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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었는데……. (23/102)

23.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었는데…….2021.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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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레냐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에드를 악역에서 ‘해방’시켜 주겠노라고……. 에드는 꿈속 레냐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레냐를 끌어안고 있고, 왜 레냐가 곧 죽을 것같이 창백한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16567316556644.jpg‘……나를 사랑했었어.’

그녀가 에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냘픈 몸이 기울어지고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나오는 중에도, 그녀는 그만을 오롯이 바라보았다. 한 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레냐에게서 흐른 핏물이 그녀를 안은 에드의 손까지도 적신 순간, 그는 제 심장이 짓이겨진 것처럼 절규했다.  

16567316556644.jpg“뱉어!! 당장!!”

16567316556658.jpg“미안해……. 고민해 봤는데 역시… 타라가 있는 곳은 알려 줄 수 없어……. 나도… 마지막까지 악역으로 남긴 싫으니까…….”

16567316556644.jpg“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독약부터 뱉어!!”

16567316556658.jpg“그리고 네가 그 애를 죽이게끔 둘 수도… 없어……. 그럼 넌, 진짜로 악당이 되잖아…….”

  평소엔 그토록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던 그녀였는데. 정작 가장 필사적으로 내지른 부탁은 외면했다. 그런 그녀가 너무도 야속하게 느껴져서, 그는 말 한마디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16567316556644.jpg‘날 사랑하던 게 아니었어?’

16567316556644.jpg‘악역에서 해방……? 네가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16567316556644.jpg‘정말 날 사랑하면 내 곁에 끝까지 남아줘야지.’

16567316556644.jpg‘나를…… 이렇게 혼자 두고 떠나면 안 되잖아.’

16567316556644.jpg‘그러니까 가지 마.’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말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녀의 귓가에는 닿지 못했을 듯했다. 그녀의 생명은 이미 꺼져가고 있었으므로. 그를 볼 때마다 수줍게 붉어졌던 그녀의 뺨이 지금은 달빛처럼 창백했다. 죽음이 드리워진 그 창백한 뺨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그걸 다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못했다.  

16567316556644.jpg‘내 허락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

  그는 그녀의 죽어 가는 몸뚱이를 집착적으로 끌어안고서 온갖 마법을 걸어댔다. 속에 남아 있던 독을 제거하고, 멈춰가는 심장에 억지로 압력을 가하여 뛰게 했다. 이미 멈춘 폐에 공기를 불어 넣고, 벌써 혈액에 다 퍼져버린 독을 정화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마법도 그 순간에는 쓸모가 없었다.  

16567316556644.jpg“레……냐……?”

  제게 안겨있던 그녀의 숨이 끊어진 것을 그가 본능적으로 느꼈을 때, 그 또한 숨을 쉴 수 없었다. 심장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갈기갈기 찢어내는 고통에 숨을 헐떡이기만 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흘러나온 것은 원망의 말도 아니었고, 분노의 외침은 더더욱 아니었다.  

16567316556644.jpg“제발…….”

  생전 처음으로 그는 무릎을 꿇고서 애원했다.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네 애정을 못 본척해서 미안하다고 드물게 사과도 건넸다. 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사적인 감정을 품으면 내 복수심이 흐려질까 봐 그 마음을 눌러 감췄을 뿐이라는 고백도 했다. 물론 그토록 열심히 쏟아낸 말들도, 결국엔 망자를 앞에 두고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이 되었을 뿐이었다.

16567316556644.jpg“……!!”

꿈에서 깨어난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정신이 덜 든 그는 제 옆에 있어야 할 레냐의 육신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고, 그 자신도 침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비로소 그는 방금 본 그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6567316556644.jpg‘……뭐였지?’

웬만해선 꿈을 잘 안 꾸던 그가 꿈을 꿨다는 것도 이상했는데, 그 내용은 더욱더 이상했다. 레냐가 품 안에서 죽는 꿈이라니. 게다가 그 순간에 느껴졌던 그 생생한 슬픔과 고통…….

16567316556644.jpg‘이상해…….’

마치 속을 날붙이로 긁어내리는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이 아직도 기억났다. 고통뿐일까? 그녀에게 품고 있던 애정 또한 여전히 생생하게 심장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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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7316556644.jpg“…….”

