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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444화 (444/445)

444. 돌아가기과거에서 재능이 쏟아져

보너스 외전 – 누나 무서워요 (2)

윤정은 상익이 뿜어낸 맥주를 뒤집어쓰고 부들부들 떨었다. 티슈를 뽑아 얼굴을 훔친 그녀가 말했다.

“아놔, 드럽게…….”

“누나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해.”

“어?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그게 순서가…….”

“됐어.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해 본 소리야. 또 진지하게 받고 있어.”

상익의 표정에 아쉬움이 번져 나갔다.

“아, 그런 거였어요?”

“그래, 내 나이가 벌써 노처녀 소리 들을 나이잖니? 누가 시간 좀 붙들어 줬으면 좋겠다. 이제 주름도 생기고, 짜증 나.”

“누나도 참, 누나가 왜 노처녀 소리를 들어요? 20대 같은데. 그리고 주름도 없이 팽팽한데요?”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욕먹는다.”

“진짠데요?”

“그래, 그렇다고 해.”

한숨을 푹 내쉰 윤정이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돌연 잔을 쾅 내려놓고 입안의 술을 쓰레기통에 뱉었다.

“누나, 왜요? 맛이 이상해요?”

“네가 조금 전에 술 뿜었잖아. 아 진짜 드럽게.”

“……죄송해요. 잔 새로 가져다드릴게요.”

“됐어. 화장실 가는 길에 가져올게.”

윤정은 벌떡 일어서더니 내부 화장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상익이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결혼?

그러고 보니 결혼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네.

윤정 누나 나이도 있어서, 만약에 사귀면 결혼해야 할 텐데.

결혼이라니.

잘 살 수 있을까?

뭐, 윤정 누나랑 살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나저나 누나는 정말 장난으로 말한 건가?

아까 결혼하자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무서웠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아쉽네.

그냥 오늘 확 고백해 버려?

그 시각, 윤정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신경 썼는데, 다 젖었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너무 급발진했나?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화장을 고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술까지 뿜을 건 뭐야?

고백하려던 사람 민망하게.

박산하한테 물어볼, 아냐, 이건 절대 아냐.

절대 안 돼 박윤정.

차라리 친구들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그럼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사귀는 단계로 넘어가지?

원래 알던 사이만 아니었으면 모르겠는데, 오래 알고 지내서 너무 민망하단 말이야.

그것도 동생이잖아.

에이쒸, 왜 하필이면 강상익이 마음에 들어온 거야.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괜히 박산하한테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봐서, 내 마음만 제대로 알아버렸잖아.

강상익, 차라리 네가 빨리 고백해. 이 순둥아.

하긴, 뭘 바라냐?

수 년째 짝사랑만 했는데, 이제 와서 할 리가 없지.

윤정은 괜히 쿠션 뚜껑만 탁 소리 나게 닫으며 화풀이했다.

“에이 몰라, 일단 도전!”

거울의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윤정은 곧 테이블로 되돌아왔다.

“강상익,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어? 왔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후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때, 형 진짜 대박이었죠. 사람들 막 울고불고, 형 매니저라는 게 그때만큼 뿌듯할 때가 없더라니까요.”

“그래, 박산하가 대단하긴 하지. 사적으로는 상태가 별로인데, 공적으로는 천재 맞아.”

“사적으로, 아! 응징의 메아리 이런 거요?”

“그래, 그것뿐만이 아니고, 평소에 이 귀한 여동생한테 하는 짓 좀 봐.”

“전 두 분 사이 좋아 보이던데요?”

“어딜 봐서?”

“그냥 제 눈에요. 그런데 누나.”

“응?”

“누나는 연애 같은 거 안 해요?”

“연애? 글쎄. 하려니 귀찮고, 또 안 하려니 젊음이 아쉽고. 몰라, 복잡해. 그건 왜 물어?”

“누나 혹시, 혹시 말인데요.”

“혹시 뭐?”

“혹시…….”

“?”

“연하는 어떻게 생각해요?”

“연하? 연하 좋지. 나랑 잘 맞기만 하면.”

상익의 얼굴에 환희가 피어올랐다.

“그래요? 아무 거부감도 없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마음만 잘 맞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런 사람이 드물어서 그렇지.”

그러니까 먼저 고백 좀 해, 이 자식아.

이러다가 폼 떨어지게 내가 해야겠냐?

“……어, 저기 누나.”

“어?”

“사실.”

“사실?”

상익이 눈을 딱 감고 외쳤다.

“저 누나 좋아해요.”

“뭐?”

“저 누나 좋아한다고요. 처음 볼 때부터 반했어요. 몇 년 동안 계속 생각해 봤는데, 누나 아니면…….”

“강상익.”

“네? 어, 누나 저기 제가 고백했다고 해서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누나가 저는 아니라고 하면 그냥 예전처럼…….”

“나도 너 좋아해.”

“예전처럼 지낼, 네? 뭐라고요?”

“나도 너 좋아한다고.”

“진짜요?”

“그래, 싫어하는데 이렇게 자주 약속 잡고 전화하고 그러겠어? 하여간에 눈치가 없어요.”

