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2021.04.09.
닉의 말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의미지? 소설 원작에서도 레냐의 정령은 병아리였는데? 아니, 병아리라고 정확히 언급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레냐의 정령이 맨 처음 묘사됐던 구절을 떠올려 보았다. 재미있게 읽은 소설인지라 다행히 뚜렷하게 떠올랐다. [레냐가 수줍게 뺨을 붉히며 정령을 소환했다. 그러자 검은색 콩알 두 개가 박힌, 작은 솜뭉치가 나타나 일행의 곁을 맴돌았다. 병아리를 닮은 생김새였다.] 나는 비로소 “아!” 하고 반사적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병아리라고 하진 않았어! 병아리를 닮았다고만 했었어!’
레냐가 삐약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삐약이가 등장하는 장면은 저게 끝이었다. 그러니 삐약이가 병아리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는 셈이었다. 하지만 병아리 외의 다른 새라고 보기엔 좀 이상해서, 넌지시 닉에게 물었다.
“병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근데 아무리 봐도 생김새가…….”
“병아리는 이렇게 눈이 크지 않아. 게다가 부리도 더 뾰족하지. 병아리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조금 달라.”
나는 다시금 삐약이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아아, 그러네. 잘 보니까 병아리라기보단 노란 뱁새……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조류 전문가를 불러 보는 게 좋겠어. 내 생각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의 새가 아닌 것 같아.”
정령의 색은 말도 안 되게 제각각이지만, 형태만은 그렇지 않았다. 반드시 세상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동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류학자라면 삐약이가 무슨 조류인지 알 터. 닉은 내게 삐약이를 넘겨주며 말했다.
“내가 내일 학자를 불러 줄 테니까, 정확히 확인해 두자.”
“응. 부탁할게.”
전문가를 부르는 것으로 결정이 나고, 닉은 내 방에서 떠났다.
‘병아리가 아니었다니……. 원작 속 레냐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조금만 생각해 보자 나왔다.
‘아니, 몰랐을 거야. 그러니까 삐약이를 성장시켜 보지도 않고 그대로 놔둔 거겠지.’
정령은 그 주인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크게 성장한다. 그러나 원작에서 삐약이는 계속 ‘작은 솜털’로만 묘사되었다. 레냐가 삐약이를 전혀 키우지 않은 것이다. 병아리를 키워 봤자 닭이 될 뿐이라고 여겨서 내버려 둔 게 분명했다.
‘원작 레냐는 여러모로 운이 없구나. 나처럼 닉에게 정령을 보여 주기만 했어도 병아리가 아니란 걸 금방 알아챘을 텐데……. 부끄러워서 숨기기만 했나 봐.’
평생 제 정령을 병아리로 알고 살았을 그녀가 새삼 안쓰러웠다.
‘나라도 삐약이 정체를 알게 돼서 다행이다. 레냐 몫까지 잘 돌봐 줘야지.’
나는 절대 삐약이를 정령계에 처박아만 두지 않으리라. 그리 결심하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다시 번쩍, 떴다.
‘잠깐, 그런데 정말 다행인 거 맞나? 오히려 더 상황이 나빠지는 거 아니야?’
나는 내 정령이 독수리 새끼일 경우를 떠올려 보았다. 독수리라면 제법 강한 정령이었다. 적어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숨길 정령은 아니었다.
‘공작이 레냐를 대충 치워 버리려고 한 건 정령 탓도 커. 레냐의 정령을 부끄럽고 쓸모없게 여겼으니까. 그런데 쓸모없는 정령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면……?’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주먹에 나도 모르게 힘이 꽉 들어갔다.
‘나를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들지 않을까? 쓸모 있는 도구를 굳이 아무렇게나 버릴 필요는 없으니까. 어쩌면…… 내 정략혼 상대를 고르는 일에도 간섭하려 들지도 몰라!’
쓸모 있는 물건은 비싼 값에 팔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당연한 마음. 공작도 그런 마음이라면, 나를 사생아인 에드보단 차라리 황태자랑 결혼시키고 싶어 할 터였다.
