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맹수 가문의 병아리2021.04.02.
프롤로그 – 악역과 악역이 만나면 마법사들이 모인 탑이라 하여 흔히 ‘마탑’이라 불리는, 그 새카만 탑의 꼭대기 층. 그곳에서 멍하니 창밖을 보던 레냐에게 훤칠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녀는 그 사내, 에이드리언을 향해 옅게 웃어주었다.
“안녕, 에드.”
누구든 홀릴 듯한 미형의 얼굴에 달빛처럼 오묘한 은회색빛 눈동자……. 오늘 같은 날마저도 그는 아름다웠다. 그래서 레냐는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 애타게 원했었는지를.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했었지.’
그의 애정을 단 한 방울이라도 더 얻기 위해, 그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했었다. 그가 이 세계를 사악한 마족들에게 넘기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위해 레냐 자신을 도구처럼 이용하고 있을 뿐이란 걸 다 알면서도, 그랬었다. 그 과거를 떠올리자 눈가가 시큰거렸으나, 에드는 감상에 젖을 시간을 길게 주지 않았다.
“나를 급히 찾았다고 들었어. 드디어 그 여자의 위치를 알아낸 거야?”
그는 자신이 제거하고 싶어 했던 이 세계의 영웅, ‘타라 폰 슈베어트’의 은신처를 곧 알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레냐가 오늘 그를 불러낸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제가 예전부터 쭉 해 오던 생각이 있어요.”
“……?”
“만약, 우리의 삶이 전부 한 편의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고, 우리도 그저 그 소설의 등장인물일 뿐이라면…… 우린 아마 악역이 아닐까요?”
“…….”
그의 미간이 얕게 구겨졌다. 그녀가 엉뚱한 소릴 하니 짜증 난다는 듯이. 평소라면 그 작은 부정적 반응에도 안절부절못했을 터다. 하지만 오늘만은 괘념치 않고 하고픈 말을 다 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정말로 특별한 날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이 땅을 몹쓸 마족들에게 넘기려 하고 있어요. 저는 그런 당신을 사랑해서 한때 친구였던 타라를 바치기로 했고요. 그러니까, 우린 아마 악역일 거예요.”
“레냐……. 내가 널 누구보다 믿고 아끼는 거,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네.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죠.”
‘항상 거짓말이었지만.’
‘항상 거짓말이었지만.’ 레냐는 그 뒷말을 꾹 삼킨 채로 그의 이야길 듣기만 했다.
“그래서 기대했어. 네가 오늘에야말로 타라 폰 슈베어트의 위치를 알려 줄 거라고. 마탑의 주인으로서 떠맡은 업무들을 다 제쳐 두고서 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알고 있어요.”
“그럼 그 일이나 서둘러줘. 사람 하나 찾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고 있잖아. 아니면 혹시…….”
그가 더욱 싸늘해진 음성으로 끊어진 뒷말을 이었다.
“숨겨 주고 있어? 하잘것없는 옛정에 이끌려서……?”
그녀에게 향해 있는 이 은회색 눈동자는 평소엔 아름답다가도, 노기가 담기면 꼭 이렇게 칼날처럼 번뜩였다. 그 점이 그녀는 늘 안타까웠다. 황제가 본인의 아들인 에드를 악마라 부르며 배척했던 건 분명 저 눈빛 탓도 클 것이기에.
“가여운 에드.”
레냐가 문득 그리 말하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덕분에 그도 얼결에 그녀를 마주 안게 되었다. 그렇게 그의 품에 안겨서, 그녀는 흐느끼듯 옅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알고 있어. 필사적으로 악역을 연기해도, 본성은 그렇지 않다는 거.”
“무슨 의미야? 오늘따라 계속 이상한 소릴…….”
“넌 악역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내가… 그 역할에서 해방시켜 줄게.”
그녀를 밀쳐 내곤 타라의 위치나 어서 말하라고 타박하려 했다. 그런데, 품에 안겨있는 그녀의 몸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그가 기시감을 느끼며 그녀를 천천히 떼어 놓은 순간-
“……!!”
레냐가 그의 앞에서 힘없이 허물어졌다. 여태껏 끌어안고 있느라 몰랐다. 이제야 보게 된 그녀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한 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 레냐? 이게 대체……. 레냐……!!”
그의 외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병이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안에는 독약으로 보이는 액체가 남아 있었고, 덕분에 그는 싫어도 그녀가 한 짓을 알 수밖에 없었다.
“뱉어!! 당장!!”
“미안해……. 고민해 봤는데 역시… 타라가 있는 곳은 알려 줄 수 없어……. 나도… 마지막까지 악역으로 남긴 싫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독약부터 뱉어!!”
