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악당도 아내랑 각방은 싫어요. (6/102)

6. 악당도 아내랑 각방은 싫어요.2021.04.20.

에드는 혼인 계약서에서 발견한 그 이상한 조항을 한참이고 살피다가, 결국 물었다.

16567313778.jpg“그런데 이게 뭐야?”

16567313778005.jpg“네? 이상한 부분이 있나요?”

16567313778.jpg“결혼 후 3년간은 입맞춤을 포함한 모든 성적인 접촉을 일절 금지한다……? 단, 대외적으로 부부 결속을 드러내기 위한 가벼운 접촉은 예외……?”

귀족들 간의 정략혼이 성사되면 식을 올린 날 바로 잠자리를 갖는 게 보통이었다. 하루라도 더 젊을 때 후계자를 만들어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이 중요한 과정을 3년이나 뒤로 미루겠다니…….

16567313778.jpg‘수상해. 결혼은 눈속임이고 사실 다른 속셈이 있는 건가?’

레냐가 적어 넣은 그 조항은 그에게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비해 레냐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덤덤하게 설명했다.

16567313778005.jpg“물론 2세 계획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뭐든 너무 서두르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16567313778.jpg“흐음…….”

16567313778005.jpg“저는 전하를 천천히 알아 가고 싶어요. 몸이 아닌, 마음부터.”

옅게 구겨진 그의 미간을 레냐가 조심스레 살폈다.

16567313778005.jpg“괜찮을까요?”

16567313778.jpg“……물론 괜찮고말고. 내 이기심 때문에 네게 부담 주고 싶지 않거든.”

16567313778005.jpg“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괜찮다고 말하긴 했지만, 에드의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세상엔 상냥하게 웃으며 남의 등에 칼을 꽂아 대는 인간들이 차고 넘친다는 걸 알았다. 그가 자란 황성에만 하더라도 웃는 낯으로 그의 식사에 독약을 섞어 대는 숙적들이 정말로 많았었다.  

16567313778.jpg“독약……? 유모…… 어째서 이런 짓을…….”

1656731380375.jpg“죄송해요, 전하. 하지만 황후 마마께서 전하의 죽음을 바라고 계시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답니다.”

  그가 어머니처럼 믿고 따랐던 유모가 그에게 독이 든 수프를 먹이고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녀는 괴롭게 죽어 가는 아홉 살의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에게 보여 준 다정한 모습들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싸늘한 눈길로.  

1656731380375.jpg“저를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이 불행의 원인은 전하의 몸에 흐르는 그 사악한 마족의 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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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악한 마족의 피. 유모는 그의 몸속에 흐르는 어머니의 피를 그렇게 표현했다. 다행히 그 사악한 피 덕분에 독이 듣지 않아 목숨은 건졌지만, 황후는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선량한 그녀가 독살을 사주할 리 없다고들 여긴 것이다. 그러니 레냐가 아무리 신뢰 가게 행동하더라도…… 그는 경계심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16567313778.jpg‘신중해야겠어.’

에드는 유모가 독 수프를 건네며 지었던 그 상냥한 거짓 미소를 똑같이 흉내 내며, 계약서를 짚었다.

16567313778.jpg“전체적으로 훌륭한 계약서야. 다만 한 가지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어. 여기, ‘이혼은 서로 합의하에 결정할 것’이라는 조항 말이야.”

16567313778005.jpg“네.”

16567313778.jpg“서로의 ‘합의’가 아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통보하더라도 가능하게끔 수정하는 게 어때?”

16567313778005.jpg“으음…….”

이번엔 레냐도 깊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에드의 말대로 계약서를 고칠 경우, 그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그녀를 떠날 수 있게 되므로.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나, 신중하기로 한 그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그녀를 떨쳐 낼 길을 반드시 마련해 두고 싶었다. 긴 시간 고민하던 레냐는 다행히 동의하는 의사를 밝혔다.

16567313778005.jpg“네, 제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이 부분은 수정해서 새로 적어 드릴게요.”

그녀는 그 자리에서 즉시 새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바뀐 내용을 신중하게 살피고, 살피고, 또 살핀 뒤에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16567313778.jpg“좋아, 먼저 서명할게.”

에드는 하얀 미소로써 까만 속을 숨기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레냐 또한 그 옆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둘은 서로가 인정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 * * 에드와 결혼 계약서를 작성한 뒤, 나는 밤잠을 설쳤다. 내가 제대로 한 게 맞는지 여러모로 걱정돼서였다.

16567313778005.jpg‘한나라면 유용한 조언을 해 줄지도 몰라.’