그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던 때, 노크소리와 함께 킬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7316573456.jpg“전하? 기상하셨습니까?”

16567316556644.jpg“……그래. 들어와.”

에드의 아침 채비를 돕고자 들어왔던 킬리안이 에드를 보고서 흠칫 놀랐다. 그는 다소 머뭇거리다가, 넌지시 손수건을 내밀었다.

16567316573456.jpg“눈가에…….”

16567316556644.jpg“음?”

거울을 보고서야 뒤늦게 에드는 제 젖은 눈가를 발견했다. 한 번도 이런 모습 보인 적 없건만. 자다가 흐른 생리적인 눈물이든 뭐든 이런 꼴을 보인 것이 다소 부끄러웠던 탓에, 그는 급히 눈가를 닦아냈다. 그러곤 손수건을 도로 킬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

16567316556644.jpg“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 그보다…….”

16567316573456.jpg“예?”

16567316556644.jpg“편지는 안 왔나?”

에드가 무엇을 묻는지 알아챈 킬리안이 곧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16567316573456.jpg“아직 공작성에 도착 못 하셨나 봅니다.”

16567316556644.jpg“쯧. 쓸데없이 느려서는…….”

사실 그 먼 거리를 하루 안에 갈 수 있는 이는 에드가 유일했다. 보통은 사흘 안에만 도착해도 굉장히 빠른 것이지만, 킬리안은 구태여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에드 또한 다 알면서도 괜히 답답한 마음에 꺼낸 말일 것이므로. 역시나 그랬던 듯 그가 셔츠를 벗어내며 킬리안에게 말했다.

16567316556644.jpg“편지가 오면 즉시 내게 가져오도록.”

16567316573456.jpg“예, 곧장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에드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오늘도 레냐가 없는 하루를 시작하고자, 아침 채비를 시작했다. * * * 알렉시스 말대로 시장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고, 그동안 나는 카롤라의 호위를 받으며 근처 노점상을 구경했다. 마침 유랑 상인들이 시장에 들른 날이라서 볼거리가 정말로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구경하며 잡담을 나누다가, 뜻밖에도 카롤라에 대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16567316556658.jpg“원래 있던 최연소 중급 기사보다 카롤라가 더 어리다고요? 그 말은…… 지금은 카롤라가 중급 기사 중 최연소라는 거네요? 대단해요!!”

내 칭찬을 들은 카롤라가 뺨을 자신의 머리 색만큼이나 빨갛게 물들였다.

16567316603971.jpg“아뇨, 어린 나이에 조금 잘 됐다고 으스댈 순 없죠. 저보다 더 대단한 분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

16567316556658.jpg“……?”

16567316603971.jpg“소문으로 다 들었습니다. 아가씨께서 무기 축복에 이어서 치유의 물약까지 척척 만드시는, 천재 중 천재란 이야기.”

천재라니. 카롤라의 입에서 나온 그 대단스러운 호칭에 나는 숨을 컥 들이쉬었다.

16567316556658.jpg“그, 그 일이 벌써 기사단에까지 알려졌나요?”

16567316603971.jpg“예, 킬리안 씨가 아가씨 칭송을 거의 하루에 다섯 번은 하니까요.”

16567316556658.jpg“아아앗…….”

카롤라 못지않게 내 뺨도 붉게 물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롤라는 동경심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내게 쏘아 왔다.

16567316603971.jpg“그래서 이번 호위 임무를 받았을 때도 내심 정말 기뻤습니다. 그 소문의 아가씨를 가까이서 뵐 수 있겠다 싶어서요.”

16567316556658.jpg“아아……. 그래서 저, 소문으로 듣던 것에 비해 어떤가요?”

내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카롤라가 이윽고 대답했다.

16567316603971.jpg“성력을 본격적으로 쓰시는 모습은 아직 못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저희를 이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분은 아가씨가 처음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고맙다고 꼬박꼬박 말씀해 주시는 분도요.”

어느새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똑바로 돌리고서 진지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16567316603971.jpg“그러니 설령 아가씨께 성력이라는 특별한 힘이 없었다고 해도, 전 아가씨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모셨을 것 같습니다. 확신할 수 있어요.”

