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 돌아가기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
외전 13화. 그의 가치 (4)
그 시각, 산하네 요리 전문점 근처 건물에는 상가 건물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벌써 몇 개월 째 상가 공실 대책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뭐 좋은 의견 없으십니까? 의견 개진 부탁드립니다.”
빵모자를 푹 눌러쓴 50대 남성이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해 주세요.”
“지금 제 건물에 임차인이 둘 남아 있는데, 이마저도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나간다고 합니다. 제가 봐도 적자만 날 것 같은데, 안 나갈 리가 없지요. 이 모든 원인이, 하산해 씨가 그렇게 되고 나서부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비록 하산해 씨가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후로 영업도 중단하고 두문불출한다고는 하나, 언젠가는 일어서리라 생각합니다. 하니, 몇 년 정도만 더 버텨 봅니다.”
그의 발언에, 다른 70대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럼 손가락만 쪽쪽 빨면서 기다리기만 하자는 얘기예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요. 좋은 의견 내놓으랬더니, 무슨 그런 황당한 얘기만 합니까?”
“그럼 어르신은 무슨 뾰족한 대책 있으십니까?”
“거야…… 아! 그래. 우리 하산해 씨한테 공식 의견이라도 전달해 봅시다. 우리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식당 영업이라도 재개해 달라고.”
“어르신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게 아픈 사람한테 할 소리입니까? 우리 돈 좀 벌자고 할 소리냐고요?”
“말 안 될 건 뭐요? 난 여기 상가를 구입할 때 노후 대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도 안 돼서 이 모양 이 꼴 아니오?”
“어르신,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닙니까?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가…….”
분위기가 격앙되자, 상가 공실 대책 회의 대표가 두 손을 들어 아래로 내리누르는 시늉을 했다.
“자자, 다들 진정하세요. 우리가 대책 회의하자고 모였지, 싸우자고 모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50대 여성이 입을 열었다.
“매일 그 의견이 그 의견인데, 이참에 대표 양반도 좋은 의견 하나 개진해 보세요.”
“저요? 제가 하나 생각해 놓은 게 있긴 한데.”
“있어요? 얼른 말해 보세요.”
“다들 아시다시피 여기가 <하산해 거리> 아니겠습니까? 하산해가 오갔던 흔적을 테마로 삼아서 새롭게 꾸며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하산해 팬들은 건재한 것 같으니까요.”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런 건 사후에나 하는 거 아니에요?”
그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죄송합니다. 그럼 제 말은 못 들은 거로 하시고, 다른 좋은 의견 있으신 분.”
그때였다.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던 40대 남성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좋은 의견 있습니다!”
“네!? 있어요? 목소리가 활기차신 걸 보니 뭔가 좋은 방법인가 보네요. 어디 말씀해 보세요.”
“하산해 팔이 움직인답니다. 저 먼저 갑니다.”
그길로 40대 남성은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실내에 자리해있던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그 문을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 저 사람이 뭐라고 한 거죠?”
“하산해 팔이 움직인다고…….”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이들이 앞다투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들은 이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됐어요. 됐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 같네요.”
“하산해 만세!”
“어휴, 한시름 덜었네요. 잘됐네. 잘됐어.”
하산해 소식에 기뻐하는 그들에게, 상가 공실 대책 회의 대표가 말했다.
“자자, 잠시만요. 우리 이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이럴 때가 아니라니요?”
건물주들이 의문을 표하자, 그가 말했다.
“하산해 씨가 좋아졌다지 않습니까? 축하 현수막이라도 걸어야죠. 우리 각자 건물에 하나씩 거는 건 어떠세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이 앞 큰 도로 쪽 현수막 집이 한가하던데, 다 같이 맡깁시다.”
“그럽시다. 하산해가 있어야 우리도 사는 거니까.”
“어? 저기 기자들 지나가네요.”
“자자, 움직입시다. 오늘 같은 날, 기자들이 우리가 내건 현수막을 찍으면 더 좋잖아요.”
“그럽시다. 내용은 어떻게 하죠?”
