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방 안에 미남이 둘씩이나……?2021.07.06.
튤립 진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퍽 한정적이었다. 그냥 황후가 목에 걸고 나올 정도로 고급 진주라는 것 정도? 그 생산지에 대해선 전혀 몰랐기에, 나는 닉 오빠의 말을 듣고서야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랬던 거야? 어쩐지…….”
무슨 분홍색 진주 쪼가리가 그렇게 미친 듯 비싼가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아름다운 데다가, 오직 그 섬에서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희소하기까지 하니…… 비쌀 만한 요건은 다 갖춰진 셈이었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닉 오빠가 이어서 설명했다.
“튤립 진주를 독점할 생각으로 섬에 눈독 들이는 이들이 많아. 서로 소유하려고 뒤로 꽤 치열하게 싸우는 중인데, 나도 얼마 전에 참전한 거지.”
“그냥 원래 소유주한테 돈 많이 주는 사람이 이기는 거 아니야?”
“단순히 돈으로 살 수 있었으면 진작 샀을 거야. 그런데 경쟁자가 너무 많아서…… 가끔은 손을 더럽혀야 할 때도 있어.”
“…….”
손을 더럽힌다는 게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길……. 마음속으로 그리 기도하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 저 섬 안 가질래. 그러니까, 뭘 하는지는 몰라도 당장 멈춰.”
닉 오빠는 눈으로 부드러이 웃으면서도, 목소리만은 더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어.”
“왜?”
“지금까지 네게 못 해 준 게 너무 많잖아.”
“…….”
예상은 했지만, 그가 예전부터 내게 품고 있던 부채 의식은 여전히 견고했다. 본인이 오빠 노릇을 잘 못 해 주었기에 내가 고생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오빠 덕분에 나는 이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그렇게 말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내 말을 예상한 듯 그가 더 먼저 못 박았다.
“네 결혼식 날, 너는 저 섬의 주인이 될 거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 거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니. 이 위험한 고집을 어떻게 꺾어야 할지를 두고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뜬금없게도 루카스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계십니까?”
안에 있던 나와 닉 오빠는 서로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닉 오빠도 나처럼 의문 가득한 눈빛인 걸 보니 그가 부른 것도 아닌 듯했다. 어쨌든 생명의 은인을 문전박대 할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목을 큼큼 다듬었다.
“기사님? 무슨 일이죠? 그…… 일단 들어오세요.”
아직 루카스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았기에, 일단 기사님이라고 그를 칭하며 안으로 들였다. 곧 그가 문을 열고서 안에 들어섰다.
“여기 환자가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나는 아팠다가 내 성력으로 나름 회복된 닉 오빠를 슬쩍 봤다가, 다시 루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음, 환자‘였던’ 사람이 있긴 한데……. 누구한테 들었어요?”
“공작께 들었습니다. 본인 성에 객으로 왔으면 밥값은 해야 한다면서, 가서 여기 있는 환자나 치료하라고 하시더군요.”
“…….”
세상에, 신성국 최고의 성기사에게 ‘밥값’을 명목으로 무료 봉사를 시키는 공작의 뻔뻔함이 새삼 놀라웠다. 덕분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가,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아요, 밥값은 무슨……. 오히려 제가 기사님께 사례를 하는 게 맞죠. 절 구해 주셨잖아요.”
“그래서 환자가 누굽니까?”
“닉 오빠가 아까 조금 아팠는데, 이제 괜찮아요. 제가 성력으로 치료했으니까.”
“당신이요?”
성력을 쓸 줄 알 만한 인상이 따로 있는 걸까? 어쨌든 내가 그런 인상은 아닌 듯했다. 루카스는 뭐 엄청난 얘기라도 들은 것처럼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신기하군요.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그사이 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는 우리에게 성력을 써 줬는데, 나는 같은 능력을 쓸 줄 알면서도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던 것에 사과하기 위해서.
“네, 기사님께서 쓰러지셨을 때 성력으로 치료 못 해 드려서 죄송해요. 그땐 오빠가 정말로 위급한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힘을 아껴 둬야만 했…… 음?”