“그리고 네가 그 애를 죽이게끔 둘 수도… 없어……. 그럼 넌, 진짜로 악당이 되잖아…….”
유언을 마치고서 레냐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점차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새하얀 빛무리가 어른거렸다. 아마, 그가 치유의 마법을 거듭하여 걸어대고 있는 듯했다. 더 오래 써먹고자 살리려는 건지, 아니면 타라를 숨겨 준 것이 괘씸해서 직접 고통스럽게 죽이고자 살리려는 건지, 그의 목적은 그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몸에 맹독이 퍼진 시점에서 이미 누구도 그녀의 생사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아무리 세상의 정점에 선 마법사라 해도 그뿐.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오롯이 신의 영역이었다. 마음의 정리를 진즉에 끝낸 그녀는 살고자 발악하는 대신, 사랑했던 남자의 뺨을 마지막으로 쓸어 만졌다.
‘좀 더 오래 보고 싶었는데.’
제아무리 간절하다 하여도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 그러니 그녀는 다른 것을 바랐다.
‘마음대로 떠났다고 너무 화내진 않았으면.’
이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일지도 모르나, 또 다른 소원을 떠올릴만한 시간은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인지조차 확인 못 한 채로 그녀의 의식은 하얗게 지워지고 말았다.
1. 맹수 가문의 병아리 안 그래도 싸늘하던 북부 공작성의 공기가 더욱 얼어붙었다. 내 아버지이자 이 성의 주인, ‘마테우스 폰 몬트’가 그 냉기의 원인이었다. 제 성질을 못 이겨서 폭발 직전인 그가 시녀와 시종들에게 으르렁대며 되물었다.
“다시 말해 봐라. 내 딸의 정령이…… 뭐라고?”
가여운 시녀와 시종들은 겁에 질려 몸을 떨어 댔다. 전쟁광, 괴물 공작, 북부의 악마…… 그런 흉악한 별명이 잔뜩 붙은 남자가 살벌하게 대답을 재촉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레냐 아가씨의 반려 정령은…… 그게…….”
“꾸물대지 말고 대답해!”
“병, 병아리입니다, 각하!!”
공작의 호통에 놀란 시종 하나가 화들짝 대답했다. 그러곤 공작이 노기 서린 고성을 내지르리라 예상한 듯 어깨를 웅크렸다. 하지만 공작은 소리치지 않고, 오히려 실성한 것처럼 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 내 딸이…… 북부를 지배하는 이 나의 딸이 독수리도 아니고, 매도 아니고…… 병아리라…….”
그의 목소리가 낮아짐과 동시에 방 온도도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정령, ‘12월 얼음 늑대’ 때문이었다. 이미 몇 차례 겪어 본 일이기에 나는 놀라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시작되려고 한다, 광견병 모드.’
이곳 키르쉬 제국의 사람들은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동물 형태의 ‘반려 정령’들……. 그들은 평시엔 누구보다 듬직한 친구지만, 항상 도움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과 영혼으로 이어진 존재이다 보니, 제 반려 인간의 감정이 격해지면 그 영향을 받아서 갑자기 난폭하게 날뛰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를 나는 ‘광견병 모드’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폭주상태’이지만. -크르르르릉……. 어쨌든 광견병 모드가 된 늑대 정령은 냉기를 다루는 제 능력을 발산하여 이곳을 냉동실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꼴을 보고 있으려니 매번 그랬듯 이번에도 퍽 때늦은 후회가 나를 괴롭혔다.
‘후……. 그때 그 텍스트 파일을 열지만 않았어도…….’
내 인생이 이토록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게 변해 버린 것은 정확히 6개월 전부터였다. 6개월 전, 평범한 대학생이던 나는 텍스트 파일이 첨부된 메일 한 통을 받게 되었다. 파일의 제목은 「한 번 멸망한 세계」. 그냥 무시하려다가, 호기심이 동해서 결국 그것을 열었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인가?”
내 예상대로 그것은 서양의 중세에서 근현대시대 즈음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마법, 정령, 신……. 그런 온갖 신비로운 존재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소설. 평소에도 같은 장르의 책들을 즐겨 본 까닭에,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문장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아, 안 돼……! 내일 아르바이트 가려면 지금 자야 해……!”
소설은 읽는 걸 멈추기 힘들 만큼 재밌었다. 첫날밤을 새워 가며 읽어 놓고도, 나는 틈만 나면 폰으로 텍스트를 읽어 댔다. 불가항력이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내 심장을 두드렸으니까. 주인공인 타라와 루카스도 좋았고, 사람들이 동물 형태의 반려 정령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독특한 세계관 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렇게 푹 빠져서 4/5가량을 읽었을 즈음이었다.
