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록 지금은 작은 솜뭉치지만……!2021.05.11.
일찍이 사교계를 누비고 다니며 레냐 또래의 영애들을 많이 상대해 봤지만, 에드가 관심을 가져줬을 때 경계심을 드러낸 영애는 없었다. 간혹 있더라도 선량하게 꾸며낸 눈웃음 몇 번이면 그들 또한 금방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랬는데…….
“저를 위해 주시는 그 마음은 감사히 받을게요. 하지만 괜찮아요.”
레냐는 그의 걱정을 듣고도 왜인지 더욱 선을 긋듯이 행동했다. 그것도 퍽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서. 어쩌면 그 눈빛이나 피로한 표정 때문에 괜히 그리 느껴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하간, 그녀가 다른 영애들처럼 그의 거짓 다정함에 마냥 속없이 기뻐하지 않았다는 건 에드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오면서 내게 다정하다고 했던 것도 실은 진심이 아니었던 건…… 아니겠지?’
그가 실은 전혀 다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이미 다 알아서, 양심을 자극하고자 일부러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 지나친 해석인 듯하여 곧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이상한 약혼녀야.’
그사이 옷을 전부 벗어 낸 에드는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시종들이 미리 준비해 둔 듯 따뜻한 목욕물과 위스키가 그곳에 있었다. 물에 몸을 담그고, 독한 위스키를 한 모금 삼킬 때도 레냐에 관한 생각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쉽게 보고 방심할 때마다 매번 예상 못 한 반응으로 나를 놀라게 해.’
어떨 땐 세상사를 전부 아는 것처럼 노련하면서도 영리하고, 또 어떨 땐 나이에 걸맞게 허술했다. 그러면서도 또 어떨 땐 오직 증오만 남은 그의 깊은 속까지도 꿰뚫어 보는 듯 보여서…… 그는 혼란스러운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다.
“…….”
문득, 자신이 레냐 생각에만 지나치게 오래 잠겨 있었음을 깨달은 에드는 잔 안에 담겨 있던 위스키를 전부 삼켰다. 그러곤 뜨거운 물에 몸을 깊이 묻은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에드가 준비해 준 최고급 침구는 내 몸을 꼭 구름처럼 감쌌다. 덕분에 나는 누운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났을 때…….
‘몸이 무겁고 추워……. 그리고 숨이…… 숨이 막혀…….’
무거운 뭔가가 몸 전체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잠결에 취한 채라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하여 눈을 떠 보았다.
‘……?! 뱀?!’
눈 뜨자마자 보인 것은 검은색 뱀이었다. 그것이 나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게다가…… 엄청 커……!’
그 거대한 뱀은 제 황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나를 노려보다가, 주둥이를 찢을 듯 크게 벌렸다.
―캬아아!
‘……안, 안 돼……!!’
이대로면 저 거대한 주둥이 속으로 단숨에 삼켜질지도 모른다고, 그리 절망에 잠겼을 때였다. 아름다운 붉은색 새가 예고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것은.
“……?”
돌연 나타난 그 붉은색 새는 홀릴 만큼 우아했고, 동시에 압도될 만큼 커다랬다.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이 넓은 침실이 좁아 보일 정도였다. 덕분에 나를 괴롭히던 뱀도 ‘키이익!’ 기분 나쁜 소릴 내며 단숨에 테라스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휴…….”
비로소 숨쉬기 편해진 나는 정신을 차리고서 새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루비처럼 반짝이는 부리, 공작새처럼 길고 화려한 꽁지깃, 그리고 수천 년의 세월이 깃들어 있는 듯한 깊이의 눈동자……. 새는 어디 한 군데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단연 날개였다.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는 그것의 두 날개를 나는 한참이고 살펴보았다.
‘불꽃…….’
날개가 화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전혀 뜨거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그 불꽃이 뜨겁거나 두렵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포근하게 여겨졌다. 날개에서부터 흩날리는 불씨를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문득 ‘피닉스’라는 것이 떠올랐다. 이 새는 분명 평범한 날짐승이 아니었다. 책이나 영화에서 보곤 했던 전설의 생명체, 피닉스라면 모를까. 어쨌든 화염 날개에 감싸이자 아까까지 느껴지던 한기와 고통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품 안에서 안도하고 있는 사이, 새가 제 고개를 숙여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뺙
“……!!”
