아지더군요. 줄 서는 시간을 아무리 당겨도 먹기가 힘들었어요.”
“그러셨군요. 제 몸이 하나뿐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네요.”
“아니, 아닙니다. 전 이렇게라도 맛본 게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산하 씨의 요리 맛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런 이에 비하면 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입니까?”
그때, 비서가 엘리엇 올슨에게 눈짓했다. 얼른 말하라는 거였다.
그러자 엘리엇 올슨이 헛기침을 하더니 산하에게 말했다.
“제가 제안할 게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게 뭡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제 전속 요리사가 되어 주신다면 마음에 쏙 드실 만한 금액을 수고비로 드리겠습니다.”
그의 제안에, 산하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제안할 금액은 들어 보지도 않고요?”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마음은 안 변합니다.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손님 한 사람을 위해서 요리하지 않습니다.”
“고집이 있으시군요.”
산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지난날을 떠올렸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주저앉고 싶었던 어느 날.
주위에서 염려와 비난이 쇄도하자, 확고했던 마음가짐마저 흐릿해지던 때였다.
그 당시, 산하는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다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결정에 관해 확신을 가지기로.
이것이 옳다. 이 길이 맞다.
자신조차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누가 믿어 줄까 싶어서였다.
그 결정은 산하가 어려움을 버텨 내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남들은 고집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굳센 신념이었다.
그 신념 중에 하나가 바로 돈이 많거나 적거나 구애받지 않고, 손님들이 똑같이 요리를 맛볼 수 있게 하자는 거였다.
그러니 부자 손님 한 명을 위해 시간을 통째로 비우고 요리하는 것은 신념에 맞지 않았다.
그 시간이면 더 많은 손님에게 요리를 선사할 수 있었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상세한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단지 모종의 의미가 담긴 말만 내뱉었다.
“고집이라기보다는 제가 한 결정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엘리엇 올슨은 감탄했다.
보통 돈 좀 있는 사람이거나 권력자조차도 자신 앞에서 기죽기 일쑤였다.
한데, 저리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이라니.
놀랍군.
이거 한 방 먹었는걸?
잠시 후.
엘리엇 올슨이 식당에서 빠져나오자, 기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사진부터 찍었다.
손님도 안 받는 시간인데, 하산해와 같이 있다가 빠져나오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봐, 누군데?”
그들이 대화하던 사이 엘리엇 올슨은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비서가 운전대를 잡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렇게 바로 거절당할 줄 몰랐는데요?”
“초청도 거절했는데, 뭐 이거라고 다르겠어요?”
“하긴요. 그나저나, 이제 일에 집중하기는 글렀습니다.”
“매일 생각나겠죠?”
“보스도 그렇죠?”
“그래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주인이 안 된다고 하는걸. 이렇게 된 이상 소심한 복수라도 해야겠어요.”
비서는 보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의문을 피워 올렸다.
“네? 어쩌시려고요?”
“말 그대로예요.”
그 말을 끝낸 엘리엇 올슨은 가로등 불빛이 가득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산하네 요리 전문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시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어요.”
* * *
<엘리엇 올슨, 산하네 요리 전문점에 불쑥 나타나>
<재계 이목 집중, 엘리엇 올슨이 한국에 온 이유는?>
<하산해, 식당 주변 주민에게 죄송하다, 개선 노력>
<산하네 요리 전문점의 명물, 텐트촌 사라지나?>
<밤낮으로 장관이었던 텐트촌, 다시 볼 수 없나?>
<국내외 관광객 몰렸던 하산해 텐트촌 거리, 과거 속으로?>
여러 뉴스가 뜨던 시각, 윤수열은 며칠째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하산해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잖아?
맛도 미쳐서 세계 부호도 줄 서서 먹고, 아니 그전에 이런 맛은 정말 처음이야.
세상에 무슨 이런 맛이 다 있지?
라면도 빵도 된장찌개도 하나같이 미쳤어.
뭐라고 표현도 못 하겠네.
그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식사를 했고, 산하의 요리를 처음 맛본 후로 눈이 뒤집어졌다.
그래, 어차피 아버지도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것 같고.
여기서 1년.
아니야, 1년은 너무 짧아.
한, 2년…… 에라 모르겠다. 그냥 질릴 때까지 여기서 일하면서 먹는 게 좋겠어.
이거 완전 수지 남는 장사잖아.
세계의 부호도 못 먹어서 안달인 걸 이렇게 자주 먹을 수 있다니.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수열이냐?”
“네, 아버지. 웬일이세요?”
옐로우 마트 대표는 걱정과 기대를 담아 얘기했다.
“인석아, 웬일은. 하려던 건 어찌 됐나 궁금해서 전화했지.”
수열이 애초에 목표로 했던 하산해라면 거래 성사는 뒷전이었다. 어떻게 하면 산하의 요리를 오래오래 많이 먹을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어, 그게요 아버지, 생각처럼 잘 안 되네요.”
“그렇지? 내 늘 말하지 않더냐? 세상사가 쉽지 않다고.”
“그런 게 아니라, 생각이 조금 달라져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 자세한 건 나중에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요. 저 바빠서요.”
어느새 통화는 종료되었고, 옐로우 마트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놈의 자식이 큰소리 탕탕 치고 나가더니, 또 무슨 꿍꿍이인 거야?”
* * *
산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창식이 갑자기 허리 벨트를 바꿨다가, 오늘은 예의 그 낡은 허리 벨트를 차고 왔기 때문이었다.
안 되겠어.
아까워도 그냥 써야지.
그가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창식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걸 드리려니까 왠지 부끄러워서.”
“에이, 무슨 말씀을요? 창식 씨 닭고기 꼬치 충분히 맛있으니까, 자부심을 가지세요.”
“감사합니다. 미슐랭 요리사님이 그런 말씀해 주시니까 너무 기분이 좋네요. 아차! 사람이 더 몰리네요. 얼른 포장해 드릴게요.”
그의 말대로 하산해 주변으로 팬들이 몰리고 있었다.
산하는 그가 닭고기 꼬치에 소스를 바르는 사이, 일회성 능력을 사용했다. 그건 바로 허공을 격하고 물건의 과거를 읽어 들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곧 그는 허리 벨트의 과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