그녀는 현재 내 직속 시녀지만, 과거엔 레냐의 어머니인 릴리아의 시녀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를 자신의 딸처럼 소중히 여기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 아침 채비를 도와주고자 온 한나가 먼저 에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16567313826518.jpg“오늘은 시녀랑 하녀들이 아침부터 떠들썩하더라구요.”

16567313778005.jpg“그래? 에드 전하 때문에?”

16567313826518.jpg“네, 멋지고 잘생겼다고 어찌나 소란이던지……. 시녀장께서 일 시작하라고 재촉 안 하셨으면 아마 온종일 떠들었을걸요?”

나는 머리를 빗겨 주는 한나를 거울로 보며 웃어 주었다.

16567313778005.jpg“이해는 돼. 수도를 포함한 남부 지역에선 이미 미혼 영애들의 우상으로 유명하시다고 들었어.”

16567313826518.jpg“확실히 대단하긴 했죠. 하지만 그래도 말이죠, 전 너무나 아쉽답니다.”

머리 손질을 끝낸 듯 한나가 빗을 내려놓았다. 거울을 보니 내 분홍색 머리카락이 포니테일로 높게 묶여 있었다. 그녀가 골라준 푸른색 벨벳 머리끈 덕분일까? 평소보다 더 낯빛이 화사해 보였다. 내 그런 모습을 살피면서 한나도 애틋한 미소를 머금었다.

16567313826518.jpg“보세요, 아가씨는 이렇게나 사랑스러우신걸요. 아마 수도에도 아가씨보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은 없을 거예요.”

16567313778005.jpg“으음……. 그런가?”

16567313826518.jpg“물론이죠! 그런 아가씨께서 이렇게 하루아침 만에 성급히 정략혼을 결정하신 게 저는 정말로 아쉽고도 아쉬워서…….”

나는 내 어깨에 얹어져 있던 그녀의 손을 위로하듯 겹쳐 잡았다.

16567313778005.jpg“항상 내 편에서 생각해 줘서 고마워, 한나. 아마 내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한나일 거야.”

16567313826518.jpg“아가씨…….”

16567313778005.jpg“근데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어. 정략혼 상대긴 해도 에드 전하는 자상하고 멋진 분이거든. 그리고…….”

그리고, 계약상 나는 언제든 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를 제대로 갱생시킨 뒤, 다른 괜찮은 여자랑 짝지어 주고 이혼하더라도 내 나이가 스물다섯 살을 넘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도 스무 살밖에 안 됐으니까. 이혼하고 나서 천천히 연애결혼을 하든 뭘 하든 늦지 않았다.

16567313778005.jpg‘나중에 이혼할 계획이라고 하면 놀라겠지?’

나는 마음 약한 그녀를 위해 진실을 감추는 편을 택했다.

16567313778005.jpg“그리고 못 해 본 연애는 전하랑 앞으로 실컷 하면 되니까. 난 아쉽지 않고 오히려 너무너무 신나.”

그제야 한나의 눈빛에 서렸던 씁쓸함이 가셨다.

16567313826518.jpg“네……. 분명 결혼 후에도 누구보다 예쁘고 알콩달콩하게 연애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가씨처럼 따뜻하고 상냥하신 분이라면.”

그녀가 이번엔 내게 리본과 똑같은 빛깔의 사파이어 귀걸이를 골라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서 괜찮다는 사인을 주자 그녀는 그것을 내 귀에 걸었다.

16567313826518.jpg“혹시 전하께서 얼마나 자상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16567313778005.jpg“음, 얼마나 자상하셨냐면…… 내가 지나친 신체 접촉은 3년간 하지 말자고 말했거든?”

16567313826518.jpg“네?!”

나로서는 그를 ‘갱생시키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신체 접촉은 피하고자 했다. 괜히 아이라도 갖게 되면 큰일이기도 했고. 그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한나는 매우 놀란 기색이라, 나는 급히 수습했다.

16567313778005.jpg“왜냐면, 너무 빠르게 이것저것 해 버리면 사랑이 금방 식잖아? 그래서 3년간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

16567313826518.jpg“그, 그런가요? 에드 전하께선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16567313778005.jpg“흔쾌히 그러자고 하시던데? 내게 부담 주기 싫다면서……. 굉장히 자상하시지?”

16567313826518.jpg“흐음…….”

한나는 고민해 보듯이 긴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16567313826518.jpg“정말로 전하께서 흔쾌하게 수긍하셨을까요? 제 생각엔 그게 아니었을 것 같아요.”

16567313778005.jpg“응? 아니, 싫은 내색 전혀 안 하셨어.”

16567313826518.jpg“하지만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대부분 남자는 엉큼한 생각을 품기 마련이랍니다.”

