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20년의 뻘짓을 종결하러 왔다!2021.07.16.
내 생각대로 루카스가 나와 이야기한 시간을 즐겁게 여겼고, 그래서 우리의 대화가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거라면……. 정말로 그런 거라면, 우린 단순히 지인을 넘어서 ‘친구’라는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내 버렸다.
‘착각이겠지.’
생각해 보면, 지금도 피곤할 그가 우리의 긴 대화를 달갑게 여겼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남을 도울지언정, 남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 주는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더 귀찮게 굴지 않기로 했다.
“루카스도 이만 쉬어야 하고, 저도 여러모로 생각할 게 많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가족 문제.”
“네, 루카스도 푹 쉬세요.”
그는 더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순순히 나를 배웅해주었다. 나도 그의 휴식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아껴 주고자,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복도를 거의 다 지나갔을 즘-.
‘아, 잠깐. 혹시 성력으로 그것도 가능하려나?’
문득 그에게 또 묻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그를 더 귀찮게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워낙 중요한 질문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그의 객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급히 여쭤야 할 게 생각났는데요, 혹시 성력으로 마음의 상처도 치료…… 으앗!!”
성력으로 마음의 상처도 치료할 수 있느냐고 물으려 했건만. 방 안에서 상의를 벗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생각이 지워졌다.
그토록 놀란 나와 달리, 그는 무덤덤하게 옷을 마저 벗었다.
“음? 아직 안 갔습니까?”
“깜, 깜짝이야……. 옷 세탁하시게요?”
“아뇨. 명상할 겁니다.”
“……벗고서요?”
“예. 아무것도 안 걸쳐야 기운을 받아들이기 쉬우니까.”
아리송한 말을 남긴 그가 이번엔 침대 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그 ‘기본 명상 자세’였다. 그는 그 상태로 나긋하게 설명했다.
“예르타에선 굳이 명상할 필요 없지만, 제국에선 다릅니다. 빠르게 체력과 성력을 회복하려면 명상을 통해 주위에 흩어져 있는 성력을 받아들여야 하죠.”
“왜죠? 두 국가 간에 뭔가 차이가 있나요?”
“공기……. 신성국과 제국은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성력의 농도가 다릅니다.”
그는 차분하게 심호흡한 뒤, 이어서 말했다.
“신성국의 공기 속엔 성력이 항상 넘쳐흐르니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채워지지만…….”
“제국의 공기엔 성력이 적어서 명상을 통해 직접 성력을 끌어모아야 한다?”
“맞습니다.”
공기 속 성력의 농도. 성력이 없는 공작은 못 느끼지만, 성력을 다루는 루카스는 분명하게 감지하는, 두 국가의 환경적 ‘차이’점. 그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친 듯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잠깐, 설마…… 설마 그것 때문인가? 그것 때문에 싹트지 않았던 거야?!’
물론 아직은 그냥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내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공작을 20년이나 괴롭혔던 그 수수께끼가 마침내 풀렸노라고. 그런 생각이 든 즉시 나는 루카스에게 외쳤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문제가 풀릴 것 같아요!!”
“……?”
루카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설명할 틈은 없었다. 어서 이것을 공작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달려가기 바빴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온실에 들어와서, 공작의 앞에까지 와 있었다. 역시나 오늘도 씨앗만 하염없이 돌보고 있던 그가 내 등장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갑자기 뭐냐. 육포 보고 눈 돌아간 똥개처럼 허겁지겁 뛰어오기나 하고.”
“헉, 헉……. 딸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헉, 헉…… 그보다 그 씨앗……. 헉, 제가…… 헉, 헉…….”
나는 급하게 오느라 가빠진 숨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외쳤다.
“20년간 싹트지 않았던 그 씨앗, 제가 틔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 외치고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씨앗을 싹틔우길 간절히 바랐었으니까, 분명 놀라워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우리 사이엔 불편한 침묵만 흘러갈 뿐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자 그가 입을 열긴 했지만, 내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잠꼬대는 그냥 침대에 누워서 해도 된다.”
“……?”
“굳이 여기까지 뛰어와서 헛소릴 꿍얼거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잠꼬대’라니, 내 말을 믿는 척도 안 하는 그의 태도 탓에 나는 허탈해졌다.
“잠꼬대하는 거 아니에요!”
