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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런 반전 매력은 반칙인데……? (30/102)

30. 이런 반전 매력은 반칙인데……?2021.07.13.

내 예상대로 공작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알렉시스가 벌여 놓은 난장판을 살폈다. 그러곤 타박 했다. 알렉시스가 아닌, 나를.

16567317669098.jpg“쯧, 집 나간 게 괘씸해도 들어오게 허락해 줬더니, 네 기사 하나 제대로 단속을 못 해서 이런 꼴을 만든 거냐?”

16567317669104.jpg“…….”

16567317669098.jpg“한심하긴.”

나는 이를 꽉 깨물며 화를 삭였다.

16567317669104.jpg‘하아……. 이래서 이 인간한테는 부탁 안 하려고 했던 건데…….’

한심하단 소리만은 또 듣고 싶지 않았건만. 그는 기어코 몸소 여기까지 찾아와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소릴 내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정말로 분했으나, 한편으론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16567317669104.jpg‘이왕 들킨 거, 그냥 공작에게 부탁해야겠다.’

멀리 있는 닉 오빠보단 눈앞의 공작에게 부탁하는 게 나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나는 싫은 감정을 꾹 눌러 참았다.

16567317669104.jpg“그…… 아무래도 12월 늑대를 불러서 막아야 할 것 같아요.”

16567317669098.jpg“그전에, 왜 저러는 거냐.”

16567317669104.jpg“여기 오는 길에 조금 나쁜 일이 있었는데 그게 본인 잘못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16567317669098.jpg“그렇군.”

16567317669104.jpg“네, 이대로 두면 벽이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우선 알렉시스의 정령을 밖으로…….”

16567317669098.jpg“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는 ‘그 나쁜 일’이 뭐냐고 자세히 캐묻지도 않았고, 동시에 본인 계획이 뭔지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무작정 알렉시스에게 다가갔다. 덕분에 황당해진 나는 그를 다급하게 불렀다.

16567317669104.jpg“잠깐만요……! 그렇게 대책 없이 가시면 위험하잖아요!”

알렉시스의 주위에선 여전히 돌풍이 몰아치고 있어서 잘못하면 날아다니는 물건에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말렸으나, 신기하게도 공작은 바람 속에서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가 어깨에 껄렁하게 걸치고 다니는 외투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저 외투, 셔츠에서 안 떨어지게 아예 꿰매 놓은 걸까?’라고, 내가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16567317669098.jpg“자네.”

마침내 공작이 알렉시스의 어깨를 짚으며 그를 불렀다. 그러자 바닥에서 수그리고 있던 알렉시스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16567317682695.jpg“……공작 각하?”

16567317669098.jpg“듣기론, 뭘 잘못했다고?”

그 질문에 알렉시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16567317682695.jpg“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제가…… 아가씨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황자 전하께 맹세했던 제가, 레냐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그러니…… 목숨으로 사죄드릴까 합니다.”

16567317669098.jpg“그렇군. 솔직히 자네가 죽고 싶다고 한다면 내가 말릴 자격은 없지.”

그쯤에서 나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16567317669104.jpg‘지금이라도 가서 저 입 틀어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공작이 평소처럼 무신경한 말을 내뱉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땐 알렉시스의 정령이 정말 미친 듯 날뛸 테니까. 어찌할지 고민하며 발을 동동거리던 때, 다시 공작의 입술이 열렸다.

16567317669098.jpg“하지만―”

16567317682695.jpg“……?”

16567317669098.jpg“이렇게 폐만 잔뜩 끼치고 죽으면 되겠나? 방을 이 꼴로 만들었으니 망가트린 물건 변상도 하고, 다친 사용인들에게 치료비도 주고, 또…… 레냐를 위험에 빠트렸던 만큼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그 애를 지켜 줘야지.”

방금, 그에게서 평생 들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16567317669104.jpg‘나를 지켜주라고?’

공작의 말을 듣고 놀라서 멈춘 나와 다르게, 그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알렉시스를 계속 달랬다.

16567317669098.jpg“사고만 치고서 내빼는 건 어린애라도 할 줄 아는 일이야. 자네가 진정 기사라면 죽을 생각 말고, 살아서 속죄할 생각을 하게.”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속죄’라는 말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것은 알렉시스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듯, 그의 텅 빈 눈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는 그렇게 뚜렷해진 눈으로 주위를 쭉 살펴보았다. 자신 때문에 난장판이 된 방의 풍경을, 안절부절못하는 카롤라의 얼굴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알렉시스는 차례로 살폈다.

16567317682695.jpg“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레냐 아가씨. 제가 망가트린 가구 값과 사용인들의 치료비는 전부 보상하겠습니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어느새 내게 다가온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신보다 작은 나와 똑바로 눈을 맞춘 채로 물었다.

