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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따님과 야반도주 좀 하겠습니다. (9/102)

9. 따님과 야반도주 좀 하겠습니다.2021.04.30.

내가 3층 방향을 살피는 중에도 삐약이의 분노는 이어지고 있었다. 화를 내는 그 모습이 흡사 구렁이로부터 알을 지키려는 어미 닭 같았다.

16567314279412.jpg‘왜 이러지? 이렇게 화내는 모습 처음 봐. 게다가 왠지 주변 공기가 뜨거워진 거 같기도 하고…….’

원인 모를 현상들 때문에 살짝 무서워진 나는 두 손으로 삐약이를 소중히 감싸 안았다.

16567314279412.jpg“쉿! 진정해, 삐약아. 거긴 위험한 거 없어.”

삐약이는 내 손 안에 감싸인 상태에서도 도통 진정하질 못했다. 내 손가락 새로 어떻게든 제 연노란색 정수리를 내밀려고 했다.

16567314279426.jpg―뺙뺙! 뺙!!

이토록 날뛰는 삐약이를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닉 오빠를 떠올려 냈다.

16567314279412.jpg“여기 닉 오빠 집무실 앞이란 말이야.”

16567314279426.jpg―뺙?

16567314279412.jpg“안 그래도 요즘 바빠서 피곤할 텐데, 자꾸 시끄럽게 굴면 오빠가 힘들어할 거야.”

16567314279426.jpg―뺙뺘…….

전에 상냥한 닉 오빠를 삐약이가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았는데, 예상 적중이었다. 그의 이름을 대자 금세 조용해졌다.

16567314279412.jpg‘휴, 진정됐다.’

나는 간신히 조용해진 삐약이를 어깨에 올려 두고서 닉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16567314279412.jpg“오빠? 자는 거야?”

16567314279477.jpg“으음…….”

불편하게 엎드려서 자고 있던 닉 오빠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그 틈에 그의 집무실에 함께 있던 기사들과 시녀들에게 명했다.

16567314279412.jpg“잠깐 너희는 자리 좀 비켜 줄래?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

16567314297983.jpg“예, 아가씨.”

닉 오빠를 자주 찾아오며 얼굴을 비쳐 둔 덕에 그들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닉 오빠에게 드디어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16567314279412.jpg“……오빠? 조심해!”

간신히 들려 있던 닉 오빠의 고개가 뒤로 기우뚱, 기울었다. 손을 급히 뻗어서 뒤통수를 받쳐 주었더니 이번엔 앞으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수면 부족에 시달린 나머지 제 목조차 가눌 수 없게 된 가여운 수험생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는 흐릿한 눈길로 나를 살피곤 살포시 웃었다.

16567314279477.jpg“레냐……. 못 본 새 많이 자랐네……?”

16567314279412.jpg“자랐다고?”

16567314279477.jpg“아깐 그렇게 울고 떼쓰더니…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됐어…….”

16567314279412.jpg“……잠이 덜 깼구나.”

아무래도 꿈속에서 어린 시절의 레냐를 만난 모양인데,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듯했다. 역시나 잠꼬대만 남겨 놓고서 그는 도로 책상 위로 엎드려 버렸다.

16567314279412.jpg‘많이 피곤한가 보네. 지금 보니 눈 밑도 엄청 퀭하고.’

그의 책상 위에는 일감이 잔뜩 쌓여 있었다. 조만간 공작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될 입장으로서 대부분의 일을 도맡은 까닭이었다. 거기에 더해 여러 공부까지도 계속하고 있으니, 그는 보통 이런 상태였다.

16567314279412.jpg‘도저히 못 깨우겠어……. 그냥 쪽지만 남겨 둬야겠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지만, 피로감에 푹 젖은 몰골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나는 쪽지나 남길 요량으로 그의 서랍을 열었다. 마침 표지에 ‘스케치’라고 적혀 있는 노트가 보였다. 첫 번째 서랍에 그냥 넣어 둔 점, 스케치라고 적혀 있는 점, 기타 등등으로 미루어 보아 사적인 일기장 같은 건 아닌 듯하여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지를 뜯고자 첫 페이지를 펼쳤다.

16567314279412.jpg“……?”

노트를 펼친 순간, 나는 초기의 목적을 잊게 되었다.

16567314279412.jpg‘소묘……. 닉 오빠가 직접 그린 건가?’

오동통한 뺨을 가진,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첫 페이지부터 그려져 있었다. 뒷장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모델을 그린 그림이 죽 이어졌다. 거의 스무 장은 돼 보였는데, 뒤로 갈수록 아이의 성장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었다. 첫 번째 그림에선 분명 작은 아기였건만. 맨 마지막 그림에서의 그녀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림의 모델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16567314279412.jpg‘레냐의 어릴 적 모습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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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닉 오빠가 그토록 열심히 그려 놓은 것은 레냐였다. 어린 레냐의 웃는 모습, 우는 모습, 떼쓰는 모습 등이 마치 앨범 속 사진처럼 그 안에 전부 담겨 있었다. 낡은 노트에서 온기가 느껴질 리 없는데도, 나는 그의 그림이 온기를 품은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16567314279412.jpg“…….”