“뭐, 별거 있습니까? 하산해 완치 기원, 경축, 뭐 이런 거 넣으면 되겠죠.”
“그럼 그건 각자 하기로 하고,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반은 다른 업체로 분산합시다. 가죠.”
그들은 앞다투어 밖으로 빠져나갔고, 기쁨이 가득한 기색으로 현수막을 제작하러 갔다.
그때, 한 기자가 온갖 성별과 나이대가 뒤섞인 그들을 발견했다.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기자는 그중 뒤처진 한 명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무슨 일입니까?”
“저는 신문사 기자인데요. 지금 저분들이랑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다들 기뻐하시는 것 같던데요.”
“뭐긴 뭐겠어요? 우리 이쪽 동네 건물주들인데, 하산해 좋아졌다고 해서 현수막 제작하러 갑니다.”
“네? 현수막이요?”
“그렇죠. 하산해가 이쪽 상권의 핵심 아닙니까? 축하해 줘야죠. 하산해도 좋고, 우리도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가 볼게요.”
하하 웃던 사내는 후다닥 사라졌다.
그러자 기자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현수막?”
한참 후.
산하네 요리 전문점 인근의 건물마다 큼직한 현수막이 내걸렸다.
<장하다 하산해!>
<대한의 아들 하산해, 완치로 가자!>
<경 하산해 회복 축>
<하산해 오심을 환영합니다.>
<하산해를 위하여!>
<하산해 완치를 기원합니다.>
길거리에는, 어느 시골 동네에서 판검사를 합격했다는 현수막보다 더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기자들은 이 모습을 연신 찍어 대기 바빴다.
한편, QBS 사장 신서홍은 보도국을 닦달했다.
“지금 사진만 찍고 뉴스만 내보낼 때야? 빨리 가서 생중계부터 해.”
“국장님, 지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중계방송 차량이…….”
신서홍이 종잇장처럼 얼굴을 구기며 그의 말을 끊었다.
“태풍 오고 눈 오면 날씨 예보 안 해? 지금 이 일이 보통 일인 줄 알아? 다른 방송국은? 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우리 눈이 많이 오니까 사진만 대충 찍고, 기사만 퍼 나릅시다. 이럴 거 같냐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얼른 내보내서 촬영하란 말이야. 뭐라도 찍어와, 얼른!”
“네, 사장님.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에이, 다들 무능하기 짝이 없어. 하산해 건이면 시청률이 얼마나 오르는데 이러고들 있는지 원.”
한참 후.
방송국 차량이 산하네 요리 전문점 근처에 도착해 촬영을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하산해 씨가 운영하던 산하네 요리 전문점 근처 건물에는 이런 현수막이 잔뜩 내걸려 있습니다. 썰렁하던 거리에도 활기가 돌고 있는데요. 지나가는 시민에게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잠시만요!”
“네?”
“QBS 김수빈 기자입니다. 오늘 주민분들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지고 있는데요. 이유가 뭔가요?”
중년 여성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하산해 때문이죠. 이분이 또 우리 동네의 보물 아니겠습니까? 하산해 씨!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완치까지 파이팅!”
“네, 하산해 씨를 향한 뜨거운 응원 잘 들었습니다. 다음 시민분 모셔서…….”
기자의 인터뷰가 조금 더 이어지고 난 후, 화면이 전환되며 데스크 아나운서가 말을 받았다.
“김수빈 기자, 수고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의학박사 함태석 님을 모셨는데요. 함 박사님, 이번 하산해 치유 건,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네, 우선 하산해 씨,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실 세계적으로도 이런 일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인데요.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다들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이번 하산해 씨의 치유가 우연이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기존에 하산해 씨 수술을 집도하셨던 의사분을 비롯해 수많은 의료진이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건, 그야말로 치료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이건 기적이자 우연이죠.”
“말씀하신 대로라면, 세간의 일부 의견대로 자연치유가 이루어졌다는 건데요. 하산해 씨가 몇 개월 전 라디오에 출연해서 침구술을 배우는 중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단 말이죠.”
