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남주님? 왜 쫓아오시죠?2021.06.22.
그 남자를 본 순간, 나는 물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설마…… 우릴 따라왔나?!’
아까 봤던 남자를 여기서 또 보게 된 걸로도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는 누굴 찾듯이 사방을 두리번대는 중이었다. 덕분에 우릴 ‘쫓아왔다’라는 결론이 자연스레 도출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왔지? 아니, 그보다 알렉시스랑 카롤라 경이 보면 이번엔 진짜로 칼부림 날 텐데……?’
두 기사가 검을 뽑아 저자에게 겨눴던 모습이 번뜩 떠올랐다. 아깐 내 만류에 따라 순순히 무기를 거두고 떠났지만, 저자가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여겨지면 정말 끝장을 내려고 들 터였다. 그렇게 상황이 심각한 와중에 이상함을 느낀 듯 카롤라가 물었다.
“아가씨? 제 뒤에 뭐가 있습니까? 왜 갑자기 그렇게 빤히…….”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카롤라가 뒤돌아서 그 남자를 보기 전에 급히 그리 외쳤다. 다행히 그녀는 도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아직 위험한 상황임은 여전했다.
‘으으……. 어쩌지? 일단 단검부터 빨리 사고 피해야겠다.’
그리 판단한 나는 알렉시스에게 줄 것까지 재빠르게 골라서 급히 노파에게 단검 값을 지불했다. 그러곤, 곧장 카롤라에게 말했다.
“물, 물건도 샀으니까 일단 자리 좀 옮길까요? 여긴 너무 복잡해서 알렉시스 경이 우릴 못 찾을지도 몰라요.”
“……? 하지만 단장님과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이동하면 길이 엇갈리지 않을까요?”
“그게…… 아, 마침 저기 오셨네요!! 알렉시스 경!! 여기예요!!”
천만다행으로 알렉시스도 마침 필요품을 다 산 듯했다. 그는 우릴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내 목소릴 듣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거기까진 좋은데, 문제가 하나 더 생겨 버렸다.
‘저쪽에서도 내 목소릴 들었어……!’
그 흑발 남자도 알렉시스와 마찬가지로 내 목소릴 듣고서 우릴 발견했다. 게다가 정말로 우리를 찾고 있던 게 맞았던지, 북적이는 사람들을 밀치고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사이 먼저 도착한 알렉시스가 해맑게 물건을 보여 주었다.
“이야, 가게마다 줄 선 사람이 많아서 오래 걸렸습니다. 이제 출…….”
“네, 어서 출발해요! 어서요!”
나는 이번에도 거의 밀치다시피 둘을 재촉해, 서둘러 정령에 올라탔다. 덕분에 놀란 카롤라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네!!”
단언컨대 내 생에 가장 초조했던 순간이었다. 그 낯선 남자가 말 걸기 전에 황급히 하늘로 날아오른 그 짧은 순간은. 어쨌든 우리가 공중으로 떠나자 그 남자도 더 어찌하진 못했다. 그저 땅에 서서 우릴 올려다보며 아쉽다는 듯 혀를 찼을 뿐이었다.
‘후……. 아슬아슬했어…….’
그렇게 이동하는 동안은 쭉 그 남자에 관해 함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고 다시 착륙했을 때, 비로소 나는 아까 왜 그리 서둘렀는지를 밝혔다. 역시나 내 말을 듣자마자 카롤라와 알렉시스가 차례로 소리쳤다.
“예?! 그 수상한 자식이 거기까지 우릴 따라왔다고요?!”
“왜 말씀 안 하신 겁니까?! 말씀하셨으면 그 자리에서 아주 끝장을 내줬을 텐데요!”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이는 그들에게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사실 그래서 말씀 안 드린 거예요.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무엇보다 거기 사람들이 괜히 휘말려서 다칠 수도 있고요.”
알렉시스와 카롤라는 놀란 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아가씨는 지나치게 상냥하셔서 탈입니다.”
알렉시스가 먼저 그리 말했고, 카롤라가 뒤이어 제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도 다음번에 또 그런 놈을 보면 꼭 말씀해 주세요. 검을 쓰는 게 너무 잔인해서 싫으시면, 주먹을 쓰면 되니까요.”
“하하…….”
나는 한차례 웃어 준 뒤, 어색하게나마 화두를 돌렸다.
“그보다, 서둘러 야영 준비를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아무리 찾아봐도 근처에 마을은 없는 것 같고…….”
이 근방에는 그저 넓은 숲과 들판만이 쭉 이어지고 있어서, 숙소는커녕 작은 마을도 없었다. 내 멀미 탓에 더 이동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야영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소 불안하던 차에 알렉시스와 카롤라가 차례로 팔을 걷어붙였다.
“예, 야영하면 저희가 또 전문가지요.”
“저기 편히 앉아 계세요. 아까 산 고기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스튜를 끓여 드릴 테니까요.”
그들의 그 힘찬 태도 덕분에 스멀스멀 피어나던 불안감이 이내 봄눈처럼 녹아 사라져 버렸다.
‘괜찮겠지. 둘하고 같이 있으면 야영이든 뭐든 안전할 거야.’
나는 카롤라가 곧 내어 줄 최고의 스튜를 기대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 * 야영 준비는 무리 없이 진행됐다. 식량도 풍부했고, 분위기도 좋았으며, 알렉시스가 애초에 걱정했던 것과 달리 레냐도 상황에 잘 적응해 주었다. 그래도 소중한 가족이 쓰러진 상황에서 그녀가 어떤 마음일지 알기에, 알렉시스는 카롤라와 함께 그녀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자 애썼다. 그러다가 자정이 지났을 즘. 그는 텅 빈 물통을 들고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 근처에서 물 좀 떠 오겠습니다.”