“등장인물들이 왜 죄다 죽어 나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내가 좋아했던 인물들이 자꾸만 죽었다. 나는 결말을 확인하고자 더욱 속도를 냈고, 마침내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 냈다.
“이래서 제목이 「한 번 멸망한 세계」였어……?”
소설은 주인공들이 죽고 세계가 멸망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책 내용은 당연히 그것의 제목을 따라가지 않겠는가. 그러니 결말이 그따위인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뭐야, 이게…….”
배신감을 느꼈다. 주인공들이 행복해지는 결말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으니까.
“아니, 다 떠나서 레냐는 뭐가 돼!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이 멸망해 버리면!”
레냐 폰 몬트.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는 그저 어리석은 악역에 불과했다. 제 친구인 타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악당인 에이드리언…… 줄여서 ‘에드’에게 홀딱 빠져, 나쁜 짓에 이용만 당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마저 그런 한심한 악역으로 남지는 않았다.
“타라를 숨겨 주려고 에드 앞에서 독약으로 자결까지 했는데…….”
마지막에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모든 걸 바로잡으려 했다. 굳이 그의 앞에서 죽은 것은, 점점 더 타락해가는 그를 멈추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는 왜인지 그녀가 죽은 이후 더욱 폭주했다. 꼭 마귀에 홀린 것처럼, 그렇게 세상을 파멸시켰다. 자신의 명을 무시하고 멋대로 자결한 레냐에게 화가 났던 걸까? 그의 감정은 소설에 자세히 묘사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너무 불쌍하잖아.”
태어날 적부터 가족들의 냉대를 받으며 태어난 레냐건만, 끝까지 사랑받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다니. 나는 한동안 텍스트 파일을 열어 둔 채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위잉. 위잉. 메일이 왔다는 알림 진동을 듣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곧 확인해 본 메일함에는 정체불명의 텍스트 파일이 또 전송돼 있었다. 「한 번 멸망한 세계 – 리부트」 지금 생각해 보면 퍽 수상한 파일명이었다. 하지만 강한 호기심에 이끌렸던 나는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곧장 그것을 열었다. 그 후 액정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뭐, 뭐야?!”
너무 강한 빛이라 함부로 보면 시력을 잃을까 봐, 한참을 눈 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꺼풀을 열었을 땐, 웬 메이드 복장의 시녀가 내게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레냐 아가씨! 아침이에요! 어서 일어나세요! 오늘은 꼭 열심히 수련해서 정령 소환에 성공해야만 해요!”
요컨대, 나는 그때 「한 번 멸망한 세계」에 와 버린 것이다. 그것도 내가 그토록 가엾게 여겼던 비운의 악역 ‘레냐’의 몸에 빙의한 채로.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웠던 그때를 떠올리자 픽,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나마 다행인가? 행복하게 살던 차에 강제로 끌려온 거면 피눈물 줄줄 흘렸을 텐데, 그건 아니었지.’
원래 세계에서 나는 가족이 없었다. 아빠는 애초에 본 적도 없고, 엄마는 어린 나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사라졌다. 그 외할머니 또한 작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는 작은 원룸에서 혼자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소설에 빙의한 거라 크게 억울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레냐는 나름 비중 있는 악역답게 상당한 미녀이기도 한 것이다. 새하얀 살결이라든가, 공작 부부의 머리 색이 반씩 섞여서 나온 희귀한 분홍빛 모발이라든가……. 여러모로 유전자를 잘 타고난 케이스였다. 여하간 그래서 오자마자 절망하는 대신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열심히 살까? 공작 영애 신분으로 사업도 하고, 에드도 갱생시켜서 세계 평화도 지키고, 잘 살아 보는 거야!”
……하면서 열의에 불탔었다. 다만 그래도 영 받아들이기 힘든 게 있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이었다.
‘내 아버지가 이 인간만 아니었어도 나름 행복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공작은 여전히 내 반려 정령이 형편없다면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진정시키고자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애쓰는 소리도 귓가에 윙윙거리며 들려왔다.
“각, 각하!! 고정하셔야 합니다!!”
“창문에 서리가 끼고 있습니다!!”
“힘을 가라앉히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번처럼 전부 얼어붙고 맙니다!!”
그들의 노력에도 공작은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고, 그에 따라 그의 늑대도 점점 더 폭주해갔다. 이윽고 늑대가 내뿜은 냉기를 못 버틴 유리잔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로 인해 쏟아진 물이 침실 한복판에서 얼어붙어 빙판이 생겼으며, 값비싼 장식품들의 표면에도 서리가 꼈다. 그쯤 되니 나로서도 슬슬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 사람 잡겠네……!!’
이전에도 황실에서 온 서신을 받고 공작이 분노하는 바람에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다. 그 일로 성 곳곳에 고드름이 맺혀, 자칫 인명 사고가 발생할 뻔했던 게 기억났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 하나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쯧, 아껴 둔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하나?’