“안 돼!”
멍청하고 쓸모없는 딸로 보여야 공작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즉시 나는 문을 벌컥 열고 외쳤다.
“오빠!!”
다행히 닉은 아직 몇 걸음 못 간 상태였다. 복도 끝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말고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응? 레냐?”
“생각해 봤는데, 내일 학자 안 불러도 될 것 같아.”
“……? 아깐 부르자고 하지 않았어?”
“아직 내가 정령 소환에 서툴잖아. 학자까지 불러왔는데 소환 못 하면 너무너무 창피할 것 같아.”
뭘 그런 걸로 걱정하냐는 눈치라서 나는 급하게 이유를 덧붙였다.
“그리고 막상 알아봤는데 뭐 참새, 비둘기, 이런 거면 어떡해? 그럼 아버지가 듣고서 더 실망하실 텐데.”
“아…….”
“알았지? 내가 알아서 알아볼게. 일단 학자 부르지 말아 줘.”
“으음, 알았어. 그렇게까지 싫다면야.”
닉은 내 뜻대로 학자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하곤 비로소 서쪽에 위치하는 자신의 성으로 돌아갔다. 삐약이가 비둘기든 아니면 공작새든, 일단 공작에게 알려지는 것만은 피한 셈이었다.
“휴…….”
비로소 나는 참았던 한숨을 푹 내쉴 수 있었다. * * * 마테우스는 언제나 그러했듯 본인의 집무실에서 공작으로서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다소 지루하면서도 평화로운 오후가 그대로 쭉 계속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꺄악!!”
집무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청소하던 하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마테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창가를 살폈다. 역시나 초록색 매 한 마리가 편지를 물고서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매번 이런 식이지.’
그 초록색 매는 ‘봄의 에메랄드’라고 불리는, 황제의 정령이었다. 황제의 정령은 매번 이렇게 창문을 와장창 깨 버리며 서신을 가져오곤 했다.
―크르르릉…….
마테우스의 정령이 황제의 정령을 보며 으르렁댔다. 당장 저 건방진 매를 한입에 삼켜 버리고 싶다는 듯 그 기세가 흉흉했다. 마테우스는 그런 늑대를 진정시키곤, 여전히 놀란 것처럼 보이는 청소 하녀에게 명령했다.
“너는 나가 봐라. 다친 곳이 있으면 치료사에게 가 보고.”
“예? 예. 감…… 감사합니다, 각하!”
갑작스레 깨진 유리창 앞에서 떨고 있던 하녀는 그의 명령에 따라 장소를 벗어났다. 그 후 마테우스는 자신의 충실한 노집사, 루드비히를 불러서 함께 서신을 열어 보았다.
“후…….”
서신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마테우스의 입에서 두 번째 한숨이 새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에이드리언과 레냐를 혼인시키자는 요청에 대한 황제의 대답은 ‘일단은’ 긍정적이었다. 다만 조건이 붙어 있었다.
‘혼인을 허락할 테니, 소울스톤 광맥을 정화하라고? 게다가…… 거절은 받지 않겠다고?’
소울스톤은 간단하게 말하여, 생명력을 지닌 광물을 뜻했다. 그 생명력을 사용하면 정령의 힘을 크게 키울 수 있는 까닭에 몹시도 고가에 거래되는 광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소울스톤이 채굴되는 광산을 누군가가 마력으로 오염시키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었다. 황제는 결혼을 허락해 주는 조건으로 그 오염된 광산 처리를 그에게 맡긴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마침 그와 함께 편지를 확인한 루드비히가 그 문제를 짚었다.
“외람되오나, 폐하께서 정화를 명령하신 웨스틸 광산은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소울스톤 광산입니다.”
“그렇지. 나도 안다.”
“그렇다면 이런 광활한 오염지를 정화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신관이 제국에 존재할 리 없다는 것 또한 아실 것입니다.”