침묵한 채 그림 위를 어루만지다가, 뒤쪽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16567314279412.jpg‘이 디자인들도 전부 닉 오빠가? 대단해…….’

뒤쪽엔 의류 디자인이 여러 장 그려져 있었다. 개중엔 드레스 디자인도 몇 장 있었는데, 전부 오래전에 그려졌음에도 전혀 구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근래에 유행한 드레스들 못지않게 감각적이고 아름다웠다.

16567314279412.jpg‘손으로 그리는 건 뭐든 잘했구나. 취미로만 끄적거리긴 아까운 재능인데…… 요즘은 바빠서 관뒀나 보네.’

그의 그림 밑에 적힌 날짜를 보니, 마지막 그림이 무려 3년 전에 그려진 것이었다. 공부와 업무에 시달리느라 취미 생활을 놓아 버린 게 분명했다. 그의 처지가 안쓰럽게 여겨지고 있을 즘. 문득 닉 오빠가 엎드린 채로 웅얼거렸다.

16567314279477.jpg“미안해, 레냐. 정말…… 미안해.”

16567314279412.jpg“깼, 깼어?!”

16567314279477.jpg“어머니가…… 잘 돌보라고…… 하셨는데…… 난 아무것도…….”

거의 웅얼대는 소리라 끝부분으로 갈수록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아마 아무것도 못 해 줘서 미안하다고 한 듯했다.

16567314279412.jpg‘잠꼬대였나? 깜짝이야……. 깬 줄 알았잖아.’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자, 짠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16567314279412.jpg‘내심 미안해하고 있었나 보네. 생각해 보면 닉 오빠가 사과할 일은 아닌데. 사과는 공작이 해야지.’

모든 문제의 원인은 공작이었다. 레냐가 애정 결핍에 시달리다가 도망치듯 전쟁터로 간 것도, 그곳에서 에이드리언이라는 나쁜 놈한테 사랑을 바친 것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마침내 초기의 목적을 떠올려 냈다.

16567314279412.jpg‘이럴 때가 아니야.’

늦장 부렸다간 에드와 약속한 시각을 어기게 될지도 모를 일. 방금 닉 오빠의 추억 서린 그림을 본 탓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나는 애써 스케치 안에 작별 인사를 남겼다. ―전부 내가 선택한 일이야. 그러니까 오빠가 미안해할 필요는 조금도…… 정말로 조금도 없어. 부디 내 걱정은 말고 오빠 자신의 미래에 집중해 줘. 그럼 언젠간 우리 둘 다 웃으며 이 순간을 회상할 날이 올 테니까.― 다 적은 편지는 종이 채 주욱 찢어냈다. 그러곤 집무실 옆에 붙어 있는 침실로 가져가서 그의 베개 밑에 꽂아 두었다. 그가 잠드는 시간이 11시라는 걸 생각해 봤을 때, 그렇게 해 두면 딱 내가 떠났을 즈음에 쪽지가 발견될 테니까.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오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곧장 내게 물어 왔다.

1656731432883.jpg“아가씨, 소공작님과의 면담은 끝나셨습니까?”

16567314279412.jpg“깨우기 미안해서 그냥 쪽지만 남겨 놨어. 많이 피곤한 것 같으니까, 들어가면 수면 방해하지 않게끔 조심해 줘.”

1656731432883.jpg“예, 주의하겠습니다.”

시녀들과 기사들은 내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다시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들이 우르르 사라지자 그의 집무실 문 앞이 평소보다 더욱 쓸쓸하고 고독하게 느껴졌다.

16567314279412.jpg‘나야말로 미안해.’

나는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속으로 사과한 뒤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부턴 최대한 서둘렀다. 에드와 만나기로 한 시각은 밤 10시. 그때까지 짐을 다 챙기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내 직속 시녀로서 한나도 함께 가기로 한 터라, 다행히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를 도와서 내 짐을 챙겨 주던 중, 한나가 불현듯 불안감을 내비쳤다.

16567314328848.jpg“아가씨, 그런데 정말로 괜찮을까요? 저는 공작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실 것만 같아서 너무너무 무섭답니다……”

나는 비상용 금화를 챙기던 걸 잠깐 멈추고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16567314279412.jpg“괜찮아, 한나. 내 침대 위에 장문의 편지까지 남겨뒀잖아. 이해하시겠지.”

16567314328848.jpg“으음…… 하지만…….”

16567314279412.jpg“그리고 이해 못 하시더라도 섣부르게 나서진 못하실걸?”

그리 확신하는 나는 여유롭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16567314279412.jpg‘속으로만 열심히 삭이겠지. 공작 정도의 거물은 재채기만 해도 귀족들의 관심을 죄다 끌어 버리니까.’