16567317682695.jpg“황자궁까지 아가씨를 호위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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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7317669104.jpg“물론이죠. 알렉시스가 없으면 카롤라의 정령에 세 명이나 타고 가야 하니까요.”

일부러 농담을 섞어서 말해 주자 그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나는 그 틈에 그의 손을 꼭 붙들곤 당부했다.

16567317669104.jpg“두 번 다신 목숨으로 사죄하겠단 소리 하지 마세요. 알렉시스가 죽어도 제겐 아무런 도움도 안 돼요. 살아서 계속 저를 도와주시는 게 저로서도 훨씬 더 좋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일은 알렉시스가 잘못한 게 ‘절대!’ 아니니까요.”

16567317682695.jpg“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비로소 상황이 정리되었다. 알렉시스는 이번 일로 상당한 자괴감을 느꼈겠지만, 적어도 목숨을 끊겠단 소린 안 하게 되었다.

16567317669104.jpg‘시간이 지나면 자책감은 차츰 극복되겠지.’

극복하고 나면 그의 마음은 더욱 단단해져 있으리라. 아마도. 그 뒤, 알렉시스는 수리비와 치료비를 계산하기 위해 루드비히를 따라갔다. 상황이 그만큼 정리되고 나서야 나는 공작에게 물어볼 게 있단 걸 떠올렸다.

16567317669104.jpg“그런데 아까 살아서 속죄하라고 하셨던 거…… 아, 벌써 갔네.”

뭐가 그리 급한지 공작은 벌써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카롤라가 옆에서 알려 주었다.

1656731771308.jpg“공작 각하를 찾으십니까? 볼일 끝났으니 가 보겠다고 하시면서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16567317669104.jpg“조금 전에요?”

1656731771308.jpg“네, 옷자락을 펄럭 휘날리며 떠나시는데 그 뒷모습이 얼마나 멋지신지……. 하마터면 제 검에다가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냐고 물어볼 뻔했습니다.”

하하,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카롤라의 취향을 대충 이해하는 척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곤 그가 떠나갔을 방향을 잠깐 눈으로 살폈다.

16567317669104.jpg‘밉살맞은 잔소리라도 한 번 더 하고 갈 줄 알았는데 웬일로 그냥 갔네.’

오늘따라 공작이 내가 아는 그 공작 같지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꿈결에 빠진 듯한 기분으로, 그 난장판 속에 우두커니 멈추어 있었다. * * * 소란이 있고서 하루가 지난 오늘. 퍽 느지막한 오후에 들어서야 내 두 눈이 비로소 뜨였다. 어제 알렉시스를 진정시키고자 무리해서만은 아니었다.

16567317669104.jpg‘늦게까지 열심히 만들긴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론 부족하려나?’

나는 오늘 내 늦잠의 결정적 원인인, 일곱 병의 치유 물약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일곱 병, 다른 이들 눈엔 충분히 많게 보일 만한 양이었다. 하지만 닉 오빠가 얼마나 쉽게 무리를 해 대는지 본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16567317669104.jpg‘하루에 반병씩 마신다 쳐도 2주면 다 마셔 버릴 테고, 그렇다고 오늘도 또 만들자니 이번엔 내가 먼저 쓰러질 것 같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현재 이 성에는 치유의 물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그 즉시 나는 대충 옷을 차려입고서 그의 객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16567317669104.jpg“루카스? 혹시 지금 바빠요?”

곧 기다리자 루카스가 문을 빼꼼 열었다.

16567317713107.jpg“바쁘진 않습니다. 무슨 용건입니까?”

16567317669104.jpg“혹시 루카스한테서 치유의 물약 좀 살 수 있을까요? 한 병당 500케른에 구매하고 싶어요.”

고민해 보는 듯했으나, 곧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16567317713107.jpg“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평소라면 열 병 정도는 그냥 드릴 수도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오는 길에 좀 무리를 해서.”

16567317669104.jpg“아아…….”

그의 거절에 내 어깨가 절로 축 늘어졌다.

16567317669104.jpg‘맞아, 루카스도 무리해서 쓰러졌었지? 물약을 만들진 못하겠네. 그럼 오빠는 어쩌지?’

힘들어하던 닉 오빠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는 한동안 어깨를 늘어트리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에 시선이 느껴져서 보니, 루카스가 내 실망한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고 있었다.

16567317669104.jpg‘앗, 너무 대놓고 실망한 티를 냈나? 나 때문에 괜히 민망하겠다.’

루카스가 아직 앞에 있단 걸 뒤늦게 상기한 나는 억지로나마 미소 지었다.

16567317669104.jpg“죄송해요. 아직 힘드실 텐데 제가 무리한 요청을 드렸네요. 방금 한 말은 잊어주세요. 그럼 이만…….”

어차피 물약은 더 못 구할 것 같으니까 괜히 귀찮게 굴지 말자. 그런 생각으로 나는 재빠르게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16567317713107.jpg“……그런데, 물약은 왜 필요한 겁니까?”