그 말대로, 황제의 명령은 마테우스만의 힘으로는 실현 불가능할 만큼 까다로웠다. 신관들의 나라인 예르타 신성국… 그곳의 교황 정도 되는 인물을 모셔 와야 간신히 해결이 될까 말까 한 문제였다. 루드비히는 거기에 덧붙여 말했다.
“광산을 정화하면 그 소유권을 각하께 넘기겠다는 것도, 그리고 아가씨와 황자 전하의 혼약을 허락하겠다는 것도, 실패할 게 뻔하니 하신 약속일 테지요.”
그것도 물론 아는 사실이었다. 참지 못하고 마테우스는 이를 빠득 갈았다.
‘결혼시키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할 것이지.’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내건다는 것은, 결국 혼인을 불허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황제의 이러한 방식의 거절은 불쾌함을 넘어, 다소 굴욕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때 루드비히가 차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각하. 이 늙은 집사가 감히 유추해 보건대, 폐하께서 실현 불가능한 명령을 계속 내리시는 이유는…….”
“그래. 내게 고통을 주려는 목적인 거지.”
“……예, 그러니 이런 식의 억지스러운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경히 알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평소엔 말을 아꼈던 루드비히지만, 이번만은 용기 내어 과감하게 조언했다. 언제나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뻔한 조언을.
“각하께선 황실의 부당한 억압을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지요. 그런데도 매번 폐하의 명령에 휘둘리는 것은…… 사실상 자학이 아닙니까?”
노집사의 말은 여전히 틀린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마테우스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향긋한 허브차로 입가를 적셨다. 찻잔을 반 정도 비워냈을 즘에야 비로소 그는 켜켜이 쌓여 가던 침묵을 끊었다.
“그러나 그대도 알 것이다. 나는…… 나는 이렇게라도 속죄해야 한다.”
“각하……. 그때의 사고는 각하께서 속죄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니. 전부 내 죄이고, 내가 속죄해야 할 일이다.”
마테우스는 루드비히의 주장을 단호한 목소리로 일축했다. 그러곤 자신의 뒤에서 묵묵히 버티고 선 늑대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정령과 정령사는 영혼으로 이어진 존재……. 고로 나의 정령이 저지른 죄는 내 죄이기도 하지.”
12월 얼음 늑대는 마테우스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족과의 전쟁 당시 그가 송곳니에 묻혔던 무고한 이들의 핏자국은 물론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죄책감만은 여전히 남아서, 마테우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신관을 구해 봐야겠군. 다만, 상황이 어려워졌단 걸 일단 알려는 줘야겠지.”
“레냐 아가씨께 말씀을 전해 드릴까요?”
“그래. 걔가 원하던 놈이랑 만나는 건 쉽지 않게 됐다고 말을…….”
그때였다. 공작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레냐가 벌컥 들어왔다.
“아버지, 아까 황제 폐하의 정령이 창문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혹시 제 혼인에 관한 답변이 벌써 왔나요?”
공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만이지? 내게 직접 찾아온 게.’
지금까지의 레냐는 그를 피해 왔었고, 그도 레냐를 구태여 만나려 들지 않았었다. 엊그제 레냐가 처음으로 정령을 소환했단 소릴 듣고 찾아간 것도 거의 한 달 만의 만남이었다.
‘역시, 요즘 뭘 잘못 먹은 게 분명해.’
안 하겠다던 결혼을 갑자기 한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오늘 이렇게 갑자기 불쑥 온 것도 그렇고……. 어딘지 콕 짚어 말하긴 어렵지만 변했다. 그의 딸은. 그는 기시감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 방금 받았다. 그런데…….”
“혹시 소울스톤 광맥을 정화하면 혼인을 허락해 주겠다고 적혀 있었나요?”
“……?!”
이번에야말로 공작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레냐는 무언가 고민하듯 머뭇대더니, 곧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폐하께서 그 문제로 골치깨나 썩이고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소문? 어디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하튼, 그런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