“어두운데 괜찮으시겠어요?”
레냐의 물음에 그가 넉살 좋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마침 달도 밝고, 제가 또 밤눈이 밝아서 말입니다. 금방 다녀오죠.”
그렇게까지 말하니 레냐도 수긍했고, 곧 알렉시스는 아까 숲에서 찾아낸 냇가로 향했다. 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레냐에 대한 생각이었다.
‘밝고, 상냥하고, 그러면서도 강한 분이야.’
귀한 태생이라 야영이 불편할 법도 하건만. 그런데도 짜증 한 번 안 부리고 적응해 주는 레냐의 모습은 알렉시스로서도 퍽 인상 깊었다.
‘하긴, 그 철저하신 전하께서 결혼 상대로 아무나 고를 리가 없나?’
에드가 데려온 인물이니 분명 범상치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함께 다녀 보니 역시나 그랬다. 그는 에드에게 문득 부러움을 느끼며 냇가에 몸을 구부리고 앉았다. 물통 가득 물을 채우려고 했다. 그러나 냇가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직후, 본인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그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이게 대체……. 눈이……?”
수면에 비쳐 보이는 그의 눈이, 붉게 변해 있었다. 꼭 핏물을 들인 듯 더없이 불길하고도 흉측한 붉은빛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떠올려 보기도 전.
―죽여.
그를 괴롭히던 목소리가 또다시 머릿속에 울렸다. 그 직후 찾아온 끔찍한 두통에 그는 비명을 내질렀으나, 그 처절한 목소리는 일행들의 귀에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숲속 바람 소리에 묻혀서 사라져 버렸다. * * * 도통 안 와서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되던 차, 드디어 알렉시스가 돌아왔다. 걱정했던 나는 그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렉시스! 너무 안 오셔서 걱정했어요.”
“길이 어두워서 좀 헤맸습니다. 물은 제대로 떠 왔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알렉시스가 가득 찬 물통을 우리에게 흔들며 보여 주자, 카롤라가 곧장 그것을 받아들었다.
“후, 다행입니다. 마침 갈증 나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후 카롤라의 목 너머로 시원한 물이 넘어가는 모습을, 알렉시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왜인지 다소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러다가 내 시선을 느낀 듯 그가 내게 물어 왔다.
“아가씨께선…….”
“아뇨, 전 됐어요.”
“그러면 여기 둘 테니 목마를 때 드십시오.”
알렉시스는 더 권유하지 않고 물통을 내 발치에 놓았다. 그러곤 아까처럼 우리 곁에 앉았는데,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래서였을까? 아까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던 이 장소가 문득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때, 카롤라가 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단장님, 오늘은 제가 먼저 자도 됩니까? 갑자기 너무 피곤한데…….”
“되고말고. 3시에 잘 깨워 줄 테니까 푹 쉬도록 해.”
“흐아암……. 네에…….”
갑자기 피곤하다니? 한순간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만요, 카롤라 경. 그냥 오늘은 잠들지 말고…… 카롤라……?”
당황한 나는 급히 카롤라 경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녀의 눈은 벌써 무겁게 닫혀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물통까지 바닥에 툭, 떨어트린 채로.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수면이라 할 수 있었다.
‘뭐지? 알렉시스가 오기 전까지는 분명 나랑 쌩쌩하게 대화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그녀가 잠든 이 순간 남은 건 나와 알렉시스뿐……. 나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키면서 모닥불만 응시했다.
“…….”
“…….”
카롤라가 잠들자마자 곧바로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숲에선 그 흔한 부엉이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그럴수록 나는 숨이 막혀 왔다. 결국 내가 먼저 침묵을 깨게 되었다.
“걱정되네요. 카롤라 경 말이에요. 아까까진 전혀 피곤한 기색 없었거든요.”
“…….”
“갑자기 이렇게 잠들다니, 괜찮은 걸까요? 혹시 아까 숲에서 가져온 버섯 중에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독버섯 같은 게 있었던 건…….”
“레냐 아가씨.”
혼자 말을 이어 가고 있느라 몰랐다. 어느새 알렉시스의 시선이 똑바로 내게 박혀 있었다.
“세상이 본인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시는지요?”
“……네……?”
“말 몇 마디 속살거려 전하를 꾀어내고, 성력인지 하는 그 재밌는 재주를 부려 대며 여기저기서 칭찬받고……. 그래서 제 앞에서도 그리 건방을 떨었던 건지요?”
전부터 줄곧 느껴지던 불길한 예감이 그 한순간 뚜렷해졌다.
“알렉시스……? 대체 무슨…….”
“제 앞에서 했던 말, 기억 안 나십니까? 저보다도 더, 전하를 잘 알고 있다고 그리 자신만만하게 얘기하셔 놓고.”
“……?!”
결단코 나는 알렉시스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했던 대상은 내 기억상 단 한 명뿐이었다.
“이시스……?”
그 이름을 말해 놓고도 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알렉시스의 손목엔 인이 없었는데?’
인이 없었으니 알렉시스는 조종받는 게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마음속으로 그토록 간절히 바랐건만.
“눈치가 참 빠르기도 하시지.”
“……!!”
자신이 이시스임을 인정하면서 씩 웃는 그를 보자 발밑이 까마득하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중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보다, 지금 도망쳐야 하나? 뛰어 봤자 금방 잡힐 텐데? 이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아무리 찾아봐도 방법은 보이지 않고, 절망감에 눈앞이 깜깜해질 때였다. 문득, 드레스 치맛자락에 붙어있는 주머니 속에서 기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
나는 홀린 듯 주머니로 손을 넣었고, 여전히 옅게 진동하고 있는 그 물건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