아껴 둬야만 했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차에 루카스가 갑자기 제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았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나는 꼼짝없이 그와 눈을 마주쳐야 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이 보면 입이라도 맞추는 줄 알 법한 자세였으니까.
“기, 기사님?”
“잠깐 보겠습니다. 정말로 당신이 여신의 은총을 받은 사람인지.”
물론 지금의 상황만 보면 상당히 이상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무슨 희한한 짓이냐고 물어야 옳은데, 그러기엔 상대가 너무 잘생겼다는 것이 문제였다.
‘와……. 얼굴이 성스러울 수도 있구나…….’
그의 얼굴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남주인공이라고 신이 얠 만들 때 제법 공들였나 보다―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한 5초 그러고 있었을 즘 비로소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안타깝게도 나 스스로 정신을 차린 건 아니었다. 이 방에 있던 또 다른 미남이 우리 사이에 끼어든 덕에, 정신이 돌아왔다.
“오빠?”
이 방에 있던 또 다른 미남, 닉 오빠가 루카스의 손목을 힘주어서 붙잡아 내렸다. 정신이 든 내가 곧장 뒤로 물러섰으나, 그래도 닉 오빠는 루카스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평소의 온화함은 어디 가고, 지금의 그는 내 심장이 다 떨릴 정도로 사나운 시선을 루카스에게 보내고 있었다.
“누군지도, 뭘 하려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 손 치우고 여기서 나가라. 허락도 없이 내 동생의 얼굴에 함부로 손을 올리는 무례한 자를 참아 줄 생각은 없으니까.”
닉 오빠의 경고에 루카스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영애께 허락 없이 손을 댄 건 명백히 제 실수이니…….”
다행히 그는 제국의 예법을 잘 알고 있었다. 신성국에선 어떨지 몰라도 제국에서 귀족 여성의 얼굴 부근을 만지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인 것이다. 그 탓에 닉 오빠 또한 상당한 불쾌함을 드러내는 중이었고, 루카스도 그를 진정시키려 나름 노력했다.
“해명을 드리자면, 저는 영애의 말대로 정말 그녀가 성력을 지녔는지 확인해 보고자 했습니다.”
심각한 상황인 건 알지만 나는 그 순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 잠깐만요, 성력은 다른 사람이 측정할 수 없는 것 아니었나요?”
“성력의 양을 측정하는 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력의 유무 정도는 알 수 있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으려던 차에, 루카스가 제 눈동자를 가리켰다.
“여신의 축복을 받아서 성력을 지니고 태어난 자들의 눈동자 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눈동자 속에…… 말인가요?”
“예, 그리고 제가 당신 눈을 들여다보니…….”
약이라도 올리려는 건지, 그는 딱 중요한 부분에서 말을 끊었다. 나는 ‘내 눈에 뭐! 당장 말해!’라고 외치고픈 걸 꾹 참고서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 인고의 기다림 끝에 그가 꺼낸 말은, 뭣 모르고 들으면 퍽 로맨틱하게 느껴질 만한 것이었다.
“빛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환하고, 아름다운 빛이요.”
“…….”
“거짓말이 아니었군요, 영애. 당신은 분명 여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내가 성력을 다룬다고 했던 걸 믿지 못해 직접 확인해 본 셈이었다. 뭐, 그의 의심이 불쾌하진 않았다. 솔직히 내가 봐도 내 인상이 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나는 다만 그가 방금 한 말을 되새겨 보고만 있었다.
‘눈동자에 빛이 있다니……. 누가 들으면 고백인 줄 알겠다.’
옆에 에드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에드는 본인이 가진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루카스의 이런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들을 불쾌하게 여겼을지도 몰랐다. 그때 닉 오빠의 목소리가 조금씩 감돌고 있던 침묵을 깨트렸다.
“그런데 누구길래 그런 걸 아는 거지? 남의 침실에 들어왔으면 우선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마땅한 순서 아닌가?”
닉 오빠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아 그렇네?’ 하고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루카스는 한 번도 본인 소개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여기 들어왔을 때에도 환자부터 찾았었고 말이다. 루카스 또한 닉 오빠의 지적을 합리적이라 여긴 듯, 곧장 본인을 소개했다.
