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악당이 젠틀하면 멋짐이 폭발2021.04.16.
응접실에 도착한 직후, 우리는 함께 마주 보며 앉았다. 마침내 에이드리언을 눈앞에 둔 상황.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분주하게 차후의 계획을 떠올렸다.
‘일단은 친절하되, 우습게 보여서는 안 돼. 우습게 여겨지면 원작에서처럼 또 이용하려고만 들 테니까.’
원작의 레냐는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했었다. 그 결과 신뢰를 살 수는 있었지만, 결국엔 ‘믿음직한 도구’로 취급받았을 뿐이었다.
‘와라!! 무슨 질문을 던지건 완벽하게 받아쳐 주마!!’
그리 마음먹기가 무섭게, 그에게서 첫 질문을 받게 되었다.
“공작의 목적이 뭐지? 혼인 상대로 나를 고른 목적 말이야.”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물을 줄이야. 가식적인 인사치레는 건너뛰고 목적이나 어서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소 난감했으나, 다행히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책도 준비해 두었다.
“아니요. 잘못 알고 계세요.”
“……?”
“전하를 반려로 선택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저예요.”
“네가 나를……?”
“네.”
나는 그리 말하고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내가 그저 아버지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는 인형이 아니라는 걸 각인시켜야 했다. 그가 공작이 아닌, 나를 파트너로 여길 수 있도록 아주 확실하게.
“전하를 반려로 고른 것도, 이곳으로 초대하기로 한 것도 전부 저였어요.”
“흐음…….”
비로소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래? 의외네. 말을 잘 듣는 딸처럼 보였거든. 게다가 좀 어려 보이고.”
“이래 봬도 스무 살 성인이니까요. 삶의 반쪽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 충분한 나이죠.”
말을 마치고서 나는 스스로 조금 뿌듯해했다. 내가 마냥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럴 나이가 지났다는 것도 확실히 드러냈으므로. 그랬건만…….
‘웃잖아? 혹시 어린애처럼 생긴 주제에 어른처럼 군다고 비웃는 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레냐는 갓 스무 살이 된 터라, 아직 얼굴에 앳된 기운이 남아 있었으니까. 더 똑 부러진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각오하기가 무섭게, 기회가 왔다.
“그럼 네게 물을게, 날 선택한 이유.”
많은 단어가 생략돼 있지만, 그가 궁금한 건 정확히 이것일 것이다.
‘몬트 공작가의 하나뿐인 딸이 황태자 말고 반쪽짜리 황자를 고른 이유.’
공작 영애로서 황태자와의 혼인도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위치의 내가 황자에 불과한 그를 고른 이유가, 그는 궁금할 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내 아부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였다.
“전하로부터 빛나는 미래를 봤으니까요.”
“흠?”
“에이드리언 전하께는 훗날 위대한 업적을 이룰,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어요.”
나는 그가 나중에 마탑의 주인으로 군림하며 흑마법에까지 손댄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강력한 힘으로 제국을 주무르다가, 결국엔 무너트리고 만다는 것도. 그러니 그의 잠재력을 살폈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넌 그 잠재력으로 못된 짓만 할 거고, 난 그걸 전력으로 막을 생각이지만.’
속내를 은밀히 감추며 웃자, 그도 비로소 비웃음이 아닌 진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내가 영애를 너무 어리게만 본 모양이야. 하는 얘길 들어 보니 사람 마음 움직이는 방법을 꽤 아는데?”
“아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단지 남들은 보지 못한 전하의 감춰진 능력까지도 살폈을 뿐이에요.”
“예를 들어?”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원작에서 에드가 남몰래 추진했던 일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자면, 브리에튼 지역 땅을 매입하신 것?”
“……!”
“그 땅은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져 쭉 방치되고 있었어요. 오직 전하만이 그 가치를 알아보신 뒤, 과감한 투자를 진행하셨죠.”
“…….”
“그 결과 그곳은 훌륭한 관광지가 되어, 전하께 많은 이득을 안겨 주고 있고요.”