16567313778005.jpg“에이, 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나한테 안 끌리는 남자도 있을 수 있지.”

16567313826518.jpg“그런 경우는 몹시도 희박해요.”

한나는 1초의 고민도 없이 그리 단언하며, 이어서 조언했다.

16567313826518.jpg“그러니까 만약 에드 전하께서 그 부분에 관해 느긋해 보이셨다면, 그건 내숭이랍니다.”

16567313778005.jpg“내숭?”

16567313826518.jpg“네, 아가씨께서 먼저 부부 관계를 금하자고 말씀하셔서 자존심 상했을 가능성이 커요.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아가씨 뜻에 흔쾌히 동의하는 척하신 거죠.”

항상 옳은 말만 해 주던 한나였지만, 이번엔 동의할 수 없었다.

16567313778005.jpg‘원작 내용을 생각해 보면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은데…….’

원작에서 레냐는 에드에게 소극적이었지만, 아주 가끔은 들이댈 때도 있었다. 술에 취했다거나, 밤에 갑자기 외로워졌다거나, 그럴 때면 그를 찾아가서 엉겨 붙었었다. 그때마다 에드는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었다.  

16567313778.jpg[후……. 레냐. 오늘은 바쁘다고 했잖아. 나랑 같이 있고 싶으면 타라 폰 슈베어트나 얼른 찾아와. 그럼 원 없이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그럼 그녀는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저 어깨만 축 늘어트린 채 그 방을 떠났었다.

16567313778005.jpg‘레냐가 에드 취향이 아닌 건 진짜로 확실해. 레냐의 유언도 무시하고서 세계를 파괴한 것만 봐도…….’

이 사실을 모르는 한나는 에드의 속내를 상당히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16567313826518.jpg“아가씨, 벌써 힘겨루기는 시작됐답니다. 연인 간의 밀고 당기기…… 일명, ‘밀당’이 말이죠.”

16567313778005.jpg“그렇구나…….”

16567313826518.jpg“이 한나가 항상 응원할 테니 절대로 패배해선 안 돼요, 아셨죠? 만약 지게 되면…… 정말로 결혼 생활이 힘들어질지도 모른답니다?”

16567313778005.jpg“알, 알았어. 마음속에 새겨 넣을게.”

밀당은커녕, 에드가 나를 도구로나 안 보면 다행이란 걸 차마 말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한나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침실을 나섰다. 아침 채비가 끝나면 자신에게 오라는 공작의 전언이 있던 것이다.

16567313778005.jpg‘공작은 날 왜 또 불렀으려나?’

아침부터 그의 호출을 받는 건 퍽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기껏 긴장하며 찾아갔건만, 왜인지 그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루드비히가 빈 찻잔을 치우는 중이었다. 인자한 인상의 노집사인 루드비히는 누구에게나 다정했기에, 나도 그에게만은 편안히 말을 붙일 수 있었다.

16567313778005.jpg“루드비히? 아버지는?”

1656731380375.jpg“각하께선 서쪽 온실에 계십니다.”

16567313778005.jpg“음? 온실? 식물을 키우는, 그 온실 말하는 거야?”

1656731380375.jpg“예, 물론 식물을 키우는 그 온실입니다. 서쪽 온실엔 각하께서 직접 가꾸는 꽃들이 가득하지요.”

루드비히의 대답을 재차 듣고도 나는 귀를 의심했다. 공작과 꽃이라니. 이만큼 안 어울리는 두 단어는 또 처음인 것이다.

16567313778005.jpg‘그 험악한 인간이 원예라……. 원작에 그런 내용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내용은 본 적 없었다. 원작에서 레냐는 그저 악역 조연이었고, 그런 레냐의 가족인 공작은 조연 중 상조연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조연의 취미 생활까지 알려 줄 만큼 친절한 소설이 아니었다, 「한멸세」는.

16567313778005.jpg‘닉 오빠 취미가 사실 권투였대도 그보단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물뿌리개를 들고서 꽃을 가꾸는 공작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꾸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거기에 루드비히가 더욱더 놀라운 이야기를 더했다.

1656731380375.jpg“처음 들으시겠지만…… 사실 각하께선 오래전부터 서쪽 온실에서 씨앗 하나를 싹틔우고자 노력하고 계시지요. 아마 지금도 그 씨앗을 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16567313778005.jpg“씨앗?”

1656731380375.jpg“예, 아주 소중한 씨앗인데, 안타깝게도 쉽게 싹트지 않아서 말입니다. 벌써 20년이나 됐군요, 각하께서 노력하신 세월이.”

1656731377800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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