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악당은 칭찬이 고픕니다.2021.05.04.
레냐가 떠난 직후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나까지 동원하여 나름 철저하게 준비한 출가였으므로. 하지만 니콜라스가 제 침실에 있던 레냐의 쪽지를 발견한 후, 공작성의 그 평화로운 고요함도 단번에 깨져버렸다.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공작은 자신의 침실에 소란을 피우며 뛰어 들어온 첫째 아들을 노려보았다.
“……뭐냐, 오밤중에…….”
“이걸 보세요!!”
그는 짜증을 삼키며 니콜라스가 불쑥 건넨 쪽지를 받아들었다.
“……!!”
옅게나마 잠기운이 서려 가던 공작의 눈이 곧바로 또렷해졌다. 레냐의 필체로 적힌 그 쪽지에는 믿기 힘든 내용이 담겨 있었다.
“뭐냐, 이거. 새로운 농담인가?”
“저도 안 믿겨서 직접 레냐 방에 가 봤는데……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습니다.”
“…….”
“자주 입던 드레스랑 보석류도 전부 챙겨서 나갔는지 그것들마저 싹 사라졌고요.”
레냐가 남겨 둔 작별 인사 쪽지를 발견하자마자 니콜라스는 곧장 그녀의 방으로 갔었다. 그러나 그곳에 남아 있던 건 빈방 특유의 싸늘한 기운뿐이었다. 그 후 레냐의 또 다른 편지를 침대 위에서 발견…… 곧장 그걸 들고 공작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공작의 입에서 이윽고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하…….”
그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치밀어 오르는 두통을 달랬다.
‘일단 필체는 확실히 레냐 본인 거군. 그놈한테 납치된 건 아니야.’
그 사실이 그나마 안심이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빙빙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자기 일에 신경 끄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무리 봐도 딸이 아버지에게 남긴 편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피고용인이 고용주에게 보낸 사퇴서처럼 차갑게만 느껴지는 편지였다. 그사이 니콜라스가 초조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확인해 보니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던데,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겁니다. 허락해 주시기만 하면 지금 당장 제가 쫓아가서…….”
“아니. 내버려 둬라. 납치된 것도 아니고, 본인이 가겠다는데 굳이 붙잡을 필욘 없겠지.”
“……예? 그게 무슨…….”
“신경 끄고 잠이나 자라는 뜻이다.”
이제 나가라는 듯 손을 내젓는 아버지를 보며 니콜라스는 굳어 버렸다.
“잠이나 자라니……. 지금 레냐가… 아버지의 딸이자 제 동생인 아이가 가출한 겁니다. 그런데 잠이나 자라고요?”
“…….”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씀을…….”
지금까진 어떻게든 아버지를 이해하려 했던 니콜라스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겨진 그가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졌었는지 곁에서 똑똑히 봐 왔으니까. 하지만…….
‘레냐가 아예 사라져버린 상황에서까지 이토록 냉혹하시다니……. 이건 아니야.’
그는 주먹을 꽉 말아 쥐다가 이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냥 제가 알아서 찾아오겠습니다.”
“니콜라스.”
급히 나가려던 니콜라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다시 뒤돌아보니,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고개 떨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니콜라스가 더 움직이지 못하고 멈춘 틈에 공작이 호소했다.
“부탁이다. 그냥 내버려 둬. 그편이…… 우리 모두에게 좋다.”
무수한 말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니콜라스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억지로 데려와 봤자 괴로워할 뿐이란 말씀인가?’
공작이 그녀를 껄끄럽게 여겼듯, 레냐 또한 그런 아버지를 더 버티지 못하고 나간 것이었다. 그러니 억지로 데려오지 않는 편이 ‘모두’에게…… 즉, 공작뿐 아니라 레냐에게도 더 나을 터였다.
“아버지께서 내가 여기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시기도 하고…… 그냥 내가 나가는 게 모두에게 좋아.”
전에 레냐가 했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녀 또한 공작과 같은 생각인 듯했다. 니콜라스는 감정을 삭이고자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죄야……. 내가 더 적극적으로 레냐를 지켜 줬어야 했어.’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고 공부했다. 동생들을 잘 돌보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선 훌륭한 가주가 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조금 무심해졌었다. 레냐가 아버지께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도움 주는 걸 미루기만 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 레냐의 가출이었다. 이내 공작이 그 참혹한 결과를 더욱 확실하게 되새겨 주었다.
“붙잡기엔 너무 늦어 버린 것이지. 너도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고 믿는다.”
니콜라스는 죄 없는 입술을 잘근 씹곤, 한숨처럼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쫓아가지 않겠습니다. 다만-”
“……?”
“훗날 제가 가주가 된다면, 그땐 아버지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든 그 아이를 곁에서 지지하고 보호해줄 겁니다. 여태껏 아버지가 못 해 주신 만큼 더 열심히.”
공작의 무책임함을 힐난하는 투임에도, 그는 구태여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해라.”
니콜라스는 공작의 침실을 나왔다. 그러곤 복도 끝 창가에 우두커니 섰다.
‘레냐…….’
그는 창문을 통해 레냐가 한창 떠나고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지금보다 더욱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겠노라고. 그래서 언젠간 여동생 하나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신세를 벗어나겠노라고. 그는 그렇게 부서지도록 주먹을 움켜쥐며 결심을 다졌다.
* * * 북부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에드는 제 처소인 황자궁까지 하루면 도착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의 정령, 초하루 밤의 흑마는 세상 그 어느 정령보다도 빨랐으니까. 하지만 그가 계산하지 못한 게 있었는데, 이번엔 그에게 다소 성가신 동행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침 그 성가신 동행자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두드렸다.