그는 내가 긴말을 이어갈 동안 한 번도 입 열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다들 전하께서 ‘우연히’ 행운을 쥐었다고만 생각하죠. 안 그래도 슬슬 진가가 드러나던 땅인데 우연히 때맞춰 투자하신 거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전 그게 우연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연이 아닌 실력이었을 테니까요.”라고, 마지막으로 덧붙이곤 찻물로 입술을 적셨다. 이제 그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완전하게 진지해진 얼굴로 나를 대했다.
“……상상 이상인걸? 정말…… 대단해.”
그리 중얼거리며 그가 찻잔을 툭 내려놓았다.
“당연하지만 여기 오기 전, 영애에 관해 미리 알아봤어. 크게는 사교계 소문, 작게는 소소한 취미까지 말이야.”
그가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내 쪽으로 숙였다. 관심을 기울이듯, 나를 가까이에서 응시하는 에드 앞에서 잠깐 심장이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유려히 움직이는 모습이 유독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특별한 건 발견하지 못했었거든.”
“……전 대외적으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그래서 이 정도 통찰력을 지녔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지. 덕분에 영애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어졌어.”
‘깊이’ 알고 싶다고 했다, 나를. 그제야 마침내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매력적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상대가 넘어오는지도 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냐를 이런 식으로 휘둘렀겠구나.’
그는 레냐의 마음을 이렇게 멋대로 휘어잡고, 마음껏 휘두르고, 그런 주제에 자신은 작은 애정 한 조각 그녀에게 주지 않은 것이다. 참 치사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질 순 없지.’
나는 그의 미남계에 걸려들지 않고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오히려 그의 허를 찌를 생각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
그가 놀란 게 느껴졌다. 여태껏 황자의 손을 이리 대놓고 붙잡은 이는 없었을 테니까.
“저를 알고 싶다고요?”
“……영애?”
“그럼 혼인을 받아들이고 저를 취하세요. 제 깊은 곳까지 기꺼이 알려 드릴 테니까.”
내 파격적인 제안에 에드의 동공은 잘게 흔들렸다. 에드를 너무나 소중히 여겨서 그의 옷자락조차 함부로 붙잡지 못했던 원작의 레냐가 이 모습을 본다면…… 아마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녀처럼 그를 애지중지 모실 생각이 없었던 나는 붙잡은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저와 혼약을 맺으신다면 전 전하를 돕고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전하의 목표가 무엇이든지 말이에요.”
“……그렇게까지 날 도와서 영애가 얻는 건? 영애의 이득 말이야.”
“전하의 이득이 곧 저의 이득이 되겠죠. 저의 이득은 곧 전하의 이득이 될 것이고요. 원래 결혼이란 게 그런 것 아니던가요? 동등한 파트너로서 한배에 탑승하는 것 말이에요.”
혹시라도 그가 나를 수상히 여기지 않도록 나는 미소를 만면에 피워 올렸다. 전생에 서비스업을 하며 단련된 이 미소야말로 내 최대 무기였으니까.
“뭐, 굳이 제 이득까지 챙겨 주고 싶으시다면… 전 급할 때 현금으로 쓸 수 있는, 반짝이는 것들이 좋답니다.”
내 마지막 말에 그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큭큭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기억해 둘게,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거.”
“감사해요, 전하. 그래서…… 저와 한배를 타실 건가요?”
그에게서 결혼에 대한 확답을 들으려던 차였다. 타이밍 나쁘게도, 공작이 마침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아니. 상관없어. 레냐가 즐거운 대화 상대가 돼 줬으니까.”
“……?”
황자가 화도 내지 않고 나를 ‘레냐’라고 부르니 공작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이미 놀란 듯했는데, 에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공작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대화해 본 결과, 우리 뜻이 일치한다는 걸 알게 됐어.”
“그 말씀은…….”
“그래. 레냐와 혼인으로 맺어지고 싶다는 뜻이야. 내 아버지 뜻이 어떻든 간에.”
공작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게 내가 앉은 자리에서도 보였다. 본인의 새 사윗감을 달갑게 여기는 눈빛이 전혀 아니었다.