순간 놀란 나는 잠에서 번뜩 깨어났다. 일어나 주위를 살피니, 아까 잠들기 전에 본 침실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거대한 뱀과 새가 침입한 흔적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오자마자 악몽이라니.’
악몽이 악몽으로 끝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꿈속에 그 화려한 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필시 뱀의 주둥이에 삼켜졌으리라.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머리 옆에 있던 수건으로 손을 뻗었다. 흥건하게 흐른 식은땀을 닦아 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뺙!!
집어 든 수건에서 노란 솜뭉치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삐약아? 언제 소환됐어?”
방석처럼 수건을 깔고 앉아 있다가 나 때문에 굴러떨어진 삐약이가 뺙뺙대며 항의했다. 나는 그런 삐약이를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너가 날 깨워 준 거야?”
―뺙! 뺩뺩!!
잠에서 깨기 직전에 ‘뺙!’ 소릴 들은 것 같았는데, 삐약이가 내 귓가에 속삭인 소리였나 보다. 즉, 삐약이가 나를 뱀의 악몽으로부터 구해 준 셈이었다.
“고마워. 마침 이상한 꿈 꾸고 있었는데.”
―뺘뺘.
“너 아니었으면 엄청 커다란 뱀한테 삼켜졌을걸?”
―뺘뱌뱌!
자랑스러웠던 걸까? 삐약이는 제 조그만 날개까지 활짝 펼치곤 폴짝폴짝 뛰었다. 덕분에 삐약이의 날개 안쪽이 설핏 드러났고, 거기서 다소 신기한 걸 보게 되었다.
“음?”
평소에는 볼 일이 별로 없었던 그 작은 공간에 웬 뾰족한 가시가 나 있었다.
“이쪽은 솜털이 아니네? 뭐지? 이 뾰족한 거…….”
―뺘?
호기심에 가시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 보니 껍질이 벗겨졌다. 그리고 껍질이 다 벗겨지자, 그것으로 돌돌 말려 있던 붉은색의 깃털이 펼쳐졌다.
“새 깃털……?!”
그러고 보니 언뜻 들은 적 있었다. 처음 깃털이 날 땐 원래 이렇게 껍질에 싸여서 가시 같은 모양으로 자라난다고. 그러다 나중에 껍질이 벗겨지며, 흔히 아는 깃털 모양으로 펴지는 것이다.
“삐약아! 너…… 자라고 있었어?!”
평생 이런 작은 솜뭉치로 남을 것만 같았던 삐약이였는데……. 그런 삐약이가, 깃털이 났다. 어른 새로 성장하는 아기 새들이 그러하듯이. 왜인지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이번엔 꼭 무럭무럭 키워 줄게. 소울스톤도 잔뜩 얻어다가 주고…….”
―뺘!
삐약이는 기뻐하듯 내 어깨로 올라와서 자신의 연노랑 정수리를 부벼 왔다. 그 감동의 순간을 좀 더 즐기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가 분위기를 깨트렸다.
“아가씨, 만찬 때에 입으실 드레스를 가져왔습니다.”
“만찬 드레스……. 응,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다소 어두운 인상의 시녀 둘이 드레스를 가지고 곧장 들어왔다. 그녀들은 삐약이를 힐끔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애완 새인지, 정령인지 묻지도 않고 그냥 관심 자체가 없는 듯 보였다. 나도 잡담을 나눌 필요는 못 느꼈기에 곧장 그들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마련해 주신 거야? 그 드레스.”
“네. 급하게 오셔서 마땅한 드레스가 없을 거라며…… 아가씨께 새 드레스를 건네 드리라 명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드레스를 구해 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 전에 미리 챙겨줄 줄이야. 나는 에드의 센스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볼까?”
시녀들이 옷 커버를 걷어 내자,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드레스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의 색을 확인한 순간 나는―
“…….”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충격이 가시고 나서야 간신히 입술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나 이거 못 입어. 도로 가져가.”
내 대답을 들은 즉시 시녀들의 시선이 살벌하게 돌변했다.
“지금의 그 잠옷 차림으로는 만찬 자리에 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럼 다른 드레스를 가져와. 이 드레스는 절대 안 입을 거니까.”
