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들이대 볼까? (7/102)

7. 들이대 볼까?2021.04.23.

공작의 취미가 원예인 것도 이미 매우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렇건만…….

16567313969583.jpg‘싹트지도 않는 씨앗을 20년이나 가꾸고 있다고?’

그건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원작 속 레냐도 이건 몰랐던 것 같으니 나는 놀란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16567313969583.jpg“그 정도면 그 씨앗, 아마 죽은 게 아닐까……? 여하튼 알겠어. 온실에 계신다는 거지?”

16567313969593.jpg“예,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16567313969583.jpg“알려줘서 고마워.”

나는 루드비히 말에 따라 온실로 향하며 생각했다.

16567313969583.jpg‘20년이나 싹이 안 트고 있는 씨앗에 공을 들인다니. 아무리 할 짓이 없어도 그렇지…….’

보통의 가장들은 애들 교육하랴, 돈 벌어오랴, 바쁘다고 들었다. 그런데 공작은 시간과 돈이 넘쳐나서 주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신박한 시간 낭비 방법을 찾아낸 걸 보니. 나는 그의 나태함에 혀를 끌끌 차면서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온실 앞이었다.

16567313969583.jpg‘와, 따뜻해라.’

유리 온실 안쪽은 아예 다른 세계인 것처럼 따스했다. 덕분에 넓은 잎사귀와 화려한 꽃잎의 식물들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6567313969583.jpg‘꽃 엄청 많다……. 근데 이거 다 외국 꽃들 아닌가?’

커다란 잎사귀나 꽃의 화려한 색감 등을 보면 제국에서 자라는 식물은 아니었다. 아마도 외래종…… 그중에서도 예르타 신성국에서 들여온 식물인 듯했다. 그래서 낯설어야 정상인데, 왜인지 익숙하고도 따스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16567313969583.jpg‘왠지 와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떠오를 것처럼 생각이 엉켜 들었다. 희뿌연 기억의 파편들이 떠오르다 가라앉길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고민해 볼 틈은 없었다. 찾던 이의 뒷모습을 때맞춰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16567313969583.jpg“아버지? 여기 계셨네요?”

그가 놀란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놀라는 걸 보니, 본인이 부른 주제에 나를 까맣게 잊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결국 내 쪽에서 먼저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16567313969583.jpg“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16567313985794.jpg“흠, 그래.”

공작은 내게 대답하는 동시에 빠르게 몸을 움직여서 뭔가를 뒤로 숨겼다. 그 순간 나는 그가 감춘 물건을 얼핏 볼 수 있었다.

16567313969583.jpg‘뭐지? 엄청 커다란 알 같은 걸 본 것 같은데……?’

16567313985804.jpg

  크기는 대략 타조알만 했고, 모양은 하얀 날개로 싸인 타원형이었다. 나는 그 이상한 물체를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헷갈렸다.

16567313969583.jpg“방금 뭘 감추신 거예요? 거대 씨앗? 타조알? 아니면…… 희귀 품종 호박?”

16567313985794.jpg“신경 쓸 거 없다.”

16567313969583.jpg“혹시 20년간 발아시키려고 노력 중이라던 씨앗이 그건가요?”

16567313985794.jpg“……?!”

그는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러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16567313985794.jpg“쯧, 루드비히가 말했나? 쓸데없는 소릴 해선…….”

16567313969583.jpg“잠깐 봐도 될까요?”

16567313985794.jpg“……뭐, 마음대로 해라.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그는 대단한 거라도 허락해 주는 것처럼 선심 쓰듯 내게 씨앗을 보여 주었다. 여하간 씨앗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나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폈다.

16567313969583.jpg‘갈라진 틈이 전혀 없네. 조금도 싹트지 않았어.’

그 말은 즉, 공작이 20년간 완벽하게 헛수고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왜인지 놀리고 싶었으나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참았다.

16567313969583.jpg“제국의 식물이 아닌 거죠?”

16567313985794.jpg“그래. 예르타 신성국에서 들여온 품종이다. 오래 돌봐 왔는데 왜인지 싹이 트질 않는군.”

16567313969583.jpg“씨앗이 너무 오래돼서 그런 거 아닐까요?”

16567313985794.jpg“아니, 그건 아니야. 이건 천 년이 지나도 조건만 갖춰지면 발아하는 강한 식물이니까. 그리고 이걸 봐라.”

그가 씨앗을 높이 들어서 햇빛에 비춰 보였다. 덕분에 놀라운 걸 목격할 수 있었다.

16567313969583.jpg“……!!”

