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돌아가기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
외전 3화. 기억나요? (3)
“이제 남편분은 밖에서 대기해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산하는 한껏 얼굴을 찡그린 새봄을 일별하고, 분만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앞에서 대기하던 산하는 전전긍긍했다. 그녀가 예정일보다 2주 앞당겨서 출산하게 된 것은 두 번째 문제였다.
그보다 중요한 건, 요즘 들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이었다. 그저 우연이려니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사건 사고는 계속되었다.
이젠 도저히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혹시나 그 영향이 와이프와 아이에게까지 끼칠까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와이프의 힘들어하던 모습을 보다가 나온 그는, 괜스레 미안함과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분만실 문이 열렸다.
“남편분 들어오세요.”
산하는 간호사의 부름에 분만실 내부로 들어섰다. 그곳에 갓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쭈글쭈글한 데다 눈도 뜨지 못한 갓난아기.
시각적으로는 그리 이쁜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 그는 뭉클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느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려 애썼다.
저 아이가 내 새끼구나.
별이가 세상에 나왔구나.
그의 마음속으로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묘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 왔다.
한참 후.
산하는 입원실에 누워 있는 새봄을 토닥였다.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다.
“힘들었지? 고생 많이 했어.”
그녀는 그의 위로에 답하기보다, 질문을 던졌다.
“우리 별이 사랑스럽죠?”
“당연하지, 우리 봄이 쏙 빼닮아서 완전 미인이야.”
“치, 이제 막 태어났는데, 어떻게 알아요?”
“아냐, 난 느낌 있어.”
그 순간 새봄의 시선이 산하의 머리에 가닿았다.
“어? 산하 씨. 머리가 왜 그래요?”
“아, 이거?”
산하는 하하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진통 당시, 그녀가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의 머리털을 힘차게 잡아당겼던 기억이 났다.
한데 딱히 변명할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요. 조금 듬성듬성 한 거 같은데. 어디 봐 봐요. 세상에, 설마 이거 내가 그랬어요?”
“아니야.”
그녀는 그의 대답을 믿지 않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무슨 소리야? 아니라니까.”
“미안해요.”
“봄아, 우리 딸도 잘 태어났고, 당신도 건강하니까 다 좋기만 한데. 뭘 이런 사소한 걸 가지고.”
“그래도…….”
“아 맞다. 정신없어서 전화도 못 드렸네. 잠시만.”
그는 먼저 장인 윤주상에게 출산 소식을 알렸다. 딸바보인 그에게 가장 먼저 알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별이는?”
“건강합니다.”
“허 그 녀석 참, 별이는 왜 이리 성격이 급한 게야? 아직 예정일도 남았다고 하지 않았어?”
“네,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요.”
“알았네. 봄이는 정말 이상 없는 게지?”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만. 바로 가겠네.”
“지금 오시면 별이 면회는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조금 천천히 오시는 건 어떠세요?”
“괜찮네. 일 때문에 멀리 와 있어서 조금 늦을 거야.”
“아, 그러셨구나. 장인어른. 봄이 바꿔 드릴게요.”
“아니야. 가서 얼굴 보고 얘기하면 되지.”
“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
그가 통화를 종료하자, 새봄이 물었다.
“아빠 오신대요?”
“응.”
“금방 퇴원할 건데.”
“이쁜 딸 걱정하시는 거지. 나도 딸이 생긴 입장에서, 장인어른 마음 십분 이해해.”
새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산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날 왜 그렇게 봐?”
“산하 씨, 이러다가 우리 아빠랑 판박이 되는 거 아니에요?”
“판박이?”
“딸바보 말이에요.”
“딸바보가 어때서?”
“우리 별이한테 너무 간섭하면 힘들어할 테니까, 적당히 해 주세요. 박산하 씨.”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윤새봄 바보로 남겠습니다.”
산하와 새봄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다가 하하 웃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우리 잘 키워요.”
“그러자.”
그 후 산하는 자신의 부모님에게도 연락을 넣었다.
