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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남주가 제 약혼자를 노린다고요? (18/102)

18. 남주가 제 약혼자를 노린다고요?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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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여 걸음을 멈추고서 그들을 기다려 주었다. 역시나 킬리안을 시작으로 기사들 전원이 나를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킬리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16567315839862.jpg“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감사드립니다.”

16567315839866.jpg“……?”

16567315839862.jpg“처음 전하께서 다짜고짜 약혼한다고 말씀하셨을 땐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야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가씨만큼 훌륭하신 분을 안주인님으로 모시게 되어서 정말로 기쁩니다.”

에드의 무기에 축복을 내려 준 것, 이시스의 수하를 찾아 준 것, 그 밖의 기타 등등에 대한 감사 인사인 듯했다. 나는 괜스레 그들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16567315839866.jpg‘안주인이라니……. 살짝 찔리네. 여기서 평생 지낼 것도 아닌데 너무 호감을 샀나.’

내가 결혼을 결심한 건 에드를 갱생시키고 암울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사랑할 계획이 없으니, 이혼 도장을 찍는 순간이 언젠간 올 터였다. 나와 그들의 이별은 일찌감치 예정돼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16567315839866.jpg‘이제부터라도 적당히 거리를 둬야겠어. 애정이 클수록 이별도 아픈 법이니까.’

킬리안이 나와 이별할 순간에 상처받길 원치 않았다. 그러기엔 좋은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터 투덜거리는 투로 툭, 대꾸했다.

16567315839866.jpg“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냥 내 안위를 위해서 한 일일 뿐인데 뭐.”

16567315839862.jpg“겸손하시기까지…….”

16567315839866.jpg“겸손 떠는 거 아니야. 이번엔 이시스가 내게 해코지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잖아. 당연히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

16567315839862.jpg“정말 그 말씀대로 아가씨 본인의 안위만을 신경 쓰셨다면, 아예 이곳에서 도망치셨을 겁니다.”

킬리안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서 나는 한순간 멍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주장은 막힘 없이 이어져 나왔다.

16567315839862.jpg“위험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은 애초에 위험한 것과 엮이지 않는 거니까요. 하지만 아가씨께선 여기 남아서 위험과 싸우길 택하셨습니다.”

16567315839866.jpg“…….”

16567315839862.jpg“그리고 그런 선택이 가능했던 건, 에드 전하를 비롯한 이 궁에 나름 애정을 품고 계셨기 때문이겠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번에도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정곡을 제대로 찔려 버렸으니까.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나는 에드를 아꼈고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킬리안 말대로 그 감정이 마음 기저에 옅게나마 깔려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내가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구하지 않고 굳이 이 황자궁에서 버티고 있는 것은.

16567315839866.jpg“……킬리안, 몰랐는데 은근히 달변가였구나? 토론이라도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어.”

16567315839862.jpg“칭찬 감사합니다. 어쨌든 부디 아가씨를 모신 것을 제 삶의 축복으로 여길 수 있게 해주시길…….”

16567315839866.jpg“으음……. 알겠어, 그럼. 원하는 대로 생각해 줘.”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씐 상황. 여기선 내가 진짜 악역처럼 패악질을 부려도 ‘오구 오구 잘한다~’ 소리만 들을 것이 분명했다.

16567315839866.jpg‘정 떼기는 천천히 하자. 어차피 이혼 도장 찍으려면 멀었으니까.’

피곤했던 나는 그 어려운 숙제를 미래의 나에게로 패스해버렸다. 그러곤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안락한 그곳, 침실을 향해서. * * * 따스한 노을빛이 내려앉은 어느 광산 현장. 유독 이질적으로 보이는 생명체 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16567315853548.jpg―키에에엑!!

거대한 박쥐인지 새인지 모를 그것, 중급 마족은 얇은 피막 날개를 펼치며 발악했다. 그러나 이미 찢겨 나가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펼친다 한들, 상대를 위협할 순 없었다. 그저 동정심만 유발할 뿐. 마족을 그 지경까지 몰아붙인 장본인인 에드가 그사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67315853553.jpg“지금이다. 어서 마력을 거둬들여라.”

16567315853548.jpg―크르르르…….

분하다는 듯 이 가는 소릴 내면서도, 마족은 자신을 소환하고 굴복시킨 에드에게 거역하지 못했다. 결국 그 명령대로 제 마력을 거두기 시작하자, 변화를 눈치챈 기사들이 뒤에서 환호했다.

16567315867037.jpg“마력이! 마력이 사라져 갑니다!”

16567315867037.jpg“광산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어요!”

16567315867037.jpg“조금만 더!!”

사악한 기운을 발하던 광산이 마침내 완벽하게 옛 색을 되찾았다. 이 모든 것이 꾸며진 연극에 불과함을 모르는 기사들은 경이로운 장면을 본 것처럼 더욱 큰 소리로 환호를 내질렀다.