‘아니, 싫어도 일단은 반기는 척해야 할 거 아냐.’
내가 나서서 한마디 하려던 때, 공작이 역시나 떨떠름한 말을 뱉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내거신 조건이 있습니다. 웨스틸 광산을 정화해야만 혼인을 허락한다고 하셨죠.”
“아, 그 소울스톤 광맥 말인가?”
에이드리언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시원스러운 태도로 툭 대꾸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공작은 결혼식 준비에 신경 써 줬으면 좋겠어.”
“…….”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광산에 대한 건 에드가 전부 해결해 줄 거야. 왜냐면 에드는…….’
내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눈앞으로 불쑥, 곱고 섬세하면서도 한편으론 남자답게 단단해 보이는 손끝이 내밀어져서였다.
“레냐. 이제 쉬고 싶은데, 방으로 안내해 줄래?”
“아? 네, 안내해 드릴게요.”
그렇게 우리는 망연자실해진 공작을 두고서 함께 응접실을 나서게 되었다. * * * 에이드리언은 레냐의 안내를 받아 귀빈실로 안내됐다. 모든 게 부족함 없이 준비된 방이었다. 꽃병에 꽂혀 있는 장미마저도 오늘 꽂아 둔 듯 싱싱했다. 그는 그것의 부드러운 꽃잎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공작……. 혼인을 제안하는 서신을 먼저 보내오긴 했지만, 역시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어.’
처음에는 공작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부른 줄 알았다. 황제가 공작을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어쩌면, 힘을 합쳐 나라를 뒤집자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오만한 서신을 받고도 꾸역꾸역 걸음 하여 찾아왔건만, 간만에 그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정말로 그 애가 모든 걸 추진한 건가?’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밝히던 레냐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전하를 반려로 선택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저예요.”
그 작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가 말했다. 본인을 지켜 줄 평생의 반려로 에이드리언 자신을 선택했노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는 퍽 생소한 감각을 느꼈었다.
‘기껏 선택해 줬는데 실망하게 할 순 없지. 내게 상당히 도움 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는 레냐의 드레스를 떠오르게 하는 푸른 장미를 계속해서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자신의 능력을 단번에 알아본 그녀가 신기했고, 조금은 고마웠다. 그러나…….
‘물론 내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그땐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겠지만.’
오랜 기간 그의 마음을 갉아먹어 온 어둠은 쉽게 사라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 처음 본 레냐가 갑자기 그를 선택해 줬다고 해서 변할 건 없었다.
“전하? 저 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응, 기다리고 있었어.”
아까 약속했던 대로 때맞춰서 레냐가 그를 찾아왔다. 그의 허락을 받고 방에 들어선 그녀는 얇은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색이 하얀 데다가 원단이 지나치게 얇아서, 몸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복장이었다. 힐끔. 에드가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길로 살폈다.
‘저런 차림으로 남자 방에 들어오다니. 경계심도 없는 건가?’
모친이 마족이든 뭐든 간에 그는 그 보수적인 황실 교육을 수료한, 엄연한 황족이었다.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라도 레냐의 드러난 살결을 가려 주고 싶어서 손끝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아까의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그녀는 그저 순진해 빠진 어린애가 아니었고, 그런 그녀에게 고지식하게 굴었다간 꽉 막힌 남자 취급이나 받을 터였다. 그래서 꾹 참고 있을 때였다. 레냐가 불쑥 그의 눈앞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말씀하셨던 혼인 계약서를 가져왔어요. 괜찮은지 확인 부탁드려요.”
그는 일단 혼인 계약서를 받아서 읽어 보았다. 사실 갓 성인이 된 그녀가 계약서를 제대로 작성해 왔을 거라곤 생각 안 했었다. 그러나 막상 살펴본 계약서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체계적이고 꼼꼼했다.
‘여러모로 놀라게 하는군.’
그는 계속해서 발견하게 되는 레냐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워하며, 눈으로는 계약서를 쭉 살폈다. 그가 조금 이상함을 느낀 것은 ‘부부간 신체 접촉’에 관한 조항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