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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남주님! 얘 좀 때려주세요! (25/102)

25. 남주님! 얘 좀 때려주세요!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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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물건, 아까 내가 노점상에서 구매한 낡은 단검이 마침내 주머니 밖으로 오롯이 나왔다. 그것은 내 손에 쥐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웅웅대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16567316867801.jpg‘뭔진 모르겠지만……!’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던 나는 그걸 당장 이시스에게 휘둘렀다.

16567316867806.jpg“……!!”

내가 호신용 무기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당황한 듯, 이시스가 칼날에 베인 제 손등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왜인지 단검이 곧바로 먼지처럼 바스러져서 사라졌다.

16567316867801.jpg‘일회용이었어……!?’

황당했지만, 어쨌든 이시스가 당황한 이때가 기회였다. 나는 단숨에 카롤라에게 달려갔다.

16567316867801.jpg“카롤라! 어서 일어나요!! 카롤라!!”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그녀를 깨워야만 했다. 그녀의 정령을 타고 빠르게 도망치면 아마 이시스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그녀는 꼭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제 손등을 대충 닦아낸 이시스가 웃으며 알렸다.

16567316867806.jpg“소용없습니다. 그 여자는 제가 아까 물에 타 준 약 때문에 푹 잠들어 있으니까.”

16567316867801.jpg“약……?”

카롤라가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기절하듯 잠든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쨌든 독한 약으로 억지로 재운 거라면 깨우긴 어려울 터.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카롤라의 장검을 뽑아 들고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검을 뽑기도 전, 이시스가 더 빠르게 달려와서 내 목을 움켜잡았다.

16567316867801.jpg“……!!”

16567316867806.jpg“죄송하지만 여기서 이만 잠들어 주셔야겠습니다. 제가 오백 년 가까이 준비한 계획을 아가씨처럼 새파란 핏덩이 하나 때문에 망칠 순 없으니…….”

그가 점점 힘을 불어넣어 내 목을 조여 왔다.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자 발버둥 쳐봐도 헛수고였다. 이시스가 조종하고 있는 이 육체는 상급 기사인 알렉시스의 육체……. 그 굵은 손가락을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풀어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 순간, 내 이상을 느낀 듯 정령계에서 삐약이가 홀로 소환돼 나타났다.

16567316867846.jpg―삐이이!! 삐이!!

나를 구하고자 삐약이는 곧바로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러곤 사력을 다하여 이시스에게 달려들었다.

16567316867806.jpg“쯧, 귀찮게…….”

이시스는 그리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삐약이를 밀어내다가, 곧 제 특기인 흑마법으로써 삐약이를 공격했다.

16567316867846.jpg―삐이!!

성장했다고 해도 삐약이는 아직 내 어깨에 올라올 만큼 작았다. 그리고 약했다. 이시스의 흑마법에 당한 삐약이가 곧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16567316867801.jpg‘삐약이……. 도와줘야 해…….’

나와 함께 기뻐하고, 함께 화내고, 함께 슬퍼하기도 했던 삐약이가…… 지금은 고통스러운 몰골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내 목을 조르고 있는 이 손가락을 풀어낼 힘조차, 내겐 없었다.

16567316867801.jpg“…….”

산소 부족으로 차츰 의식이 흐려졌다. 그런 와중에 내가 떠올린 것은 공교롭게도 살고 싶다는 생각 따위가 아니었다.

16567316867801.jpg‘악역에게 주어진 운명은 결국 이런 건가……?’

원작의 레냐처럼 그리 허무하게 죽지 않겠다고 결심했건만. 나도 결국엔 마탑에서 독약을 삼키고 죽었던 그녀처럼 이토록 무력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처럼, 나 또한 마지막으로 에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16567316867801.jpg‘그만큼 노력했는데도 왜 항상 레냐는, 그리고 나는, 널 구해 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끝내 네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마는 걸까. 그 씁쓸한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한 채로, 내 의식은 이윽고 끊어져 버렸다. * * * 의식의 경계가 무너지고 나서 나는 기묘한 꿈을 꿨다. 어둠이 드리워진 마탑의 꼭대기 층…… 즉, 원작에서 레냐가 목숨을 잃은 장소에 우두커니 서서 에드를 바라보는 꿈이었다.

16567316867801.jpg‘에드……. 에이드리언…….’