“네, 저도 들은 기억이 납니다.”
“혹시 하산해 씨의 자가치료 가능성은 염두에 둘 수 없을까요?”
의학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완전히 마비되었던 팔을 그런 식으로 치료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봅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죠. 자연치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하산해 씨의 팔은 심한 물리적 손상에 의한 마비였습니다. 단순히 침 좀 찌르고, 뜸을 뜬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기적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네, 하산해 씨는 자연 치유되었다. 이런 의견 주셨습니다. 함 박사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카메라가 돌아가며 아나운서를 집중적으로 비췄다.
“오늘 오전 8시 12분,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하산해의 상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전 국민이 기뻐했고, 팬들은 환호했습니다. 하산해 씨가 모두에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보여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아홉 시 뉴스에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QBS 긴급 속보 마칩니다.”
* * *
홍 과장은 하산해의 소식을 듣고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렸다. 그의 어깨와 머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그만 울어, 이 화상아.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는 안 울겠네.”
“이거 정말 사실이지?”
“보면 몰라? 저기 현수막도 걸려 있잖아. 다 됐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자.”
와이프의 말에, 홍 과장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또! 또 왜? 당신이 그렇게 양심적인 사람이었어? 하산해 좋아졌다잖아. 당신 가정은 눈에도 안 보이지?”
그가 까끌까끌한 음색으로 말했다.
“여보, 미안해. 미안한데, 하산해가 좋아진 건 좋아진 거고, 그렇다고 해서 죄지은 내가 사라지진 않아.”
홍 과장의 와이프는 가슴을 쾅쾅 쳤다.
“내가 못 살아! 그럼 하산해가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그녀의 질문에 홍 과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답답해진 그녀가 꽥 소리 질렀다.
“이제 굶어 죽건, 얼어 죽건 신경 안 쓸 테니까 알아서 해!”
씩씩거리던 그녀는 팩하고 뒤돌아 걸어가 버렸다. 그렇게 몇 걸음 옮기던 그녀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볼이 움푹 들어가고,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버린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휴, 앓느니 죽지. 어쩌다 저런 인간을 만나서…….”
그녀는 욕을 하면서도, 내일 남편에게 가져다줄 생필품과 도시락에 관해 고민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 해가 졌다.
눈을 치워서 깨끗해진 거리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발이 더 거세지고, 사람 발목 높이까지 눈이 쌓이던 그때였다.
인적조차 드문 밤, 추위 속에서 떨던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홍필준 씨,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십니까?”
홍필준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만난 듯 흔들렸다.
잔뜩 얼어버린 그의 입에서 어눌한 말이 흘러나왔다.
“하, 하산해 씨?”
“왜 이러고 계시는지 묻지 않습니까?”
“그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그게 다입니까?”
“네?”
“이러면 제가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홍필준은 죄책감 가득한 눈빛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모양새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산하가 입을 열었다.
“두 가지만 약속하세요.”
“네?”
“첫째, 다시는 음주 운전 하지 마세요.”
“네, 그럼요. 다시는 운전을 안 할 생각입니다.”
“둘째, 이제 죗값 치르셨으니, 그만 하세요.”
“네!?”
당황한 홍필준의 시선에, 산하가 속내를 내뱉었다.
“전 가끔 여기를 지나가면서 홍필준 씨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습니다.”
“네…….”
“그날 일을 떠올릴 때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하늘에 묻곤 했습니다. 당신을 마구 패 버리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거든요. 저도 언젠가 실수를 할 테고요.”
“…….”
“사람은 누구나 실수에서 배우곤 하지 않습니까? 단지,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 같습니다. 홍필준 씨도 그간 많은 걸 배우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마세요. 가족을 위해서라도.”
홍필준은 차마 하산해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세요. 저도 오늘이 지나면 이번 일은 잊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일 계속 되새겨 봐야, 홍필준 씨도, 저도 괴로울 뿐이니까요. 그럼 잘 가세요.”