“세, 세워 주세요!! 빨리요!!”
“……?!”
여기서 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에드는 급히 정령을 땅에 착륙시켰다. 땅에 닿기가 무섭게 레냐는 정령의 등에서 내려 수풀 너머로 뛰어갔다. 곧이어 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웁, 우웁, 웩……!!”
레냐의 멀미가 이토록 심할 줄, 에드는 미처 예상 못 했다. 그녀 덕분에 그들은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씩 이렇게 착륙해야만 했다. 부끄러워할까 봐 차마 가서 등을 두드려주진 못하고, 그는 그저 그녀가 뛰어간 방향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성가시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약혼녀였어.’
그래도 그 몬트 가문의 귀한 딸이란 걸 생각해 보면 조금의 성가심 정도는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와 혼인함으로써 얻을 이득을 떠올리며 애써 표정을 풀었다. 마침 구역질을 끝낸 레냐가 비칠비칠 걸어왔다.
“으으…….”
“괜찮아?”
“네에에…….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안색이 새파랬다. 에드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고 쓸어 주었다.
“미안해. 네가 블랙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줄은 몰랐어. 보통은 나 혼자 타고 다녔으니까.”
블랙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그의 정령도 마침 뒤에서 콧김을 ‘푸르릉’거리며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에드는 그런 블랙의 콧잔등 또한 가볍게 두드려 준 뒤, 자신의 겉옷을 바닥에 깔았다. 그러곤 그 위에 레냐를 조심스레 앉혔다.
“일단 물 마시면서 쉬고 있어. 보니까 근처에 마을이 있는 것 같던데, 가서 멀미약을 좀 구해 볼게.”
“아뇨……. 곧 도착할 텐데 굳이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 혼자 남기도 싫으니까…….”
그 말을 듣고 에드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여자 혼자 두기엔 조금 위험한 장소야.’
근처에 어두운 숲이 자리하고 있어서, 재수 없으면 위험한 야생 동물이나 도적 떼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허술하게 관리했다가 잃어버린 순 없지. 간신히 얻은 몬트 가문의 약혼녀인데.’
그녀의 말이 합당하다고 여긴 그는 자신도 근처에 있던 나무둥치에 걸터앉았다.
“알았어, 그럼. 진정될 때까지 쉬었다가 가자.”
그는 그녀가 최대한 빨리 낫길 바랐다. 그녀가 괴로운 게 문제가 아니라, 계속 이렇게 멈춰 댔다간 에드 자신이 못 버틸 것 같아서였다. 아까 열 번째 착륙했을 땐 레냐를 내다 버리고 혼자 돌아가 버리는 상상까지 해 버린 참이었으니. 지금도 그런 상상을 하며 짜증을 달래고 있는데, 문득 레냐가 말을 붙여 왔다.
“정말로 자상하시네요, 전하께선.”
“응?”
“저 때문에 많이 늦어지고 있는데 짜증 한 번 안 내시고, 약도 사다 준다고 하시고……. 정말로…… 전하와 맺어지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나 봐요.”
방금까지 그가 레냐를 버리고 떠나는 상상을 했단 걸, 그녀는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내가 자상하다고? 본인이 공작 영애라서 대접받는단 생각은 안 해 봤나?’
아마 귀하게 떠받들어지며 자라서 이런 순진한 면모가 있는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자신처럼 온갖 암살 시도에 시달리는 유년기를 겪었다면 세상에 공짜 친절 따윈 없다는 걸 진즉 알았을 테니까. 자신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듯한 그녀를 그는 비웃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소 걱정되기도 했다.
‘호감을 사려면 입에 발린 소리나 해야겠지만…….’
조금은 현실에 대해 경고해 줄 필요도 있어 보였다. 이 순진한 약혼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황궁의 교활한 짐승들에게 물어뜯기는 상황을 막으려면.
“내가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건 약혼자로서 너를 진심으로 위하고 있어서야.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게 있어.”
“……?”
“만약 나를 제외한 다른 이가 과하게 다정하게 군다면 한 번쯤은 의심해 보도록 해.”
그는 먼 곳에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서 레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쁜 꿍꿍이를 가진 사람들은 보통 다정하게 웃고 있거든. 그렇게 본심을 감추고 다가와선 끔찍한 배신을 저지르는 거지.”
그럴 생각은 아니었건만,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괴로웠던 과거 기억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감정이 드러나 버렸다. 역시나 레냐는 갑자기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에드를 향해 놀란 눈빛을 보내왔다. 덕분에 조금 민망해져서 수습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저, 진짜 친절과 가짜 친절도 구분 못 할 만큼 순진하지 않아요.”
“흠, 그래?”
“네, 그래서 아무나 칭찬하지도 않는걸요. 정말로 다정한 사람들에게만 다정하다고 말하죠. 그러니까, 전하 같은 분께만요.”
“…….”
그녀는 그가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단호히 말했다. 그의 미소도, 다정함도 전부 거짓일 거라곤 생각조차 못 해 본 것처럼. 덕분에 아주 오래전에 죽어 버린 줄 알았던 죄책감이 그의 심장 한 귀퉁이를 찔러 왔다.
“……속은 좀 괜찮아?”
“네. 이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일어나자.”
그는 줄곧 그래 왔듯 이번에도 레냐를 직접 일으켜서 블랙 위에 태워 주었다.
‘내가 어떤 놈인지 알았다면 다정하단 말은 농담으로도 못 했을 텐데.’
그는 그녀의 순진함을 이번에도 비웃었다. 그러곤 그 순진한 약혼녀의 몸이 추락하지 않게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얽어 안은 채, 블랙을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