뒤에서 그를 불러 보았으나 그는 반응이 없었다. 내 목소리도, 내 기척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저 테이블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뿐. 그를 부르고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가, 나는 그의 오른쪽 귀 끝에 남은 흉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16567316867801.jpg‘현재가 아니야. 이건…… 원작에서 레냐가 죽은 그 이후의 시간대야.’

내가 알기로 에드의 귀 끝에 그어진 저 흉터는 레냐가 죽고 나서 생긴 것이었다. 레냐가 죽은 뒤 그의 마탑은 한차례 공격을 받는다. 그때 직접 나서서 싸우다가 누군가가 쏜 화살에 맞아 생긴 흉터였다. 저 흉터로 보나, 그가 입은 마법사 로브로 보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레냐가 죽은 이후의 에드인 게 분명했다.

16567316867801.jpg‘이 무렵부터 에드가 총력을 다해서 제국을 공격했었지. 덕분에 이야기도 금방 결말이 나버렸고.’

상황을 알고도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다. 원래 꿈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깨고 나서 이상함을 느낄지라도 꿈속에 있을 땐 그러려니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의 곁으로 다가가 흉 진 귓가를 어루만졌다.

16567316867801.jpg‘아팠겠다. 마법으로 치료하면 금방 나았을 텐데 왜 미련하게 방치해서는…….’

쉽게 치료되는 상처였는데도 왜인지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채로 방치했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그래서 원작을 읽을 때도 퍽 이상하게 여겼었고. 그것이 안타까워 귀를 쓰다듬다가 나는 비로소 그가 무얼 그리 열심히 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16567316867801.jpg‘기억의 구슬?’

마법사들에겐 저 ‘기억의 구슬’이라는 마법 도구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담아 유품으로 남기는 풍습이 있었다. 세상에 남겨진 이들이 언제든 그 구슬을 보며 고인을 떠올릴 수 있게끔 한 배려였다. 나는 에드를 이토록 집중하게 만드는 이가 누군지 확인하고자 구슬의 받침대를 살폈고, 거기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16567316867801.jpg‘레냐가 남겨 둔 기억을 보고 있어…….’

그 순간 떠오른 건 ‘왜?’였다. 그에게 레냐는 한낱 말 잘 듣는 도구였을 뿐, 죽었다고 해서 신경 써 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레냐의 기억을 여러 차례나 반복해가며 돌려 보고 있었다. 그것도 슬픔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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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질 즘, 그 혼자뿐이던 마탑에 킬리안이 나타났다.  

16567316900211.jpg“에이드리언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드가 대답하지 않자 킬리안의 목소리에도 조금 더 초조함이 담겼다.  

16567316900211.jpg“황제가 항복 의사를 밝힌 지 사흘이 지났으니, 이제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16567316900219.jpg“…….”

16567316900211.jpg“그녀의 마지막 부탁대로 이쯤에서 모든 걸 멈추시겠습니까?”

  그녀…… 아마도 레냐의 부탁대로 모든 걸 멈추겠냐는 킬리안의 물음에, 비로소 에드의 입술이 열렸다.  

16567316900219.jpg“아니.”

  곧 에드는 구슬에서 눈을 떼곤 킬리안을 마주했다.  

16567316900219.jpg“멈추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계속해서 마계의 문을 열고, 계속해서 제국을 공격해라. 그렇게 하면…….”

  그가 뒷말을 잇던 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다행히 깨어나기 직전, 그의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었다.  

16567316900219.jpg[모든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왜인지 제국을 무너트리고 나면 어떤 과오,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여긴 듯했다. 그 실수가 무엇인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16567316867801.jpg‘방금 뭐였지? 그냥 꿈…이라기엔 꽤 구체적이었는데…….’

그 순간 들려온 이시스의 목소리 때문에 내 고민은 깊게 이어지지 못했다.

16567316867806.jpg“생각보다 일찍 깼네? 성력 때문인가?”

16567316867801.jpg“이시스!!”

잠결에 몽롱했던 정신이 한순간 뚜렷해졌다. 나는 급히 고갤 들고서 주위를 살폈다. 내 손과 발은 꽁꽁 묶여 있고, 카롤라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이 담긴 듯한 밧줄로 온몸이 묶인 채 기절해 있었다. 그리고 삐약이는 아까 당했던 그대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들을 소리쳐서 부르기도 전에 이시스가 다가와 내 턱을 억센 손길로 붙잡았다.

16567316867806.jpg“그래, 이 성력……. 수상해. 분명 뭔가가 있어.”