한참 후, 병실 문이 빼꼼 열리며 윤정의 얼굴이 나타났다.
“언니!”
“아가씨, 왔어요?”
“아무도 없네. 내가 1등이에요?”
“맞아요.”
이내 병원 침대 머리맡으로 쪼르르 다가간 윤정이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죠? 별이는 엄마 고생 안 하게 날짜 맞춰서 좀 나오지. 한 2주 일찍 나온 거죠?”
새봄이 뭐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산하가 입을 열었다.
“오늘 출근 안 해?”
윤정이 고개를 돌렸다.
“박산…… 아니, 오빠. 이런 날에 출근하게 생겼어? 내가 또 태몽의 주인으로, 우리 조카 옆은 지켜야 할 거 아냐?”
“안 지켜도 되는데?”
“뭐래, 언니 진짜 진짜 축하해요. 아빠랑 엄마는 곧 오실 거예요. 별이는요?”
“신생아실에 있어요.”
“아. 보고 싶다. 퇴원은 언제 할 수 있대요?”
“내일 오전쯤에 할 것 같아요.”
“조리원으로 바로 가요?”
“조리원은 안 가고, 그냥 집에서 몸조리하기로 했어요.”
“왜요? 힘들지 않겠어요? 요즘 조리원 좋은데 엄청 많아요. 되게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그냥 집이 편할 것 같아서요.”
그때, 산하가 윤정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박윤정 씨, 산모 그만 괴롭히고 나갑시다. 무슨 범죄자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
“산하 씨, 난 괜찮아요.”
“아냐, 당신 더 쉬어야 해. 넌 나랑 잠시 나가자.”
곧 병실 복도로 나온 산하가 윤정에게 말했다.
“오느라 고생했어. 얼른 출근해.”
“나 오늘 별이 못 봐?”
“응, 못 봐. 지금 면회 시간 아니야.”
“아쉽다. 아 참, 오빠. 내가 오기 전에 조사해 봤는데, 국제 학술지에 의하면 32도 이상의 환경이 지속될 때 조기 출산 확률이 늘어난대. 올여름은 유난히 덥잖아? 그래서 별이가 일찍 태어났나 봐.”
산하는 황당해하며 윤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 많은 애들이 이렇게 태어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지. 아무튼 난 출근할게. 며칠 있다가 신혼집으로 별이 보러 가면 되지?”
“아니.”
“아, 왜애?”
“별이가 너한테 물들까 두려워서. 조기 차단하려고.”
“뭐가 물들어?”
“네 성격 좀 돌아보지 않을래?”
“내 상큼발랄한 성격이 어때서? 좋기만 하구만. 흥이다. 나 갈 거야.”
그녀는 곧장 병실 문을 빼꼼 열더니 인사했다.
“언니 저 갈게요. 몸조리 잘해요.”
“벌써요?”
“네, 언니 쉬어야죠.”
“전 괜찮은데.”
“아니에요. 갈게요.”
“아가씨. 조심해서 가요.”
이윽고 윤정은 씩씩한 걸음걸이로 복도 저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박산하.”
“뭐?”
“축하해.”
“고맙다.”
“흥!”
윤정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고, 산하는 복도 저 너머로 멀어져가는 여동생을 보며 피식 웃었다.
며칠 후.
찜질방처럼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누워 있던 새봄이 말했다.
“산하 씨, 나 조금 더워요. 보일러 끄면 안 돼요?”
“안 돼. 오늘 비 와서 서늘하잖아. 어머니가 그러셨는데, 지금 조리 잘해야 늙어서 고생 안 한다고 하셨어. ……그래도 우리 봄이가 덥다니까, 잠깐 끌까?”
“……산하 씨도 참. 그냥 놔둬요.”
“알았어. 벌써 점심시간이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미역국 가져올게.”
산하는 얼른 방을 빠져나갔고,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새봄은 자신의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별아, 아빠가 그렇게 좋아?”
딸 아이는 눈을 뜬 후로 제 아빠만 보면 방긋방긋 웃었다. 그게 못내 신기했던 새봄은 아이에게 묻기까지 했다.