“누나…….”

“우리 사귈까?”

“네!”

“쉿! 조용히 대답 안 해?”

“죄송합니다.”

“그럼 오늘부터 1일이다?”

“1일이요? 네!”

“조용히 대답하라고 멍충아. 사람들이 보잖아.”

“네.”

다음 날.

일찍 출근한 약국장은 허공에 꽃다발을 내밀고, 한쪽 무릎까지 꿇었다.

“박 약사, 내 그대를 생각함은, 저 하늘보다도 높고, 머나먼 우주보다도 넓으니. 아니야. 이건 너무 상투적이야. 더 좋은 거 없나?”

한참 고민하던 그는 원안대로 고백하기로 했다.

“박 약사. 당신이 나의 약국에 온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온통 그대로 물들었소. 나와 사귀어 주겠소?”

그때, 딸랑 소리가 나며 유리문이 열렸다.

“약국장님, 좋은 아침. 어? 웬 꽃다발? 무릎은 왜 꿇고 있어요?”

그 순간 약국장의 사전 계획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의 뇌리에는 온통 지금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박 약사!”

“네? 왜요? 그 느끼한 눈빛은 뭔데요?”

“사랑하오.”

“네!?”

“이 꽃을 받아 주시오. 내 그대와 행복한 날들을 함께하고 싶소.”

윤정은 난처한 기색이 되었다.

사실 약국장이 전혀 마음에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오빠 말대로 소중한 상대를 골라내 보니, 약국장은 제외였다.

“……저기, 약국장님?”

“이 꽃다발을 받아 줄 때까지 일어서지 않으리다.”

망설이던 그녀는 결심했다. 질질 끌기보다, 단호하게 말해 주는 게 상대에게도 이로우리라 생각했다.

“저기요. 약국장님. 저 남자친구 있는데요? 갑자기 아침부터 왜 이러세요?”

그녀의 대답에, 약국장의 동공이 찢어질 듯 확장되었다.

“박 약사, 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남자친구 있다고요.”

이날 해가 진 오후.

약국장은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다가 술집에 들어섰다. 평생 마시지 않던 술이 오늘따라 너무나 당겼기 때문이었다.

한 잔, 두 잔, 세 잔.

안주 없이 술을 들이켜던 그의 눈동자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박 약사…… 이건 배신입니다.”

그는 돌연 크허헝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술집 손님들이 모두 그를 쳐다봤지만, 약국장은 더 크고 서럽게 울었다.

“박 약사! 어떻게 나를…… 어무이!”

콧물 눈물을 짜내며 엉엉 울던 그가 술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어떡하라고…….”

한참이나 질질 짜던 그가 돌연 자신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 바보 등신 쪼다 같은 놈. 왜 그랬어. 왜?”

* * *

산하네 요리 전문점 유리 벽에는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중 한 여성과 노인이 대화를 나눴다.

“우와, 박 교수님 요리하는 모습 짱 멋있다. 그쵸 교수님?”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신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우리 스승님은 대체 못 하는 게 뭔지. 원.”

“스승님이요?”

“암, 스승님이지. 배움을 주면 스승님 아니냐?”

두 사람은 명성이 자자한 하산해 침구술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몇 년 전 하산해 특별법안이 통과되었고, 하산해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배움의 장이 생겨날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자 각 대학은 하산해를 유치하려 안간힘을 다 썼었다.

그 요란함을 보다 못한 산하는 독립적인 건물 하나를 배움의 장소로 지정했었다.

덜렁 큰 건물 하나였지만, 세간에서는 이곳을 ‘하산해 침구술 대학’이라고 불렀다.

특히 노인은 한의대 명예직 교수이면서, 산하에게 가르침을 청한 학생이기도 했다.

“옳지, 우리 스승님이 보셨다.”

“교수님! 우리 왔어요!”

그들이 손을 마구 흔들자, 산하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아무리 제자라지만, 나이 지긋하신 분이 매번 스승님이라고 하니, 마음 한편이 이상했다.

저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형님, 저 어르신도 학생이에요?”

“학생이라기보다는, 타 대학 교수님인데 뭐 좀 더 배우러 오신 거야. 왜 자꾸 스승님이라고 하셔서는…….”

“그야 형님은 만인의 스승 아니겠습니까? 오오, 위대하고 위대한 자여, 그 이름하여 하산해라.”

“닥치고 양파나 까고 싶어?”

“죄송합니다. 오픈 준비하러 가 볼게요. 나세야, 린다야. 출동!”

만두가 후다닥 도망치려 하자, 산하가 물었다.

“맞다. 너 농사는 잘 짓고 있어?”

“농사요? 병들어서 다 갈아엎었는데요?”

“애지중지 키운 녀석들이라며?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더니, 이거 순 허풍쟁이 아니야?”

“그게요, 형님. 저는 농사에 소질이 없나 봐요.”

“내가 말했잖아. 뭐든 연차가 쌓여야 노하우도 생기고, 숙련돼서 잘한다고. 첫술부터 배부를 일 있냐?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 제대로 살리겠다던 놈 어디 갔어?”