산하는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에 비친 눈이 밟히고,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그 뒤쪽에서는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 왔다.
* * *
몇 시간 전, 프랑스.
수집가 사내는 오전부터 종일 이어지는 대형 연말 파티에 참석 중이었다. 그는 조금만 참으면 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어깨마저 으쓱했다.
그때, 누군가가 실내로 뛰쳐 들어오며 소리쳤다.
“빅 뉴스! 빅 뉴스야!”
“뭔데 그래?”
“아니기만 해 봐.”
수집가 사내는 피식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방금 뛰어 들어온 남자는 연말마다 저러곤 했다.
모두에게 관심이라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순간, 빅 뉴스라고 외치던 남자가 다음 말을 이었다.
“하산해 팔이 좋아졌대.”
수집가 사내의 입에서 와인이 뿜어졌다. 그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느새 힘이 빠진 그의 손에서 와인잔이 떨어져 쨍그랑 부서졌다.
하산해 팔이 움직인다고?
아냐, 말도 안 돼.
다들 가망 없다고 했는데.
내가 파산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는 인파를 거칠게 헤치고 나아가더니, 조금 전 소식을 전한 남자의 멱살을 붙잡았다.
“너, 뭐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뭐, 뭡니까? 이거 놓으세요.”
“왜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냐고 묻잖아? 정체가 뭐야?”
“누가 이 사람 좀 말려 줘요.”
그 시각,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하산해 관련 뉴스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진짜네. 하산해 팔이 좋아졌대요.”
“와, 다행이네.”
그때였다.
수집가 사내가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뒤돌아섰다.
“다행!? 뭐가 다행이야? 야 이 새끼야? 뭐가 다행이냐고?”
“왜, 왜 이래요?”
“다시 말해 봐. 하산해가 뭘 어쨌다고?”
그가 상대방에게 미친놈처럼 따지고 들던 그 순간, 누군가가 달려와 수집가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야! 이 새끼야. 호언장담했잖아. 너만 믿으라며?”
수집가 사내는 당황했다.
“이제 어쩔 거야? 어? 그 많은 앨범 다 어쩔 거냐고?”
친구가 원망을 쏟아내자, 수집가 사내가 돌변했다.
“등신 같은 네가 투자한 거 아니야? 그걸 왜 나보고 지랄이야?”
“뭐, 뭐라고?”
“이 등신 새끼야. 네가 가진 돈을 남 말만 듣고 투자했잖아. 그럼 스스로 책임져야지.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이 나쁜 새끼.”
“너보다는 내가 손해가 더 커. 완전히 망했다고. 기분 더러우니까, 꺼져.”
수집가 사내는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한 채 밖으로 향했고, 열 받은 남자는 수집가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이내 두 친구는 엎치락뒤치락하며 바닥을 굴렀고, 파티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두 사람은 곧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비슷한 시각.
이상인은 하산해 소식에 기뻐하다가 도박사이트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다.
미친.
그는 얼른 사이트에 접속해서 도박 현황을 살펴보았다. 이미 하산해 관련 도박 베팅은 마감된 지 오래였다.
그곳 자유게시판은 수많은 게시글로 인해 혼잡스러웠다.
- 이건 무효야. 완치된 건 아니잖아.
- 맞아! 이번 건은 무효라고. 내 돈 돌려줘.
- 재활 치료 중이라잖아. 당연히 무효지.
그걸 살펴보던 이상인의 긴장이 풀렸다. 워낙 엄청난 사건이기에, 조금 전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무효가 될 모양이네.
그럼 그렇지.
차라리 다행이야.
그 돈 생긴다고 해도, 국내 송금도 힘든데.
괜히 골치만 아프지.
그래도 미련이 남은 이상인이 사이트 여기저기를 살피던 그때, 공지 하나가 올라왔다.
<본 게임은, 하산해의 완치 가능성 여부를 두고 벌어졌습니다. 하나, 결과를 도출하기가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베팅은 그대로 유지하되, 1년의 기간을 유예하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그걸 본 이상인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만약 완치되면, 대체 얼마지?