하나, 아이는 맑디맑은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마주 보던 그녀는 문득 잊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가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별이 이름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때, 산하가 밥상을 차려서 방에 들어섰다.
“우리 봄이 밥 먹자.”
“나 아기 아니거든요?”
그가 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아기래? 밥 먹자고 했지.”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산하 씨, 우리 딸 이름은 어떻게 해요?”
“이름? 태명에서 따오면 어떨까 하는데?”
“태명이요?”
“응. 나름 고민해 봤는데, 박윤별 어때?”
“윤별이요? 괜찮은데요?”
“그렇지? 그래도 며칠 더 같이 고민해 보자. 안 되면 작명소도 찾아가 보고. 당신은 생각해 놓은 이름 없어?”
새봄은 염두에 두었던 이름들을 떠올렸다.
“생각은 해 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래? 아직 출생신고 기한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될 것 같아. 식기 전에 밥부터 먹어.”
“알았어요. 그런데 출근 언제까지 안 할 거예요?”
“당신 몸조리 다 끝날 때까지?”
“그게 언제인데요?”
“나도 몰라.”
“바보.”
“배 안 고파?”
“알았어요. 먹어요.”
새봄은 그가 직접 만든 국을 떠먹는 순간,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출산 직후라 호르몬 변화 때문에 그런지, 대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반응에 산하는 놀랐다.
“어? 봄아 왜 울어? 어디 아파?”
새봄은 말없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냥, 국이 너무 맛있어서 그래요.”
그는 맛있어서 운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난 또. 많이 끓여 놨으니까, 많이 먹어. 애는 내가 보고 있을게.”
산하는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딸을 안아 들었고, 아기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방긋 웃었다.
* * *
<하산해 2세, 세상의 빛을 보다.>
- 역시 사람은 이름이 있고 봐야 해. 남 출산 소식까지 알아야 한다니.
- 하산해가 딸 낳으니까, 뉴스 기사 도배됐네요.
- 이게 뭐 큰일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 하산해 자체가 큰 인물이니까요. 이만한 영향력 가진 사람 봤어요?
- 하산해 딸도 천재일까요?
- 모든 건 유전이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 캬, 아버지의 뒤를 이은 천재의 탄생인가.
산하의 딸이 태어난 후로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보통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부부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래전, 그의 형 박제동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산하는 그리 큰 고생을 하지 않았고, 양가 부모님에게 힘을 빌리지도 않았다.
그건 바로 유미옥의 재능 덕분이었다.
봉씨는 사라졌지만, 그 재능은 여실히 발휘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박제동은 산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여기 갓난아기 키우는 집 맞냐?”
“왜?”
“보통 이쯤 되면 아빠나 엄마나 다크서클도 달고, 피곤해 죽을듯한 모양새여야 하거든. 그런데 넌 뭐냐? 왜 이렇게 쌩쌩해?”
“형은 꼭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 같다?”
“아니, 이해가 안 되니까 그러지. 어떻게 애들은 너를 그렇게 좋아하냐?”
“내가 또 한 순수하잖아. 순수함은 통하는 거거든.”
“에이, 그건 아니지. 쇠고집이면 몰라도.”
“내가 뭘 그렇게 고집이 세다고.”
“원래 본인은 잘 모르는 거니까. 제수씨는?”
“친정에 잠깐, 뭐 좀 줄까?”
“아냐, 됐어. 우리 조카 벌써부터 미모가 남다르네. 제수씨 닮아서 그런가?”
제동은 보석을 박아 넣은 듯 반짝이는 조카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도 닮았어.”
“글쎄, 너는 안 닮았는데? 딱 우리 제수씨 미모를 빼다 박았어.”
제동은 아이를 가만히 안아 들어 어르고 달랬다. 그러자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조금 전 형의 말에 심술이 난 산하가 말했다.
“왜 가만히 있는 애를 울리고 그래?”