그가 그 얄미운 입을 잠깐 다물고 있는 틈에 곧장 설명했다.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신성국에선 잘만 자라던 식물이 제국에서는 싹트지도 않았던 건 발아에 필요한 어떤 ‘요소’가 충족되지 않아서였어요. 그리고 전 그게 뭔지 알아냈고요.”
“……알아냈다고? 내가 20년간 못 찾아낸 걸 네가 알아냈다는 뜻이냐?”
“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뭔지 들어나 보자.”
헛소리라고 코웃음 치면서도 흥미가 생기긴 했나 보다. 은근히 궁금해하는 게 느껴졌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나는 재빠르게 제안했다.
“그전에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만약 제 말대로 해서 진짜로 싹이 트면,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시겠다고.”
“그 부탁이라는 건…….”
“별로 대단한 부탁은 아닐 거예요. 아버지께서 씨앗에 쏟아부은 20년의 세월에 비하면.”
“……쯧. 그래, 알겠으니까 이제 잡소린 그만하고 어서 싹트지 않는 이유나 말해 봐.”
약속을 받아 냈으니 더 꾸물거릴 필요는 없을 터. 나는 곧장 내 추측을 그에게도 들려주었다.
“씨앗이 싹트지 않았던 건, 신성국과 제국의 공기가 달라서였던 것 같아요.”
“하……. 공기 중 습도랑 온도는 이미 다 똑같이 맞춰 줬다고 내가 분명 말했…….”
“성력은요?”
“……뭐?”
“공기 중 성력의 농도도 신성국과 똑같이 맞춰 줬어요?”
공기 중 성력의 농도 차이. 제국의 공기엔 성력이 부족하다며 명상에 들어간 루카스를 보고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 역시나 공작도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던 듯했다. 그의 손끝이 잘게 떨리는가 싶더니, 결국 들고 있던 물뿌리개까지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성력의 농도……?”
“네. 습도나 온도가 그렇듯이 공기 중 성력의 농도도 지역마다 제각각이라던데…… 이건 생각 못 하고 계셨죠?”
“…….”
“어쩌면 이게 답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충격에 젖은 공작을 지나쳐서 씨앗에 다가갔다.
“혹시 ‘유리 돔’ 같은 거 있을까요? 이 씨앗이 충분히 덮일 만한 크기로요.”
“유리 돔……? 잠깐 기다려 봐라.”
제법 협조적으로 변한 그가 곧장 어딘가에서 커다란 유리 항아리를 들고 왔다. 테라리엄을 꾸미고 있었던 듯, 그 안에는 모래와 선인장 등등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내게 보이며 물었다.
“이 정도 크기?”
“네, 크기는 충분한 것 같아요. 그런데 안에 든 식물들은 비워 주셔야…….”
공작은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선인장과 모래를 옆에 있던 화단에 쏟아 냈다. 그렇게 안이 텅 빈 유리 돔 하나를 뚝딱 만들곤, 그가 다시 물었다.
“됐지?”
“……네. 일단 주세요.”
나는 그 유리를 뒤집어서 씨앗에 덮어씌웠다.
‘됐어. 이렇게 덮어 두면 씨앗 주위의 공기가 밖으로 잘 흩어지지 않을 거야.’
그다음이 문제였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유리 돔 위에 손을 얹었다. 역시나 공작이 곧바로 의문을 드러냈다.
“지금 뭘 하려는 거냐?”
“이 항아리 내부에 성력을 불어넣으려고요.”
“……잠깐, 네가 성력을 쓴다고……?”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집중해야 하거든요. 성력을 물건이나 사람한테 써 본 적은 있어도 공기 중에 흘려 넣는 건 처음이라……”
그리 말하자 그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로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건 단언컨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만족한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예상대로야. 형태가 있는 물체에 힘을 불어넣을 때보다 몇 배로 어려워.’
아주 질긴 풍선에다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비슷했다. 성력이 돔 안에 조금씩 흘러 들어가는 듯하다가도, 조금만 방심하면 허사가 되었다. 넣으려 하면 튕겨 나오고, 다시 넣으려 하면 또 튕겨 나오고……. 이걸 수십 번이나 반복하는 바람에 탈진할 듯한 기분이 들쯤이었다.
