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역시 네가 범인이구나……!2021.05.18.
아멜리 다음으로 자신을 소개하고자 일어난 그 기사는 반짝이는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껄렁한 느낌의 미남자였다. 여기 사용인들은 참 개성들이 뚜렷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기사들이 자신의 멋진 기사도를 보여 주고 싶을 때마다 하는 그 ‘손등 키스’를 내게 건넸다.
“저는 알렉시스. 얼마 전에 등급 심사에 통과하여, 지금은 상급 정령 기사입니다. 아름다운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놀랄 틈도 없었다. 그가 자기소개하는 순간, 왜인지 심장 부근이 욱신거렸던 까닭에.
‘뭐지, 이 느낌은…….’
알렉시스는 입 맞춘 후에도 내 손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제국에서 손등 키스는 흔한 인사법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오래 손을 잡는 건 드물었다. 심장이 자꾸 쿵쿵대서 손을 뿌리칠 생각도 못 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옆에서 꽂혀 오는 에드의 시선 덕분이었다.
“…….”
에드가 말 한마디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차, 싶어서 알렉시스의 손을 살짝 뿌리치듯 놓았다.
“그래요, 알렉시스. 저도 당신을 만나서 기뻐요.”
기사들은 일개 사용인이라기보단, 가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에 더 가까웠다. 그런 까닭에 나도 적절히 예를 갖춰서 높임말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뒤 다시 살짝 에드를 살폈는데, 그는 어느새 도로 앞쪽을 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손잡고 있었나? 에드가 무심한 편이라 다행이야.’
아마 다른 남자였다면 한마디 했을지도 몰랐다. 무심한 에드는 그냥 시선으로만 경고하고 넘어가기로 한 듯했다.
‘그런데 알렉시스라……. 상급 정령 기사 정도면 원작에서 한두 번은 언급됐을 법도 한데…… 왜 본 기억이 없지?’
제국에선 기사들이 지닌 정령의 힘이나 검 숙련도 등을 종합적으로 심사하여, 그에 맞는 등급을 부여하고 있었다. 공작 같은 ‘최상급’ 정령 기사는 국가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고, 그 바로 아래 단계가 ‘상급’이었다. 최상급보다는 못해도 상급이면 꽤 강한 편이라, 원작 후반부의 전쟁 장면에서라도 한 번쯤 등장했어야 옳았다.
‘이상하네. 게다가 이 기묘한 두근거림은 또 뭐고.’
이상할 정도로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중, 갑자기 에드가 내 손목을 붙잡아 왔다. 어쩐지 그의 손아귀에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안색이 좀 안 좋아진 거 같은데, 괜찮아?”
“네? 아, 괜찮아요. 그냥 가슴이 조금 답답해서요.”
“……가슴이?”
“살짝 답답하고, 심장도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것 같아요.”
“…….”
그가 무언가 생각하듯 미간에 옅은 주름을 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린다라……. 혹시 알렉시스 때문인가?”
“……? 네?”
“상급 정령 기사잖아.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그 강한 기운 때문에 곁에 있기만 해도 버거워한다고 들었거든.”
“……그런 얘기가 있던가요?”
“나도 누가 흘린 얘길 대충 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알렉시스는 내보내는 게 좋겠어.”
“……?!”
그의 섬세하지 못한 해결 방안을 들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니, 나 때문에 만찬 시작하자마자 알렉시스를 혼자 내보낸다고? 그건 좀 너무하지! 두근거린 건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는 건데!’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즐길 때 혼자 쫓겨나면 알렉시스의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이었다.
“아뇨, 그렇게까지 할 필욘…….”
“알렉시스, 나가라. 네 기운 때문에 레냐가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까.”
역시나 에드의 명령을 들은 알렉시스는 심장에 라이트 훅이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상처받은 눈을 했다.
“제 정령의 기운 때문에 불편하셨습니까? 이런……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어서 나가도록 해.”
에드의 대답이 너무 단호해서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에드에게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 지금은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닙니다, 아가씨. 저 때문에 괜찮은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음식은 그냥 제 방에서 따로 먹어도 됩니다.”
“…….”
“그럼, 이만.”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알렉시스가 알아서 떠나 버렸다. 혼자서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정말로 쓸쓸해 보였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했냐는 원망의 시선으로 에드를 보았는데, 그는 되레 내 쪽으로 웃어 보였다. 본인이 잘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괜히 마음 찜찜하게…….’
나도 어쩔 수 없이 에드에게 마주 웃어주긴 했지만, 역시 찜찜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술이 좀 들어가니 그런 죄책감도 슬슬 지워졌다.
‘나중에 마주쳤을 때 잘해 주면 되겠지. 그리고 내가 내쫓은 것도 아니고 에드가 나가라고 한 건데, 뭐.’
