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악당과 결혼해도 될까요?2021.04.06.
에드의 마음을 열고 그를 갱생시키려면, 무엇보다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쉽게 믿지 않았으니까. 정략혼을 통해 그의 그 가까운 존재…… 즉, 아내가 되기로 한 건 그래서였다. 거기까지가 내가 정략혼 상대로 그를 택한 실질적인 이유였고, 감정적인 이유는 또 따로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마음이 쓰이던 캐릭터 중 하나였지, 에이드리언도.’
「한 번 멸망한 세계」, 줄여서 「한멸세」를 읽었을 때, 에드는 내가 레냐 다음으로 마음을 줬던 캐릭터였다.
‘괜히 불쌍하단 말이야? 사연 있는 나쁜놈이라 그런가?’
어쨌든 레냐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에드의 운명을 바꿔 주고 싶었다. 그녀가 목숨을 내던졌음에도 끝내 구원하지 못했던 그의 마음을 나라도 구원해 주고 싶었다.
“……뭐?”
에드를 결혼 상대로 원한다는 내 말을 듣고서 공작이 뱉은 대답은 그것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죽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남편감 고르는 눈마저 형편없구나.’ ……하고, 속으로 욕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공작의 못됨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걸.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남편감 고르는 눈마저 형편없구나.”
공작은 듣는 상대를 배려해서 ‘속으로만’ 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놓고 그리 말한 거로도 모자라, 내 지식수준을 의심하는 듯한 물음까지 이어서 던졌다.
“골라도 왜 하필……. 너, 에이드리언 황자가 어떤 처지인지는 아는 거냐?”
“알아요. 그분께서 정실인 황후 마마의 피를 잇지 못한 것, 다 알고서 결정한 거예요.”
“…….”
에드는 그 말대로 황후의 자식이 아닌…… 속된 말로 사생아였다. 심지어 황제와 마족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 하프 마족이기도 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평범한 인간으로 알려졌지만 말이다. 여하간 그래서인지, 공작이 에드를 본능적으로 찝찝하게 여겼다는 묘사가 원작에서도 몇 번 나왔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마음에 안 드나? 반대하는 거 아니야?’
그가 에드 황자만은 안 된다고 날뛰면 내가 기껏 세워 둔 계획이 전부 틀어지고 만다. 초조해진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실지도 모르지만, 그와 혼인하면 가문에 정말로 큰 득이 될 거예요. 아버지의 충성심을 폐하께 보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설득할 필요 없다. 마음대로 해라.”
그는 본인의 옷자락을 멋들어지게 펄럭이며 휙 나가 버렸다.
‘생각보다 쉽게 허락하네? 왠지 마음에 안 든 눈치였는데…….’
공작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혼자 넓은 방에 덩그러니 있으려니, 냉기가 새삼 뼛속에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어휴, 춥다.’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북부의 찬 공기도, 쓸데없이 넓은 이 성도, 그리고 내 아비라는 작자도……. 왜인지 오늘따라 너무나 차갑게만 느껴졌다. * * * 다음 날, 황성에 서신을 보냈노라고 공작이 통보해 왔다. 물론 나와 에드의 혼인을 추진하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황실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곧 에드와 만나게 될 터였다. 레냐의 마음을 이용하면서까지 세상을 부수려 했던 황자, 에이드리언 폰 베르크……. 이 세계의 악역인 그를 조만간 만나서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그때까지 손 놓고 놀 순 없지.’
이곳은 나 같은 조무래기 악역에겐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세계가 아니던가. 마음 좀 뒤숭숭하다고 해서 마냥 넋 놓고 있다가는 어느새 쓱싹 죽어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자투리 시간을 능력 개발에 이용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성력이라도 열심히 키워야 해. 내 정령이 삐약이인 이상 공작처럼 강한 정령 기사가 되는 건 힘드니까.’
다행히 레냐가 그 ‘성력’이라는 힘 하나는 쓸만하게 타고난 편이었다. 신관들의 나라인 예르타 신성국에서 온 레냐의 모친, 릴리아가 불치병으로 죽기 직전에 내린 과감한 결정 덕분에.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목숨. 내 아이를 위해 쓰겠어요.”