* * *
산하는 이른 새벽 풍류 본사로 출근하기 위해 현관을 나섰다.
“더 자라니까.”
“됐으니까, 조심히 다녀오세요. 박 대표님.”
“네, 그럴게요. 윤새봄 씨. 다녀올게. 별이 울면 전화해.”
“알았어요.”
그는 전담 비서가 끌고 온 고급 승용차에 올라탔다.
풍류에서 주문한 이 차량은 방탄 차량으로, 온갖 위험한 외부 환경에서 탑승자를 보호하는, 세계에서 극소수만이 사용하는 차종이었다.
각국의 대통령이나 요인 또는 글로벌 그룹의 CEO나 타고 다니는 차량이라고나 할까.
“비싸서 그런가, 좋긴 좋네요.”
“그럼요. 대표님 전담팀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주문한 건데요. 총알은 물론이고, 지뢰가 터져도 안전하다고 합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지뢰가 터질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대표님 다치신 거 생각하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의견이 모였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산하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죄인이라 더 할 말은 없네요. 갑시다.”
“풍류 본사로 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그래요.”
내리막길을 부드럽게 굴러간 승용차가 산하네 요리 전문점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산하는 자신의 식당 앞을 살폈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던 홍필준도, 낡은 텐트도 사라지고 없었다.
홍필준 씨, 어쩌면 당신도 피해자일지 모릅니다.
이게 다 페널티 때문이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음주 운전을 했다는 건 사라지지 않아요.
그 약속 꼭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잘 사세요.
속으로 그 말을 내뱉던 산하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참 후.
풍류 본사 내부로 들어선 산하의 눈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풍류 본사 직원들이 다 몰려나와 도열하더니 크게 소리쳤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난 이러라고 시킨 적 없는데요? 설마 장단석 부사장님이 이러라고 하셨나요?”
“아니요!”
“아니에요.”
“대표님, 이런 걸 자발적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원 몇 명이 나서서 그의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 주고 꽃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산하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부사장님 탓한 건 비밀입니다. 쉿!”
모든 직원이 자신의 입가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자, 다들 고맙습니다. 얼른 나아서 빠르게 복귀할게요.”
“네, 대표님! 완치 기원할게요.”
“파이팅!”
직원들을 지나친 산하는 어느새 뛰쳐나온 장단석 부사장과 마주했다.
“대표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아 참! 엄청나게 큰 선물이 들어왔는데요. 빨리 보셔야겠습니다.”
“큰 선물요? 뭔데요?”
“일단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대표실로 이동한 산하는, 그곳에 가득한 꽃다발을 보게 되었다. 특히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꽃다발 하나와 편지가 눈에 띄었다.
“저건 누가 보낸 겁니까?”
“청와대에서 보냈습니다.”
“청와대요?”
“네, 그만큼 나라에서도 대표님을 중히 여긴다는 뜻이겠죠? 그러니까 대표님 전용 차량 잘 타고 다녀 주세요. 또 반려하시지 말고요.”
“반려는 안 해요. 저도 이제 몸 사려야죠. 타 보니까 좋던데요? 그나저나 청와대는 부담스럽네요. 우리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시기를, 정치권하고 엮여서 좋을 게 없다고 하셨는데.”
“그건 맞는 말씀이죠. 그래도 이왕 보내온 거 답장은 하셔야죠?”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괜히 골치만 아프게 생겼어요.”
장단석은 기분 좋은 듯 크게 웃었다.
“그래도 전 좋기만 한데요. 대표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산하는 감회 깊은 표정으로 대표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 * *
샌프란시스코의 한 주택가.
과거 육상선수였던 존스 데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하나 그에게는 그 무엇도 지겹고 무료하기만 했다. 그에게는 달린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존스 데반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되뇌었다.
이젠 희망이 없어.
끝이야.
그때였다. 방 문이 벌컥 열리며, 그의 친구 브렌든이 뛰쳐 들어왔다.
“헤이 존스, 빅 뉴스야! 소식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