“……아니, 왜 울지? 배고픈가? 기저귀 갈아 줘야 하나?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그가 육아 경험을 바탕으로 원인을 탐구하던 그때, 산하가 아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별아, 아빠 여기 있어. 뭐가 그렇게 서러워?”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 심지어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방긋 웃기까지 했다.
“와, 뭐지?”
“뭐긴 뭐야. 아빠 좋아하는 딸이지. 그치 별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지?”
아이는 그렇다는 듯 계속 웃었다.
“진짜 너는 베이비시터 쪽으로 나갔어도 대성했겠다.”
“그래? 지금이라도 한번 시작해 볼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네 팬들이 알면 난리 난다.”
“그런가? 별아 까꿍?”
“너 육아한다고 팬들이 난리다. 언제 복귀하려고?”
“그래도 한 일 년은 애 곁에 있으려고. 크는 건 봐야지.”
박제동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인생 뭐 있냐? 내 새끼 크는 거 보는 게 좋지.”
“그렇지?”
그때였다. 방문이 빼꼼 열리더니 윤정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산하, 박산하, 박산하.”
“넌 또 언제 왔냐?”
“왔어?”
“큰오빠도 있었네? 오구오구 우리 조카 잘 있었어용? 고모가 선물 사 왔어.”
윤정은 종이가방을 들어 보이더니 물건을 주섬주섬 꺼냈다. 아이 장난감부터 시작해 신발까지, 다양한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그게 다 뭐야?”
“딱 보면 몰라? 고모의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이지.”
“우리 별이 아직 갓난아기거든? 운동화가 웬 말이냐?”
“애들은 하룻밤 사이에도 쑥쑥 큰다잖아. 미래를 대비한 거야.”
“잘났다.”
“그러엄, 나 잘났지. 별아 고모한테 와봐.”
윤정은 박제동의 품에 안겨있던 조카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왔다.
“까꿍?”
그 순간 아이가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윤정이 말을 더듬었다.
“별아. 고모야. 고모라니까. 왜 울어? 고모가 싫어?”
* * *
몇 개월 후, 이른 아침.
산하는 회사의 중대한 결재나 회의 때문에 가끔 짧게 출근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법인 풍류가 상장을 앞두고 있기에, 부사장 장단석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었다.
“별아, 아빠 다녀올게.”
“빨리 와요. 알았죠? 별이가 당신만 없으면 자주 울어요.”
“알았어. 점심 전에 올게. 그런데 이제 당신이란 말이 입에 착 붙었네? 아주 자연스러워.”
“……그만하고 얼른 출근해요.”
“알았어. 다녀올게.”
산하는 그녀와 딸에게 뽀뽀를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잠시 후, 한적한 도로.
아직 해가 제대로 뜨지 않아서 주변이 어슴푸레한 시각이었다.
산하는 비정기적으로 출근했기에, 당분간 운전을 직접 하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산하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곳에는 밴드가 붙어 있었다.
어제 요리 도중 칼질하다가 다친 상처였다.
숙련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다치지 않았건만, 어이없게 베이고 말았다.
대체 요즘 왜 이러지?
이유가 뭘까?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사라진 봉씨하고 관련된 걸까?
찝찝해하던 그는, 그 마음을 달래려 자신의 딸 사진을 확인했다. 최근에 스마트폰으로 찍어 놓은 딸이 방긋 웃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냥 아무 일도 아닐 거야.
그치 별아?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파란불이 들어오자 액셀을 천천히 밟았다. 오늘은 안개가 약간 낀 날이라 운전이 조심스러웠다.
* * *
몇 시간 전.
만취한 세 사람이 한 술집에서 빠져나오며 비틀거렸다. 그중에 제일 젊은 사람이 혀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홍 과장님, 택쉬 잡아 드릴까요?”
셋 중에서 가장 취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태액시? 택쉬? 그딴 거 필요 없어. 우리 대리가 대리 불렀어. 그치 대리야?”
“그럼요, 그럼요. 대리가 대리 불렀죠.”
두 사람은 그게 뭐가 그리 웃기는지 낄낄 웃었다.