그의 딸로서…… 아니, 딸에게 빙의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낀 나는 공작을 막고자 나섰다.
“아버지.”
“……?”
휘몰아치던 찬바람이 곧장 멎었다.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내가 빙의하기 전 원작의 레냐는 그를 두려워해서 잘 부르지도 않았으니까. 그는 나를 한참이고 빤히 보다가, 툭 물었다.
“……뭐냐.”
방금까지 그 난리를 피워 놓고 뭔 일 있냐는 듯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은…… 그 와중에 잘생겨서 조금 분했다. 깨끗하다 못해 투명한 은빛 머리카락에, 선명한 푸른 눈이라니. 저런 못돼먹은 아버지가 갖기엔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내 버리면 뼈도 못 추릴 터라, 용건이나 꺼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우선 시종들을 물려 주셨으면 해요.”
공작의 시선이 싸늘했다. 그의 늑대 정령도 제 은빛 털 자락을 뽐내며 함께 싸늘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서 한껏 긴장했으나-
“너희들은 나가 봐라. 어디 들어는 보자, 무슨 변명을 하려는지.”
그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사이에 시종과 시녀들은 도망치듯 후다닥 방을 나가고, 그곳엔 우리만 남게 되었다. 나는 한차례 심호흡 후 입을 열었다.
“저도 이해해요.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거.”
“…….”
“어머니의 목숨과 맞바꿔 태어난 주제에 몸도 약했고, 그래서 반려 정령 소환도 제때 못 했고, 간신히 소환했나 했더니만 이런…….”
나는 내 손 위에서 잠들어 있던 정령, 삐약이를 그의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귀엽지만, 안타깝게도 별 쓸모는 없어 보이는 그 연노란 솜뭉치를.
“이런 작은 정령을 소환했으니까요.”
“……쯧, 그나마 주제 파악은 하는구나.”
한 대 때려 주고픈 말투였다. 내가 원해서 약한 정령을 가진 것도 아니고, 순전히 운이 나빠서 그리 타고난 건데 저따위 말투라니. 우선은 그를 진정시켜야 했기에 화를 꾹 눌렀다.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냐? 강한 정령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한 성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넌 정말 나와 릴리아의 피를 이어받았다곤 믿기 어려울…….”
“그래서, 아버지께서 전에 말씀해 주셨던 그 ‘정략혼’이라는 걸 받아들일까 해요.”
“……?!”
그가 이젠 길 가다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얼굴이 되었다.
‘놀랐나 보네. 하긴, 죽어도 정략혼만은 안 된다고 버텼었으니까.’
내가 빙의하기 전의 레냐는 공작 앞에서 조용하고 온순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절대!’ 할 수 없다고 버티던 게 있었는데, 바로 정략결혼이었다. 딸이 제 말을 무시하니 화가 난 공작은 레냐를 더 냉대하고, 참다못한 레냐는 전쟁터로 도망치듯 가 버린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본인과 똑같은 악역, 에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난 원작의 레냐처럼 되긴 싫거든.’
그녀처럼 정략혼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보단 차라리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사라져 드릴게요. 원하셨던 대로.”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냐.”
저 인간에게서 도망치고픈 마음+원작 내용대로 세계가 박살 나기 전에 빨리 에드를 막아야겠다는 생각. 이렇게 두 가지가 합쳐져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저도 아버지께 더 고통 드리긴 싫으니까요. 안 그래도 꼴 보기 싫던 딸이, 약한 정령까지 갖게 됐으니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시겠죠.”
“…….”
“그러니 아버지를 위해서도,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 저는 떠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이상하게도 공작은 기뻐하는 기색 하나 없이 침묵했다.
‘왜 대답을 바로 안 하지? 시집가라고, 가라고, 아주 노래를 부르더니.’
하도 그래서 나도 정략혼을 내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뒀었다. 나중에 실수로 사고라도 치면 ‘용서해 주세요! 대신 정략혼 할게요!’ 하며 만회할 수 있을 테니까. 그의 폭주를 막고자 나름 큰맘 먹고 그 카드를 꺼낸 것이건만…….
‘딸이 알아서 순순히 나가 준다니까 갑자기 부성애에 눈이라도 떴나? 지금 와서?’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속으로 비아냥대고 있을 때였다.
“알겠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보내 주마. 생각해 둔 상대라도 있느냐?”
“네. 누구를 택해야 가문에 도움이 될지 깊이 고민해 봤는데…….”
그의 눈치를 보면서 슬쩍 꺼내 들었다. 내가 정략혼 하고자 하는 그 남자의 이름을.
“에이드리언 황자님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