“안 됩니다. 이미 구매한 드레스를 다른 드레스로 교환해 올 순 없습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이걸 판매한 고급 의상실에서도 그런 황당한 요청은 받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
“입으셔야 합니다. 반드시.”
말투가 무례한 건 둘째치고, 정말 당황스러울 만큼 노골적인 강요였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절대 그 드레스를 몸에 걸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 붉은색 벨벳 드레스, 에드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스위치 같은 거잖아!’
붉은색 벨벳 드레스. 그건 에드를 학대하고, 심지어는 은밀히 암살하려 했던 황후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녀는 장례식에 갈 때를 제외하곤 항상 붉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래서 원작에서 레냐가 뭣 모르고 붉은 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에드는 반발심을 드러냈었다.
[두 번 다신 그렇게 입고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나를 죽이려 들었던 그 끔찍한 여자가 생각나니까.]
그 장면을 떠올린 나는 빠득, 소리가 날 만큼 이를 악물었다.
‘저 애들이 일부러 황후가 입는 드레스랑 비슷한 걸 가져온 건가? 왜지? ……어쨌든, 저딴 걸 입었다간 에드가 나한테 정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야.’
하지만 그걸 알아도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올 때 입고 온 드레스는 지금 먼지투성이였고, 다른 깨끗한 드레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챙긴 건 보석, 구두, 그리고 가방뿐. 그 외의 드레스 같은 건 전부 한나가 챙긴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고민해보고 있는데, 이 이상한 시녀들이 꼭 뭐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굴었다.
“전하의 선물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겠죠?”
“뭐? 전하께서 직접 골라 주신 드레스도 아닐 텐데?”
“하지만 값은 전하께서 지급하셨습니다. 그런 드레스를 거절하는 건, 전하의 성의를 무시하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이쯤 되니 얘들이 슬슬 무서워지려 했다. 건방진 걸 넘어서 살짝 미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얘들을 어쩌지?’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앞둔 까닭에 처음엔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이내 나도 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소리는……?!’
탁탁탁탁. 뭔가가 아주 빠르게 땅을 박차며 달려오는 듯한 소리였다. 이 이상한 시녀들 귀에도 들리는 듯,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마침내 소리의 정체를 파악해 냈다.
‘한나의 정령…… 바이올렛의 발소리야……!!’
나는 이상한 시녀들을 밀치고서 문을 활짝 열었다. 역시나, 반가운 보라색 타조가 복도 끝에서부터 이곳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한나!!”
“아가씨!!”
마침내 도착한 한나가 내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바이올렛의 등에서 내려서자마자 내 손부터 반갑게 붙잡았다.
“세상에, 저보다 늦게 출발하셨는데도 먼저 도착하셨군요?”
“응, 에드 전하의 정령이 굉장히 빨랐거든.”
“아가씨께서 편히 쉬실 수 있게끔 미리 와서 준비해 뒀어야 했는데…… 드레스까지 전부 제가 가지고 있어서 곤란하셨겠어요.”
“아니야. 곤란할 뻔했는데, 그러기 전에 딱 맞춰서 와 줬어.”
나는 한나의 손을 놓아준 뒤, 뒤돌아서 이상한 시녀들을 노려보았다. 내 눈빛을 보고 한나도 무언가 느낀 듯 물었다.
“그런데 저 애들은 뭔가요? 뭔데 저렇게 아니꼬운 표정으로 서 있죠?”
“아, 쟤들?”
나는 곧 내 방식대로 그들을 소개했다.
“지들이 사 온 이상한 드레스를 입으라고 나한테 자꾸 강요하더라고? 아주 못된 애들이야.”
“역시 못된 애들이었네요! 어쩐지 그래 보이더라니……!”
“응. 당장 내쫓아 버리자. 만찬 자리에 늦지 않으려면 빨리 준비해야 하니까.”
어차피 저들 얼굴은 확실히 외워 뒀다. 그러니 나중에 언제든 에드에게 이번 일을 알리기만 하면, 저들을 찾아내서 해고할 수 있었다. 만찬 시간이 코앞인 지금은 일단 채비에 집중해야 했다. 한나도 내 그런 뜻을 알아챈 듯, 자신의 정령인 바이올렛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갔다.
“너희,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