그녀는 주술로써 자신의 남은 생명을 성력으로 바꾸어 레냐에게 심고자 시도했고, 심지어는 그에 성공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레냐는 성력… 즉, 타인을 치료하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릴 적엔 그 힘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작은 주술이 실패했다고 판단, 레냐의 성력 개발을 돕지 않았다. 그 결과 그녀는 힘을 아깝게 썩히기만 했었다.
‘일찌감치 성력을 개발해 두면 원작 레냐랑 다르게 신관으로 대우받게 될지도 몰라.’
어차피 정령을 가진 건 제국인들만의 특성이라, 제국 밖엔 아예 정령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예르타 신성국 같은 곳으로 이민 가서 쭉 신관으로 살면 정령 때문에 차별받을 일도 없을 듯했다. 판단을 마친 나는 소설 원작에서 본 ‘성력 개발 명상법’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랬더니 과연, 심장 부근에서 신비로운 힘이 느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데……? 그래도 신관들 사이에선 이 정도가 평균이겠지?’
남이 내 성력을 측정해 준다면 얼마나 편할까 싶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자신의 성력을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 그래서 내 성력이 타인들에 비해 어떤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레냐의 가녀린 몸과 어울리지 않는 강한 힘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고된 삽질 끝에 금맥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곧장 좋아졌다. 그때였다.
“레냐!”
레냐에게는 공작 말고도 가족이 두 명 더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닉 오빠?”
평소엔 공작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잘 정돈돼 있던 첫째 오빠 ‘니콜라스’의 은발이 꼭 새집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급히 달려온 모양새라 그가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아버지에게서 들었어. 너…… 에이드리언 황자랑 혼인하겠다고 했다며? 그게 사실이야?”
나를 보는 니콜라스의 눈동자에서 따뜻한 애정과 걱정의 기운이 느껴졌다. 공작도, 니콜라스도, 눈동자 색은 똑같이 푸른색이지만 그것이 품은 온도는 전혀 달랐다. 니콜라스의 따스한 푸른색을 볼 때마다 내가 매번 신기하게 여기는 점이었다.
“응. 사실이야, 오빠.”
“대체 왜……. 넌 아직 스무 살 어린애야. 결혼은 너무 이르잖아.”
스무 살 어린애라니.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무심결에 살풋 웃고 말았다.
“날 어린애로 보는 건 오빠뿐일걸? 보통은 열여덟 이전에 혼처가 정해지잖아. 난 오히려 늦은 편이지.”
“하지만…….”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가 여기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시기도 하고…… 그냥 내가 나가는 게 모두에게 좋아.”
공작이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닉도 물론 잘 알았다. 그래서인지 내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긴 한숨만 흘렸다.
“가여운 것…….”
동정심 깃든 목소리에 나까지도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새 닉 오빠한테 정들었나? 왜 이렇게 안쓰러워 보이고 난리인지…….’
내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닉 또한 내게 위로를 건넸다.
“이미 백번도 더 한 말이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주술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떠나셨겠지. 오랜 지병으로 전부터 편찮으셨으니까. 그러니 괜히 죄책감 때문에 그런 결정 내린 거면…… 안 그래도 돼.”
“하지만 아버지께선 그렇게 생각 안 하시잖아.”
“…….”
“아버지한텐 어머니가 세상 전부였는데 그 전부를 나 때문에 잃으셨어. 내 얼굴 볼 때마다 힘드시겠지. 다 이해해. 그래서 나가려는 거고.”
나는 그가 고갤 돌리고서 본인의 젖은 눈가를 닦는 걸 모른 척했다. 눈가를 닦은 뒤, 그는 내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그래도 네가 원치도 않는 결혼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아버지를 위해 집을 나가고 싶은 거면…… 차라리 내가 도와줄게.”
“아니야. 정말로 원해서 결혼하기로 한 거야. 이미 결정했어.”