그도 잘 알 터였다. 자신이 나서면 나설수록 일은 커지고, 그만큼 몬트 가문에 얽힌 근거 없는 추문도 늘어나리란 걸. 한가한 사교계 귀족들의 안줏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그는 최대한 사려야 했다. 내 말을 들은 한나는 여전히 걱정하는 듯하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16567314328848.jpg“아가씨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믿을 수밖에 없네요. 전 다른 누구도 아닌, 아가씨만의 한나니까요.”

16567314279412.jpg“믿어 줘서 고마워, 한나.”

모든 짐을 챙긴 뒤, 나는 마지막으로 한나에게 확인했다.

16567314279412.jpg“그럼, 아까 얘기한 대로 먼저 여기서 떠나. 어느 방향인지는 알지?”

16567314328848.jpg“물론이죠, 아가씨. 가서 아가씨의 새 방을 깨끗하게 치워 둘게요. 빨리 오셔야 해요?”

16567314279412.jpg“응. 걱정 마.”

내 대답을 들은 즉시 그녀가 자신의 정령을 소환했다. 그녀의 정령은 보랏빛의 거대한 타조로, 그걸 타면 꽤 빠른 속도로 에드의 궁에 도착할 터였다.

16567314279426.jpg―꾸르르륵! 꾸르르르륵!

두 차례 목을 울린 뒤, 타조가 한나를 등에 태우고서 출발했다. 나는 창가에서 그녀와 그녀의 보라색 타조가 성문을 무사히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다행히 시녀인 그녀의 외출을 수상하게 여기고서 붙잡는 이는 없었다.

16567314279412.jpg‘휴…… 됐다. 한나도 무사히 나갔고, 짐도 다 챙겼어. 이제 나랑 에드만 빠져나가면 돼.’

사실 작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단순한 작전이긴 했다. 그래도 어쨌든 작전의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 두고 있으니 긴장감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16567314279412.jpg‘떨려라…….’

초조한 기색으로 방 안을 어슬렁거리길 수 시간째. 마침내 기다렸던 9시 50분이 되었다. 나는 즉시 옷장으로 들어가서, 그 안쪽에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의 입구를 열었다. 원래는 성이 적군에 함락됐을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탈출 통로인데, 지금은 내 도망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16567314279412.jpg‘여기로 나가면 절대 안 들킬 거야. 이 성에서 수십 년씩 일해 온 하인들도 모르는 통로니까.’

말 그대로 공작가 직계만이 아는 탈출구라, 나도 처음엔 몰랐다가 닉 오빠와 대화하던 중에 우연히 들어서 알게 된 곳이었다. 그러니 이곳을 통하면 경비병에게도 들키지 않고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만 워낙 길이 좁고 길어서 이동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16567314279412.jpg‘좋게 생각해야지. 야밤에 약혼자랑 도주하는 경험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색다른’ 경험인 건 확실했다. ‘좋은’ 경험인지에 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16567314279412.jpg‘거의 다 왔다……!’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며 열심히 걸었더니 마침내 통로의 끝이 보였다. 더욱 속도를 내서 빠르게 빠져나오자 차가운 숲의 공기가 폐부로 단숨에 스며들어 왔다. 긴 고생 끝에 보게 된 보름달과 눈으로 뒤덮인 숲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16567314279412.jpg“휴…….”

방금 도착한 이곳은 성의 북쪽에 위치하는 침엽수림으로, 에드도 여기서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는 철두철미한 악역답게 먼저 와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16567314359199.jpg“왔구나, 레냐.”

16567314279412.jpg“네, 떠날 준비는 다 마치셨나요?”

16567314359199.jpg“예전에 다 끝냈지.”

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쓰고 있던 검은색 후드를 똑같이 뒤집어쓴 채로 씩 웃어 보였다. 보름달의 마력 때문일까? 아니면 눈 쌓인 숲의 고요함 때문일까. 그의 미소가 평소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도 아름다웠다. 내가 잠깐 꿈같은 기분에 젖어 있는 사이 그는 본인의 정령인 검은색 페가수스를 소환했다.

16567314359199.jpg“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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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의 말을 듣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나를 번쩍 들어서 정령 위에 태워 주었다. 그러곤 자신 또한 내 뒤쪽으로 올라탔다. 미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날개 달린 말에 올라타는 기분은…….

16567314279412.jpg‘이거, 뭔데 이렇게 신나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짜릿했다. 그의 단단한 몸이 안정감 있게 뒤를 받쳐 주자,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두려움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때,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16567314359199.jpg“많이 흔들릴 거야. 나한테 좀 더 가깝게 기대. 그리고 혹시 무서우면 속도 줄일 테니까 언제든 말하도록 하고.”

16567314279412.jpg“네, 저 준비됐어요.”

그 순간 그의 페가수스가 지면을 강하게 박차며 날아올랐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까만 말을 타고서, 새하얀 숲을 누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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