그냥 볼 땐 몰랐는데, 씨앗의 껍질이 의외로 반투명했던 모양이다. 햇빛에 비춰 보니 날달걀처럼 내부가 얼핏 들여다보였다. 게다가…….

16567313969583.jpg‘안에서 뭔가 꿈틀대고 있어……!!’

씨앗의 내부에 핵처럼 보이는 동그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뭔진 몰라도, 이 씨앗이 생명을 품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인 셈이었다. 이렇게 꿈틀대는 걸 씨앗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의문이었지만.

16567313969583.jpg“살, 살아 있네요?”

16567313985794.jpg“그래. 오래돼서 죽은 건 아닌 거지. 발아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뿐.”

16567313969583.jpg“조건……. 예르타 신성국 식물이니까, 습도나 토양 같은 걸 그곳과 최대한 똑같이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뭐 그런 당연한 걸 말하냐는 듯 공작이 눈총을 보냈다.

16567313985794.jpg“물론 맞춰 줬지. 토양, 물, 습도, 온도, 그 모든 게 신성국과 일치하게끔 환경을 조성해도 소용없었어.”

이 세상엔 대단히 다양한 식물이 존재하고, 그 식물들의 발아법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씨앗은 습도가 높아야만 발아하지만, 또 어떤 씨앗은 습도가 높으면 그대로 썩어 버린다. 원예라는 건 그토록 까탈스럽고 제멋대로인 것이다.

16567313969583.jpg‘신성국에서만 충족되는 어떤 특별한 발아 조건이 있을 거야. 그걸 알아내야 해.’

하지만 그 조건이 뭔지 20년간 알아내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알아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했다. 고로 내가 공작에게 해 줄 조언은 하나뿐이었다.

16567313969583.jpg“그냥 포기하고 다른 취미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16567313985794.jpg“……쓸데없는 소린 그쯤하고 일단 저쪽에 앉아라. 씨앗 얘기나 나누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그가 뒤쪽에 있던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켰다. 나도 씨앗 얘기나 하려고 여기 온 건 아니었기에 그의 말에 따라 착석했다. 부담스럽게도 내 맞은편에 자리한 그는 다짜고짜 곤란한 물음을 던졌다.

16567313985794.jpg“너…… 어제 잠옷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에드 황자 방에 방문했다던데, 사실이냐?”

16567313969583.jpg“음, 네. 실내복 겸 잠옷 차림이었죠. 늦은 시각까지 불편한 드레스로 쫙 빼입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그는 곧장 황망한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뻐끔거리던 그의 입술이 간신히 소릴 내었다.

16567313985794.jpg“그래, 내가 네게 조금 무관심했던 건 사실이다. 바른 몸가짐 같은 것도 제대로 알려 주지 못했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가 기본적인 것쯤은 지킬 줄 알았다.”

기본적인 걸 지키라니. 대체 공작이 뭔 말을 하는 건지, 나는 고민에 빠졌다.

16567313969583.jpg“혹시 실내복 차림으로 에드 전하를 만나러 가서 이러시는 거예요? 벌거벗고 간 것도 아닌데…….”

16567313985794.jpg“……벌거벗고 갔으면 어제 당장 황자를 내쫓고, 네겐 1년간의 외출 금지 처분을 내렸겠지.”

16567313969583.jpg“하지만 이젠 저도 성인인데다가 에드 전하는 곧 제 남편 되실 분이에요. 아버지의 관심은 감사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겠죠.”

16567313985794.jpg“쯧, 다른 사내를 만났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참견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는 왠지…… 위험한 냄새가 나.”

공작은 어느새 나타난 자신의 정령을 자연스럽게 쓰다듬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16567313985794.jpg“그 결혼, 사실 말리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말리고 싶고. 그와 얽히면 안 될 듯한 기분이 들어.”

16567313969583.jpg“위험…….”

그의 말을 들어 주다가 한 가지 묻고픈 게 생겼다. 다만 다소 용기가 필요한 질문이라,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6567313969583.jpg“……혹시 저를 걱정하세요?”

16567313985794.jpg“…….”

16567313969583.jpg“아니면 에드 전하께서 절 인질로 삼아서 가문을 위협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할까 봐, 그걸 걱정하시나요?”

보통의 아버지들이라면 단번에 대답했을 것이다. 세상에 내 딸보다 더 중요한 건 없노라고. 하지만 그는 보통의 아버지가 아니었고, 그 당연한 대답조차 쉽게 해 주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긴 시간이 지나서야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16567313985794.jpg“……나는 북부의 주인이자 이 몬트 가문의 가주이다. 고로, 내겐 가문에 위협이 될 만한 모든 이를 경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설령 네 약혼자라 해도.”