16567315867037.jpg“됐다!!”

16567315867037.jpg“전하께서 마족을 해치우고 소울스톤 광산을 구하셨다!!”

16567315867105.jpg“와아아!!”

그 환호성 속에서 에드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었다.

16567315853553.jpg‘이걸로 제일 큰 문제는 해결됐나?’

황제가 결혼 승낙 조건으로 내건 것은 광산을 정화하라는 것뿐. 그 방법에 대해선 제한을 두지 않았으니, 결국 그는 이 결혼을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즉, 에드 자신이 레냐를 정식으로 아내로 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직 사소한 문제점이 하나 남아 있기는 했다. 그는 그 문제점…… 눈앞에 있는 마족을 응시했다.

16567315853553.jpg‘살려 두면 골치 아파지겠지.’

산 채로 붙잡아 뒀다간 나중에 황실에서 조사해 보겠다며 마족을 넘기라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황혼의 열쇠를 다시 써서 마계로 보내자니, 현재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하급 마족과 달리 중급은 자아가 어느 정도 있는지라 마족들의 대의를 위해 스스로 이 연극에 협력해 준 것이겠지만…….

16567315853553.jpg‘어쩔 수 없겠어.’

뒤탈 없게 하려면 해치워야만 한다- 그리 판단한 에드는 블랙을 타고서 상공으로 올라갔다가, 빠르게 하강하며 창으로 마족의 머리를 꿰뚫었다. 마족은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하게 되었다.

16567315867105.jpg“해치웠다!!”

16567315867105.jpg“와아아아!!”

그의 수하들은 모두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그를 맞이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이시스 만은 불만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쓸모 있던 마족을 해치워서 속이 뒤틀린 듯했다. 에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 하곤 시선을 돌렸다. 그때, 알렉시스가 다가와선 에드를 불렀다.

16567315880805.jpg“전하, 인근 마을 주민들이 감사의 뜻으로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합니다.”

알렉시스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엔 아까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 중이던 마을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오염된 광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에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차마 정든 고향을 떠나지 못하여 버티던 이들이었다. 에드 덕분에 고향을 되찾았으니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들을 보여 준 뒤 알렉시스가 넌지시 물었다.

16567315880805.jpg“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6567315853553.jpg“흠…… 마음은 고맙지만, 시간이 없다고 전해라.”

16567315880805.jpg“곧장 돌아가시겠습니까?”

16567315853553.jpg“그래. 궁에 사랑스러운 자식들……은 없어도, 사랑스러운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거.”

에드는 도중에 말을 끊고서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이어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푸른 광물이었다. 달빛처럼 신비롭고도 은은한 빛이 광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빛을 본 알렉시스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16567315880805.jpg“그, 그건…… 소울스톤? 게다가 상등품 아닙니까……?!”

16567315853553.jpg“그래. 아까 챙긴 기념품이다. 이걸 약혼녀에게 빨리 전해 주고 싶거든.”

레냐를 처음 만난 날부터 에드는 파악했다. 그녀의 정령이 썩 강한 정령은 아니라는 사실을. 만약 강한 정령을 가졌다면 그녀는 당장 그에게 자랑하듯 제 정령을 보여 줬을 테니까.

16567315853553.jpg‘아마 보여주기도 부끄러울 만큼 약한 정령을 지녔겠지. 하지만 이거면…….’

에드는 손에 쥔 소울스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마족을 끄집어내고자 광산에 들어갔을 때 벽에 박혀 있던 걸 우연히 발견하여 캐내 온 것이었다. 운 좋게 갖게 된 이 상등품 소울스톤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그 어떤 약해빠진 정령도 평균적인 수준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

16567315853553.jpg‘치유 물약과 간식에 대한 감사 인사는 이 정도면 되겠지.’

사실 답례로 주기엔 지나치게 비싼 물건이지만…… 그래도 그는 이것을 꼭 선물하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서 도넛은 단순히 맛있는 빵을 넘어, 새로운 맛의 세계를 열어 준 획기적 디저트인 까닭이었다. * * * 에드가 귀환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더 동쪽에 위치하는 예르타 신성국은 고요한 밤에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신성국의 심장 역할을 하는 빛의 신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곳의 신관들도, 신자들도, 온종일 펴놨던 성서를 덮고서 하나둘 잠자리에 들어서고 있었다. 단, 요즘 들어 걱정이 많았던 교황 ‘안톤’만은 예외였다.

16567315867037.jpg“후우…….”

갑갑한 마음에 잠들지도 못한 채, 그는 빈 예배당만 정처 없이 서성거렸다. 그때 기다렸던 인물이 때맞춰 그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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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7315895052.jpg“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리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이는 어느 젊은 신성 기사로, 예르타에서도 그 인기와 명성이 자자한 자였다. 예르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기사이자, 동시에 안톤의 친동생이기도 한 까닭에. 곧 안톤이 나지막하게 그자의 이름을 불렀다.