“저는 예르타의 신성 기사, 루카스 뮈스켈입니다. 신의 죄 많은 종일 뿐이기에 당신들과 같은 작위나 가문의 명성은 없습니다만, 대신 신분을 증명할 신분패는 가지고 있으니 염려치 마시길.”
곧 닉 오빠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번졌다.
“루카스 뮈스켈……?”
신성국에서 제법 유명한 기사라서인지 오빠도 루카스의 이름을 들어 본 듯했다. 그게 누구냐고 묻는 대신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대가 정말로 그 루카스 뮈스켈이라면, 제국엔 무슨 일로 온 거지? 그 정도 되는 자가 별것 아닌 일로 오진 않았을 테고…….”
“제국에서 수상한 마력의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그걸 조사하고자 온 겁니다.”
“교황 성하의 명령으로?”
“…….”
짧은 시간 침묵한 뒤, 루카스는 이어서 대답했다.
“……그저 개인적 호기심에 이끌렸을 뿐입니다. 명령을 받은 건 아닙니다.”
한순간 대답을 못 한 것도 그렇고, 말하면서 괜히 시선을 피한 것도 그렇고……. 거짓말이라는 게 뻔히 보이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닉 오빠는 본인이 함부로 캐낼 만한 일이 아니라 여긴 듯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내 침묵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뭐지? 조사하고자 왔다고? 이건 훨씬 더 나중에 일어나야 할 일인데 왜 벌써……?’
혼란스러웠다. 원작대로면 루카스가 그 ‘마력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건 훨씬 나중이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제 루카스를 처음 봤을 때도 그가 마력 때문에 왔을 거라곤 생각 못 했었다. 높은 직위의 신성 기사로서 다른 중요한 국가적 업무 때문에 온 줄로만 알았다. 혹은 그냥 개인적 용무를 보고자 왔거나. ‘왜 앞당겨졌을까? 아니, 그보다 그럼 지금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내가 혼란에 젖어 있는 사이 루카스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영애를 돕고자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만 저는 다시 수도로 올라갈 생각입니다. 지금은 그쪽에서 마력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
수도에서 마력이 느껴진다는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시스를 말하는 거겠지? 아니면 설마…… 에드가 지닌 마력을 감지한 건가?’
원작의 내용을 되짚으며 열심히 추리해 보았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둘 중 어느 쪽의 마력을 감지한 건지 모르겠어……. 원작에서 루카스가 수상한 마력의 움직임을 포착하고서 황자궁을 찾아냈을 땐 이시스랑 에드가 같이 있었으니까.’
마력을 느끼긴 느껴서 황자궁으로 찾아간 걸 텐데, 둘 중 누구의 마력을 감지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마족의 핏줄을 이은 에드가 선천적으로 품고 있는 마력…… 그것을 루카스가 찾고 있는 거라면 조금 위험했다. 단순히 개인적 호기심으로 왔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일 테고, 어쩌면 교황으로부터 그 수상한 마력원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원작에선 교황이 그냥 ‘조사’해오라고만 명령했었지만……. 이번에도 원작과 똑같은 명령을 받았을 거라고 마음대로 추측하는 건 위험했다. 이미 원작의 전개를 벗어날 만큼 벗어난 상황이므로. 고민을 이어가던 나는 일단 침착한 척하며 루카스에게 물었다.
“그 마력의 ‘수상한 움직임’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누군가가 마력을 써서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고 있습니다. 마족을 소환했거나, 혹은 역소환했거나…… 그런 것이겠죠.”
“……!!”
거기까지 듣고서야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루카스가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
‘망했다……. 이시스 때문에 온 게 아니야. 에드가 소울스톤 광산에다가 마족을 풀어놓고 다녔던 것 때문에 온 거구나. 어쩌지……? 아니, 다 떠나서 왜 대비할 틈도 안 주고 이렇게 빨리 오고 난리…….’
속으로 짜증을 팍팍 부리려던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번뜩 스쳤다.
‘잠깐, 전부 나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