“그럼 대리님은요?”
“나? 나는…….”
히죽 웃던 그가 답했다.
“택쉬 타고 가야지. 아우 취한다.”
홍 과장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의 퇴근을 허하노라.”
“어이쿠, 과장님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얼른 꺼져. 난 대리 오면 갈 거야.”
“지인짜요?”
“나 맘 바뀌기 전에 썩 꺼져.”
“예이, 알겠습니다. 상준 씨 바바이. 과장님도 바바이. 먼저 갑니다.”
“어, 가라. 가. 너어. 출근 늦으면 호온 나. 맴매할 거야. 술 마셨다고 안 봐주는 거 아알지?”
“분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과장님 이 홍 대리는 정말 먼저 갑니다.”
“대리님, 출근해서 뵙겠습니다.”
“오케이! 회사에서 보자고. 기분 조타!”
이내 대리 한 명이 택시를 타고 사라졌고, 홍 과장은 자신의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가 차창 너머로 말했다.
“상준아.”
“네, 과장님.”
“타, 데려다줄게.”
“에이, 아닙니다. 과장님 댁이랑 반대 방향인데요. 시간 오래 걸려요.”
“그런가? 그럼 먼저 휘익 가. 난 여기 있다가 대리 오면 갈 거니까.”
“과장님 가시는 거 보고 갈게요.”
홍 과장은 술에 취해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그를 윽박질렀다.
“어허, 지금 하늘 같은 과장 말에 토다는 거야?”
“아닙니다.”
“그럼 얼른 가. 훠이.”
그의 지시에, 상준은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네, 과장님. 그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그래그래, 먼저 가.”
그는 손을 휘휘 내젓더니 창문을 올렸고, 이내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상준은 잔뜩 올라오는 취기에 토악질이 올라옴을 느꼈다. 후다닥 전봇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밤새도록 먹은 술과 안주를 게워냈다.
그 시각 홍 과장은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대리 기사에게서 연신 전화가 왔지만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
쉼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홍 과장은 잠이 깼다. 그는 여전히 취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 씨, 뭐야, 여기 어디야?”
두리번거리던 그는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짜증부터 냈다.
“어떤 새끼야?”
스마트폰 화면에는 마눌님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화들짝 놀란 그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이내 벼락 떨어지는 듯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어디야? 어!? 왜 전화 안 받아? 이 화상아!”
“아, 아니 그게…… 있잖아.”
“또 술 처먹었어? 이젠 하다 하다 외박을 해?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당장 튀어와.”
“여보, 침착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회사 바로 가 봐야 하거든?”
“아, 그러세요? 그러셨구나. 내가 외박까지 하면 어떻게 한다고 했어?”
“여보! 진짜야. 진짜라니까. 어제 거래처 사람들이랑 일 때문에 한잔했어. 깨 보니까 차 안이지 뭐야. 그게 다야.”
끄응 참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퇴근하고 바로 튀어와.”
“알았어.”
이내 통화를 종료한 그가 인상을 잔뜩 구겼다. 필름이 끊겼는지, 술 마시던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제기랄, 왜 나 혼자 여기 잠들어 있어? 이것들이 하늘 같은 과장을 버려두고 지들끼리 간 거야?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그가 승용차 시동을 걸었다.
곧 골목을 빠져나간 차가 대로변에 접어들 무렵, 홍 과장은 멍한 정신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취기가 가시지 않아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 회의도 그렇고, 협력업체 미팅도 제대로 못 할 판이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안 되겠어. 사우나 가서 몸 좀 풀고, 한숨 자고 가야겠어.
그는 촉박한 시간을 아끼려고, 액셀을 꾹 밟았다. 이내 차량은 안개를 뚫고 빠르게 나아갔다.
그 잠깐 사이, 홍 과장은 깜빡 졸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시야에 한 차량이 훅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그는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지만, 실수로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홍 과장의 승용차가 굉음과 함께 한 승용차 측면을 거칠게 들이박았다.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잠시 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건물 사이로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