‘잠깐, 지금 들어간 건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밀어 넣어도 튕겨 나오지 않았다. 성력이 돔 안에서 순환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서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다! 성공했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긴 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원예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섬세함’인 것이다.
‘그런데 얼마만큼 불어넣어야 하지? 너무 지나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지 않나?’
적절한 농도로 엇비슷하게라도 맞춰 주어야 할 듯했는데, 그 적절한 농도를 몰랐다. 이 부분은 예르타 출신인 루카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아서 손을 떼려고 했다. 그때- ―파지직!
“……?!”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서 황급히 손을 뗐다.
‘뭐지? 방금 유리에 금 가는 소리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성력을 너무 꽉꽉 쑤셔 넣어서 유리의 약한 부분이 못 버티고 깨진 모양이라고. 그래서 유리 표면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공작이 옆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텄다.”
“……?”
“싹이…… 텄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씨앗을 살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방금 그 ‘파지직!’ 소리는 유리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씨앗 윗부분이 갈라졌어?!’
진심으로 눈을 의심했다. 20년간 공작이 별짓을 다 해도 단단히 웅크리고만 있던 새싹이, 마침내 그 두꺼운 껍데기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민 것이었다. 놀라웠고, 경이로웠으며, 동시에…… 다소 의아했다.
‘근데 성력을 넣자마자 이렇게 바로 싹이 틀 수 있나? 혹시, 힘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더 빠르게 자라는 거……?’
습기가 많으면 씨앗이 썩듯이, 성력도 지나치면 위험하리라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했다. 애초에 성력의 정의부터가 ‘생명체를 치유하는 성스러운 에너지’다. 많이 받아서 좋아지면 좋아졌지, 위험해지진 않을 터였다. 판단을 마친 나는 우선 크게 심호흡했다.
“후…….”
그 뒤, 마지막 숨 쉴 힘까지 쥐어짤 기세로 성력을 팍팍 불어넣었다. ―파지직! 파직!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갓 머리를 내밀었던 새싹이 순식간에 씨앗 껍데기를 가르며 자라난 것이었다. 그걸 본 공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그러는 사이에도 싹은 대나무 뺨치는 속도로 성장하며 몸집을 부풀렸다. 연약한 연녹색 잎이 강인한 진녹색으로 변했고, 실낱같던 뿌리 또한 좁은 화분을 깨트릴 기세로 굵게 뻗어 나왔다. 이 모든 일이 고작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쑥쑥 성장한 식물로 돔 안이 빈틈없이 가득 찼을 때― ―쩌저적! 이번에야말로 진짜 유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발 빠르게 상황을 인지한 공작이 나를 급히 뒤로 끌어당겼다.
“손 떼!”
“꺄악!!”
우리가 물러서자마자 ‘퍽!’ 소릴 내며 돔이 터져 나갔다. 내부에서 식물이 계속 자라나는 바람에 그 압력을 못 버티고 터진 듯했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공작이 빠르게 잡아끌어 준 덕분에 다친 곳은 없었다. 공작 또한 별로 다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식물의 상태를 살폈다.
‘깨, 깨졌다……. 씨앗은 어떻게 됐지?’
그리고 마침내 그걸 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지금 내 망막에 새겨지고 있는 이 광경은, 훗날 내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 * * 툭.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들고 있던 잉크병이 엎어졌다. 열심히 정리해 둔 서류가 새카만 잉크에 젖어 가는 상황. 에드의 눈가는 거침없이 일그러졌다.
‘젠장.’
그사이 킬리안이 급히 수건을 들고 다가왔으나, 에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킬리안을 밀어낸 그가 이번엔 엉망이 된 서류 위를 쓸듯이 손짓했다.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스스슥……. 퍼져 가던 잉크가 저절로 다시 병 안에 모여들었고, 그에 따라 서류는 도로 깨끗해졌다. 물건의 형상을 되돌리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오직 치료에만 그 쓸모가 국한되어 있는 성력과 달리, 마법은 활용도가 퍽 넓었다. 크게는 도시 하나를 파괴하는 일부터, 작게는 방금처럼 엎어진 잉크를 치우는 일까지……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단, 에드 자신의 일그러진 표정만큼은 그 대단한 마법으로도 지울 수 없었기에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토록 깊게 구겨진 그의 미간을 가만히 살피던 킬리안이 그 순간 기습적으로 물었다.
“레냐 아가씨 때문인 거지요?”