루카스가 말을 걸어올 거라곤 생각 못 했기에 이미 복도를 반 정도 지나갔던 나는, 그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서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16567317669104.jpg“어제 만났던 저희 오빠 기억하시죠?”

16567317713107.jpg“저를 상당히 경계했던……?”

16567317669104.jpg“네, 그때 느끼셨겠지만, 닉 오빠는 막내인 저를 상당히 아껴 주거든요. 그래서 제 결혼식에 맞춰 큰 선물을 주려는 모양인데, 그것 때문에 지나치게 무리를 해서요.”

루카스는 노련한 상담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얘길 들어 주었다.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져서, 어느새 나는 친구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듯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16567317669104.jpg“선물은 됐으니까 건강부터 챙기라 해도, 정말 말을 안 듣더라고요.”

16567317713107.jpg“그랬습니까?”

16567317669104.jpg“네. 닉 오빠가 평소엔 잘해 주는데 그런 부분에선 고집이 진짜 세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약이라도 잔뜩 주고 갈 생각으로 루카스에게 왔던 거죠.”

16567317713107.jpg“흐음.”

16567317669104.jpg“아, 제가 너무 구구절절 말이 많았죠? 안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저 때문에 더…….”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16567317713107.jpg“아뇨.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면 꽤 피곤했겠지만, 영애께서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16567317669104.jpg“재미없는 농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나요? 꼭 시달려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 걸 보니.”

16567317713107.jpg“예. 한 명 있습니다. 게다가 하필 가족이라 피할 수도 없죠.”

16567317669104.jpg“가족이라면…….”

나는 그의 가족 관계를 되새겨 보다가 곧 한 인물을 떠올렸다.

16567317669104.jpg“혹시 교황 성하 말씀이세요?!”

16567317713107.jpg“예. 맞습니다.”

16567317669104.jpg“말도 안 돼요. 신성국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훌륭하신 분이잖아요.”

16567317713107.jpg“존경받으면 농담도 잘할 거라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16567317669104.jpg“앗…….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퍽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여서 동조해 주자 그가 한숨과 불만을 술술 털어놓았다.

16567317713107.jpg“재미없는 농담을 숨 쉬듯이 쏟아 내는 수준이라 매번 힘듭니다.”

16567317669104.jpg“저런…….”

16567317713107.jpg“그래서 그냥 들어 주는 척, 고개만 끄덕여 주고 있죠. 그러고서 머릿속으론 딴생각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면 되니까요.”

16567317669104.jpg“……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고생이 많았겠네요.”

문득, 조금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작의 주인공인 루카스랑 이런 시시콜콜한 가족 얘길 하게 될 줄이야.

16567317669104.jpg‘실제로 대화해 보니 표정이 꽤 풍부하네. 활자로 읽었을 땐 되게 딱딱하고 고지식한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원작에서 ‘무표정’으로만 묘사됐던 그의 표정은, 잘 보면 단순히 무표정이 아니었다. 고민할 때 그의 눈썹은 미세하게 구겨졌고, 내 얘길 들을 때 그의 시선은 미세하게 차분해졌다. 본인의 형 이야기를 할 때는 또 어떤가. 아마 루카스 자신도 잘 모르고 있겠지만, 형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입가는 미약하나 부드러운 미소로 물들어 있었다. 언뜻 무표정인 것 같아도, 잘 보면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16567317713107.jpg“골치 아프죠, 가족이란 거. 영애도 고생이 많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 주었다. 목적대로 물약을 구하진 못했어도 그의 위로를 들으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때,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16567317713107.jpg“그래서 주제넘게 조금 참견해 보자면…….”

16567317669104.jpg“……?”

16567317713107.jpg“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영애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헌신하는 ‘심적인 이유’ 말이죠.”

나는 그가 강조한 부분을 가만히 따라서 읊어 보았다.

16567317669104.jpg“심적인 이유…….”

16567317713107.jpg“치유의 물약 수십 병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니까요.”

그의 말이 옳았다. 물약으로 당장 피로감을 없애 줄 순 있어도, 닉 오빠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소용없었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리할 것이었다.

16567317669104.jpg‘방법이 생각날 것도 같은데…….’

루카스의 말을 듣고서 깊이 고민하다가 나는 뒤늦게 떠올렸다. 내가 아직도 그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는 걸.

16567317669104.jpg“충고 정말로 고마워요. 덕분에 조금 알 것도 같아요.”

16567317713107.jpg“도움이 됐다니 기쁩니다.”

16567317669104.jpg“그럼 이번엔 정말로 가 볼게요. 편히 쉬세요.”

16567317713107.jpg“……가시려고요?”

그냥 내 느낌일 뿐일까? 그 순간, 나는 왜인지 그가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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