흑막, 에이드리언을 막으려면 그의 가장 가까운 이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정략혼은 그걸 위한 너무도 좋은 기회였다. 그 기회를 내가 스스로 날려 버릴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서 닉 오빠의 권유는 거절했지만, 그의 마음만은 내게 확실히 와닿았다.
‘진짜로 오랜만에 느껴 보네. 가족의 정이라는 거.’
나를 키워 주셨던 외할머니를 잃은 후로 쭉 싸늘히 식어 있었던 마음이 덕분에 따끈해졌다. 그리고 나는 작게나마, 그에 보답하기로 했다.
“그보다 내 정령 안 궁금해? 엊그제 처음으로 소환됐는데.”
“들었어. 작은 병아리라며?”
“아버지는 강한 정령이 아니라고 아쉬워하셨는데, 그래도 난 삐약이가 좋아. 엄청 귀엽거든.”
즉시 그에게 삐약이를 보여 주려 했다.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정령을 정령계에서 다시 불러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정령들은 본래 정령계라는 곳에서 태어나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자신과 영혼으로 이어진 인간의 힘을 빌려, 인간계에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혹시라도 공작의 험상궂은 늑대 정령이 삐약이를 한입에 삼킬까 봐 무서웠던 나는 지금껏 삐약이를 그 정령계로 ‘소환 해제’해 두었다. 지금까지 쭉. 즉, 나는 공작이 방문했던 시각 이후로 삐약이를 한 번도 소환해 보지 않은 셈이었다.
‘그냥 나타나 달라고 속으로 부탁하면 되려나?’
그리 생각한 나는 속으로 열심히 부탁했다. 하지만 삐약이는 제 솜털 끝자락 하나 보여 주지 않았다. 기다리던 닉 오빠가 이윽고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무리할 필요 없어. 소환 성공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아직 어려울 거야.”
“아니야, 잠깐만 기다려 봐.”
나는 더욱 간절하게 삐약이를 불러 댔고, 그 순간 허공에 빛으로 이루어진 작은 터널이 생겨났다.
“됐다!”
나는 정령계와 이어진 통로에서 튀어나온 삐약이를 보며 반가움에 젖었다.
‘내 부름을 듣고 와 줬어! 그런데…… 삐졌나?’
나타난 삐약이는 내 주위를 뺙뺙대고 뛰어다니면서 성을 냈다. 아무래도 그녀를 정령계에 박아 두기만 한 까닭에 화난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열심히 사과했고, 그녀도 곧 화를 풀곤 내 뺨에 솜털을 마구 비볐다.
‘휴……. 쉽게 풀어지는 단순한 삐약이라 다행이야.’
우리의 재회를 지켜보던 닉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곤 제 손끝으로 삐약이의 뺨을 톡, 찔렀다.
“네가 내 동생의 정령이구나?”
―삐약! 뺙!! 삑삑!!
“이, 이런…….”
닉이 심각한 표정으로 휘청거렸다. 그러곤 삐약이를 조심스럽게 제 손에 올렸다. 문득 불안해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래? 내 삐약이한테 혹시 문제라도 있는 거야?”
손 위의 삐약이를 뚫어지게 관찰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본 정령 중에서 가장 귀여워.”
“…….”
너무 자그마해서 얼마 못 살고 소멸한다든가, 어디가 아픈 거라든가…… 그런 등등의 심각한 문제라도 있는 줄 알았다.
“놀, 놀랐잖아……. 삐약이한테 문제 있는 줄 알고.”
“미안, 너무 귀여워서…….”
긴장이 풀리며 내 입에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음?”
닉이 삐약이를 보다가 또다시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굴었다. 방금 속아 넘어갔던 까닭에 이번엔 나도 긴장하지 않았다.
“또 귀엽다고 하려고? 나 심장 약하니까 장난치지 마.”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닉의 입에서 ‘귀엽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진짜로……?’
그런 걱정이 될 즈음 비로소 닉 오빠의 입이 열렸다.
“분명 병아리라고 했지, 이 아이?”
“응. 작은 부리도 있고, 솜털도 병아리처럼 노란색이니까…….”
“조금 다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