16567316556658.jpg“카롤라 경…….”

신분제에 익숙한 이곳 귀족들이 기사들에게까지 친절했을 것 같진 않으니, 그래서 더욱 내 별것 아닌 행동도 좋게 봤던 걸까? 어쨌든 감동에 젖은 나는 그녀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16567316556658.jpg“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우정의 선물을 드릴게요.”

16567316603971.jpg“선물이요?”

16567316556658.jpg“네, 여기 보세요. 신기하게 생긴 단검이 되게 많아요.”

나는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던 노점상을 가리켰다. 낡은 망토를 뒤집어쓴 노파가 단검들을 죽 늘어놓고 파는 노점상이었다. 깨끗한 새것부터, 너무 오래돼서 무언가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을 듯한 것까지…….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검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카롤라는 장신구보단 이런 걸 더 좋아할 것 같았는데, 예상대로 그녀의 눈빛이 금방 초롱초롱해졌다.

16567316603971.jpg“오오? 단검을 이렇게 파는 곳은 흔치 않은데 신기하네요. 게다가 외국에서 들여온 것처럼 보이는 것도 엄청 많고.”

16567316556658.jpg“하나 골라 보세요. 마침 저도 계속 눈에 들어오는 게 있어서 사려고 했거든요.”

아까 그 남자가 불길한 기운이 어쩌고저쩌고했던 게 나도 내심 걸렸었나 보다. 평소엔 관심도 없던 호신용품에 자꾸 눈이 갔다. 그사이 카롤라는 열심히 단검들을 살폈다.

16567316603971.jpg“그럼 선물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테니…… 전 이 하얀 녀석으로 고르겠습니다. 아가씨께선 어떤 걸 고르시려고요?”

16567316556658.jpg“전 이거요.”

내가 골라서 보여 준 건 카롤라가 고른 하얗고 멋진 단검에 비하면 무척 초라한 물건이었다.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손잡이는 다 헤져있고, 날에도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역시나 기사가 보기에도 별로였는지 카롤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16567316603971.jpg“너무 낡지 않았을까요? 다른 좋은 것도 많은데…….”

16567316556658.jpg“그렇긴 한데, 아까 봤을 때부터 계속 눈에 들어와서요.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인연…같은 게 느껴졌다고 할까요? 게다가 여길 보세요.”

나는 손잡이 끝부분을 그녀에게 자세히 보여 주었다.

16567316556658.jpg“여기, 아주 작은 보석이 박혀 있어요. 그리고 옆엔 신기한 문자들이 작게 적혀 있고요. 무슨 사연이 있는 물건일까요?”

왜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이런 노점상 물건엔 기묘한 사연이 깃들어 있지 않던가. 이것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던 나는 노파에게 물었다.

16567316556658.jpg“이거 어디서 구하셨어요?”

노파는 그저 나를 힐끔, 보고는 옆에 있던 가격표의 가격을 가리켰다. 뜻 모를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 서 있자 카롤라가 옆에서 설명했다.

16567316603971.jpg“귀가 안 들리나 봅니다.”

16567316556658.jpg“아아…….”

귀가 안 들리니, 내가 가격을 묻는 줄 알고서 가격표를 가리킨 듯했다. 그렇다면 이 단검에 깃든 사연은 듣기 어려울 터였다. 그러던 중, 단검을 빤히 살펴보던 카롤라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 왔다.

16567316603971.jpg“음? 그런데 이거…… 잘 보니 고대의 문자 같은데요? 제가 전에 모시던 백작가 도련님이 고대어를 배우실 때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어서요.”

16567316556658.jpg“고대의 문자요? 혹시 뭐라고 적혀 있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글자를 집중해서 보다가, 더듬더듬 그것을 읽었다.

16567316603971.jpg“일격에…… 일격에 밤을 가른다? 라고 적힌 것 같습니다.”

16567316556658.jpg“일격에 밤을?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일…….”

‘무슨 의미일까요?’라고 물어보려고 했다. 카롤라의 뒤에서 익숙한 흑발 남자를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그 흑발 남자가, 아까 내게 종교를 권했던 그가, 왜인지 가까운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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