그의 마지막 말에, 봉만두가 가슴을 탕탕 쳤다.

“형님, 이번에는 갈아엎었지만, 저의 이 불타는 마음은 아직도 죽지 않았습니다. 형님 말씀대로 숙련 또 숙련해서, 농군의 아들이 무엇인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예, 봉만두 님. 알아모시겠습니다. 아주 변덕이 죽 끓듯 하지?”

그의 말에, 봉만두는 헤헤 웃기만 했다.

“웃지 마, 정들어. 오픈 준비나 해.”

“옛썰!”

경례를 올려붙인 만두가 오픈 준비를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어!? 비글윤정?”

“뭐? 비글?”

산하가 만두의 시선을 따라갔다.

가게 유리 벽에 들러붙은 윤정이, 손 모양으로 하트를 날리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더 가관인 건, 그 옆에 강상익이 똑같은 모양새로 웃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것들이 이제 쌍으로…….”

“쌍이요?”

“아니야. 넌 오픈 준비나 해.”

“네, 형님.”

한참 후.

조용해진 식당 내부에 상익과 윤정이 산하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래서, 둘이 사귀기로 했다고?”

은근히 애정행각을 벌이던 상익과 윤정이 답했다.

“네, 형.”

“응.”

두 커플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고, 꿀이 뚝뚝 떨어졌다.

“참 일찍도 사귄다.”

“뭐가 어때서? 좋기만 한데. 그치 상익아?”

“네, 누나.”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보고해?”

“형은 꼭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박산하, 알려 주면 고맙다고 해야지.”

“나는 꼭 알고 싶지도 않고, 고맙지도 않으니까 둘 다 썩 꺼져!”

“형, 그래도 우리 커플 온 김에 뭐라도…….”

“맞아. 박산하. 우리 맛있는 거 해 줘.”

“이 한 쌍의 바퀴벌레를 어떡하지?”

“뭐? 바퀴벌레?”

“형, 바퀴벌레는 좀…….”

“됐고, 바퀴벌레약이 남았나? 만두야? 바퀴벌레 약 좀 사 와라.”

봉만두가 질투의 화신이 되어 외쳤다.

“네, 형님. 특대형으로 사 오겠습니다.”

“아, 뭐래. 상익아 가자. 치사하고 드러워서 안…… 아니지, 먹어야 하는데. 빨리해 줘.”

“가라고.”

“형, 오늘 특제요리 간짜장이죠? 사랑합니다.”

“좀 가라고!”

“못 가!”

“맞습니다. 못 가요.”

“아우, 두야. 내가 죄인이다.”

* * *

윤정과 상익이 사귀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게 흐른 어느 날이었다.

“아들.”

“네, 아버지.”

“이번에는 꼭 나가자.”

“선 자리요? 에이, 저 그런 거 안 해요.”

“안 하기는, 사진 못 봤어? 마음에 쏙 들 텐데?”

“전혀요.”

“강상익.”

“네, 아버지.”

“이 아비도 떡두꺼비 같은 손자, 손녀가 보고 싶다.”

“그러니까 빨리 결혼하라는 말씀이시죠?”

“정답이구나.”

“엄마도 아빠랑 생각 같아. 연애도 안 하고, 어쩜 그러니? 설마 혼자 살 생각은 아니지?”

강영신과 김혜윤은 말을 끝내자마자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빨리 여자를 만나라는 압박이었다.

평소와 달리 그 눈빛을 당당히 마주하던 상익이 입을 열었다.

“저 결혼하고 싶은 사람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뭐? 있어?”

“진짜니?”

“네.”

“뭐 하는 사람이니? 나이는? 집안은?”

“어허, 여보. 천천히 합시다.”

헛기침을 한 김혜윤이 입을 닫자, 강영신이 물었다.

“그래, 나이는 몇 살이야?”

“저보다 조금 많아요.”

“많아?”

“네.”

많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영신이 돌변했다. 남의 일은 몰라도 아들 일이 되자, 그는 아주 깐깐하게 따지기 시작했다.

“네가 뭐가 모자라서 나이 많은 사람이랑 만나?”

상익은 평소와 같지 않은 아버지의 태도에 당황했다.

“아버지, 나이 많은 게 어때서요? 차이도 그렇게 크게 안 나요. 저보고 물질이나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김혜윤이 구시렁거렸다.

“나보고 뭐라고 할 때는 언제고, 당신도 똑같구만…….”

“커흠흠, 내가 언제 뭐라고 했나. 그래서 정말 결혼까지 할 생각은 아니지? 그냥 연애해 보니, 결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이거지?”

“할건데요?”

“뭐!?”

“아버지랑 어머니도 아는, 아니다. 본 적은 없으시겠구나.”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아들, 알아듣게 얘기해. 그래서 상대가 누구니? 엄마, 아빠도 아는 사람 딸이야? 이름이 뭔데?”

두 사람은 무척이나 궁금한 듯, 아들의 입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에 상익이 답했다.

“박윤정이요.”

“응? 그게 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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