16567313969583.jpg“…….”

주절주절 길게 말했지만, 결국은 가문이 우선이라는 말이었다.

16567313969583.jpg‘끝까지 나를 걱정한단 소린 안 하네. 저 씨앗 같은 거에는 온갖 애정과 정성을 다 쏟아 줬으면서…….’

뻔히 예상했던 대답인데도 속에서 서러운 감정이 솟았다. 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냉기가 서린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16567313969583.jpg“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전하께서 절 이용해 몬트 가문에 위협을 가한다면…… 그땐 제가 차라리 자결을 해서라도 막을 거니까요.”

16567313985794.jpg“……뭐?”

16567313969583.jpg“이런 각오를 바라셨던 거, 맞죠?”

16567313985794.jpg“아니, 나는 단지…….”

16567313969583.jpg“원하시는 대답은 해 드렸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은 채로 나는 온실을 나왔다. 그도 딱히 나를 더 붙잡진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딱 그만큼의 대화였다. 우리의 대화는.

16567313969583.jpg‘나도 참……. 저 인간한테 뭘 바란 건지…….’

씨앗을 두고 함께 고민할 때, 잠깐이지만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그와 고민하고 대화하는 그 과정이 조금은 즐거워서…… 그 탓에 나도 모르게 기대를 걸었나 보다. 물론 그 기대는 고스란히 실망으로 돌아왔다.

16567313969583.jpg‘걱정된다고 한마디 해 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어디 나 없이 평생 씨앗에 물이나 주면서 살아 봐라.’

본인 딸인 나보다 한낱 식물에 더 마음을 쏟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심술이 났다. 그렇게 무거워진 마음을 끌어안고서 내 방에 도착했을 때.

16567313969583.jpg“……!”

나는 문을 연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웬 훤칠한 미남자가 모델처럼 창틀에 기대어 서 있던 것이다. 그 훤칠한 남자…… 내 약혼자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16567314044085.jpg“레냐, 이제 돌아왔구나?”

16567313969583.jpg“전하? 제 방엔 어쩐 일로……. 그리고 그 짐 가방은 뭔가요?”

16567314044085.jpg“아무래도 슬슬 황자궁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며칠 더 묵고 갈 줄 알았는데, 온 지 하루 만에 떠난다고 하니 잠깐 입술이 굳었다. 그런 나와 다르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16567314044085.jpg“광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준비해야 할 게 많거든. 이미 결혼이 결정된 이상 더 있을 필요도 없고.”

16567313969583.jpg“아아…….”

16567314044085.jpg“아마 2주 정도면 다 해결될 것 같아. 그러니까 짐 챙겨서 너도 그때쯤 올라오도록 해.”

16567313969583.jpg“…….”

무척이나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는 원작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모든 걸 혼자 결정하고서 통보해 왔다. 가뜩이나 공작 때문에 속이 쓰린데 에드까지 저러니 내 신경도 뾰족해졌다.

16567313969583.jpg‘여기 남자들은 왜 이렇게 다 제멋대로야? 내 의견은 아예 물어보는 척도 안 하네?’

날 제대로 돌봐 주지도 않은 주제에 내 결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공작이나, 나랑 결혼하겠다고 한 주제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짐 가방부터 싸 둔 에드나, 하나같이 꿀밤을 먹여 주고 싶은 인간들뿐이었다.

16567314044085.jpg“그럼 이만 가 볼게. 배웅은 됐어.”

그는 그리 말해 놓고서 내 옆을 휙 지나쳐,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생각했다.

16567313969583.jpg‘아마 원작의 레냐였다면 알겠다고 대답했겠지. 에드 앞에선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기도 싫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공작 때문에 심기가 뒤틀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그전에 나는 원작 레냐처럼 순종적 도구가 되지는 않겠노라고, 진심으로 다짐한 바가 있었다.

16567313969583.jpg“전하.”

16567314044085.jpg“……?”

갓 문을 넘어가고 있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나는 성큼성큼 움직여서 금세 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16567313969583.jpg“저는 당신의 반려가 될 사람이에요. 당신을 신경 쓰고, 당신 곁에 있길 바라는, 당신의 파트너요. 그래서 말인데…….”

무방비하게 놓여 있던 에드의 손을 감싸듯 쥐었더니 그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 선명한 은회색 눈동자 속에 비친 내 결연한 모습을 응시하며, 나는 이윽고 말했다.

16567313969583.jpg“오늘,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16567314071433.jpg

1656731407143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