그 뒤로도 알렉시스 생각에 마음이 찜찜해지려 할 때마다 술을 삼켰다. 그러다 너무 취하면 연습도 할 겸, 성력을 써서 다시 술기운을 지워냈다. 그리 부어라 마셔라 소란한 가운데 이곳에서의 첫날이 저물어 갔다. * * * 술을 마시면서 중간중간 성력으로 피를 정화한 덕분에 숙취는 전혀 없었다. 대신 피로감이 굉장했다. 아직 성력 운용에 서투른 주제에 힘을 낭비한 탓일 터였다. 그래서 이튿날은 삐약이랑 뒹굴거리며 그냥 쉬었다. 침실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또 하루 뒤, 킬리안이 나를 찾아와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아가씨와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한가할 때를 알려달라는, 전하의 전언입니다.”
“한, 한가할 때?”
나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한가하기만 한 내게 한가할 때를 알려 달라니. 에드의 그 말은 꼭 내 한가한 처지를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물론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찔렸던 나는 아침부터 부랴부랴 준비하고서 직접 에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 와중에 작은 문제가 하나 또 생겼는데, 집무실 바로 앞에서 달갑지 않은 인물을 마주쳤다는 것이었다.
‘이시스다. 근데 표정이……?’
그는 누구 하나 죽일 듯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에드의 집무실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나를 발견하곤 가식의 미소를 얼굴에 둘렀다.
‘와……. 어떻게 바로 저렇게 웃지? 분명 방금까진 험악하게 인상 쓰고 있었으면서.’
역시 소름 끼치는 인간이었다. 웬만하면 그냥 지나가고 싶었으나, 결국 이시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응, 전하께서 많이 배려해주신 덕분에. 그런데 이시스는…… 별로 그러지 못했던 것 같네? 혹시 화나는 일 있었어?”
“…….”
“방금 표정이 안 좋았던 것 같아서.”
그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그럴 리가요. 아가씨께서 오신 뒤로 즐거운 일뿐인데…….”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으나 눈빛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 또한 밝게 웃었다.
“즐겁다니 다행이야. 방금까지 무서운 표정 하고 있길래 많이 걱정했거든.”
“…….”
“그럼 난 이만 전하께 가 봐야 해서…….”
그를 지나쳐서 에드의 집무실로 들어서려던 때였다.
“아가씨.”
뒤돌아보니 그의 흉흉한 시선이 아직도 내게 꽂혀 있었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전하께선 가끔 속마음을 감쪽같이 감추시니까요.”
“…….”
“비록 지금은 온 세상을 다 갖다 바칠 것처럼 다정하셔도…… 그 행동을 오롯이 믿으셨다간 크게 상처받게 될지도 모르죠.”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야? 에드 전하께서 내게 진심이 아닐 거라고……?”
에드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구태여 내게 그걸 말하는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역시나 썩 좋지 않은 의도가 있었던 듯, 그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번졌다.
“전 단지 레냐 아가씨처럼 여린 분께서 행여나 상처받으실까 걱정되어 드린 충고랍니다.”
“…….”
그의 말을 다 듣고도 크게 반응해주지는 않았다.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행동이므로. 나는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 단언하는데, 내가 이시스보다 전하를 더 잘 알고 있으니까.”
“…….”
“그리고 여리지도 않고.”
내 도발적인 언사에 그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내 픽, 웃으면서 뒤돌아 걸어갔다.
‘허세라고 여기는 모양이네. 그게 아니란 걸 곧 알게 되겠지만.’
스무 살밖에 안 된 여자가, 비록 약혼했다고는 하나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잘 안다고 말하니 허세처럼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몸소 보여 주리라. 내가 책 빙의자인 이상 에드에 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그땐 부디 그 비열한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들기를 기도하며, 에드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레냐, 밖에서 이시스랑 마주쳤어? 말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귀 밝은 에드가 우리 대화를 얼추 들은 듯 곧장 그렇게 물어 왔다. 숨길 수도 없고, 숨길 필요도 없으므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복도에서 잠깐 얘길 나눠 봤는데,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전하의 다정함을 너무 믿진 말라고…… 그런 충고를 다 해 주고.”
“……뭐? 이시스가 그랬다고?”
“이시스 눈엔 제가 어리고 불안해 보였나 봐요. 그래서 걱정되는 마음으로 해 준 충고였겠죠.”
두둔해 주는 척하며 슬쩍 이시스의 행동을 까발린 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에드의 눈빛에서 벌써 미미한 노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이시스를 향한 불신을 키워 주면 될 듯했다.
“그런데 저와 나눠야 할 중요한 이야기라는 게 뭔가요?”
“아, 웨스틸 광산을 오염시킨 게 뭔지 조사해 봤는데, 사람이 아니더라고.”
방금 그가 말한 것은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뿐일까? 나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이미 알았다. 하지만 다 안다고 할 순 없으니, 연기력을 쥐어 짜내며 놀란 척했다.
“……세상에, 사람이 아니었다고요?! 그럼 대체 뭐였죠?!”
“누군가가 불법적으로 소환한 중급 마족의 짓이었나 봐. 아주 심각한 사안인 거지.”
그는 태연하게도 ‘누군가 소환한 중급 마족’이라고만 말했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저렇게 말하다니. 나는 새삼 그의 연기력이 나 못지않게 뛰어남을 느꼈다. 왜냐하면 중급 마족으로 광산을 오염시킨 그 누군가는―
‘자기가 고대 유물까지 써서 계획적으로 소환한 거면서 아닌 척은…….’
다름 아닌 에드 자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