16567315867037.jpg“루카스…….”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그 순간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루카스의 숙인 등 위로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안톤은 생각했다. 먼 옛날 자취를 감췄다던 아름다운 천족들의 모습이 아마 저랬을 것이라고. 어둠을 녹여낸 듯 새카만 머리카락도, 짐승의 그것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도, 루카스가 지닌 고고한 분위기 속에선 그저 거룩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쯤에서 안톤은 쓸데없는 생각을 접곤 루카스를 향해 말했다.

16567315867037.jpg“고개를 들어라, 동생아. 매일 그렇게 번거롭게 무릎 굽혀 인사할 필요 없다.”

16567315895052.jpg“번거롭다고 마음대로 생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올바른 예법이야말로 정의롭고 강한 마음을 기르기 위한…….”

16567315867037.jpg“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안다. 네가 매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했으니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안톤은 고지식한 동생을 볼 때마다 매번 살갑게 좀 굴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물론 그 부탁도 고지식하다 못해 꽉 막힌 동생에겐 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건 루카스는 그를 형이 아닌, 교황으로만 대할 뿐이었다. 덕분에 안톤의 입술 새로 익숙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16567315867037.jpg“그렇게 똑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앵무새가 돼 버리진 않을지 걱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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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7315867037.jpg“……농담도 받아 주질 않는군. 하긴, 지금이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니긴 하지.”

안톤이 머쓱하게 그리 말하고서야 루카스가 고갤 들어 올렸다.

16567315895052.jpg“무슨 말씀입니까?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16567315867037.jpg“방금, 제국에서 마계로 통하는 통로가 열렸다.”

16567315895052.jpg“……흑마법사가 마족을 소환한 것입니까?”

16567315867037.jpg“아마도. 아니면 그 반대로 누군가 마족을 퇴치해서 그 영혼이 마계로 역소환된 것일지도 모르지.”

교황이라 하더라도 만능은 아니었다. 특히나 안톤은 장남이라는 이유로 교황위를 계승 받은 경우라, 성력 면에선 루카스보다 못했다. 물론 루카스보다 빼어난 성력을 지녔대도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을 것이었다. 그 먼 제국에서 발생한 마력의 움직임을 정확히 감지하고 파악하는 건 성력과 관계없이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그리고 안톤은 그 사실을 솔직하게 밝혔다.

16567315867037.jpg“제대로 알려면 직접 가봐야 해. 나를 포함한 신전의 모든 신관이 온 정신을 집중해서 마력을 감지해 봤자 여기선 한계가 있으니까.”

16567315895052.jpg“……그렇군요. 결론은, 제가 제국으로 가길 바라십니까?”

본인이 불려온 이유를 정확히 추측한 루카스였다. 안톤은 짧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16567315867037.jpg“그래. 이때까진 타국의 일이라 신중히 지켜봤지만, 이 이상 뒷짐 지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구나. 제국에서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라.”

16567315895052.jpg“…….”

16567315867037.jpg“그리고 이건 중요하다고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랄 만큼 중요한 일이지. 뭣 모르는 어린애나, 다 늙어서 비실거리는 원로들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니야.”

16567315895052.jpg“……원로님들을 그렇게 표현하지 마십시오.”

16567315867037.jpg“내가 믿을 것은 너뿐이다. 네가 가 주었으면 한다, 루카스.”

안톤은 곧 루카스에게 다가가서 진중한 태도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16567315867037.jpg“부탁하마. 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와 다오.”

루카스는 제 손을 붙잡은 형의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그 목석같은 얼굴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스치지 않고 있었다.

16567315895052.jpg“부탁하실 일이 아닙니다. 교황으로서 명령을 내리십시오.”

16567315867037.jpg“루카스…….”

16567315895052.jpg“당신은 저의 형님이기 전에, 신성국을 이끄는 수장이십니다. 제가 당신의 동생이기 전에, 신성국을 지키는 기사이듯이.”

16567315867037.jpg“…….”

한결같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을 거라고 한탄하며 안톤이 세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16567315867037.jpg“그래, 내가 졌다. 제국에 가서 누가 자꾸 마족을 소환하는 건지 알아보고… 그다음 무사히 귀환해라.”

16567315895052.jpg“…….”

16567315867037.jpg“덧붙이자면 이건 명령이다. 네가 그렇게 원했던 대로.”

안톤은 ‘이런 명령 성애자 같으니’……라고 덧붙이려다가 관뒀다. 자신이 아는 루카스라면 분명 ‘방금 저를 명령을 받고 흥분하는 특이 성애자로 매도하셨습니까?’ 하고,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따질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안톤이 명령을 내리고서야 비로소 루카스는 만족한 듯 걸음을 움직였다. 레냐가 원작이라 부르는 세계에서 그가 부여받았던 역할, ‘남자 주인공’에 걸맞은 자리로 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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