그는 그리 혼잣말하곤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저 신기한 물건을 살피듯이 그의 시선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눈빛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뒤에 이어진 말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16567316867806.jpg“산 채로 들고 가서 뜯어봐야겠어.”

16567316867801.jpg“……!!”

산 채로 뜯어본다……. 그 짧은 말에 담긴 끔찍한 의미를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원래라면 나는 패닉에 빠져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댔을지도 몰랐다. 누구든 좋으니 살려 달라고,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공포에 질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마침 숲에서 조용히 걸어 나오는 누군가를 발견해서였다.

16567316867801.jpg“……?”

나는 그자를 슬쩍 보고, 다시 이시스를 살폈다. 이시스는 아직 제 뒤로 누가 다가오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파악할 수 있었다.

16567316867801.jpg‘눈치 못 채게 주의를 끌어야 해!’

일단은 주의를 끌어야 했다. 이시스가 뒤를 돌아보지 못하도록. 다행히 예전에 범죄 드라마를 즐겨 봤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16567316867801.jpg‘이런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즐겼지, 아마?’

드라마에서 본 살인마들의 심리를 떠올린 나는 즉시 몸을 덜덜 떠는 척했다.

16567316867801.jpg“무슨 의미야……? 날 산 채로 어쩐다고……?”

일부러 겁먹은 척하며 이시스의 가학성을 자극하자, 예상대로 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16567316867806.jpg“이제야 좀 두려우신 모양이죠, 레냐 아가씨? 가여워라…….”

16567316867801.jpg“날 죽이려는 거야?”

16567316867806.jpg“긍정적이시기도 하지. 제가 그냥 죽일 리 있나요. 차라리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가하며, 아가씨의 몸 구석구석을 해부한다면 모를까.”

내 겁에 질린 얼굴을 감상하려는 것처럼 이시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 남자’는 이시스의 뒤쪽으로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16567316867801.jpg‘조금만…… 조금만 더……!’

남자가 이시스의 등 뒤로 오기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나는 역겨움을 꾹 참고서 대화를 계속 유도했다.

16567316867801.jpg“해부? 그런 짓을 하면 전하께서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자 역시나, 그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면서 내 희망을 깨부수려 들었다.

16567316867806.jpg“전하께서요? 그것참 큰일인데……. 일단 이 납치극을 본 사람이 없으니, 저 여자 시체가 전하께 발견되기 전에 도망치면 되려나요? 아아, 그런데 발견된다고 해도 이미 죽어서 썩어 가는 시체가 범인을 지목할 순 없을 테고…… 흐음…….”

16567316867801.jpg“확실해?”

16567316867806.jpg“……?”

16567316867801.jpg“여기 우리 빼고 아무도 없는 거 확실하냐고.”

내 입가에 번져 가는 미소를 보고서야 이시스는 황급히 주위를 살피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가 고개를 채 다 돌리기도 전, 그 남자가 더 먼저 검집으로 이시스의 뒤통수를 후려쳤으니까.

16567316867806.jpg“……!!”

얼마나 세게 후려쳤던 걸까? ‘빡!’ 소리가 들판 전체에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얻어맞은 이시스의…… 아니, 알렉시스의 몸은 이내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나는 나를 구해 준 이를 조심스레 살폈다. 시장에서부터 쭉 쫓아온 것인지 그의 머리카락이 산발이 돼 있었다. 힘들게 온 게 분명한 듯한 그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물었다.

16567316867801.jpg“종교 권유가 아니었던 거죠……?”

16567316939505.jpg“……당연히 아닙니다. 권유가 아니라 ‘경고’하려고 했다고, 제가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남자는 다소 까칠한 어투로 그리 면박을 주곤, 본인의 검으로 나를 옥죄던 밧줄을 잘라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그의 검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검 손잡이 끝에 새겨진 문양을.

16567316867801.jpg‘저 엑스자로 교차한 깃털 문양, 분명 예르타 신성국의 상징이었어.’

지금껏 그의 넓은 망토 속에 가려져 있었을 그 검에는, 예르타 신성국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예르타 신성국의 기사. 그의 정체를 알고 나자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이 남자가 왜 이리 미남이었는지, 그리고 원작에서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게 누구였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16567316867801.jpg‘예르타의 성기사, 황금색 눈동자, 꽃미남…… 이 남자가 루카스였던 거야!! 주인공인 타라랑 이어질,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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